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정규야!”
하현이 전각에 올라와 가장 먼저 들은 것은 제갈과의 목소리였다.
그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제갈정규를 부르고 있었다.
“할아버님…….”
곧이어 하현에게도 익숙한 제갈정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하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지만, 목소리에는 사이한 기운이 가득했다.
하현은 잰걸음으로 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혹시나 정규 소협이 제정신이 아니라면?’
물론 제갈과나 그 옆에 있을 당규호도 무림에서 손에 꼽을 만한 고수이기는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날아오는 공격은 제대로 받아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제갈과가 혈육에게 손속의 사정을 두지 않을지도 의문이고.
“가주님!”
하현이 소리를 치자, 두 명이 뒤돌아본다.
제갈과과 당규호, 모두 한 가문의 가주이다.
두 명의 시선과 함께 한 명이 더 하현을 바라보았다.
하현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
순간 하현은 발걸음을 멈추며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제갈정규의 눈을 보는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예민했어.’
그의 눈은 정순했다. 사이함에 빠져 정신을 잃은 사람의 눈이 절대 아니었다.
요황에게서 알아낸 방법이 주효했던 모양이었다.
“제가…… 살아있는 겁니까? 어떻게 그에게서 풀려난 거지……?”
제갈정규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할아버지 덕분에 이곳이 제갈세가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뛰쳐나간 동생 제갈정현과 지금 눈앞에 있는 하현까지.
“고생했다. 정규야. 정말 고생했어.”
제갈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노고수가 남의 눈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그도 마음고생이 몹시나 심했던 모양이었다.
“이분들은 다 누구십니까? 처음 뵙는 얼굴들인데?”
“다 너를 살려주려 중원 각지에서 오신 분들이시다. 여기는 사천당가의 가주고, 여기 보이는 공자는 남궁세가의 남궁하현 공자시다. 다 너를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주셨다.”
제갈과는 제갈정규가 처음 뵙는 얼굴이라고 한 사람 중에 하현도 포함되는지 알았는지, 제갈정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갈정규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하현을 보며 말했다.
“여기…… 하현 공자가 저를 살려주었다고요?”
“그래. 이 분이 아니었다면 너를 찾아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겐 평생의 은인이다.”
진심을 담아 말하는 제갈과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흘렀다.
제갈정규에게 하현은 동생을 옳은 길로 이끌어준 고마운 후기지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자신을 구해내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하현에게서 미묘하게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이런 기운을 느끼지 못했는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나쁜 느낌은 아니다.
다만 상극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가 불이고, 하현이 물이라는 느낌.
“정규 소협. 일어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하현도 그런 느낌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진심 어린 말투로 제갈정규에게 말했다.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리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오.”
“괘념치 마세요. 일단은 몸부터 추슬러야 하실 것 같습니다. 지금 몸은 어떻습니까?”
“몸……?”
제갈정규는 이제야 문득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웃통이 벗겨져 있었는데, 순간 그는 붉은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피부가 붉었다.
“내, 내 몸이 어째서……!”
지금까지는 평온해 보였던 제갈정규지만, 원래보다 반 배는 더 커지고, 붉어진 피부에 몹시도 놀랐는지, 그는 평정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그의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공……! 내공도 한 톨도 남김없이 없어졌다니……!”
제갈세가는 외공보다 내공에 훨씬 더 치중하는 가문이다.
아니, 외공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애초에 선법 같은 기병이기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타고난 신력보다는 내공에 의존하는 무공을 펼친다는 방증이기도 했으니.
“공자. 진정하시오. 진정!”
가장 가까이에 있던 당규호가 깜짝 놀라 소리치기는 하였으나, 그 말이 귀에 들릴 리 만무했다.
평생의 공부를 한순간에 날려버렸고, 몸도 흉측하게 변했는데 진정하라는 말로 진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소림의 고승이나 무당의 도인이 오랜 시간 정신 수양을 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갈 공자를 어서 진정시켜라!”
“네. 가주님!”
당규호의 말에 당가의 의원이 뛰어들어 급히 제갈정규의 혼혈을 짚었지만, 제갈정규는 끄떡도 없었다.
퍼억!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휘두른 팔에 맞은 의원이 나가떨어졌다.
어찌나 힘이 강력했는지, 의원은 수 장을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이, 이게 무슨!”
제갈과와 당규호가 놀라기는 했지만, 그들은 오대세가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가문의 가주들이다.
그들 둘은 순간적으로 제갈정규에게 반응했다.
팍- 파바박!
두 고수의 손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였다.
그들은 제갈정규의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하면서 한 손으로는 혼혈을 짚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혼혈을 두드려도 제갈정규는 반응이 없었다.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호신강기를 몸에 두르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혈도를 짚는다는 것이 단순히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공을 혈도에 주입하여 그 혈을 자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갈정규의 피부는 내공의 주입 자체를 거부하듯 튕겨내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렸던 게 이겁니다. 저도 처음 보았을 때는 믿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있습니다.”
하현이 말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방법이 있다니?”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게요. 정규 소협! 정신 차리세요!”
하지만 제갈정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쓰러진 의원이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아내는 것을 보고 더욱 흥분했는지, 제갈정규는 완전히 폭주 직전이었다.
‘정규 소협의 사기는 내 자연의 기운과 상극이야. 자연의 기운이라면 저 사기를 잠시 억제할 수 있다.’
일전에 동굴에서 그와 싸웠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다.
두 번째 그를 마주하니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제갈정규가 완전히 이지를 상실했을 때보다 비교적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지금 더 확실히 느껴지기도 했다.
우득 우득-!
제갈정규는 주변의 모두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청난 힘에 가주들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막아내려면 못 막아낼 것은 없었지만, 그랬다간 제갈정규의 몸이 상할 것이 분명했기에 순순히 물러난 것이다.
