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서둘러야 해요. 그자가 도망이라도 치면 안 되니까요. 만약 비장호가 숨어들었더라도 찾으실 수 있겠죠?”
“음…… 가 봐야 알겠지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무공을 모르는 파락호가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요.”
“좋아요.”
그러자 옆에 있던 소화가 하현에게 말했다.
“현아. 그러면 우리는? 나랑 팽 오라버니는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아니. 누나도 해줄 일이 있어.”
“무슨 일?”
“헌홍 형도 이리로 와주세요.”
하현은 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방에는 그들밖에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는 하현이었다.
“누나는 이곳을 조사해줘.”
“이곳이라면 제갈세가를 말하는 거야?”
“응. 특히나 제갈세가의 사람들을 유심히 봐줘. 특히 하인들을.”
소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 혹시 내부인의 소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러면 왜?”
“흉수의 주체는 외부인일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부에 조력자 정도는 있을 수 있겠지.”
“흐음…… 이해했어.”
두 주먹을 꼭 쥐며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소화를 보며 하현이 당부의 목소리를 냈다.
“누나. 아주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수상한 장면을 포착했다고 곧바로 그 사람한테 달려들거나 하면 안 된다?”
“내, 내가 뭐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사람인 줄 알아? 그럴 생각도 없었거든.”
“누나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하현은 그 순간 팽헌홍과 눈을 마주쳤고, 둘은 ‘그러려고 했네.’라고 동시에 생각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건 내 추측인데, 하인은 자신이 마교에 협력한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그런 일을 저지를 수도 있을 거야.”
“그게 말이 돼?”
“나도 그게 확신이 가지 않아서 누나랑 팽 형한테 조사해 달라고 하는 거야.”
소화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만 믿고 있어. 내가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응. 부탁해 누나.”
하현은 곧장 운후와 진유강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조금 전에 말했던 대로 의성이었다.
* * *
의성 뒷골목을 지배하고 있는 비장호.
그는 지금 그의 부하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급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얼른 챙겨라. 얼른!”
“네. 형님!”
“대답할 시간에 물건 하나라도 더 챙겨라. 목숨이 날아가고 싶어서 그러느냐?!”
그에게 구박받던 부하는 그렇게 급하면 짐을 챙기는 걸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구시렁거리다가 비장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그것이 우리 생명줄이다. 그 물건을 놓고 가면 도망가지 않느니만 못해. 이 돌대가리야. 생각을 좀 해라!”
“아, 알겠습니다.”
부하가 다시 짐을 열심히 챙기는데, 비장호의 오른팔 격인 파락호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형님.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니오? 말씀을 들어보면 그자들은 제갈세가로 간 것 같은데. 융중산은 여기서 말을 타더라도 하루는 꼬박 걸리는 거리이지 않소? 찾아올 리도 없지만, 만약 온다고 하여도 내일은 되어야 올 것 같은데…….”
“야. 이놈아. 너는 그놈을 못 봐서 그래. 어린 것이 눈에 독기가 얼마나 흐르던지. 내가 주먹 생활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을 봐 왔지 않느냐. 그 눈은 독사의 눈이야. 그런 눈을 하고 있는 자에게는 항상 조심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이다!”
비장호가 부족한 주먹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왈패의 수장으로 살아남은 이유가 이것이다.
그는 눈치가 기막히게 빨랐다.
강자에게는 그 납작 엎드릴 줄을 알았고, 살기 위해서는 신발도 핥을 정도로 자존심보다는 목숨을 더 중요시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약자 앞에서는 잔인한 수를 써서라도 신처럼 군림하는 법을 아는 자.
그것이 비장호였다.
“독사가 무슨 뜻이에요?”
“한 번 물리면 끝이라는 소리다. 아무리 친절하게 웃고 있어도, 그런 자한테는 벗어나지 못하면 죽음뿐…… 응?”
비장호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다가, 그에게 질문한 목소리가 굉장히 어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지금까지 그와 대화하던 그의 오른팔 격인 파락호는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힌 채 축 늘어져 있다.
“허, 허억! 대협!”
비장호는 봇짐에 쑤셔 넣던 짐들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그 즉시 바닥에 부복했다.
그자는 하현이었다.
소리 하나 없이 나타난 하현이 어느새 그의 부하를 제압하고 비장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 눈에서 그렇게 독기가 흘러요? 하하. 처음 듣는 얘긴데.”
“그,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독사? 그런 말을 들어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요.”
“대협! 살려만 주십시오!”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안심하세요.”
“감사합니다!!”
하현이 부하를 땅에 털썩 내려놓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이 어수선한 것이 척 봐도 급히 짐을 챙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급하게 어디를 가시려고 하는 거 같은데요?”
“아, 아닙니다. 그냥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오호. 그렇군요. 왜 갑자기 가시는 거예요?”
“네?”
“이유가 뭐냐니까요.”
“그, 그게…….”
“혹시 저 때문은 아니죠?”
하현이 질문 한 번에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오자, 그가 움찔하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대협!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라고요? 죽으시려고요? 도와드려요?”
“살려주십시오! 있는 사실대로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엔 정말입니다.”
갑자기 소리치는 그의 말에 하현이 씨익 웃었다.
“역시, 다 말하지 않은 게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대협.”
“일어나세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비장호가 엉거주춤 일어나며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혹여나 수하들이 오지 않았을까 아주 약간의 기대를 품고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 표정은 울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운후와 진유강이었으니까.
“대장. 일단 눈에 보이는 파락호들은 모두 때려눕혔소. 조용히 이야기 나누시면 될 것 같소이다.”
“이번엔 대장이야?”
