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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천재 외손자-227화 (227/304)

227화

그들이 돌아온 날 밤에는 연회가 열렸다.

제갈과는 곳간을 열어 음식과 재화를 아낌없이 풀었다.

그 덕에 하현을 맞이하러 모인 민초들도 잔칫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회는 과도하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아직 귀주성에서는 큰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다.

제갈세가주의 아들이자, 제갈 삼 형제의 아버지인 제갈지 역시 귀주성에 가 있는바.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운후 아저씨. 이번 일은 아저씨 덕분에 쉽게 해결된 겁니다. 정말 큰 공을 세우셨어요.”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다. 도련님 뒤를 따라다니다 보니 어쩌다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난 것뿐이죠.”

“그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잖아요? 돌아가서 큰 외숙부께 말씀 꼭 잘 전달해 드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운후가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하자, 하현이 그를 얼른 일으켜 세웠다.

진심으로 운후 덕에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흠. 흠흠. 나도 가주 대리님께 말씀 좀 잘 전해 주시려나?”

“진유강. 당신이 한 게 뭐가 있다고?”

“뭐가 있다니. 사람 참 섭섭하게. 나도 막 같이 왔다 갔다 하고, 그러지 않았소.”

그의 앞에서 너스레를 떠는 진유강을 보며, 하현이 피식 웃었다.

진유강이 공치사를 원하는 이유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유강은 지금 범죄자의 신분이다.

지금은 하현이 하인으로 받아들여 남궁세가의 그늘 아래 있기에 관군이 관여하지는 않지만, 하현이 수틀리면 하루아침에 그를 관아에 데려갈 수도 있는 노릇, 그래서 최대한 공을 쌓으려는 것이다.

하현에게 잘 보이고, 남궁세가에 잘 보이기 위해서.

‘정예 대원으로까지, 오른다면 그때는 나를 함부로 하지는 못하겠지.’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예 대원이 되고자 하는 그였다.

하현도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더욱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

‘지금 남궁세가의 유일한 문제는 그 숫자가 너무 적다는 것.’

믿을만한 사람으로 계속해서 인원을 늘려나가는 것.

하현이 추구하고 있는 방향이었다.

“하현 소협. 여기 계셨군.”

“가주님?”

한창 진유강의 푸념을 들어주고 있던 차에, 제갈과가 하현에게 다가와 하현을 불렀다.

“중요한 얘기 중이었는데, 내가 방해한 건가?”

하현이 진유강을 슬쩍 밀어내며 대답했다.

“아뇨. 별로 중요치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진유강은 입을 삐죽이고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현은 멀어지는 그를 보면서 작게 웃고는 제갈과를 다시 바라보았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하현은 제갈과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제갈과는 그를 다른 사람이 없는 방으로 데려갔다.

남들이 듣지 못하게 하현에게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일단…… 정말 고맙다는 말부터 다시 하고 싶네.”

“아닙니다. 감사 인사는 정말로 충분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정파의 무인으로서 당연히 했어야 하는 일이었고요.”

제갈과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는 감사함이 넘쳐 뚝뚝 떨어질 듯했다.

“정완이나, 정현이에게는 직접적으로 말은 못 하지만, 정규는 특히나 내가 총애하던 아이였네. 사실 내가 충격을 받아 냉정하지 못했던 것이 한이라네.”

“아닙니다. 충분히 빠른 판단을 하셨습니다. 가주님께서 저희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시지 않았더라면 제가 여기에 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정말 큰 용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갈과는 하현을 새삼 감탄 어린 눈으로 보았다.

무가에서 태어나, 다른 세가의 도움으로 집안의 위기를 이겨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큰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하현은 그것마저도 제갈과의 공으로 돌렸다.

정말이지 적을 만들지 않고, 그에게 빠져들게 하는 화법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저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갈 소협을 찾아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정신을 되찾지 못한 탓에…….”

