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모두가 남궁세가에 돌아오고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하현은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침이 시작되면 온 가족이 모여 다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서 각자 가문의 일을 보거나, 수련을 한다.
하현은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수련 시간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남궁세가의 가주 자리를 이양해주기 위해서는 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남궁기철이 가주 대리를 잘 해왔다고는 하지만, 가주 대리와 진짜 가주와는 다르다.
세가 내의 내정에 있어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가주는 가문의 일만 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남 개봉에 있는 천 노인과는 되도록 거래를 줄이도록 해라. 그자는 욕심이 너무 많아 신뢰를 주면 도리어 그 신뢰를 이용할 자이니.”
“잘 알아 두겠습니다. 가주님.”
“그리고, 하남성 고시현의 장 노야와는 친분을 두텁게 가지도록 해라. 취월걸개와의 친분도 있지만, 최근에 새로 쌓은 하현이와의 관계도 얕은 관계가 아니다. 분명히 열을 주면 열다섯으로는 보답할 터이니 조금씩 거래량을 늘리고.”
“알겠습니다. 가주님.”
남궁무룡이 가장 많이 가르쳐 주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중원 각지에 있는 중요한 사람과 그 사람들의 성품에 대해 전달해주는 것.
이것은 지금까지 남궁무룡이 가주로서 직접 다른 단체의 우두머리들을 느낀대로 말해주는 것으로써, 그의 경험을 전달 해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궁무룡은 상인뿐만 아니라, 현재 구파일방의 수장들이 어떤 사람인지, 세외의 중도를 일컫는 자들의 성품은 어떤지도 잘 설명 해주었다.
“지금까지 했던 말은 모두 알아들었느냐?”
“네. 열심히 기억도 하고 있거니와, 아까부터 가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으니 모두 기억할 때까지 반복해서 보고 기억하겠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계속 가주님이라 부르는 게야? 이제는 아버지라 부르라니까.”
“아직은 가주님이 맞으시지 않습니까? 제가 가주가 되면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하게 될 터이니, 그 안에 실컷 불러 놓으려 합니다.”
남궁무룡은 그의 큰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이 애비가 너무 급작스럽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는 것 같아 불만이야?”
“아뇨. 불만일 리가요. 우리 남궁세가의 가주 자리는 정말…… 어릴 적부터 꿈꿔오던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네 얼굴은 그리 좋아 보이지만은 않아 보이는데?”
남궁기철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작게 한숨을 쉬고서는 대답했다.
“역시 아버지 앞에서는 뭘 숨길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어째서인지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서운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 남궁세가의 가주는 아버님이었습니다. 무려 오십 년이나요.”
오십 년.
정말로 긴 시간이다.
오십사 년 전의 정사대전의 여파로 남궁세가는 거의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그때 유일하게 남은 남궁세가의 직계가 바로 남궁무룡이었다.
가주의 즉위식이고, 뭐고 할 새도 없이 남궁무룡은 자연스럽게 가주가 되었고 전후에 가문을 재건해나가기 시작한 사 년 뒤에 남궁기철이 태어났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후후…… 내가 오래 하기도 했구나.”
“그래서인지, 가주가 아닌 아버님은 쉬이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어쩐지 제가 가주가 된다는 기쁨보다는 아버님께서 이제 가주가 아니라는 그 서운함에 마음을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
남궁기철의 나이도 어느덧 오십.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아버지의 앞에 서면 아직도 다 크지 못한 어린아이인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스윽-
남궁무룡이 손을 끌어다 남궁기철의 손등 위에 포개어 놓았다.
언제나처럼 크고 따듯한 손이다.
손은 나이를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듯, 구순을 넘은 나이 덕에 여기저기 주름이 져 있긴 하지만, 평생 검을 수련한 덕에 그마저도 나이답지는 않았다.
“그래. 네 마음은 잘 알겠다. 너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어주는 것 같은 것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어쩔 수 없구나. 그게 다 네가 첫째이기 때문냐고 묻는다면…… 그건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남궁무룡이 남궁기철의 눈을 바라보았다.
항상 어린아이일 것만 같던 남궁기철은 어느덧 손주를 봐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내 나이도 어느덧 백수를 바라보고 있다. 물론 내가 당장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슬슬 나도 내가 없는 남궁세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아버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니. 넌 이제 가주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해.”
