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따라다녔다니? 무공이라도 익힌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나는 제갈세가 곳곳을 대놓고 돌아다녔거든 헌홍 오라버니는 은밀히 다녔고.”
“일부러 그런 거야?”
“응. 제갈세가에는 처음 왔으니까, 둘러볼 수 있냐고 얘기하고 당당하게 돌아다녔지.”
소화다운 발상이었다.
하현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알아 놨어?”
“누구인지 물어보면 이상할 거 같아서 용모파기를 그려놨어.”
소화가 건네준 종이를 펼쳐 본 하현은 작게 감탄을 흘렸다.
짙은 눈썹에 눈 사이가 멀고, 콧볼이 두툼한 사내의 얼굴 그림이었다.
소화가 그림에도 재능이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내가 정현 형한테 은밀히 이 자가 누구인지 알아볼게.”
“응. 알았어.”
하현은 소화에게도 의성으로 돌아가 비장호에게 알아낸 일들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본디 소화도 총명한지라, 하현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대강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이틀 후네? 형문산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야?”
“응. 서둘러야지. 그래서 오늘 밤에 제갈세가주님과 독대하기로 했어.”
“나도 데려가야 해.”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소화의 무력은 정예대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발전했다.
다만, 용봉지회에 다녀오느라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여 아직 일반대원에 머무른 채였다.
“형문산까지는 말을 타지 않을 거야. 나와 비슷하게 달릴 수 있는 소수 정예로 다녀오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따라올 수 있지?”
“그럼. 당연하지.”
소화가 호기롭게 양손을 쥐며 대답했다.
그들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언제 떠날지 모르니 최대한 체력을 비축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날 밤.
하현은 은밀하게 그의 방으로 접근 해오는 기척을 느꼈다.
그런데 그 기척은 무척이나 은밀해서 하현도 집중해야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로 기운의 운용에 능숙한 인물은 세가 내에도 몇 없을 것이라 생각한 하현은 곧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제갈정완.’
제갈정현의 큰 형인 제갈정완이 분명했다.
하현은 조용히 창문을 열고 일 층으로 뛰어내렸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건만, 하현은 떨어지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자네……!”
눈앞에 갑자기 하현이 생겨난 듯 보여 조금 놀란 제갈정완이 하현을 불렀다.
하현은 태연하게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올려 조용히 하라는 표현을 했다.
-내가 오는 줄 알고 있었던 건가?
-우연히 창밖을 보고 있다가 눈에 띄었습니다.
하현은 제갈정완의 전음을 능숙하게 받아주었다.
하지만, 대답을 곧이곧대로 하지는 않았다.
겸양하는 척하며 주제를 옮겼다.
-따라오게.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니.
-알겠습니다.
제갈정완은 이곳에 왔던 것처럼 은밀하게 그림자에 몸을 숨겨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세가 안이지만, 누가 어떻게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는 그였다.
잠시 그를 따라가니, 아주 작은 일 층짜리 건물에 도착했다.
하인들이나 살 법한 그 건물에 다가가자, 제갈정완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할아버님. 저 왔습니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제갈정완이 하현을 그곳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침상 하나와 탁자 하나뿐인 단출한 방이었다.
탁자 앞의 의자에는 긴 백발을 정리하지 않고 풀어 놓은 제갈세가주 제갈과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게.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다고?”
“그렇습니다.”
하현은 제갈과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저께 수많은 무인이 있던 자리에서 보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그때는 애써 숨기고 있던 감정들이 얼굴 곳곳에 묻어나왔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다.
그런데 하현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하. 정말로 무룡 형님께서 자랑할 만하군.”
“저 말입니까?”
“그래. 이렇게 옆에만 있어도 자네가 가진 중후한 기운과 총명함이 느껴지는 기분이야.”
순간 하현은 그가 기운을 온전히 갈무리했는지 몸을 살펴보았다.
기운은 완벽하게 갈무리했다.
하현 정도로 기감이 뛰어난 자라고 해도 그가 가지고 있는 기운을 알아챌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현이 조금 놀란 눈으로 제갈가를 바라보자,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놀라지 말게나. 정말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 아니라, 자네가 풍기는 분위기에서 유추할 수 있었던 것이니.”
“분위기 말입니까?”
“그래. 내가 고수들만이 가지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지. 어린 나이에 벌써 그 정도의 성취라니……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 해도 될 정도군.”
제갈과는 남궁무룡이나 취월걸개와 같은 배분의 고수다.
지금은 싸움터에 나선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간의 경험과 쌓아온 내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네는 어찌 이리도 강해질 수 있었는가? 무엇이 자네를 이렇게 움직이게 했는가?”
하현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왜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런 표정을 지우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힘이 없으면 억울한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무인으로 태어나 억울한 일이 더는 없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현은 마치 선문답하듯 대답했지만, 제갈세가주는 하현의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허허…… 자네는 자네의 할아버지와 말하는 것도 똑 닮았군. 언젠가 무룡 형님께서 이렇게 말해 주신 적이 있었네. 업적과 공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자손들이 계속해서 무리하게 될 거라고. 무공을 익혀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만을 가르치라고.”
“할아버지께서 그러셨군요.”
“그래. 내 잘못된 교육관이 오늘의 이 사달을 만들어 낸 걸세. 내가 손주들에게 공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회한이 드는지 말끝을 흐렸다.
제갈정현과도, 정규와도 인연이 있다고 하는 소년을 보니, 감상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하현은 그를 위로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가 가장 기운을 차릴 수 있는 말을 하기로 했다.
“흉수가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대를 요청한 겁니다. 그 방법에 대해 제갈세가주님과 상의하고 싶어서요.”
“무어라? 그게 정말인가?”
하현의 생각대로 효과는 탁월했다.
