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진유강이 양화를 따라 금와객잔을 떠나고 난 직후.
하현은 운후에게 말해 마부들에게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시켰다.
“소저. 의춘까지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이 객잔을 또 들를 테니까, 평경 소협의 몸이 회복되지 않으면 계속 여기서 기다리셔도 돼요.”
“며칠이나 걸릴 것 같으세요?”
“별일이 없다면 닷새 안에는 다시 돌아올 거에요. 마차를 몰고 의춘까지 가는 건 이틀이 걸리고, 올 때도 이틀이 걸릴 텐데 혹시 쉬어오게 되면 하루 정도는 더 걸릴 수 있으니까요.”
“알겠어요. 제 생각에는…… 그때까지는 계속 신세를 지게 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하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게 하는 편이 하현이 더 마음에 놓이기도 했다.
“그럼 편하게 계세요. 계산 걱정은 하지 마시고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드시고,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요구하시고요.”
“마음 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뭘요. 만약 평경 소협이 잘못되시기라도 했으면 제 마음에 큰 짐이 되었을 텐데, 이렇게 살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죠.”
맑게 피어오르는 미소에서 진심이 묻어 나왔다.
“저도 다행이에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네. 올 때는 매우 많은 사람이랑 같이 올 수도 있으니까, 너무 놀라지 마세요.”
“혹여 검존 어르신을 뵐 수도 있는 걸까요?”
“당연한 걸 왜 물어보세요? 저 할아버지 마중 나가는 거라니까요?”
“그래도…… 실감이 안 나서…….”
검을 다루는 검객들에게 검존 남궁무룡은 신처럼 받들어진다.
하물며 해남파는 해남검파라고 불릴 정도로 검법을 숭상하는 문파니 남궁무룡에 대한 선망이 더욱 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할아버지를 잘 모시고 오면 잘 말씀드려서 소저와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볼게요.”
“말로만 들어도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류이영은 이 순간 이 상황도, 아직 깨어나지 못한 대사형도 잊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검존을 만나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니 꿈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저도 출발할 준비를 해야겠네요.”
“네. 이제 저도 방해하지 않을게요.”
“방해 안 됐어요. 저도 오랜만에 이렇게 재밌게 이야기해 보네요.”
하현은 싱긋 웃고는 그의 방으로 들어갔고, 류이영은 하현이 들어간 방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존을 보는 것이 좋은 건지, 하현과의 대화가 좋은 건지, 그녀는 혼자서 방긋방긋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를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던 두 명의 사람이 있었으니.
“사제. 사매가 조금 이상한 것 같지?”
“네. 사저와 근 이십 년을 함께 보냈지만, 저렇게 상냥한 사저는 처음 봅니다. 언제나 철두철미한 사저였는데요.”
해남파의 두 제자 영진과 단청이었다.
그들은 류이영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행동을 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사매가 검존 어르신을 평소에도 그렇게 흠모했었나?”
“검존 어르신이야 뭐 우리 같은 검수들에게는 언제나 흠모의 대상이긴 하지만, 사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류이영을 바라보았다.
그때 류이영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영진과 단청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들처럼 그녀의 눈빛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사형. 사제.”
“왜 그래. 사매?”
“사저 왜 부르세요?”
그녀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영진과 단청이 평소에 알고 있던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냉정한 류이영의 그 눈이었다.
“지금 둘 다 여기에 있으면 지금 대사형 옆에는 누가 있는 거예요?”
“그야 지금은 아무도 없…….”
“죽을 뻔한 대사형 옆에 아무도 없다고요? 아직 의식도 못 차렸는데?!”
류이영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더니 평경이 누워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앓느니 죽지……. 제가 가 있을 테니 조용히 수련이라도 하고 있으세요. 다시 한번 술에 입이라도 댔다가는…… 장문인께 말해서 엄벌을 내려달라고 할 거예요.”
그녀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평경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멍하니 대답도 못 하고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던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변한 게 없는 거 같은데?”
“그러게요. 평소의 류 사저인데요?”
“하아…… 모르겠다. 사매 말대로 무공 수련이라도 하고 있자.”
“네. 사형.”
그들은 무공이라도 수련하려 객잔에 딸린 작은 공터로 향했다.