제갈정규를 데리고는 왔지만, 아직 상황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머리에 장침을 꽂고 의식을 잃은 채다.

시험 삼아 장침을 뽑아 보았다가, 다시 제압하는데 꽤 고생한 그들이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요황이라는 작자에게서 정보를 빼내고 있으니.”

“그는 순순히 말합니까?”

“아니. 모든 걸 말하는 순간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아는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며 계속해서 시간을 끌고 있네. 결정적인 순간에 작은 정보를 하나씩만 풀면서 연명하는 중이지.”

하현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로서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래도, 당가에서 의원들을 보내오기로 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맞네. 특별히 당가주께서 자백제를 만들어 보내주신다고 답신이 왔네. 그게 효과가 있길 바라야지.”

당문에서는 중원 최고의 독가(毒家)라는 명성에 걸맞게 효과 좋은 자백제를 만들 수 있었다. 제갈정규의 상태를 확인해 볼 의원도 여럿 보낸다고 했으니, 지금 제갈세가로서는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없었다.

“자네를 불러놓고서는 다른 이야기만 했군.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네.”

그는 하현의 눈을 슥 보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받은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나 그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 위함이었네.”

“은혜를 갚으신다니요. 오늘 연회를 열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네. 오늘의 연회는 사실 자네만을 위했다기보다는 우리 가문의 일을 위해 먼 길을 와준 모든 무인들을 위해 연 것이고, 자네에게는 따로 더 보답해 주고 싶어서 말이야.”

제갈과의 눈빛은 진중했다.

하현은 종종 이런 눈빛을 마주하곤 한다.

어떻게든 해주고 말겠다는 그런 눈빛.

그래서 하현은 그냥 거절하기를 포기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가벼운 선물로 주시면 더욱 감사드리겠습니다.”

“하하. 젊은 사람이 겸양이 넘치는군.”

제갈과는 하현의 말이 겸손이라고 생각했는지 껄껄 웃었다.

하현은 호탕하게 웃는 제갈과를 보며 며칠 전까지 보던 그 사람이 맞는지 헷갈렸다.

곧 죽을 것처럼 기력 하나 없던 노인이었는데, 지금은 정정하다 못해 활기가 돌았다.

“말을 해주려니, 이미 천하명마를 가지고 있고, 검을 주려니 지금 자네의 검보다 좋은 검은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하다네. 금은보화와 무공은 이미 남궁세가에도 차고 넘칠 테니…… 응?”

제갈과는 순간 하현의 눈이 반짝였음을 알아챘다.

지금까지의 눈빛과는 전혀 다른 눈빛에 제갈과는 하현이 저런 눈빛도 할 수 있구나 하고 신기해할 정도의 눈빛이었다.

“금은보화를 원하는 만큼 주면 되겠나?”

“괜찮습니다.”

제갈과는 헛다리를 짚었다.

금은보화라는 말에서 눈빛을 빛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하현은 촌각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남는 것은 한 가지.

제갈과는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러면…… 무공을?”

씨익-

그제야 하현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그가 평소에 짓고 있는 애늙은이 같은 미소가 아니라, 또래에 걸맞은 순수한 미소다.

“하하하! 자네. 그렇게 웃을 수도 있었군. 무공이라?”

“가주님.”

“왜?”

“저는 입이 무겁습니다. 아직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단 한 번도 남의 비밀을 타인에게 누설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갈과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하현을 보았다.

조금 전에 하현이 한 말을 뜻풀이해 보자면 자신은 입이 무거우니 걱정하지 말고 가문의 비전 무공을 가르쳐달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하하하! 그랬구만. 입이 무거웠어! 하하하!”

제갈과는 전각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웃었다.

제갈정규가 집으로 돌아온 것과는 또 별개로 하현과의 대화 그 자체가 너무나도 즐거웠던 탓이다.

‘정현이가 사천에 갔다 와서 갑자기 무공 수련에 열심히 더니, 이 아이에게 큰 자극을 받아서 그랬구나.’

