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진유강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나요?”
“네. 저도 그때 소협의 부탁 때문에 신경 쓰고 있었는데, 따로 서신이 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흠…… 그랬군요.”
하현은 턱을 매만졌다.
양화를 미행하는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몸을 내빼라고 했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의 연락이 없다는 것은 셋 중의 하나의 경우다.
‘지금쯤 미행을 멈추고 돌아오고 있거나, 혹은 연락도 못 할 정도로 급한 일이 생겼거나, 혹은…… 정말로 도망갔거나.’
그는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마지막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뭐…… 엄청 큰일이 있으면 어련히 도망치겠지.’
그렇지 않아도 눈치 하나만큼은 하현만큼이나 빠른 그였기에, 그는 그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데, 평경이 그를 불렀다.
“남궁 소협.”
“네. 평경 소협.”
“아까는 부지불식간이라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생명을 구해주시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 문파의 대제자라 할만한 정중한 태도였다.
조금 전 류이영을 놀리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 간극에 하현은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고 진중한 태도로 포권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사과드립니다. 저와 마교의 일 때문에 중간에서 피해를 보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저와 제 사제들이 똑바로 수련해 실력이 있었으면 생기지 않았을 일입니다. 만약 저희가 이용당해 소협께 해를 끼쳤다면 너무나도 죄송했을 겁니다.”
둘의 말 모두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애초에 하현이 없었다면 해남파 제자들은 이 일에 휩쓸리지 않았겠지만, 애초에 해남파 제자들이 약해서 이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림에서 약한 것은 엄청난 중죄, 누군가는 냉혹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무림은 치열한 곳이다.
“그러면 서로의 잘잘못은 없는 거로 하죠.”
“그렇다고 하기에는 저희가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 목숨, 이 객잔에서 머무는 값, 저희가 먹은 음식 등등…… 은혜를 다 갚기가 너무 힘들 겁니다. 조금 덜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현은 평경이 하는 말의 속뜻을 알아챘다.
그는 최소한 이 객잔의 사용료만은 하현에게 주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도리를 아는 자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돈이 크고 작고가 아니라, 최대한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으니까.
“아니요. 그건 은혜 축에도 못 껴요. 그런데 지금 저는 일부러 해남파에 빚을 지워두고 있는 건데요?”
“빚을 지워두시다니요?”
“저는 세상 모든 검법을 견식하는 것이 제 작은 소망인데, 언젠가는 해남도에도 한 번은 넘어가 볼 생각이에요. 그때는 저 은자 하나 안 들고 갈 건데, 저를 책임져 주셔야죠.”
평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현은 그것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의 속마음은 달랐다.
‘분명히 우리 해남파의 검결을 사용했던 것 같은데……?’
그가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해남파의 무공을 쓰는 하현의 뒷모습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검법의 형과 태도, 그 안의 내공을 운용하는 방식도 모두 해남파의 그것과는 달랐지만, 이상하게 그건 해남파의 검결을 이용한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껴졌었다.
하현은 그런 평경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이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편하게 쉬세요. 저희가 남궁세가를 떠나도 아예 여기서 며칠 더 요양하셔도 좋고요. 류 소저. 의원은 소협이 며칠 정도 누워 있어야 한 대요?”
“그게 한 달은 이러고 있어야 한다고…….”
“한 달이나요? 객잔에 계속 있으신 건 괜찮은데, 혹여나 상처가 덧날까 겁나긴 하네요.”
평경의 상처는 그만큼 컸었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피를 어찌나 많이 흘렸는지 머리칼이 우수수 떨어질 정도였다.
“그러면 평경 소협. 더 귀찮게 하지 않고, 이만 저는 내려가 볼게요.”
“벌써 가시려 합니까?”
평경은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다.
조금 더 하현과의 분위기가 괜찮아지면 어떻게 해남의 검결을 알고 있냐고 물어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요양하고 계세요. 다음에 또 올라오죠. 뭐.”
“아. 그러시겠습니까? 하긴. 소협도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모시고 오느라 피곤하실 테니까요.”
“그건 아니지만. 뭐. 그렇다고 하죠.”
하현은 싱긋 웃고는 류이영을 돌아보았다.
“류 소저. 소저는 계속 여기 평경 소협을 간호하고 있는 거예요?”