터덜터덜 걷는 그들의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 * *
진유강은 꼬박 하루가 넘도록 신창양가의 양화를 쫓고 있었다.
“하암-.”
그는 양화가 기척을 느끼지 못할 만큼 충분히 거리를 벌리고서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어찌나 지루한지 하품을 쩍쩍해댔다.
하기는 그럴 만도 하다.
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은 곧 신법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산길을 오직 육신의 힘으로만 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몸이라도 성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단전이 파괴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양화는 필사적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하현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집념이 멀찍이 떨어진 진유강에게까지 느껴졌다.
“쯧쯧. 내가 따라가는지도 모르고.”
그는 양화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추적을 대충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며 양화의 기척에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가 큰 소리로 소리치지만 않는다면 절대로 걸릴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참 무서운 사람이란 말야.”
그는 방금 말한 무서운 사람은 하현이었다.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잘생기기는 했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분명히 일부러 딱 저 정도로 손속을 가했을 거란 말이지.”
그는 저 멀리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양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근골이나 정신력으로 미루어 보아, 저 양화라는 신창양가의 무인은 사실 굉장히 뛰어난 무인이었을 것이다.
저렇게 맹목적으로 그의 세가를 향해 돌아가기보다는 숨겨진 계략은 없는지, 뒤쫓는 사람은 또 없는지를 한 번쯤은 확인해볼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얘기다.
“엄청난 정신적인 충격, 그리고 끊임없는 육체의 고통이 생각이라는 걸 할 여유를 전혀 주지 않았다.”
지금 양화의 저 비정상적인 상황은 모두 하현이 안배해 놓은 것이다.
이런 점이 무섭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었다면 하현은 이미 계책에 능숙해진 것이고, 만약 일부러 한 것이 아니라면…….
“천재 난 거지 뭐.”
그는 자신이 말하고서도 뭐가 그리 웃긴 지 피식 웃어버렸다.
어렸을 적부터 그 역시 천재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몇 번 눈으로 본 것은 잘 잃어버리지도 않았고, 이해력이 남달라서 남들보다 깨달음이 몇 배나 빠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하현의 옆에 있으면 그가 어릴 적 천재라고 불리었던 것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마치 태양 아래 촛불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흐음…… 그런데 도망치는 방향이 조금 이상하단 말이야.”
그런데 진유강은 양화가 도망치는 방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현은 광서성이나 광동성에 본거지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는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있는 위치에서 정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것은 안휘성이다.
안휘성이 엄청나게 크기는 하지만, 남궁세가의 지배력이 공고한 곳이라 그가 의아한 것이다.
“뭐…… 끝까지 쫓아가 보면 답이 나오겠지.”
그는 생각을 비우고, 계속해서 양화의 뒤를 쫓았다.
분명히 집으로 돌아갈 것은 뻔하고, 지금처럼 쫓아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혹시나 양화가 진유강의 미행을 눈치채고 엉뚱한 곳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별로 문제가 될 일은 없다.
그는 하현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될 테니까.
“너무 멀리 가지만 말아라. 빨리 대장한테 돌아가야 하니까.”
그는 들리지도 않을 말이건만, 양화를 향해 내뱉었다.
자신이 한 말이건만,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그는 자신의 입을 찰싹 때렸다.
“내가 정신이 나갔지. 나갔어.”
그는 하현에게 돌아가고픈 마음이 드는 자신을 자책했다.
금방 다시 집중을 찾은 그는 천천히 양화의 뒤를 쫓았다.
* * *
하루가 더 흐르고, 하현과 그가 이끄는 마차의 행렬은 드디어 강서성 의춘에 도착했다.
남궁기철에게 들은 그들의 접선 장소는 의춘에서도 조금 더 서쪽으로 나아간 곳에 있는 거대한 공터였다.
마차와 사람을 모두 데리고 가려면 커다란 공터에서 하는 것이 제일 편했기 때문이라 했다.
“도련님. 건네받은 지도로 미루어 보아 이쪽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무인들의 걸음으로는 이미 도착해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조금 빨랐나 보네요.”
운후는 태연한 척 말하는 하현의 얼굴에서 일말의 걱정을 보았다.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 세가의 무인들도 모두 뛰어나고, 무엇보다 가주님이 함께이지 않습니까.”