그는 막내 손자가 한순간에 달라진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마음을 고쳐먹었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하현과 직접 만나 보니 심지어는 그 자신도 무공에 대한 열정이 다시 고개를 내비치는 것 같은 감정이 일었다.

“그래, 알겠네. 어떤 무공을 원하는가?”

“…….”

하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워낙에 무공을 좋아하고, 즐기기에 흥미가 있었을 뿐이지, 어떤 무공을 어떻게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하현이 우물쭈물하며 고민하는 내색을 보이자, 그런 하현이 귀여웠는지 제갈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직접 우리 세가의 무공서고에 들어가서 무슨 무공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는가?”

“무공서고 말입니까?”

조금 전보다 하현의 눈이 더욱더 빛났다.

무공서고에 데려간다는 것에 반응하는 모양새가, 저잣거리에 데려가 준다는 아이의 그것과 판박이였다.

하현이 너무나도 좋아하자 제갈과는 기분이라는 듯 하현에게 말했다.

“아니다. 아예 이렇게 하지. 내가 무공 서고에 있을 시간을 주겠네. 그 시간 동안 자유롭게 비급을 보다 나오는 건 어떻겠는가?”

“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하현이 힘차게 대답했다.

제갈과는 껄껄 웃었다. 하현이 너무나도 좋아하자 그도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그러면 세 시진(약 6시간) 동안 서고에서…….”

“네 시진(약 8시간).”

“응?”

“네 시진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제갈과는 하현의 눈에서 열망을 읽었다.

네 시진은 안 된다고 하면 어째서인지 저 눈빛에 실망감이 어릴 것을 생각하자, 그는 마음이 아팠다.

“그, 그래. 네 시진 동안 보게나.”

“감사합니다. 가주님!”

하현은 제갈과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까지 감사의 뜻을 전했다.

누가 보면 하현이 제갈과의 은인이 아니라, 제갈과가 하현의 은인이라도 되는 것 같을 정도로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하현이었다.

‘네 시진 안에 비급을 보면 얼마나 보겠나?’

제갈과는 안일하게 생각했다.

보통 수재라고 하는 무인들도 비급 한 권을 다 외우려면 네 시진은 족히 걸린다.

그런데, 하현은 특별히 총명해 보이니 두 권이나, 많아야 세 권.

‘가문의 은인을 위해서 겨우 무공 비급 세 권 정도야 충분히 내줄 수 있지.’

그는 기분 좋게 하현의 등을 두드렸다.

하현에게 이렇게라도 보답할 수 있어 더욱 기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왜 이렇게 등골이 서늘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전혀 몰랐다.

하현이 비급을 한 번 보면 외우고 이해까지 해버리는 천재 중의 천재라는 사실을.

그리고 예전 남궁세가에서 서고 하나의 비급을 몽땅 외우는 데 정확하게 네 시진이 걸렸었다는 것을.

‘서고의 크기가 얼마나 클지는 모르지만, 최대한 많은 무공을 보고 나오는 거야.’

하현은 의지를 불태우며 주먹을 꼭 쥐었다.

졸지에 가문의 무공을 몽땅 털릴 위기에 처한 제갈과는 그것도 모르고 허허 사람 좋은 웃음만 짓고 있었다.

“자. 그럼 나가겠나? 당장 서고에 들어가도 되고, 아니면 내일 낮에 들어가도 되고. 편한 때를 고르게나.”

“그러면……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오늘 해시 말(밤 11시)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묘시 중반에 나오겠군. 잠은 안 자도 괜찮겠는가?”

“네. 하루쯤은 괜찮습니다.”

“그래. 편한 대로 하게.”

하현은 입이 귀에까지 걸린 채로 제갈과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제갈과는 저 행복한 미소를 보며 어째서 자꾸 불안함이 생기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 애써 그의 마음을 억눌렀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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