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웃어?’
그는 눈앞의 하현이 웃는 모습을 보고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히 어린아이일 뿐이건만, 이 순간 불가해한 생물 같다고 느꼈다.
싸움을 즐기는 것이 느껴진다.
천살성 같이 살육과 피에 취해 싸우려는 느낌이 아니다.
순수하게 무학을 겨루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파악!
예고도 없이 하현이 유지석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팔을 지혈할 새도 없이 하현의 검을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크윽-.”
검이 부딪치며 전해오는 충격에 절로 신음이 흘렀다.
팔 근육에 힘을 제대로 줄 수 없어 검 끝이 흔들린 덕분에 하현의 검력을 모두 해소하지 못한 까닭이다.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맹수처럼, 하현은 그의 다친 팔을 집중적으로 공략할 생각으로 보였다.
피잇-
하현의 손에서 한 줄기 섬광이 쏟아져 나온다.
비검이다. 파락호들을 죽이려던 검을 비검이 막아냈기에, 유지석은 하현에게 비검이라는 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챙-
빠르고 정확한 비검이지만, 유지석은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검으로 가볍게 그것을 튕겨낸 그는 이어지는 후속타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스으윽-
그 덕에 그는 번개 같은 속도로 무언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무엇이 날아오는지 정확하게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이것은 예기(銳氣)다.
파바박!
그는 이를 악물고 신형을 한 바퀴 돌려 몸을 피해냈다.
무언가 그의 귓불을 스쳐 간다 싶더니, 이내 귀에서 뜨뜻한 피가 흘러 목덜미를 적셨다.
“암격?”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는 하현을 바라보았다.
하현은 어느새 흑룡검은 허리에 다시 집어넣고, 적룡검만을 들고 있었다.
그는 흘러내리는 피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리고, 피에 젖은 손을 옷에 슥 문대어 닦았다.
“대단한 자질이구나!”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유지석은 하현의 재능을 목도하자 순수하게 감탄했다.
‘또 저런 눈빛.’
하현은 지금 유지석이 짓고 있는 표정을 최근에 본 기억이 났다.
하북에서 만나고, 싸웠던 신강양가의 장로 마통검이 보내온 눈빛이었다.
마교인들이 숭상하는 것은 순수한 힘과 재능이다.
그런 그들에게 하현은 상대해야 할 적이면서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었다.
일말의 불쾌감을 느낀 하현이 유지석을 바라보았다.
귀에서 흘러내린 피가 목을 지나쳐 앞섬을 모두 적시고 있음에도 그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하현에게 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억-
하현은 그의 표정에 요동하지 않았다.
그는 적룡검을 다시 등에 꽂아두고, 허리의 흑룡검을 뽑아 들었다.
‘승부를 내려면 지금이야.’
시간을 더 끌면 안 된다고 느꼈다.
지금까지는 유지석에게 밀리지 않는 내공을 보이는 듯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현은 기교로 내공을 보완하며 내공이 부족하지 않은 척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싸움이 더 길어지면 그가 패할 가능성이 점점 커질 것이다.
우웅-
흑룡검에 진기가 모여든다.
주변의 공기를 모두 잡아먹은 듯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지석도 하현에 화답하듯 검에 막대한 진기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쉬이익-
양쪽에서 강맹한 진기가 모이는 까닭일까.
둘을 사이에 두고 골바람이 몰아쳤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나풀거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현과 유지석은 호신기를 끌어올렸다.
서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는 것이다.
이번의 한 수가 결정타가 될 것임을.
타앗-
먼저 움직인 것은 하현이다.
가볍게 디딘 발걸음이지만, 그는 순식간에 먼 거리를 이동했다.
“후읍-!”
숨을 참으면서까지 폭발적으로 진기를 끌어 올린 유지석이 팔을 휘두른다.
범인이 보았다면 천천히 팔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력을 돋운 하현에게는 그가 그 순간에 수십 번이나 검을 휘두른 것이 보였다.
사샤샤샥!
하현에게 무형의 검기가 쏟아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현은 투명한 그물이 그를 덮쳐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하현은 그에 개의치 않았다.
‘깨버린다!’
하현은 도리어 그 진기의 그물에 몸을 던지며 흑룡검을 휘둘렀다.
검이 휘둘러지는 범위는 정확하게 하현의 몸 하나가 빠져나갈 만큼이었다.
퍼버버벅!
흑룡검이 허공을 가른 것 같건만, 수차례의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암격에서 몸을 빼낸 하현은 유지석과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한 번 더 온다.’
하현은 거기서 더 나서지 않았다.
이번 수가 전부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쉬익-!