“저도 그러리라 생각은 하는데, 마음이 쉽게 따라주지는 않네요. 가족의 일이라 그런가 봐요.”
특히나 사랑해 마지않는 할아버지의 일이다.
길고 긴 전투에 얼마나 기력을 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행에는 남궁민도 함께다.
불세출의 천재이자, 온 무림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청룡신검이지만, 이상하게 남궁민은 하현에게 다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더욱 마음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어, 옵니다. 오네요.”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차에 걸터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하현이 벌떡 일어나 운후에게 말했다.
“어디서 오신다는 말입니까?”
하현은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런데 운후는 아무리 그 방향을 향해 청각과 안력을 집중해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오신다는…….”
“아저씨. 마차 좀 잘 봐주세요. 저 갔다 올게요.”
“도련님…….”
하현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는지 운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신법을 전개해 튀어 나갔다.
휘이익-!
그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날 듯이 나무 위를 뛰어갔다.
지금껏 하현이 펼친 신법 중에 가장 빠르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의 속도였다.
할아버지의 기운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부웅!
하현은 가장 높은 나무를 박차고, 하늘로 높이 뛰었다.
하늘의 한 가운데, 하현의 눈에 비로소 여러 사람의 행렬이 보였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새로운 상승 검법을 배울 때보다도 더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
내공이 실린 하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하현은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차는지, 또다시 나무의 반동을 이용해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향해 쏘아졌다.
바로 어제 신창양가 무인의 목을 벤 그 수법이었다.
피슝- 쾅!
화살처럼 쏘아진 하현은 바닥에 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에고고. 허리야. 너무 무리했네.”
귀환하던 모든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하현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특히나 그들의 가장 앞에서 남궁세가 무인들을 이끌고 있던 노인은 하현에게 서둘러 달려갔다.
“현아. 왜 그리 급한 게야.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하현은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도 않고,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할아버지!”
“어이쿠.”
하현을 품에 안은 노인, 남궁무룡은 하현이 품에 안기자 짐짓 무겁다는 듯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현의 성장 속도는 무섭도록 빨랐다.
취월걸개가 종종 하현을 볼 때마다 죽순처럼 자란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
하현은 이제 앳된 얼굴을 제외하고, 키와 몸만 본다면 성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잘 다녀오셨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그래. 현이 네가 염려해준 덕분이지, 멀쩡하구나.”
남궁무룡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현은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대열에서 나온 남궁기현이 하현을 보며 툴툴거렸다.
그 역시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럴 리가요! 모두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다친 분도 없으시다면서요?”
“그래.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모두 다친 사람 하나 없단다. 다 가주님의 덕이지.”
남궁기현의 말은 겸양이 아닌,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남궁무룡의 엄청난 무위 덕에 전투가 이토록 쉽게 풀린 것이었으니.
“민 형!”
그리고 하현이 또 달려간 것은 남궁민의 앞이다.
“그래. 하현아. 제갈세가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어요?”
“그럼. 옥룡이라고? 멋지구나.”
하현은 조금은 부끄러워졌지만, 그의 말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내심 옥룡이라는 별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남궁무룡이 그들에게 다가와 하현에게 물었다.
“마차는 준비되어있는 게야?”
“네. 조금만 가면 돼요. 저 위쪽으로 올라가면 돼요.”
하현은 할아버지와 남궁세가 무인들을 이끌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선풍이 끌고 있는 가장 크고 튼튼해 보이는 마차에 남궁무룡과 남궁기현, 남궁민을 태웠다.
그리고 선풍의 고삐를 운후에게 맡겼다.
“아저씨. 그러면 금와표국까지 잘 부탁할게요.”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하현은 공손하게 말하는 운후에게 고마움을 표하고는 마차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현은 제갈세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세세하게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제갈세가의 얘기를 끝마치고 나면 또 해남파 무인들의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번 귀주전쟁에서는 어땠는지 묻고 싶기도 했다.
“제갈세가에 가는 도중에 파락호를 만났거든요…….”
하현은 말을 시작했고, 가족들은 모두 그의 말에 경청했다.
그는 할 말이 참으로 많았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