“계속은 아니고, 가끔씩만요. 지금도 물을 갈아줄 시간이 되어서 가지고 온 거지 사실 오늘 처음 온 거예요.”
“류 사제. 자주 좀 와달라니까. 내가 여기서 얼마나 심심한 줄 알아?”
류이영은 평경의 투덜거림을 가볍게 무시해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며칠 전에 저 출발할 때 말했었잖아요. 할아버지와 만나게 해드리겠다고. 마차에서 돌아오면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렸거든요. 그랬더니 해남파와도 인연이 깊다고 하시면서 좋다고 하시던데요?”
“아! 정말요?”
류이영은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책임감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 언제 가면 될까요? 검존 어르신이 괜찮으신 시간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그때 숙소로 가겠습니다.”
“쇠뿔도 단숨에 빼랬다고, 아예 지금 갈까 하는데. 사실 할아버지도 여독을 푸셔야 하니까 아예 지금 해야 할 일들을 다 처리하고 귀찮게 안 해드리려고요.”
“어르신만 괜찮으시다면 전 언제든 좋아요.”
“그러면 지금 가죠.”
하현과 류이영은 평경에게 다시 오겠노라 인사하고는 방을 나섰다.
방에 혼자 남은 평경은 그 문을 보며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소리죽여 웃었다.
“류 사제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 처음인데…….”
그는 다시 자리에 털썩 누으며 생각했다.
“사문에는 투귀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조금만 더 중원에 있겠다고 서신을 보내기라도 해야 하나? 그나저나, 나도 검존 어르신을 뵙고 싶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동안 이 방에서 스스로는 움직이기도 힘들다.
들것에 실려 검존을 만나러 갈 수도 없거니와, 검존 어르신을 이곳으로 오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있나. 잠이나 자야지.”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오지 않는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다치고 나서 지금처럼 아쉬운 것은 처음이었다.
* * *
남궁무룡이 머무는 전각 앞.
하현의 뒤에 바짝 붙어서 서 있는 류이영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혹시 들리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그런데…… 나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지?’
그녀는 문득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평소에 선망하던 검존을 만나는 것 이상으로 크게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언제나 냉정하고 당당하던 그녀다.
그런데, 지금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저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그녀는 하현이 말을 걸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직접 만나보면 정말 좋은 분이라고 생각할걸요?”
그리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왜 자신이 긴장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 하현 소협의 할아버지라 그러는 거구나.’
지금 그녀는 단순히 검존이라는 무림의 큰 어른을 만나는 것에 긴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현의 집안에 가장 큰 어른을 만나기 때문이었다.
‘미쳤나 봐. 정말.’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그것이 걸릴 것만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여쭤보고 올게요.”
“알겠어요.”
남궁무룡은 이 층에서 머무는지 하현이 계단을 타고 올라갔고, 그녀는 이제야 고개를 들고 숨을 푹 내쉬고는 얼굴에 손부채질하며 열을 식혔다.
‘옷 좀 갈아입고 올걸.’
이제야 오랜 시간의 무림행으로 낡아버린 해남파의 무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무복이지만, 비교적 깨끗한 옷이 분명 봇짐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온 것이 못내 아쉬운 그녀였다.
“소저! 올라 오라셔요.”
그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하현은 야속하게도 너무 빨리 내려왔다.
류이영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준다고 생각했는지, 급히도 내려온 것 같았다.
“저기…… 아니에요. 올라갈게요.”
그녀는 지금 말고 다음에 뵙겠다고 말하려고 하다가 하현의 얼굴을 보고서는 말을 멈추었다.
저렇게 해맑고, 즐거운 얼굴로 그녀 자신을 위해 할아버지에게 뛰어갔다 온 하현의 얼굴을 보자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것 같은 다리를 움직여 이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미쳐버리겠구만.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거지꼴을 한 남자가 상소리를 거칠게 내뱉었다.
그의 행색은 말 그대로 거지꼴이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에, 옷은 나무에 걸려 군데군데가 찢어져 있었고, 바닥도 몇 번이나 굴렀는지 온통 흙투성이였다.
게다가 복부에서 흘린 피가 파지까지 적셨는지, 초록색의 무복에 꽤 큰 붉은 얼룩이 져 있었다.
“이 정도 왔으면 더 못 쫓아 오겠지? 어휴 누가 지독한 마교 놈들 아니랄까 봐. 하여튼 독하다 독해.”