아니나 다를까, 뒤따르는 후속타가 또 있었다.
앞엣것은 실초로 허초를 만든 미끼.
하현이 그 암격을 향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흑룡검으로도 마음의 검을 펼치는 데 익숙해진 하현의 검이 번개같이 암격을 갈라버렸다.
쿠웅!
유지석의 암격이 검에 갈라지는 것과 동시에, 땅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굉음과 함께 이형환위와 같은 하현의 신법이 또 한 번 펼쳐 나왔다.
‘걸렸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는 유지석의 눈에 희열이 깃든다.
그는 하현이 첫 번째 함정에 걸리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고 이중 함정을 파놓은 것이다.
하현과 유지석의 그 사이, 그는 이미 검을 찔러넣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하현은 스스로 검에 꿰뚫리고 말 것이다.
서걱-
유지석은 검에 무언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는다.
평생 검을 잡고 수련해온 초절정의 고수다.
검에서 느껴져 오는 감각이 하현의 피육을 베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왔다.
“……!”
그리고, 느껴지는 감각은 극도의 위기감이다.
아직 휘두른 검을 회수하지 못했다.
하현의 검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타앗!
그는 위기를 느낀 즉시 발을 굴러 퉁겨나가듯 하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검격 안으로 들어가 하현이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할 속셈이었다.
그와 동시에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낸다.
그대로 하현의 심장에 박아넣을 요량이었다.
우우우웅-!!
하지만, 하현의 품에 들어온 그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하현은 애초에 검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흑룡검은 오른손에 들기만 한 채로 미동도 없었고, 대신 왼쪽 옆구리에 가 있는 왼손에 막대한 기운이 모여들고 있다.
정작 함정에 빠진 것은 그였다.
파아악-!
하현이 왼손이 파공성을 퍼트리며 앞으로 쏘아졌다.
한 손만으로 펼친 항룡십팔장이다. 거기에 발경의 묘리를 담았다.
그 덕에 유지석이 그와 거의 붙어 있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
하현은 순간 유지석과 눈이 마주쳤다.
놀람을 넘어선 경악의 눈이다.
스스로 하현의 왼손에 달려든 꼴이기에 장을 피해낼 방법이 없었다.
쿠우웅-!
마치 폭약이라도 터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유지석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멀리 나가떨어졌다.
‘이겼다.’
하현은 승리를 확신했다.
유지석을 때린 왼손이 그 반탄력으로 얼얼했다.
우두둑 하며 뼈가 부러지는 그 느낌까지 확실히 느꼈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를 바라보며 하현은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꿈틀-
그의 생각대로, 유지석은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현은 아쉬움의 탄식을 흘렸다.
유지석의 표정이나 움직임으로 보아 치명상을 먹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항룡유회에 실린 경력이 작았냐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현은 제대로 힘을 실었고, 그게 제대로 먹힌 것까지 생각했다.
“그 순간에 팔로……?”
곧 그가 무사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유지석의 오른팔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축 처져 덜렁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 그는 피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팔 하나를 희생해 하현의 장력을 와해한 것이다.
하현이 느꼈던 뼈가 부러지는 느낌은 갈비뼈가 아니라, 유지석의 왼팔 뼈를 산산조각 내며 느낀 것이었다.
“순간…… 저승의 문턱에 발을 들여 넣는 줄 알았다.”
그는 제법 태연하게 말했다.
“장법에도 그리 조예가 깊을 줄은 생각도 못 했군.”
여유 있는 그의 말투에 도리어 하현이 인상을 썼다.
그가 숨겨둔 수가 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유지석은 하현을 똑바로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제 나는 더 싸울 방도가 없다. 권각을 배우기는 했지만, 네 장법에는 미치지 못한다. 무식한 내공 싸움을 하기에도 한쪽 팔로는 이길 자신이 없군.”
하현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유지석이 저토록 당당한 표정으로 말하는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 항복한다는 말인가?”
“아니, 그럴 순 없지. 날 보내줘라.”
“뭐?”
하현은 황당했다.
저런 요구를 저렇게 당당하게 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보내달라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좋은 정보를 주지.”
“천마유가의 위치라도 가르쳐 주려는 것인가?”
“아니, 그건 네 개인적인 바람인 것 같고. 네 일행이 여기까지 온 이유의 해답을 알려주마.”
“이유의 해답?”
그는 하현과 함께 온 무인들이 파락호를 쫓아간 방향을 흘긋 보더니 말했다.
“아까 저 숲으로 사라진 자들 중에서 제갈세가의 직계가 보이더군. 너희 사라진 제갈세가의 둘째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
유지석은 제법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하현이 대답 없이 그를 노려보자,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한층 더 여유로워진 얼굴로 말했다.
