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으음…….”
한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아……! 아……!”
그는 천장과 벽의 낯익은 문양을 보고는 감격했는지 눈물을 주륵 흘리면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감탄사만 내뱉었다.
드르륵-
“양화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곧바로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준용……! 정말로 이곳이 신강양가라는 말인가?!”
“양가 맞습니다. 도련님.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쓰러져 있던 자는 하현과 진유강으로부터 겨우 도망친 신강양가의 양화였다.
그는 안휘성 황산 근처에서 신강양가의 무인들을 만나고는 긴장이 풀렸는지 곧장 정신을 잃었고, 이제야 깨어난 것이다.
조금 전 방으로 급히 들어온 준용은 양화의 하인이었으나, 무공을 오래 익히며 고수의 반열에까지 오른 자였다.
“도망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곳에서 죽는 줄 알았다.”
“도련님. 함께 갔던 다른 도련님들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다른 도련님이라 하면 양규와 양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떠올린 양화의 낯빛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둘의 생사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말끝을 흐렸고, 준용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이 무사하지 않으리라고 알아들은 것이다.
지금 살아있다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라도 구조해야 하지만, 이미 죽었다면 눈앞에 살아 돌아온 양화가 몸을 추스르고서 자초지종을 들어도 늦지 않다.
이것이 마교인의 사고방식이었다.
“지금 내 몸 상태가 어떻지? 의원에게 들었나?”
“네. 의원뿐만 아니라, 가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상태를 확인하고 처방을 내려주셨습니다.”
“가주님께서 직접…….”
신강양가주, 양귀진은 무인으로서도 신마의 초입에 들어간 초절정의 고수이지만, 의료술로도 교내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남궁무룡에게 두 다리를 잘리고 나서부터 밤낮 할 것 없이 의학에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벌써 삼십 년이다.
그는 어지간한 무인은 고사하고, 명의라고 하는 의원들과도 의술로 부족하지 않았다.
“가주님께서…… 뭐라시더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복부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준용은 말하기가 힘들다는 듯 몇 번을 머뭇거리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제대로 치료하시고, 충분히 요양하시면 예전처럼 건강하게는 사실 수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결국 무공은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양화는 심경이 복잡한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사실 자기 스스로도 단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금와객잔에서 황산까지 도망 올 동안 내공을 쓸 수 없어 얼마나 힘들고,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지만, 자신이 느끼는 것과 남의 입으로 듣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미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조금 더 누워있으시지요. 절대적인 요양이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이 쓸모없는 몸뚱어리를 요양해서 무엇 하겠느냐.”
그가 슬그머니 눈을 뜨며 말했다.
그의 눈은 회색으로 죽어 있었다.
힘을 숭상하는 천마신교에서 평생의 내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살 의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저 공력이 흩어져 다시 모을 가능성이라도 있다고 하면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이겠지만, 단전이 파괴된 그는 평생 무공을 쓰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으득-
자신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자연스럽게 한 사내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무섭도록 순수한 표정의 잘생긴 그 얼굴을.
“남궁……하현!”
그는 하현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마음 같아서는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건만, 이곳은 신강양가다.
무공도 없는 그가 소란을 피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그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눈을 번뜩 떴다.
그 무엇보다 급한 일이 떠오른 듯했다.
“지금 당장 가주님께 가야 한다.”
“안 됩니다. 지금은 움직이시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가주님께 빨리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다!”
그의 표정을 매우 급박해 보였다.
내공도 하나 없건만, 준용은 양화의 기백에 압도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면 제가 가주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가주님을?”
“그렇지 않아도, 가주님께서 깨어나면 바로 말씀해달라 하셨습니다. 제가 가서 가주님께 도련님이 깨어났다는 것과 지금 당장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라. 그만큼 급한 일이다. 지금 당장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준용이 방을 나가고, 양화는 이제야 천천히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단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깨어난 즉시 객잔에서 도망쳐 한 번도 쉬지 못했기에, 이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몸을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이토록 무자비하고 완벽하게 파괴하다니…….”
태어날 때부터 천마신교에서 태어난 그의 입에서 무자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하현의 손속은 거침없었다.
단전이 있어야 할 부위는 핏덩어리와 살덩어리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정말 무섭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거침없는 손속이었다.
“이 와중에 커다란 기혈이나 혈관은 건드리지도 않았다니.”
정말이지 하현은 정확하게 단전만을 파괴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찢기고 터져야 했을 혈관과 기혈들을 그 짧은 순간에 이어 붙이기까지 했다.
그 덕에 양화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계속해서 걸음을 옮길 수 있고, 생명에도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그자는 우리 가문에…… 우리 교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는 하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공포심이 몸에 새겨진 듯 소름이 돋으며 식은땀마저 흘렀다.
“내, 내가 이토록 공포에 빠지다니.”
지금은 이런 꼴로 누워있다고는 하지만, 천마신교의 당당한 후기지수였으며, 신강양가에서 촉망받던 무인이다.
훗날 차기 가주로까지 거론되었던 그였는데, 지금은 하현을 떠올리기만 해도 공포심이 차올랐다.
“도련님, 가주님 들어가십니다.”
그때 문밖에서 준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였다.
아마도 그가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공으로 온 것처럼 보였다.
드르륵-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바로 문이 열렸다.
“양화……!”
