212화
“뭐……? 푸하하!”
현암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처음 검을 잡을 때부터 기재라 불리었던 그다.
선산검문(仙山劍門)이라 칭하는 무당에서도 가장 앞서나가며 검의 천재라 칭송받던 그였기에 이런 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아니지. 이제 시작인걸.”
“조금 전의 일격이 진검이었으면 가슴을 꿰뚫리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건 목검이 아닌가? 우리가 생사결을 하는 것도 아니고 초식을 나누는 것뿐인데. 그리고 자네도 여기서 멈추는 건 아쉽지 않은가?”
스윽-
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다시 추어올리며 기수식을 취할 뿐.
현암이 하현의 뜻을 알아채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의 검을 바라보는 하현의 눈에 이채가 스친다.
태극검도 좋은 검법이지만, 그야말로 기초 검법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은 내공을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검에서 경파가 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파앗!
하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의 목검에서는 계속해서 월광검법이 펼쳐진다.
그런데 현암은 조금 전의 검법보다 또 무언가 변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따악!
날아오는 검의 일격을 받아낸 현암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부딪치는 목검의 질감이 딱딱하지 않고, 푹신한 느낌마저 든다.
그 느낌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다.
‘태극(太極)?’
하현의 검에서 태극의 묘리가 섞여 나오고 있다.
십수 년간 태극에 대해서 공부한 그에 미칠 바는 못 되지만, 하현의 태극은 매우 능숙했다.
아니, 무서웠다.
태극과 하현의 발경은 각각 상대의 힘과 작은 힘을 이용하는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의 수법이다. 하현의 기민한 오성과 상단전은 이 두 가지의 수법을 하나로 녹여내고 있었다.
퍼버버벅!
하현과 현암은 순식간에 몇 합을 주고받았다.
허나 누가 우위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애초에 하현은 이 싸움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다만 그는 검룡이 어떤 검을 쓰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미청단은 덤이고.
쉬이익-!
조금씩 하현의 검의 궤적이 달라져 간다.
그 궤적은 알게 모르게 검룡의 검을 닮아가고 있었다.
무의식의 결과였다.
하현은 기왕 비무를 한다면 현암을 더 궁지에 몰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가 가진 것이 하나라도 더 튀어나올 것이 분명하다.
팍- 파악!
워낙 근거리에 붙어 쉴 새 없이 검을 날리고 있기에 서로의 몸에 검을 닿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재미있다.’
검룡 현암도장의 머리에 스친 생각이다.
그는 하현과의 비무를 진심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눈에 하현은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로 보이지 않았다.
무슨 요괴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것도 가져갈 수 있으려나?’
검을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하현은 그의 초식을 파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순간적인 기지로 현암의 검을 파악하여 그 초식을 깨부술 다음 초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와중에 현암 역시 새로운 영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틀에 박힌 검법을 쓰던 그는 하현에게 유연한 사고를 배우고 있었다.
처억- 화아악!
현암이 뒤로 몇 발자국을 착착 물러나더니 검을 고쳐잡고, 다시 검을 내질러왔다.
그런데 그 검에 깃든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도 내공은 없이 초식만 일으켰음에도 그에게 바람이 모이는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는 광풍과 함께 하현에게 순식간에 다가왔다.
‘태극혜검(太極慧劍)’
그는 호북제일검이자 검성으로 불리는 스승님께 배운 무당 검법의 오의를 펼쳐내었다.
물론 이성 정도의 경지만으로 펼치는 검이다.
그렇다고 해도 무당에서도 몇 익힌 자가 없다는 태극혜검의 위력은 엄청났다.
하현은 순간 당황했다.
현암이 싸움에 취해 그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올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위력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하현은 현암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역시 순식간에 펼치던 초식을 다른 검법으로 바꾸었다.
창궁무애검법.
무당파에 태극혜검이 있다면 남궁세가에는 창궁무애검법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쩌어억-!
