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허어…… 진정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제갈정규는 탄식을 내뱉었다.
진정으로 하현의 능력에 탄복하면서도, 자신은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내뱉은 탄식이다.
호북성은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쌍벽을 이루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무당은 도문이기도 하고, 무당의 도사들이 무당산 밖으로 잘 나오지 않기도 하여 실질적으로 호북을 지배하는 것은 제갈세가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제갈세가의 직계 삼형제 중 제갈정완은 무재로 이름 높았고, 제갈정규는 문재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그는 눈앞의 하현의 오성과 지능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문사를 했어도 시대에 이름을 떨쳤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하현이라면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제갈 소협. 그리고 또 가르쳐 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준다는 말인가?”
“요 며칠 계속해서 소협의 몸에 자연의 기운을 주입하면서 깨달은 것이 좀 있어서요.”
“깨달은 점?”
“제갈 소협의 내공에 관련된 것입니다.”
제갈정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렸다.
아직도 뇌옥에 묶여 있는 요황에게 내공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지만, 그에게서는 한 번 잃어버린 내공은 다시 찾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리고 평생 내공심법을 익히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제갈정규는 씁쓸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 이야기는 무엇 때문에 꺼내는가…… 나는 모두 포기했거늘…….”
“저도 무인입니다. 무인에게 내공이 어떤 의미인지는 저도 잘 아니까요.”
“후후…… 이제 나에게는 이 엄청난 신력이 있지 않은가? 우리 가문의 무공은 이제 펼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외가무공을 찾아서 익혀 봐야지.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
제갈정규는 곧 음울한 기운을 털어내고, 희미하게나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비록 외양은 흉측하게 변했지만, 요황이 돈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은 약재와, 배화문의 시술은 그에게 비현실적인 힘을 주었다.
이 힘을 잘 활용한다면 분명히 앞으로도 계속 무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심법을 다시 익히려는 시도는 해보셨습니까?”
하현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해 보았다.
그가 익히고 있는 심법은 대천성신공(大天星神功)이다.
대천성신공은 제갈세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상승의 심법이다.
약하디 약한 문사의 몸을 내가고수로 만들어준 심법이니 혹시나 다시 기운을 쌓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운기조식을 해보려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기운을 모으는 것은커녕 애초에 느낄 수조차 없었다.
변해버린 체질이 내공을 쌓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나 잘 안되었나 보군요. 아주 어쩌면 제가 가르쳐드릴 심법으로는 내공을 쌓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제갈정규가 눈을 부릅떴다.
하현의 말은 모두 이해했건만, 그는 다시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하현의 말은 비현실적이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혹시 내공 자체를 아예 느끼지도 못하고, 심법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 막막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네! 바로 그 상태네.”
“역시 제 짐작이 맞았군요. 제 생각에 제갈 소협의 몸은 변한 게 아니라,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다시 태어났다니……?”
얼굴에 의문이 가득한 제갈정규를 보고서 하현이 입을 열었다.
“일종의 환골탈태라고 할 수 있지요.”
“환골탈태라니, 그건 전설 속에나…….”
“그런데 말 그대로 몸이 다시 태어나는 환골탈태는 아닐 겁니다. 요황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억지로 그런 상태가 되도록 유도한 것이죠. 약물과 시술을 통해서요.”
“허어…….”
제갈정규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피부가 붉게 변했고, 온몸의 근육이 우락부락 커지기는 했지만, 그 이외에는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단전이라 부르는 배꼽 아래 내공의 창고 자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몸의 구조가 보통의 사람과 달라졌다고 생각한다면요.”
“단전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추측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내공을 익힌다는 말인가? 내공을 쌓을 수가 없는데.”
당연한 의문을 말하는 그를 보며 하현이 손가락을 들어 머리를 톡톡 쳤다.
“그런데 정규 소협께서 멀쩡한 부분이 한 군데 계시죠. 바로 이곳입니다.”
“머리……?”
“네. 가끔 이성을 잃으시기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제 많이 진정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저와 제대로 대화하고, 의문을 가지시고, 생각을 하신다는 것이 머리만은 정상이라는 그 증거가 될 수 있죠.”
“…….”
제갈정규는 대답하지 않고, 하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현은 설명을 기다리는 듯한 제갈정규에게 빙긋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혹시 상단전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상단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고승들이나 도사들이 깊은 수양 후에 깨우친다는 그것 아니냐?”