“아버님…….”
남궁기철은 말을 잇지 못했고, 남궁무룡은 무언가 좋은 생각을 했는지, 얼굴에 한껏 미소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다행히, 내 손주들의 재능이 너무나도 뛰어나 앞으로 가문이 걱정되지는 않는구나.”
손주들에 대한 말을 꺼내자, 남궁기철도 자연스럽게 웃음 지었다.
그의 아들, 딸과 조카들은 정말로 눈부신 재능을 가졌다.
당대에 이런 재능을 가진 무인이 한 명만 나와도 대단하다고 할 것인데, 네 명이 이렇게 한꺼번에 나오다니, 가문에 큰 축복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청룡신검이라 불리는 남궁민은 이미 온 중원에 이름을 떨치고 있으며, 남궁환과 남궁소화도 각각 화멸검과 검봉으로 무림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현이는 정말…… 저희가 어릴 때 저희 삼 남매는 누가 더 대단한지 이야기하곤 했죠.”
“이야기만 했느냐? 그러다 싸움이 붙어서 내가 말리느라 고생했지.”
“하하. 그랬었죠. 그런데, 이제야 그 결판이 난 것 같습니다. 영령이가 저희 중의 제일이었습니다. 하현이를 낳았으니까요.”
남궁무룡은 빙긋이 웃었다.
남궁기철의 말에서 진한 그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영령이가 보고 싶구나. 만약 영령이 있었다면 왜 자신이 아닌 오빠가 가주 자리를 가져가느냐고 아득바득 달려들었을 터인데.”
“하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마음을 다해 축하해 주겠죠.”
남궁무룡의 눈에 기어코 이슬이 맺히고 말았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결코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는 그이건만, 아주 가끔 남궁기철의 앞에서는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이것이 맏아들에게서 느끼는 편안함일 것이리라.
“우리가 영령이 해주지 못한 만큼 하현이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
“하하…… 꼭 영령이 아니었어도, 하현이는 제 사랑을 알아서 찾아 받았을 겁니다. 그만큼 총명하고 영특한 아이니까요.”
남궁기철과 남궁무룡의 눈이 마주쳤다.
지금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직은 많이 어리고, 제가 이제야 막 가주 자리에 오르겠지만…… 제 역할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음 대까지 우리 남궁세가를 무사히 건네주는 것.”
“그래. 네 다음 대의 아이들이 재능을 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너의 가장 큰 과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남궁기철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주가 되었지만, 결코 경거망동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도 남궁세가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훗날 다음 대의 아이들이 성장한다면 그때 남궁세가는 무림에 지금보다도 더욱 큰 영향을 끼치는 가문이 되리라 확신했다.
“자. 잡담이 길었구나. 그러면 계속할까? 어디까지 했지?”
“네. 포달랍궁의 현재 궁주는 간사한 면이 있는 자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구나. 그렇기 때문에 그와 약속을 할 때는 항상 증인을 준비해야 하며 되도록 배분이 높은 자를 데려와야 한다…….”
남궁무룡의 말은 계속되었다.
오늘 하루만으로 끝낼 수 없는 양이건만, 남궁기철의 눈은 쉼 없이 반짝였다.
* * *
“후. 이제 다 됐어요. 이제는 제법 움직이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쓰시는 건지…… 솔직히 말해서 제 내공도 이전보다 더욱 증진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하현이 평경의 등에서 손을 떼며 말하자, 평경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서도 쉬이 믿음이 가지 않았다.
몇 달은 요양해야만 할 것 같았던 상처였다.
검상이 내장을 어찌어찌 비켜 가서 내상 자체가 깊지는 않았지만, 내장이 거의 배 밖으로 튀어나오기까지 했고, 피도 너무 많이 흘렸었던 그다.
‘그런데 칠 주야 만에 이렇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다니.’
물론, 금와객잔에서 그를 치료해주었던 그 의원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매일 하현이 주입해주는 이 기운에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내공은 증진되었다기보다는 제 기운이 돌면서 탁기를 걷어내 기혈이 깨끗해져서 그렇게 느끼는 걸 거에요.”
“탁기를 걷어냈다는 말입니까?”
“네. 막상 들어보니 별 건 아니죠?”
평경은 어이가 없는 말에 웃지도 못했다.