두 목검이 부딪치는 그 순간 두 사람의 사이에는 벼락 맞은 나무가 쪼개어지는 듯한 소리가 일었다.
하현과 현암은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은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듯 비슷한 모습을 쪼개어져 있었다.
잠시 그들은 눈을 마주쳤다.
“하하하. 여기까지 해야 할 듯하네. 엄청난 검법이군. 몸은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마지막 검법은 무엇입니까?”
“태극혜검이라 하지. 괜찮았는가?”
“훌륭한 검법이군요.”
“자네의 것은?”
“창궁무애검법입니다.”
현암이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대답했다.
“아! 말로만 듣던 창궁무애검법이로군. 정말 당황했지 뭔가. 난 태극혜검을 뛰어넘을 절초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구파에서도 소림과 함께 선두를 달리는 대문파의 절학은 상상 이상이군요.”
비무를 하기 전과 후 하현의 태도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검을 부딪치기 전까지만 해도 심드렁하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길고양이 같은 모습이었다면 지금 그는 잔뜩 흥미가 오른 어린아이같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만큼 순수하다는 것인가? 열정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 둘 다일지도 모르지.’
현암은 하현을 보며 쿡쿡 웃었다.
굉장한 매력의 소년이다.
괴짜 도사라고 불리는 그의 사제 현무도장이 하현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신나게 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자. 이것부터 받게.”
그는 거리낌 없이 하현에게 목함을 건넸다.
하현도 사양치 않고 바로 받았다.
“지금 섭취할 텐가? 내가 도와줄 테니.”
“그래 주시겠습니까?”
“뭐. 안될 것 없지. 그런데 자네, 사람을 너무 잘 믿는군. 강호에서는 그러면 손해 볼 일이 많은데 말이야.”
현암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영약의 섭취를 도와준다는 의미는 하현의 명문혈에 손을 댄다는 소리다.
명문혈은 그 자체로도 굉장한 급소가 되지만, 등을 돌리고 있기에 목숨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암은 하현이 오늘 처음 본 자신에게 등을 맡기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하현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평소에 아무나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를 죽일 생각이셨다면 비무 중에도 수없이 기회가 있었겠죠. 내공을 끌어올리셔서 그 태극혜검을 극성으로 펼치셨다면 저는 필사였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조금 그렇지만, 제 누울 자리는 잘 찾는 편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검룡 소협은 나쁜 사람은 아니고요.”
현암은 하현의 말에 또 한 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머리털이 나면서부터 무당의 도사로 살았던 그다.
누구에게 착하니 나쁘니 하는 소리를 들어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하현은 사실 누구보다 편견 없이 그를 경계하고, 그 경계를 허문 것이었다.
“그래. 나쁜 사람이 아닌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어서 여기 앉아서 미청단을 삼키게.”
하현이 곧장 미청단을 삼키고, 현암은 하현의 몸 안에서 미청단이 잘 반응할 수 있도록 그의 내공을 하현에게 전해주며 유도해주었다.
미청단의 섭취는 푸르스름하게 해가 올라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윽고 모든 과정을 끝낸 그가 하현의 등에서 손을 뗐을 때, 하현은 굉장히 개운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하현의 내상이 지대했기에 미청단 한 알로 모든 치유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이전보다 훨씬 몸이 개운하다고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내공을 일으킨다는 생각만 해도 몸에서 거부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하지만, 그것보다도 하현이 얻은 것은 따로 있었다.
스윽
하현은 그의 머리에, 정확히는 백회혈이 있는 정수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곳에서 무언가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까지는 상단전이라는 존재 자체는 느끼고 있었지만, 그곳에 담긴 기운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단전의 존재와 함께 그 안에 잠자고 있는 기운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걸 활용할 수 있다면……?’
순간 하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스쳐 가는 듯했지만, 안개 속에 갇힌 듯 명확하게 잡히지는 않았다.
하현은 나중에 천천히 시간을 내어 연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검룡을 바라보았다.
“깨달음을 주시어 정말 감사합니다.”
