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하현이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입을 틀어막고 무언가를 찾았다.
“왜. 왜 그러는가?”
당황한 당규호가 물었지만, 하현은 대답하지 않고 구석으로 가더니.
“웨에엑!”
무언가를 토해냈다.
마치 먹물처럼 보일 정도로 검은 무언가였다.
치이익-
하현이 토해낸 그것은 바닥에 닿자 순식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화했다.
그 뒤로도 몇 차례나 더 그것을 뱉어낸 하현은 입가를 닦으며 일어섰다.
“자네 그게 혹시……?”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요황을 가리키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 자의 몸에 있던 마기입니다. 정말 맛없네요.”
하현은 침을 퉤퉤 뱉었다.
제갈세가주는 하현을 황망한 표정으로 보다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면 금제가 완전히 풀린 것인가?”
“네. 풀렸습니다. 금제라는 것도 결국은 몸 안에 진기를 심어 어떤 방식으로든 작용시키는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자의 몸은 마기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제갈과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것이 가능한 건가?’라고 혼잣말했다.
하현은 그에게서 눈을 돌려 요황을 바라보았다.
요황 역시 하현을 보고 아연실색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에게 금제를 가한 것이 누구인가?
중원 전체를 위협할 정도로 거대한 단체인 마교의 정점에 서 있는 교주다.
“거, 거짓말하지 말아라. 입을 열면 나를 죽게 하려고……?!”
“당신을 죽일 거였으면 내 손가락 하나면 충분했어.”
“흡!”
싸늘한 말에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현의 말대로 요황은 현재 저항할 수 없기에 사혈 하나만 누르면 되는 일이었다.
“당가주님. 자백제 여분 혹시 있으시죠?”
“그럼! 나를 뭐로 보고.”
그는 품에서 병 몇 개를 더 꺼냈다.
준비를 철저히 해 왔는지, 모두 다 자백제인 것으로 보였다.
“제가 심문에 같이 참여하고 싶지만, 공력의 소모가 커서 너무 힘드네요. 조금 쉬다 와도 될까요?”
“그럼! 어서 쉬다 오거라. 안될 것이 어디 있겠느냐.”
제갈과가 펄쩍 뛰며 말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하현의 입에서 힘들다는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부탁이 있다면 제갈 공자가 깨어날 방법을 모두 알아내고 난 뒤에 천마유가의 유지석과 무슨 관계인지, 교주와는 어떤 사이인지를 여쭤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구석으로 가서 한쪽으로 치워 놨던 종이 뭉치를 집어 들고 제갈과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제가 일부 알아낸 것인데, 의학이나 술법 방면으로는 전혀 지식이 없으니 제대로 알아낼 수가 없더군요. 이것도 참고할 게 있으면 참고해주시고요.”
“아, 알겠네.”
하현은 터덜터덜 뇌옥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 제갈과와 당규호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참…… 대단한 아이이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저 나이일 때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군…….”
“하하! 저는 저때쯤 독연을 터뜨려서 혼났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나는군. 자네의 아버님께서 자네가 커서 과연 당가를 잘 이끌 수 이끌지 모르겠다며 걱정하시던 게 눈에 선하군.”
긴장이 풀린 덕인지 당규호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제가 어른들에게 걱정을 많이 끼치긴 했죠.”
“그래도 이렇게 잘 성장해서 당가를 잘 이끌고 있지 않은가?”
“예쁘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규호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슬쩍 요황을 쳐다봤다.
그 눈빛은 당가주로서의 눈빛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악동이라 불리었던 당규호의 눈빛이었다.
* * *
뇌옥을 서둘러 빠져나온 하현은 숙소로 향하지 않았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해.’
화악!
순식간에 기감을 최대한으로 펼쳤다.
그러자 제갈세가의 장원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운의 위치가 보였다.
‘이쪽에 가장 사람이 없구나.’
하현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곳을 확인한 뒤에 옆에 있는 전각 위로 올라갔다.