쒜에엑!
그는 하현을 향해 양손을 내뻗었다.
내공을 싣지 못한 손이지만, 터져 나오는 파공음으로 보아 저 손에 맞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휘익-!
하현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가볍게 제갈정규의 손을 피해냈다.
아무리 빠르고 강력하다고 할지라도, 초식도 없이 단순하게 뻗기만 하는 공격은 여유롭게 피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는 그 속도 그대로 나아가 제갈정규의 등 뒤에 섰다.
터억!
그리고 등에 손을 댄 하현은 상단전의 기운을 끌고 내려와 그의 몸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손바닥에서 벼락이라도 치는 듯 찌릿한 기운이 이어졌다.
제갈정규의 몸이 자연의 기운을 거부하는 것이다.
“끄아아악!”
제갈정규는 괴로운 듯 비명을 질러댔다.
그의 동작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하현은 재빨리 제갈과를 향해 소리쳤다.
“가주님. 지금입니다!”
파바박!
제갈과가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제갈세가의 신법인 천기신행(天機神行)을 극성으로 펼치며 날아왔다.
그리고 가볍게 제갈정규의 혼혈을 짚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점혈이 먹혔는지, 제갈정규는 몸을 비틀거리더니 결국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후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아마도 아직은 정신이 불안했나 봅니다. 하기는 그럴 만도 합니다. 평생 공력을 잃어버렸으니…….”
당규호는 그가 안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 제갈과가 하현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정규 소협을 잠시 무력화한 것 말입니까?”
“그래. 내 공력으로도 뚫지 못했거늘…….”
하현은 그에게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를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선기(仙氣)입니다. 검룡 소협에게 도를 닦는 법을 배워 선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제갈정규 소협이 내뿜는 사기에 상극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선기까지 익혔단 말인가……?”
“네. 다행히 제 체질과 맞았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제갈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현의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된듯했다.
“그래. 이번에도 또 신세를 졌군. 고맙네.”
“아닙니다.”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황급히 장내를 정리하고, 제갈정규를 다른 침상에 눕히고 나서 몸을 묶어두었다.
제갈과는 마음이 아픈 모양이었지만, 제갈정규가 온전히 정신을 되찾을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다행히 제갈정규에게 얻어맞은 당가의 의원은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코뼈가 부러지고, 입술이 크게 찢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제갈 소협이 일어나려면 또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저는 숙소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혹여나 깨어나게 되면 말씀 주세요.”
“알겠네. 가서 조금 쉬게나.”
하현은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 * *
그 후로 며칠이 또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제갈정규는 몇 번이나 깨어나고 혼절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와중 그는 점점 제정신을 찾아갔다.
한 번 혼절했다가 일어날 때마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심지어 가장 최근에 혼절했을 때는 그가 폭주했던 모든 상황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상황이 제법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하현은 제갈과에게 말해 제갈정규와 단둘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고 요청했다.
제갈과는 당연하게도 하현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둘의 대담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정규 소협.”
“하현…… 아니, 옥룡 소협.”
제갈정규의 외모는 우락부락한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 눈빛만은 며칠 전과 확연히 달랐다.
이제는 본디 그가 가지고 있던 현기가 어느 정도 돌아온 것 같았다.
“나를 왜 보자고 한 것인가?”
목소리가 저절로 떨린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폭주할 때면 어느새 하현이 나타나 그에게 자연의 기운을 주입하며 다시 기절시키니, 그 앞에서 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가를 너무 오래 비웠기에, 저는 곧 남궁세가로 돌아가야 해요.”
“아…… 그렇군.”
“그런데 제갈 소협께서 또 이성을 잃으셨는데 제가 없으면 큰일 나잖아요?”
“그건…… 그렇지.”
제갈정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현이 없다면 그의 폭주를 막아낼 사람이 없었다.
지금 당장 무당에서 선기를 다루는 도사를 부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제가 방법을 하나 생각 해봤어요.”
“방법?”
“다만, 조금 아프실 수도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그럼. 괜찮고말고. 내가 나를 도우려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더욱 괴로운 일이라네.”
그의 표정은 결연했다.
정신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나까지 고민했던 그였다.
“그러면 뒤로 돌아보세요.”
제갈정규는 순순히 하현에게 등을 맡겼다.
곧 하현의 손이 닿는 느낌이 났다.
부드러웠다. 평소처럼 고통을 가져오는 느낌이 아니었다.
“자. 들어갑니다.”
“뭐가 들어……으아악!”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하현의 손에서 나온 무언가가 제갈정규의 몸으로 들어가 엄청난 고통을 가져왔다.
“조금만 참으세요. 그리고 제가 말하는 구결을 읊으시는 겁니다.”
“구, 구결을……?”
하현은 알 수 없는 구결을 읊조리기 시작했고, 제갈정규는 눈이 뒤집힐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따라 했다.
그러자 하현의 손에서 나온 기운은 그의 신장 뒤쪽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제갈정규가 하현에게 물었다.
“이게 무엇이지?”
“그건 금제입니다.”
“금제……?”
제갈정규가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지만, 특별히 달라진 것이 보이지는 않았다.
“발동 조건을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가 감이 안 잡혔는데, 다행히 이것저것 연구해보다 보니 실마리가 잡혀서요. 이제부터 제갈 소협이 정신을 잃으시게 되면 금제가 펼쳐지게 되어 선기가 몸을 감쌀 겁니다. 그때마다 조금 전 같은 끔찍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하고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제갈정규지만, 하현이 말한 금제의 수법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하현이 펼친 수법은 마교주가 요황에게 했던 금제의 수법을 따라 한 것이었다.
하현은 마기 대신에 선기로 그 금제를 펼쳐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