“가주님!”
양귀진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마교의 사람들이 정이 없다고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양화는 그의 조카였기도 하거니와 그의 제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널 이렇게 만든 것이냐. 마화당주가 너를 뒤쫓던 자를 쫓다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던데, 그자의 소행인 것이야?!”
“저를 뒤쫓았단 말입니까?”
“그래! 황산까지 너를 따라왔다고 했다. 그곳에서 순찰하던 마화당주가 발견해서 망정이지, 우리 가문까지 따라올 수도 있었다.”
“이럴 수가……!”
양화는 자신의 무공을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을 때보다 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자신이 신강양가의 위치를 알려줄 뻔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자가 남궁하현이었습니까?”
“남궁하현? 그는 아니었다고 들었다.”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은 남궁하현이었습니다.”
“뭐라고?!”
양귀진은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그의 판단으로 양화는 하현에게 절대 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현은 좋게 쳐 줘야 겨우 극마의 초반에 올랐을 것이고, 양화는 극마의 중위에는 올랐기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나의 계략과 너의 무공 실력이면 이번 일은 실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늘, 무슨 변수라도 있었던 것이냐. 혹시라도 남궁무룡이……?!”
만약 남궁무룡이 이 일에 끼어들었다면 그는 실패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양화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남궁무룡에게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은 뻔했다.
“아닙니다. 이번 일 때문에 가주님을 급히 보자고 말씀드린 겁니다. 우리의 계략이 모두 간파당했습니다. 남궁하현은 제 역용술을 간파했고, 제가 내공 한 톨 없던 그사이에 저를 공격했습니다.”
“뭐라고……?!”
그는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이번 계략은 전부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계략이 빠져나갈 경로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두 가지의 경우의 수밖에는 없다.
첫째로는 남궁하현이 너무나도 천재라서 양화를 보자마자 계략을 알아챘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는…….
“간자가 있다는 말이냐?”
양화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귀진은 첫 번째 경우의 수는 고려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사람의 마음을 읽지라도 않는 이상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네. 제가 그들에게 들었습니다. 우리의 정보가 빠져나간 경로를……!”
“그게 어디냐.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것이야?”
양화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이야기는 아무도 들으면 안 되기에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잠시 귀를 좀…….”
양귀진은 양화에게 다가가 귀를 내밀었다.
그리고, 양화는 그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뭐, 뭐라고?!”
양귀진은 그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에게서 들은 말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그들이 교주 자리에 혈안이 되어있다고 해도……!”
그는 입을 다물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일이니,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된다.”
“네. 이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우리 입에서 먼저 나오는 순간 불리해지는 것은 도리어 우리일 것입니다.”
“그래……. 사람을 풀어 조사 해봐야겠다.”
그들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양화의 통증이 도져 대화를 그만할 수밖에 없었다.
양귀진은 의원을 불러 양화에게 붙여주고는 그의 가주전으로 돌아갔다.
돌아간 그는 즉시 그의 직속 수하들에게 천마유가의 동향을 조사해보라 한 뒤에 깊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현의 말 한마디로, 신강양가는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 *
빠악-!
“커헉! 잠깐! 잠깐!!”
명치에 손바닥이 제대로 틀어박힌 진유강이 컥컥대며 연신 기침해댔다.
그의 명치를 강타한 손의 주인 하현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대로 시작도 안 했어. 빨리 일어나.”
“아니, 다짜고짜 그렇게 들어오면 내가 어떻게 막으라는 소리요?”
“내공도 제대로 안 실려서 그렇게 아프지도 않을 건데, 왜 이리 엄살이 심해?”
“엄살이라니! 이게 얼마나 아픈데. 거기 운 형! 형도 와서 맞아보시오. 이게 엄살인지 아닌지!”
둘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운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번에 강자와 싸워봤더니 실력 증진의 필요성을 느꼈다며 도련님께 실전같이 해달라고 한 건 유강이 너였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끄악! 쓰러진 사람을 발로 차려고 하다니. 이 잔인무도한!”
“그러니 빨리 일어나.”
“나 환자요. 환자!!”
“그래서 손이랑 다친 곳은 안 때리잖아. 어서 안 일어나?!”
그 뒤로도 하현은 진유강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그때 대련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운후의 옆으로 누군가 나란히 섰다.
“아! 큰 도련님.”
“하하. 큰 도련님이라니. 어색하네요. 오후에 남궁세가로 떠나기로 했는데, 오늘도 수련을 빼먹지 않으시는군요.”
그는 남궁민이었다.
사실상 운후와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는 조금 낯을 가리는 모습이었다.
“하현 도련님께서 어차피 돌아갈 때는 마차로 돌아갈 테니 오늘도 해도 상관없지 않겠냐고 해서 말입니다.”
“역시 하현이답네요.”
남궁민은 호탕하게 웃었다.
꽤 오랜 시간 보지 못했건만, 하현은 역시 하현이었다.
본인의 강함에 절대 만족 못하는 듯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수련하는 곳에 그도 조금은 자극되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아, 현이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요.”
“대련이 끝나려면 조금 걸려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대신 전달해 드립니까?”
“네. 부탁드려요.”
남궁민은 잠깐 눈을 돌려 하현을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취월걸개 어르신이 와 있으셔서요. 하현이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 전해주세요.”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