다른 사람의 시야에 걸리고 싶지 않았기에 전각 사이를 뛰어다니며 하현은 이윽고 그가 가고자 했던 곳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다. 바닥에는 풀도 깔리지 않은 흙바닥이었는데, 건물을 세우기 위해 땅을 골라놓은 것으로 보였다.
‘다행히 작업하는 인부도 없는 것 같고.’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그는 진각을 밟으며 기수식을 취했다.
쿵-!
그는 지금껏 익힌 적도, 사용해 본 적도 없는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 발걸음은 그다지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천천히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두두두두-
그런데 발걸음은 아주 조금씩 빠르고, 강해지기 시작했다.
콰과과과-
이윽고 그 발걸음은 땅을 모두 파버릴 듯이 맹렬해졌다.
하현이 굳이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온 이유가 있다.
지금 그가 떠올리고 있는 무공은 그의 심상 안에서 천마의 의념이 내보였던 보법이다.
세상에서 ‘천마군림보’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보법.
‘내가 본 것은 겨우 껍데기뿐이지만…….’
하지만 껍데기라고 하여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껍데기를 이루기 위한 의기의념이 분명히 깃들어 있다.
하현이 복구하고 싶은 것은 그 속에 들어있는 진짜 내용이었다.
그 후로도 공터에서는 땅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하현은 계속 연습을 하고 싶었지만, 주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커다란 소리가 지속적으로 울렸는데 아직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것이 운이 좋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하현이 천마군림보를 연습한다고 하여 그 무공을 알아볼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아주 혹시 모를 일이다. 그리고 하현이 마교의, 그것도 교주의 무공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 들키게 되면 하현 뿐만 아니라, 남궁세가 전체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도 있는 노릇이니 하현이 이토록 조심하는 것이었다.
‘이제 슬슬 요황이 중요한 정보를 말했으려나.’
제법 시간이 지난 것을 확인한 하현은 신법을 전개해 공터를 빠져나오려 했다.
그가 다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그는 깜짝 놀라 덜컥 멈춰버리고 말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그를 바라보고 있던 두 개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 만 것이다.
“어엇!”
하현은 급하게 신법을 거둬들인 탓에 꼴사납게 바닥을 우당탕 구르고 말았다.
다행히 기혈이 역행하지는 않았는지 벌떡 일어난 하현은 그 눈동자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의 주인은 이제 갓 예닐곱을 되었을까 싶은 남자아이였다.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다행히 이곳에 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 이 무공을 알아보지는 못했겠지.’
하현은 아이에게 물었다.
“넌 누구니?”
“나는 제갈선. 형은?”
“남궁하현. 남궁세가에서 왔어.”
제갈선의 얼굴을 보자 하현은 누군가 저절로 떠올랐다.
아이의 얼굴은 제갈정현의 큰 형인 제갈정완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 같았다.
“혹시 네 아버지가 제갈정완님이니?”
“응. 우리 아빠 알아?”
“그럼 잘 알지.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는걸. 그런데 여기에는 왜 있는 거야?”
제갈선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는 우리 집인데? 그러는 형이야말로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하현은 제갈선의 말이 맞기에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외부인이 집주인에게 왜 여기 있냐고 물어보는 꼴이었다.
“나는 잠깐 연습할 게 있어서. 방금 본 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왜?”
“아직 미완성이라서 창피하거든. 너는 아직 무공은 배우지 않았구나?”
“응. 아빠 말로는 내년부터 배울 거라고 하셨어.”
“그러면 그때 배우게 될 거지만, 원래 남의 무공 수련을 보고 있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거든.”
제갈선은 똘똘하게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몰래 봐서 미안해!”
어디서 배웠는지 제갈선은 귀엽게 포권까지 하며 인사했고, 하현은 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러면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보자!”
“응!”
하현은 제갈선을 두고 뒤돌아섰다.
아직 무공을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뇌옥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이 무공들은 일단은 기억만 해놓고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연습해보자.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는 무공이야. 내 신법에 접목할 요소도 있는 것 같고.’
이미 제갈선의 시야에서 사라진 하현은 알지 못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제갈선이 흥미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는 것을.
* * *
이틀이 흘렀다.