“엇? 자네도 깨달음을 얻었는가? 나 역시 자네 덕에 작지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네.”
그가 허물없이 웃었다.
서로에게 이토록 도움이 되는 비무가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 들어가 볼까? 사숙들이 일어나기 전에 나도 방에 가 있어야 하네.”
“네. 그러시죠. 훗날 다시 뵐 수 있겠죠?”
“난 인연이 닿으면 만난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네.”
“그러면요?”
“무당으로 오게나. 그러면 내가 우리 사부님을 소개해주지. 자네를 굉장히 좋아할 걸세. 아! 온 김에 현무도 만나고 가고 말이야.”
하현은 피식 웃었다.
검룡의 성격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꼭 들르지요.”
“그래. 그럼 이만.”
검룡과 하현은 미련 없이 서로의 숙소로 흩어졌다.
이미 말간 해가 고개를 쳐들었고,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현은 그들의 기척을 느끼며 조금 전 깨달은 것들을 조용히 생각했다.
도가의 내공 운용법. 이것을 떠올리자 백회혈이 아주 조금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 * *
간단히 요기한 팽헌홍과 하현은 다시 말을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
팽헌홍은 하현의 몸 상태가 어제보다 더 좋아진 것을 느꼈지만, 굳이 그것에 대해 물어보거나 말하지는 않았다.
원래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능력을 보여주던 하현이다.
그렇기에 하현의 회복속도가 더 빨라졌다고 하여 이상할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하남성을 빠져나가겠군요.”
“그래. 이번에도 고시현에서 쉬어 갈 생각이냐?”
“하하. 아뇨. 이제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요. 그곳에는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고시현은 하현에게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장노야에게 혹시나 붙잡히면 며칠은 그곳에서 더 보내야 할 수도 있다.
취월걸개가 은근히 고시현을 피해가는 이유를 알 것 같은 하현이었다.
“형님만 괜찮으시면 이곳 근처에서 오늘은 노숙을 하고 바로 안휘로 넘어갈까 하는데. 어떠세요?”
“좋다. 그러면 늦어도 내일 저녁에는 남궁세가에 당도할 수 있겠구나.”
“별일 없다면 그렇겠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팽헌홍은 기쁜 기색을 숨기고자 하는 것 같다.
자기 집을 떠나서 남(?)의 집에 가는데, 저토록 기뻐할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소화 누나가 그렇게 보고 싶어요?”
“쿨럭. 그, 그게 아니고.”
수통의 물을 마시던 팽헌홍이 절반은 도로 뱉어버렸다.
하현은 그 모습을 보고 큭큭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도제 어르신께 말씀드려서 정식으로 혼담을 넣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누나랑 형 나이도 이제 그리 어리지 않은데.”
팽헌홍은 올해로 열아홉, 소화는 열여섯이 되었다.
무인들의 혼인은 늦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혼담을 보내기에 결코 이른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팽헌홍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된다.”
“왜요?”
“아직은 나도, 소화도 준비가 되지 않았거든.”
“무슨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거예요?”
하현이 꼬치꼬치 캐묻자, 팽헌홍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아직 제대로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서로 무림에서 뜻하는 바가 있거든. 혼인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것들을 이뤄 놓고서 해야겠지.”
“혼인하고서 이루면 안 되는 거예요?”
팽헌홍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주변에서 보고 느낀 바로는 혼인하는 순간 서로에게 엄청난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야. 특히나 여인의 경우에는 그게 더 크지. 강호행을 접고 집안의 대소사에만 신경을 쓰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까.”
“팽 형은 누나가 그러지 않았으면 싶은 거군요.”
“그래. 소화는 누가 봐도 중원에서 재능을 펼칠 능력이 있으니까. 그걸 방해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는 곧은 눈빛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
하현은 그 눈에서 그가 소화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야영할 준비를 마친 그들은 하늘을 지붕 삼아 누워 별을 바라보았다.
그 별은 이윽고 각자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했고, 그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