“편할 대로 부르라고 한 건 대장이지 않소? 입에 딱 달라붙는구만.”
“휴, 그래. 죽이지는 않았지?”
“한 명도, 뭐 한동안은 죽만 먹어야 하는 자들이 있겠지만.”
그가 큭큭 웃는 모습을 보고 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비장호를 보았다.
“말하지 않았던 게 무엇이죠?”
비장호는 한 가지 큰 의문이 깃들었다.
도무지 이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겨우 용기를 짜내어 목소리를 떨면서 하현에게 물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보세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제가 거짓말을 했던 것을요.”
“그건 간단하죠. 아저씨가 살아 있으니까요.”
“네?”
비장호는 의문을 표했다.
하현의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제가 아저씨를 제압했던 복면인이라면 아저씨를 살려 둘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았거든요. 원하는 정보도 얻었겠다. 갑자기 사라져도 관아에 신고해 줄 사람도 없는 파락호겠다. 살인멸구를 하는 게 더 간단한 방법이니까요.”
“살인멸구라니……!”
비장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무서운 말을 하는 하현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흉수는 사파 아니면 마교에서 보내온 인물일 겁니다. 죽이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 이유는 뻔하죠.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기로 하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테죠. 그렇지 않나요?”
비장호는 하현을 멍하니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현이 말한 내용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그 멍한 표정을 보고 하현은 자신의 말이 맞다고 확신했다.
하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비장호가 도망가기 전에 급하게 싸고 있던 커다란 봇짐을 발견했다.
“저것 부피가 상당히 큰데요? 도망치는 와중에도 챙길 것이 저렇게 많았나 보죠?”
“저것은……!”
하현은 비장호의 말을 듣지도 않고 짐으로 다가가 그것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그 안에서는 나뭇조각 같은 것이 우수수 쏟아졌다.
“아니, 이게 뭐야. 저것들…… 약재 아니오? 이게 다 뭐야. 이것은 포황(蒲黃)이고, 신곡(神曲)에 서각(犀角)에 웅담(熊膽)까지? 모두 구하기 힘든 귀한 약재인데?”
하현이 비장호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 모든 실마리가 일치하는 듯했다.
비장호는 사색이 된 얼굴이다.
“마교인지, 사파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갈세가에서 이미 약재를 쓸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을 알고 있나 보군요.”
“대협! 저는 이것들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살고 싶으면 귀한 약재를 모아서 가져오라 했기에 약재를 샀을 뿐입니다.”
그의 말은 진실되어 보였다.
진강호의 말대로 비장호가 모으고 있던 약재들은 하나같이 고급 약재다.
솔직히 말해 하현도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는데, 겨우 파락호가 그 사용처까지 알고서 모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요. 아저씨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은 어쩐지 알 것 같네요.”
“알아주시는 겁니까?”
“알아주고 말고가 어딨어요. 아저씨가 마교의 흉수는 아니잖아요?”
“그럼요! 절대, 절대 아닙니다. 그 복면인이 마교의 떨거지였습니까? 하! 그걸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을 것인데. 제가 그걸 몰랐습니다요!”
그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
하현은 그를 보며 한 편의 경극을 보는 듯했다.
파락호이긴 하지만, 그는 엄연한 피해자였다.
하현은 그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이 물건을 모으라고 한 것은 분명히 언제, 어디로 가져오라는 말도 함께였을 거예요. 그렇죠?”
“맞습니다. 접선 장소와 시간을 말해 주고, 그때까지 이 물건을 못 구해오면 우리 식구들을 모두 죽일 것이라 했습니다.”
“거기가 어딘지 말하면 저는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연히 아저씨가 그 장소에 가실 필요도 없고요.”
그런데 비장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협. 그걸 말하면 저는 정말 죽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선택하셔야겠네요.”
하현이 눈짓하자, 진유강이 씨익 웃으며 허리에서 도를 꺼내 들었다.
도가 뽑혀 나오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지금 죽던지, 아니면 저한테 말하고 바로 다른 지역으로 도망쳐서 살 기회라도 만들던지.”
비장호의 눈에 공포가 깃들었다.
하현은 잠시 그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하현에게 그가 아는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만나기로 한 것은 나흘 후. 수주(隨州)의 형문산 중턱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그게 정말 다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곧장 떠나세요. 수하들을 이끌고 가시든 혼자 가시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행동을 서둘렀다.
하현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어떻게든 부하들을 깨우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우리도 가죠. 빨리 제갈세가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하현은 진유강을 시켜 약재를 들쳐메게 한 뒤에 비장호의 은신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참 하현이 사라지기를 기다린 비장호가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이놈의 왈패를 그만두든가 해야지. 아예 다른 성으로 옮기던지.”
다행히 하현은 강도는 아니었던지라 전표나 은자까지 챙겨가지는 않았다.
그 약재를 사느라 많은 은자를 소모하긴 했지만, 다른 곳에서 자리를 잡을 정도의 은자는 남아있었다.
“다시는 무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야.”
그는 마음 깊이 다짐하고는 부하들을 깨웠다.
* * *
제갈세가로 돌아온 하현은 숙소에 가기도 전, 제갈정현을 통해 제갈과에게 은밀히 독대를 청했다.
- 오늘 밤. 나의 처소로 오게
제갈정현에게 건네받은 짧은 서신.
하현은 밤이 되기를 기다리려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현은 곧장 소화가 머무는 방으로 갔다.
마침 소화는 숙소에 돌아온 참이었다.
“누나. 뭐 알아낸 거라도 있어?”
“특별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
“뭔데?”
소화가 조용히 말했다.
“하인 하나가 내가 돌아다니는 곳마다 계속 마주쳤어. 나를 감시하는 것처럼.”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