“뭐. 비슷한데, 제 생각은 그게 아니에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내공이라 부르는 진기를 쌓으면 자연스럽게 하단전, 그러니까 보통 단전에 모이게 되고, 진기와는 다른 특별한 기운들을 쌓으면 자연스럽게 머리에 쌓이게 되는 것 같아요.”
“특별한 기운이라면?”
“선기라고 할 수도 있고, 자연의 기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갈 소협 같은 경우에는 사기(邪氣)라고 부르는 그 기운을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갈정규는 황망한 표정이었다.
하현이 하는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현원전단신공(玄元展檀神功)도 익히셨나요?”
“아니, 나는 대천성신공을 익혔지.”
“그러면 더 잘됐네요. 제가 구결을 수정해봤는데, 현원전단신공을 익히고 계셨다면 아주 혹여나 헷갈릴 수도 있으니까요.”
순간 제갈정규에는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하현이 구결을 수정했다는 것은 현원전단신공의 구결을 이미 알고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자네가 우리 가문의 무공을 어떻게 알고 있나?”
하현은 순간 뜨끔했지만, 도리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제갈가주님께서 감사의 표시로 가르쳐주셨어요.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해요? 다시 무공을 익히고 싶지 않으신가 봐요?”
“아! 아니다. 잠자코 듣고 있을 테니 어서 말해주게나.”
“알겠어요.”
하현은 태연하게 그가 수정하여 다시 만든 현원전단신공의 구결을 읊어주었다.
제갈정규는 눈을 감고 그 구결을 외웠다.
그도 범상치 않은 오성의 소유자였기에, 집중하여 하현의 말을 듣는 것으로 구결을 깨우칠 수 있었다.
사실 이번에 만들어 본 무공은 하현으로서도 많이 실험적이었다.
‘오롯이 상단전만을 위한 무공은 만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
상단전의 존재를 의식하고 나서 벌써 몇 달이 흘렀다.
남들이 볼 때는 짧은 시간이라 할 수도 있으나, 아직 오랜 생을 살지 않은 하현에게 몇 달은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어떻게 하면 상단전을 더 잘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나온 그 고민의 결과가 상단전을 수련할 수 있는 심법을 창안하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상단전에 기운 자체를 축기 할 수는 없어.’
하현은 상단전에 담겨 있는 자연의 기운을 더 쌓아보려 노력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검룡이 준 무당파의 미청단이 아주 미력하게나마 그 기력을 더 쌓아주었을 뿐.
‘하기는 그게 가능하다면 마교에서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면서까지 자연의 기운을 뽑아내지 않았겠지.’
하지만, 제갈정규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없는 기운을 다시 축기하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몸에 한가득 흐르고 있는 사기를 상단전을 이용하여 모으고, 사용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제갈정규와 여러 번 부딪치며, 하현은 제갈정규의 사기는 자연의 기운과는 상극이지만, 그 성질만은 비슷하다는 판단이 내렸다.
“이 무공을 제대로 익히시면 지금은 몸 전체에 퍼져 있는 사기가 상단전에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꾸준히 수련하시어 그 기운을 내공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분명히 다시 무공을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자네…….”
제갈정규는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하현은 그가 혼자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면 혼자서 익히시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저에게 오시기 바랍니다. 저는 며칠 안에 남궁세가로 돌아갈 것이니, 부지런히 익히셔야 할 거예요.”
“알겠네. 열심히 하겠네.”
제갈정규는 그를 두고 돌아서는 하현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이 은혜는 내가 어떻게 갚아야 하겠는가?”
“일단 무공에 대한 값은 이미 제갈세가주님께서 치르셨습니다.”
“할아버님이?”
“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군요.”
제갈과가 의도했던지는 모르지만, 하현은 그에게 제갈세가의 무공을 선물 받았다.
그러니, 제갈정규를 위한 무공을 선물로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어차피 제갈세가의 서고에서 현원전단신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만들어내지 못했을 심법이기도 하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정 은혜라고 생각하신다면 언젠가 제가 힘을 필요로 할 때 조건 없이 저를 도와주세요.”
“조건 없이?”
“네. 조건 없이.”
제갈정규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든 내 힘이 필요할 때 말하게나.”
“감사합니다.”
하현은 생긋 웃어주고는 다시 뒤돌아 전각을 빠져나갔다.
제갈정규는 하현이 돌아가고 나서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하현이 가르쳐준 무공을 하루라도 빨리 대성하고 싶었다. 그는 일 분, 일 초가 아까웠다.
* * *
“다들 준비되었죠?”
“그렇소. 그런데 우리한테 준비랄 게 뭐가 있소? 아무것도 없이 옷가지 몇 개만 들고 와서, 얻어가는 것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는데.”
