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모두 수준 높은 무인이었기에,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올라가서 부터가 문제였다.
“여기에 있다고? 동굴은커녕 아무것도 없는데?”
“그자에게 속은 것 같소이다. 지금이라도 그자를 쫓는 게 어떻습니까?”
조바심이 난 무인들이 하현을 다그쳤다.
정상에는 풀도 자라지 않는 노지뿐이었다.
하현은 그들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진법입니다.”
“진이라고?”
그들 중 몇몇 고수들이 하현의 말을 따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진법에 제법 조예가 깊은 제갈정완과 제갈정현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진법이 설치된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 겁니다.”
하현은 뜻 모를 소리를 했다.
“한시가 급하니,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는가?”
검룡이 하현에게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신뢰가 그득하게 깃든 얼굴과 말투였다.
“상세히 말해 줄 수 있겠나? 나는 진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라.”
“어려운 것 없습니다.”
그러자 제갈정완도 하현에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나도 자네로부터 시작된 일이니, 자네의 말을 따르겠네.”
굳이 따지자면 이곳에서 배분이 가장 높은 두 명이 이렇게 나오자, 다른 일들은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소화와 팽헌홍은 굳이 이런 일이 아니었어도 하현을 따르려는 생각이었고.
“고마워요. 다들 제가 말하는 곳에 각각 서시면 됩니다.”
하현은 무인들을 어느 곳곳에 배치했다.
그저 쉽게 배치하는 것 같지만, 하현은 연신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여기가 수산괘면 저 방향이 천지곤이어야 하고, 그러면 이 자리에 배치해야 해. 팽 형은 이 자리로 와줘요.”
그런 식으로 모두의 자리를 잡아 준 하현에게 검룡이 기어코 입을 열었다.
“저기, 하현 소협?”
“네?”
“굉장히 바쁜 건 알겠는데, 아주 간략하게라도 설명해줄 수 있겠나?”
“그럼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미 우리는 진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하현은 계속해서 마지막 한 자리를 찾으려 이리저리 움직이면서도 설명을 계속했다.
“크기가 상상을 초월해서 느끼지 못한 겁니다. 이 봉우리의 중턱부터 진이 시작된 것 같아요. 저도 꼭대기까지 올라오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건 무엇인가?”
“파훼법을 펼치고 있는 겁니다. 진을 깨는 방법을 가장 크게 두 가지가 있죠. 첫 번째는 진을 구성하고 있는 물건이나 구조물 따위를 깨부수거나 자리를 옮겨 버리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그 틈을 찾아내서 찢어버리는 것.”
“그러면 우리가 하는 게...?”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방법입니다. 이렇게 파훼해 버릴 거에요.”
“그렇군. 이 방법은 설명해줘도 모를 테니 나는 잠자코 있겠네.”
검룡이 한발 물러서자, 하현은 이제야 됐냐는 듯 웃어 주고는 계속해서 땅을 꾹꾹 밟아가며 마지막 위치를 찾았다.
그런 하현을 바라보고 있는 제갈정완의 눈빛이 기이했다.
그의 반절도 되지 않는 나이의 하현이지만, 마치 선망의 눈빛을 보내는 듯했다.
‘완벽한 오성이다. 두뇌로는 무림 일절을 논한다는 우리 제갈세가를 압도하는 오성.’
그는 제갈세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무공은 물론 진법과 용병술 그리고 용인술을 두루 익혔다.
그런 그의 기준에서도 하현의 자질은 탁월했다.
오랜 시간 동안 몸에 익혀온 그런 학문들이 모두 무색하게 만드는 듯했으니까.
지금만 해도 그렇다.
그는 이런 식으로 진을 파훼할 수 있다는 것은 이론만으로 들어보았지, 이렇게 실제로 적용한 것은 처음 보았다.
그의 탁월한 감각 덕이겠지만, 범인이라면 종이를 펼쳐놓고 수 시진을 계산하여야 하는 것을 순식간에 머리로만 계산하는 저 천재적인 두뇌는 빼놓을 수 없었다.
‘남궁세가의 시대는 앞으로도 오래 계속되겠구나.’
솔직히 오대세가의 장남으로서 천하세일가 남궁세가에 대한 부러움과 질시가 아예 없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 저도 모르게 하현을 인정하고 말았다.
“자 됐습니다.”
그가 하현을 보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하현이 그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 각자 병기를 뽑으시고, 제가 신호하면 있는 힘껏 바닥을 향해 찔러 넣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곤 하현은 눈을 감고 기운을 집중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체력과 내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더욱 집중해서 검에 기운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밀려드는 내력에 검 끝이 흔들린다.