“내 말이 맞군. 제갈세가가 급하기도 했나 보군. 그 고고한 척하는 얼굴을 하고 타 문파와 세가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면. 여기는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궁금하지만, 그건 묻지 않겠다.”
“그래서. 제갈정규가 있는 곳을 가르쳐줄 테니 너를 보내달라 이 말이냐?”
“그래. 역시 머리 회전이 빨라서 좋군.”
우득- 우득-
그는 하현에게 말하는 와중에도 엇나간 뼈를 맞추고, 웃옷 한 겹을 이빨로 찢어 삼각건을 만들어 어깨에 걸었다.
하현은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빨리 선택해야 할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제갈정규는 고통받고 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침을 퉤 하고 뱉었다.
하현에게 내상도 입었는지, 입에서 나온 것은 침 대신 붉은 피였다.
이런 순간에도 하현은 그가 처음 봤을 때와는 성격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복면을 쓰고 있을 때는 더 진중하고, 과묵해 보였는데 지금 그는 동네 파락호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이 껄렁한 얼굴이었다.
“후…….”
하현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는 지금 당장은 개인적인 은원을 내려놓자고 생각했다.
‘그래. 유지혁이 살아 있고, 천마유가를 찾으면 그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 해도 큰 수확이야.’
잠시 생각을 마친 그는 유지석을 향해 말했다.
“어딘지 안내해라. 제갈정규를 찾으면 널 놓아주지.”
“누굴 바보로 알고? 나 보고 안내하라는 소리는 나를 포박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래. 맞아.”
“그럴 수는 없지. 위치만 듣고 나를 보내줘라.”
“이상한 곳을 말하고, 이대로 도망치려고? 내가 널 어떻게 믿지?”
“그럼 믿지 말던가. 날 죽여라. 그렇게 되면 넌 천마유가도 찾지 못하고, 제갈정규도 찾지 못하게 될 테니까.”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는 묘하게 당당했다.
하현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위치를 말해.”
“역시 현명하군. 그렇지 않아도 그 배화문 잡것을 처리해야 했다. 술법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은 아쉽지만…….”
“혀가 길어. 위치만 말해.”
“까칠하기도 하군. 제갈정규는 여기 형문산의 꼭대기에 있는 동혈에 있다. 진법으로 동혈의 입구가 가려져 있다. 파훼법은 건괘의 넷째 양효와 미제괘의 처음 음효를 부수는 것이다.”
“주역이군.”
유지석이 눈을 동그랗게 하현을 보았다.
주역까지 통달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하현이 주역을 해석하는 동안 몸을 내빼려고 했는데, 이미 하현은 해석도 필요 없이 모두 깨달은 것 같았다.
“난 다 가르쳐줬다. 날 보내줘라. 장담컨대 지금 제갈정규는 한시가 급하다. 내가 너를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보지는 않지만, 필사를 각오하면 시간은 충분히 끌 수 있다. 그 안에 제갈정규는 죽게 될지도 모르고.”
하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여기서 정말 보내도 될지 고민하는 것이다.
“가라.”
“잘 생각했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것 같은 기분이군.”
“부디.”
하현의 짧은 대답에 그가 피식하고 웃더니, 숲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가만히 눈을 감고 주변 기운에 집중했다.
유지석이 멀어지는 방향은 남쪽이다.
호북성을 기준으로 북쪽보다는 남쪽의 영토가 훨씬 작다.
아주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속속들이 이쪽으로 정파 고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파락호를 데리고 가장 먼저 돌아온 소화를 필두로 금세 다들 이 자리에 모였다.
도망갔던 파락호들을 모두 데리고서였다.
“복면인은? 도망친 거야?”
“잠깐만 누나.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
하현이 말을 가로막자 소화가 입을 삐죽였다.
그녀를 달래 줄 새도 없기에 하현은 급히 무인들을 모았다.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왜? 그에게서 무슨 정보라도 들은 건가?”
제갈정완이 하현에게 곧바로 물어왔다.
제갈정현 역시 먹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애타는 눈빛으로 하현을 보았다.
“제갈정규가 있는 곳을 들었습니다. 이 산의 정상이라고 합니다. 곧바로 출발할 겁니다.”
“이곳에 형님이 있다는 말인가?”
“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빠르게 갈 테니 다들 잘 따라오세요.”
하현은 말하고서는 곧장 정상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포박된 파락호들을 공터에 묶어둔 다른 무인들도 곧바로 하현의 뒤를 따랐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