요황을 심문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는지 생각보다는 오래 걸렸다.
심문이 모두 끝나고 제갈정현의 정신을 일깨우는 일은 의학에도 깊은 지식이 있는 당가의 의원들과 당규호에게 맡기기로 했다.
하현은 제갈과에게 심문 내용이 정리된 종이를 건네받았다.
요황이 마교와 어떻게 연관이 된 것인지, 특히나 천마유가의 유지석과는 무슨 관계였는지를 정리하여 건네받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별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죽지 못해 살아가던 요황의 앞에 유지석이 먼저 나타났고, 마교의 본산에 다녀와 교주를 만날 때에는 창문도 없고 밖을 볼 수 없는 마차로 다녀와서 어디인지 알 수도 없었다고 해.”
하현은 그와 마주 앉은 소화에게 말했다.
그녀 역시 마교와 관련된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모와는 얼굴도 본 적도 없고, 그녀가 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도 아니건만, 하현의 일이 곧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래도 대략 며칠 정도를 갔는지는 알 거 아니야?”
“하남성에서 출발해서 대략 스무날을 쉬지 않고 갔다고 하니까, 분명히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임은 틀림없어.”
“마차로 스무날이라고? 그러면…… 동쪽으로는 흑룡강성, 서쪽으로는 청해, 서장, 신강 정도로 볼 수 있겠네?”
“응. 남쪽으로 광동이나 광서일 가능성도 있고.”
중원 어디에 있는지 아예 감도 못 잡을 때 보다 많이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범위가 너무 넓었다.
“으음…….”
그런데 하현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탁자에 넓게 펼쳐진 지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화는 그런 하현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괜스레 말을 걸거나 하지도 않고, 하현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내 생각에는…….”
“응?”
“그렇게 먼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왜?”
턱-
하현이 지도의 한 곳을 짚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귀주성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
“응.”
“일단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청해성이나 흑룡강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귀주성에 집결시키려면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을 거야.”
“그러면 어디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하현이 손가락을 뻗어 광서성과 광동성을 가리켰다.
“너무 멀게만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어. 광서성과 광동성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
“저기는 밀림밖에 없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잖아?”
“그게 허점인 거지. 생각해보면 사람은 그 추운 북해에서도 살고, 광서성보다 더 덥고 습한 남만에서도 사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화도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른들한테 얘기해보자. 그쪽을 중점으로 봐야겠다고.”
“알겠어.”
하현은 어쩐지 그곳에 무언가 있을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사실 이전에도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천마의 의념을 만나고 나서 더욱 강한 확신이 들었다.
마교의 본거지가 그곳에 없다면 최소한 천마유가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었다.
찌릿-
그때 하현이 눈을 부릅떴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소화가 너무 놀라지 않게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으로 향했다.
‘밖은 그다지 소란스럽지 않은데.’
이 이상한 기운은 분명히 세가 내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운이야. 누군가 침입하기라도 한 것인가?’
하현은 소화에게 잠시 갔다 올 곳이 있다고 한 뒤에 전각을 나섰다.
그는 곧바로 신법을 전개하여 그 기운의 발원지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이 너무나도 급하게 신법을 전개하는 하현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으나, 하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꺼림칙한 기운. 도대체 뭐지? 어……?’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 도착한 하현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여기는……?”
이곳은 제갈세가의 의료당이었다.
즉 제갈정규가 누워 있는 곳이라는 소리였다.
벌컥-!
그때 의료당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안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는 제갈정현이었다.
“제갈 형!”
“하현아! 때마침 여기에 와 있었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있고말고! 형님께서 깨어나셨다.”
“형님이라면 제갈정규 소협이?”
“그래!”
제갈정현은 몹시도 흥분한 얼굴이었다.
“일단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올라가 보거라. 나는 가주님께 갔다 올 터이니.”
그는 이 말을 남기고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현은 의료당을 한 번 올려다 보고는 발걸음을 옮겨 전각 위로 올라갔다.
‘이 기운은 정규 소협의 것이었어.’
기운의 정체를 알았음에도 느껴지는 이질감에 하현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발을 놀렸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