다른 무인들도 하현을 보고는 똑같이 저마다 독문 무공을 사용하여 기운을 끌어 올렸다.
아홉 명의 고수들이 각자 기운을 모으는 데 집중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바람이 흐르지 않아.’
하현은 지금 그가 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렇게나 진기가 요동친다면 당연히 광풍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기는 바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입가에 웃음을 띠며, 하현은 소리쳤다.
“지금!”
푸욱!!
그의 목소리에 맞추어 각기 다른 아홉 개의 병기가 바닥을 찔렀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 촌각이 흐르고.
쩌어억-!
병기를 찔러 넣은 곳부터 균열이 인다 싶더니, 갑자기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은 계속해서 커지다가 이내 바닥이 와장창! 하고 깨져버렸다.
그 순간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감각이 일었다.
분명히 땅에 발을 대고 있건만, 그 아래로 또 하나의 하늘이 있는 것 같은 느낌.
휘잉-!
그때 바람이 느껴져 왔다.
그것도 얼굴을 할퀴어 버리는 것 같은 칼바람.
이 모든 감각이 지나가는 동안 하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의 산 정상에 서 있었다.
휘익- 휘익-
매섭게 바람이 부는 그곳엔 수풀이 우거졌다.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곳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민둥산이었는데.
발밑을 보니 하현의 흑룡검은 비석 하나를 반으로 가른 채 바닥에 꽂혀 있었다.
이 비석들이 진법을 활성화하는 데 쓰인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다른 무인들도 무사한지를 확인했다.
숫자를 헤아려 보니, 다행히 모두 아까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 이건...”
몇몇 무인은 그들이 조금 전에 겪은 기현상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현도 만약 취월걸개에게 단기간에 진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면 저들처럼 어리둥절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무사하십니까?”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고, 몇몇은 무사하다며 하현에게 말했다.
하현은 그들이 모두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은 후에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커다란 동혈의 입구가 있었다.
그 동혈 입구의 지름은 일반적인 성인 남성 두 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였다.
“아마 저기인 것 같습니다.”
“정말로 산 정상에 동혈이 있었군. 아까는 믿지 못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도 진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면 다시 확인해 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현은 검룡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고는 동혈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 모두가 주위를 잔뜩 경계하며 하현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이윽고 동혈 앞에 도착했을 때.
- 끄아아아악!
동혈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비명을 듣는 순간 제갈정완과 제갈정현이 눈을 마주쳤다.
“형님!”
“그래. 정현아. 정규의 목소리가 맞는 것 같다!”
그들 둘은 제갈정규의 목소리가 맞다고 확신했다.
하현도 그들의 반응을 보고는 말했다.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빨리 들어가는 게 답일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앞장서겠다.”
그는 허리 품에 넣어두었던 섭선을 다시 촤악 펼치고는 동혈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동굴 안은 생각보다 밝았다.
야명주나 이런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발광이끼로 보였다.
‘이곳이 명당이라 찾은 게 아니야. 우연히 발견했거나, 정파 무인들을 피해 도망가다 이곳을 찾았겠지.’
타다다닷-
동혈 안에 십수 개의 발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행히 동혈은 한 곳으로만 뚫려 있는 외길이었기에 그들을 거침없이 달렸다.
“하현아. 무슨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나도 맡았어. 이게 무슨 냄새지...?”
“약재 냄새 같기도 하고, 피 냄새 같기도 하고...”
하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좋지 않은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착-
얼마나 달렸을까.
눈에 공력을 집중한 하현은 저 멀리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모두를 멈춰 세웠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저길 보세요.”
하현의 시선이 끝이 향한 곳에는 무언가가 쌓여 있는 무더기가 보였다.
소화가 말한 이상한 냄새의 근원지는 저곳이었다.
“저... 저!”
“무량수불!”
“...아미타불...!”
무인들의 눈이 어둠에 적응되고, 그 무더기가 무엇인지를 확인한 순간, 도호와 불호가 동시에 터져 나온다.
시체였다. 그것도 사람의 시체. 무슨 약에 절여졌는지, 일반적인 사람의 시체의 색이 아니었다. 어떤 시체는 거무튀튀하고, 어떤 것은 불그스름했다.
“천인공노할...!”
제갈정현이 분노를 터뜨렸다.
남궁환, 하현과 함께 사천에 다녀오고 나서 제갈정규와 많이 가까워졌던 그는 둘째 형에게서 배화문에 대한 것들을 종종 듣곤 했다.
지금 눈앞의 시체 더미는 예전에 제갈정규가 말해주었던 딱 그 모습이었다.
“배화문의 잔당이 남아 있었던 게 사실이었네요. 정현 형.”