제갈과의 눈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 세가의 수많은 무인이 달려들어도 그 흉수를 찾을 수 없었는데……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자네가 어떻게?”
“몇 가지 우연이 겹쳤습니다. 하늘이 둘째 손자님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시는 거겠지요.”
하현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툭 말을 내뱉었다.
제갈과는 하현을 경이롭게 보았다.
저 나이대의 소년들은 대게 철이 없기 마련이다.
자신이 세운 공을 몇 배로 부풀리기를 원하고, 그 보상은 더 크기를 바란다.
그런데 하현은 모든 것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한 태도다.
“그 방법을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럼요. 당연합니다.”
하현은 재빨리 의성에서 만났던 비장호와 더불어 약재와 접선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두 해주었다.
그는 하현의 말이 계속되며 어떨 때는 웃고, 어떨 때는 하현의 말에 맞장구쳐주며 하현의 말을 자세히 들었다.
하현의 말이 끝나자, 제갈과는 눈을 감았다.
무언가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현은 제갈세가주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전해져 온다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제갈세가는 예로부터 총명한 두뇌로 유명하다.
허나, 하현은 아직 그것을 느껴보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겪은 제갈세가의 인물은 제갈정현 뿐인데, 그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기 때문이다.
“인원을 당장 둘로 나눠야겠군.”
이윽고 눈을 번쩍 뜨며 입을 열었다.
하현은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 번째 부류는 소수 정예. 두 번째 부류는 그 나머지로 나눠야겠네. 형문산에 가는 것은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기보다는 고수가 필요한 일일 것이네. 혹시 어디에 간자가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신법을 전개할 수 있는 고수가 필요하겠지.”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방안이었다.
“어떻게든 형문산에 나타날 복면인을 생포하거나, 그 꼬리를 밟으면 될 일이니까. 그리고 나머지는 지금 당장 이곳을 중심으로 호북에 있는 왈패나 파락호들을 찾아 그런 자와 만난 적이 있는지를 조사하게 해야겠네.”
이 역시 하현의 생각과 일치했다.
파락호들은 대부분 무공을 익히지 못했기에, 그 성취가 낮은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임무다.
“한시가 급하니, 지금 이 자리에서 형문산에 같이 갈 인원을 꼽는 게 좋을 것 같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현은 곰곰이 생각하며 누구를 데려가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하게도 소화와 팽헌홍이다.
하현의 신법을 따라올 수 있을뿐더러, 전투에서의 능력도 출중하다.
‘검룡 소협도 분명히 그 정도의 능력은 있을 텐데.’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검룡이다.
하현은 그와 맞붙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비록 둘 다 내공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하현과의 초식 대결에서 동수를 이뤘었다.
‘그 외에도…….’
하현은 몇 명을 더 떠올렸다.
그가 다른 무인들을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재능이다.
그는 타고난 지휘자였다.
* * *
“…….”
동혈의 안.
양팔이 묶인 제갈정규는 이제 고통에 찬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총명하고 올곧았던 그의 눈은 흐리멍덩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고, 입가에서는 침이 질질 새어 나오고 있다.
마치 몽혼약에라도 당한 것 같은 자태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민머리 요황이 즐겁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역시, 혈족이란 대단해. 이지를 상실시키고, 산공독에 몸을 푹 절이는 데만 이 긴 시간이 들다니. 비리비리해 보이는 제갈세가도 뼈대 있는 가문이다. 이 소린가.”
“장난할 시간 없다. 네 말대로 거의 모든 준비를 마쳤다. 정말로 저자가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해라.”
복면인의 말에 요황이 그를 노려보았다.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자지만, 지금 그가 하는 실험에 들어가는 재료 대부분을 이 복면인이 공수하고 있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장난이라니. 제일 힘든 단계를 지난 것이다. 다음 단계부터는 약재와 시간만 있으면 된다.”
“교주님께서 기대가 많으시다. 죽지 못해 살아가던 너희를 구원해준 것이 우리 교와 교주님이라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요황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는 도무지 저 복면인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는 그에 대한 살심마저 자라나고 있었다.
‘이 생강시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장 첫 번째로 보는 피 맛은 너의 것이 될 것이다.’
그는 마교에 투신하기는 했지만, 뼛속까지 마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다만, 말을 잘 듣는 척을 하면 막대한 은자와 함께 그가 필요로 하는 각종 약물들이 내려오기에 복종하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알겠으니까, 어서 다음 재료를 가져와야 한다. 포황(蒲黃), 신곡(神曲), 서각(犀角). 이 재료가 없으면 이 놈은 움직일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방도를 마련해두었다. 사흘 후까지 가져다주도록 하지.”
복면인은 말을 내뱉고는 동혈을 나가 버렸다.
요황은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쯧 하고 찼다.
‘이 대법만 완성되면……!’
그는 이지를 상실한 제갈정규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보통 인간의 그것보다 더 단단한 듯한 근육이 느껴진다.
사실 생강시는 말이 좋아 강시라는 말이 붙었지, 사실 강시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강시는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전설과도 같은 일이지만, 생강시는 시전자의 기억을 지우고, 육체를 약물로 강화하여 자신의 말만 듣도록 세뇌하는 것이다.
구하기 힘든 약물로 몸을 억지로 진화시키고, 또 싸울 때 제 몸을 돌보지 않기에, 수 배에서 많으면 열 배나 강해지도록 만드는 시술이 바로 이 시술이었다.
“크크크…… 이제 완성이 눈앞이다.”
그는 제갈정규를 흐뭇하게 바라보느라 알지 못했다.
나가 줄 알았던 복면인이 그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과 더불어, 그의 품에 든 소책자에 그가 생강시를 만드는 방법을 아주 상세하게 적고 있다는 것을.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