거지꼴의 남자, 진유강은 입안 가득 침을 모아 카악 하고 뱉었다.
“정말 내가 돌아가기만 하면 당장에 정식 대원까지는 올려달라고 해야겠다. 억울해서라도 지금처럼 무명제자로는 절대 못 있어! 내 목숨을 걸고 이렇게 임무를 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는 이제야 한숨을 돌렸다고 생각했는지 괜히 땅에 분풀이라도 하는 듯 발길질해댔다.
마교의 추적은 끈질겼다.
다섯, 아니 모두 여섯의 추적이었다.
처음 수하들에게 진유강을 추적하라고 지시했던 그들의 대장이 나중에 그들에게 합류하여 진유강을 쫓았으니까.
알고 보니, 그의 복부를 꿰뚫은 검도 그가 던진 것이었다.
“이 와중에 이걸 들고 오다니. 나도 정말 대단하다!”
그는 문득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마교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남궁세가에 가지고 가면 아주 자그마한 단서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 힘든 와중에도 버리지 않고 들고 온 것이다.
그는 물이 졸졸 흐르는 냇가를 찾아 바로 그 옆에 털썩 앉았다.
“크아…… 이제야 살 것 같네.”
먼저 물로 목을 축인 그는 조심스럽게 계속해서 상처를 덮고 있던 손을 살며시 떼보았다.
겨우 그것만으로도 알싸한 통증이 그를 감쌌다.
상처에는 피가 엉겨 붙어 눈으로 보기에는 아주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피가 응고되면서 상처를 잘 막아 주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한 치만 안으로 들어갔으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네.”
다행히 아주 깊은 상처는 아니었는지 출혈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움직이는 데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 부위를 계속 칼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입으로는 계속 툴툴대면서도 한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경공이 몇 단계는 더 발전했겠군.”
무인이라는 족속이 이렇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건만, 무공 수준이 강해지니 그 모든 고생이 보답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주 조금의 깨달음이나 발전으로도 그럴진대, 지금 진유강의 경공은 눈에 띄게 발전할 수 있었다.
물론 병 주고 약 주고라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는 않지만, 하현에게 배운 경공 덕에 큰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정도로 퉁쳐도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는 그였다.
“으윽!”
그는 깨끗한 물로 상처를 씻어내고 상처를 살폈다.
꽤 깊은 상처였지만, 다행히 지혈됐는지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 주변 혈도를 짚어 완전히 피가 흐르는 것을 차단한 그는 소매를 찢어 허리를 꽉 졸라매어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잘 묶어주었다.
“일단은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봐야겠어.”
그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부터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냇물의 하류 쪽을 바라보던 그는 인상을 팍 썼다.
“아니…… 이렇게까지 도망쳤는데 이걸 쫓아왔단 말이오?”
그는 그를 쫓던 마교 무리의 대장이었다.
그 역시 완전히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진유강을 쫓아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는지, 그의 머리와 옷이 땀으로 번져 번들거렸다.
“끝까지 쫓아서 죽인다. 그게 우리 신창양가다.”
“아니, 수하들도 다 놓고 혼자 온 것 같은데. 우리 이쯤 포기하고 각자 갈 길 가는 건 어떻소?”
진유강은 그의 뒤를 유심히 살폈지만, 그의 수하들은 아무도 쫓아오지 못했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는 이렇게 먼 거리를 그렇게 빠른 속도로 오려면 보통 내공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야 하현에게 배운 경공 수법으로 달렸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진유강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그대로 무시하고 계속해서 그에게 걸어 올라왔다.
그의 눈은 진유강을 뚫어버릴 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진유강은 그 시선이 묘하게 낮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혹시?”
그 시선을 따라가 보자, 그의 시선은 진유강이 아닌 검에 꽂혀 있었다.
“오호라. 이걸 찾으러 온 것이오?”
진유강은 그 순간 무언가 중요한 게 떠올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을 이었다.
“잠깐…… 그 말은 그쪽은 지금 검이 없다는 소리 아니오?”
“검이 없어도, 권장법으로도 충분히 널 상대할 수 있다.”
“그렇겠지. 그래도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소?”
말을 마친 그는 마교인의 검으로 아직은 그가 가장 자신 있는 복마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이 경공과, 이 검법이 있으면 저 자한테는 절대 지지 않을 수 있어.’
진유강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슬쩍 피어올랐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