하현이 슬그머니 제갈정현의 어깨를 짚었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았던 그는 그 덕에 정신을 차리고 흥분을 삭혔다.
그때 하현이 동굴 안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 모퉁이 뒤에서 다수가 접근합니다. 다들 긴장하세요!”
파앗!
하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동굴 안쪽에서 수십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의 맨 뒤에는 민머리에 붉은 경장을 입은 사내가 하현 일행을 보고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이곳에는 어찌 들어온 것이지?! 지천유창진(地天劉滄陳)을 어떻게 깨고 들어왔다는 것이냐!”
“요황!!”
“나를 어떻게 알고 있... 제갈세가?!”
제갈정완이 소리치자 민머리의 사내, 요황이 다시 한번 놀란 눈으로 소리쳤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아. 내 동생을 내놓아라!”
파라락!
제갈정완이 신법을 펼치자, 요황에게 거의 날 듯이 다가갔다.
제갈세가의 독문 보법인 천기미리보(天機迷離步)를 극성으로 펼친 결과였다.
화아악!
어느새 펼쳐서 쥐고 있는 그의 섭선에 대천성신공(大天星神功)의 충만하게 깃든다.
그 순간, 그의 부채는 쇳덩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는 있는 힘껏 부채를 내리쳤다.
쾅!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는 요황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하 하나가, 갑자기 요황과 제갈정완의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수하는 그의 몸을 아끼지 않고, 별다른 방비도 없이 몸으로 막아내었다.
그래서 수하는 어깻죽지부터 왼팔이 억지로 뜯겨나갔다.
“무슨...?”
“헛?!”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어깨부터 거칠게 뜯겨간 그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인제 보니 그의 눈에는 생기도 하나 없었다.
마치 시체의 눈을 보는 듯했다.
“강시?”
누군가 무의식중에 툭 튀어나온 말이지만, 그의 말은 무인들의 마음에 파문을 가져왔다.
강시는 죽은 자를 일으키는 술법이다.
전설 속에나 있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아니요. 저들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다고?”
“네.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하현은 저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이 느꼈다.
“무슨 수를 쓴 것일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조종하는 것 같습니다.”
제갈정완의 섭선에 잔뜩 움츠렸던 요황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리쳤다.
“눈치가 좋구나! 여기 있는 이 자들이 여태껏 우리 배화문에서 연구한 그 결과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대법이 완성되었을 것을...!!”
그리고, 그는 동굴 안쪽으로 신법을 전개해 도망쳤다.
제갈정완이 그를 뒤쫓아 가보려 했으나, 요황이 이끌고 온 무사 몇 명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두 하나같이 눈에 초점이 없었다.
서걱-!
그때, 가장 앞에 서 있던 무사 하나의 머리가 툭 떨어졌다.
그러자 무사는 완전히 사망한 듯,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방금 검을 휘두른 자는 하현이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여도, 역시 목이 떨어지면 바로 죽는 것 같습니다. 이 자들의 성취가 생각보다 많이 낮기에 할 만할 겁니다.”
하현의 솔선수범에 무인들은 그들의 앞을 막고 있는 수십의 무사들을 손쉽게 도륙내었다.
몸의 단단함이나 신체 능력은 매우 뛰어났지만, 무공에 대응하지도 못하고 너무나도 쉽게 죽어버린 그들이었다.
“아미타불...”
원진의 합장 한 번.
이후 그들은 감상에 빠질 새도 없이, 동굴 안쪽으로 사라진 요황을 쫓아 들어갔다.
이윽고 다다른 동굴의 끝에서, 그들은 요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버러지 같은 실패작들. 겨우 이 정도 시간밖에 벌지 못했다니.”
그는 탄탄한 근육질의 남자 옆에 서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확인한 제갈정완과 정현이 매우 놀라며 소리쳤다.
“정규야!”
“형님!”
그는 실종되었던 제갈정규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들의 말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이틀만... 아니, 하루만 더 있었어도 이놈의 영혼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을! 이렇게 된 이상,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너희도 찾아가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무인들을 보며 소리친 요황이 제갈정규의 백회혈에 꽂혀 있던 기다란 장침을 뽑아내었다.
사람의 머리에 어찌 저리 긴 것이 들어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침이었다.
번뜩!
그러자, 제갈정규의 눈에 안광이 돌았다.
그 모습에 요황이 조금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자. 다 죽여라.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거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제갈정규에게 소리쳤다.
그런데, 이다음 상황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파악!
“왜, 왜 나를?!”
제갈정규가 갑자기 요황의 목을 손으로 낚아챘고, 순수한 근력만으로 그를 들어 올렸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