또 이틀이 흐르고, 하현은 그동안 머물던 전각 앞에서 모두와 함께 제갈세가를 떠날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가주 당규호는 며칠만 더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아직 제갈정규의 상태가 완전히 정상은 아닌 까닭이다.
“얻어가는 게 없다니. 여기까지 오고 가면서 얻은 경험들만큼 소중한 게 어딨겠느냐.”
“누가 아저씨 아니랄까 봐. 그렇게 고리타분한 말만 하시오.”
“아저씨라니, 누가?”
“대장이 매일 아저씨! 하고 부르면 제일 먼저 뒤돌아보는 게 운 형이면서 발뺌은.”
하현은 운후와 진유강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즐겁게 보았다.
이제 둘의 사이가 제법 가까워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 하현이었다.
“팽 형은 계속 심심하셨죠? 제가 같이 시간을 보내드리지도 못하고.”
“아니. 나에게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최근 이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거든.”
“다행이네요.”
하현은 어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소화와 오래도록 함께일 수 있어서 좋았던 것이 아니냐고 물을까 하다가 참았다.
하현에게는 팽헌홍이 편하고 든든한 형 같은 느낌일지라도, 운후와 진유강의 앞에서까지 체면을 구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조금 기다리면 사람을 보내온다고 하더니 아직이야?”
소화가 툴툴대며 하현에게 물었다.
그들이 이렇게 숙소 앞에서 출발도 안 하고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제갈세가주의 요청 때문이다.
하현이 그에게 이제 떠나고자 한다는 기별을 넣었는데,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대답을 들은 것이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있어. 우리를 데리러 오는 거 같아.”
하현은 여유롭게 말했다.
잠시 후 하현의 말대로 사람 한 명이 찾아왔다.
제갈세가에서 하현과 가장 연이 깊다고 할 수 있는 제갈정현이었다.
“하현아. 오래 기다렸지?”
“아니에요. 다른 할 일도 많으실 텐데 괜히 저희 때문에.”
“무슨 말을 섭섭하게!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자. 따라오게.”
하현과 일행은 제갈정현의 뒤를 따랐다.
“아……!”
제갈정현의 뒤를 조금 따라 걷다가, 하현은 탄성을 내뱉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야. 빨리 가자.”
그 탄성에 소화가 그의 옆에 바짝 붙으며 물었지만, 하현은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이것 때문에 기다려 달라고 한 거구나.’
제갈세가의 입구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모여있다.
하현에게 말하지 않고 준비한 것 같았지만, 하현의 뛰어난 감각에 미리 걸려버렸다.
하지만 하현은 잠자코 제갈정현의 뒤를 따를 뿐이다.
잠시 후.
“와아…… 아니,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이…….”
“제갈세가에 기거하는 모든 이가 나온 것 같은데?”
하현을 제외한 모든 일행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제갈정규를 데리고 제갈세가로 돌아왔을 때 보다 더욱 많은 인원이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제갈과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바로 뒤에는 제갈정완과 제갈정규 역시 함께였다.
하현도 자연스럽게 일행의 가장 앞에 서서 그를 맞았다.
“옥룡. 자네 덕분에 제갈세가에 큰 비극을 피해 갈 수 있었다네.”
“아닙니다.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지금, 이 순간부터, 제갈세가는 옥룡 소협과 남궁세가의 영원한 우방이네. 언제든 제갈세가의 힘이 필요할 때 말만 해주게나.”
“이런 일이 없더라도, 우리는 항상 우방이었지 않습니까?”
하현이 빙긋 웃었다.
제갈과도 하현의 넉살 좋은 표정에 껄껄 웃더니 허리와 고개를 숙여 포권하며 말했다.
“그 말이 맞네. 돌아가는 길 평안하시게. 다시 뵙겠소. 은인!”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은인!!”
제갈과의 말을 따라 하듯, 그의 뒤에 있는 수천의 무인이 하현을 향해 포권하며 인사했다.
그들의 말에는 하나같이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모두 평안하시길!”
하현 역시 그들에게 인사해주고는 환송 인파를 지나쳐 제갈세가를 나섰다.
입구에는 그들의 말이 묶여 있었다.
“하현아. 너 제법 능숙하던데? 평안하시길!”
소화가 킥킥 웃으며 하현에게 말했다.
“옥룡 공자 무탈하시오!”
“남궁세가의 무인들 모두 고마웠소!”
멋쩍은 표정으로 선풍을 타고 가는 그들의 뒤로 제갈세가 무인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그들의 함성은 하현과 그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