그의 상식으로는 몸 안의 탁기를 걷어내려면 굉장히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운기조식을 통해 걷어내거나, 영약이나 영단을 먹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기운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이다.
“어쨌든 제가 의원을 불러드릴 테니까, 의원님이 괜찮다고 하면 천천히 세가 구경도 해보세요.”
“네. 항상 감사합니다. 소협.”
“뭘요. 아직 개방에서는 들어온 소식이 없어서, 소식 들어오면 말씀드릴게요.”
“네. 그것도 정말 감사합니다.”
하현이 문을 열고 나가고, 평경은 혼자가 되었다.
그는 하현과 지낸 며칠을 통해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나름 무공을 익혔다고 생각했었는데.’
해남도는 섬이긴 하지만, 그리 작은 섬이 아니다.
내륙에 있는 다른 성들과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어느 소국 정도는 충분히 될만한 면적이다.
평경은 그곳에서 태해검(太海劍)이라는 다소 거창한 별호를 받았다.
똑같은 수련을 해도, 또래보다 훨씬 무공이 잘 붙는 그의 특이 체질 덕이었다.
하지만, 하현과 시간을 보내며 그는 천천히 하현의 내공과 무공 실력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필패 정도가 아니야. 솔직히 어른과 아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분명히 자신보다 나이도 어릴 것이 분명하건만, 무공에 나이는 아무 의미 없다고 스스로 증명하는 듯 엄청난 내공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속세를 떠난 노고수가 반로환동하여 돌아온 줄 알았을 정도였다.
드르륵-
그때 문이 열렸다.
하현이 불러준다고 했던 의원과 류이영이였다.
“사제, 의원님과 함께 왔네?”
“전각 앞에서 하현 공자를 만났거든요. 공자가 하는 말이 의원님이 상태를 보시고 사형께서 돌아다녀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괜찮다고 하시면 바로 데리고 나갈까 싶어서요.”
류이영이 하현을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소협에서 공자로 변해 있었다.
남궁세가에 있는 요 며칠 사이,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았다.
“혼자 나가도 되는데.”
“또 혼자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요? 물론 남궁세가 안이니까 외부적인 일이 생긴다는 게 아니라, 사형이 혹시라도 쓰러지기라고 하면요.”
류이영이 의원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의원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이 의원도 남궁세가의 사람이다.
혹여나 오해할만한 말은 하고 싶지 않은 그녀였다.
“그러면 잠시 상태를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의원은 개의치 않은 듯 자연스럽게 평경의 상태를 보았다.
그리고 의원은 생각보다 빠르게 손을 떼었다.
“허허……. 놀랍군요.”
“왜요?”
류이영은 의원이 혹시라도 나쁜 이야기를 할까 싶어 다급하게 물었다.
“칼에 찢긴 상처가 다 아물지는 않았더라도, 많이 부족했던 피와 기운은 거의 다 채워졌습니다. 상처만 아물면 평소같이 생활하셔도 될 정도에요.”
“그래요? 그러면 오늘도 나갈 수 있는 건가요?”
“네. 오랫동안 걷지를 못하셨기에 다리 근육이 많이 상해있을 겁니다. 오늘부터라도 걸으며 회복하시는 게 더욱 좋겠죠.”
“아!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류이영은 그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평경 역시 자신의 몸이기에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직접 의원의 입으로 듣자,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의원이 돌아가고, 그는 류이영에게 말했다.
“류 사제. 사제가 정말 고생이 많았어.”
“제가 무슨 고생을 했어요? 하현 공자가 정말 고생이 많았죠.”
그녀는 하현을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미소가 배시시 번져 나왔다.
“맞다. 하현 소협께는 갚지 못할 은혜를 얻었지. 그러면 나가볼까? 세가나 한 바퀴 구경해야겠다.”
“아! 같이 진유강 소협이 시험을 치르는 곳에 가보실래요?”
“시험?”
“오늘 남궁세가에 청룡관이라는 곳에 입관하는 시험을 치른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도 분주하고, 생각보다 큰 행사 같던데요?”
“그래? 그러면 한 번 가보자.”
평경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랜만에 걷는 덕에 처음에는 몸이 휘청이고, 비틀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나도 약해져 버린 그의 근력에 울상을 지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약해졌다고 제자리에 멈추어 설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