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사부님! 태극혜검이라니요?! 실전된 태극혜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현이 한참 생각에 빠져있을 때, 검룡이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검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 그 태극혜검 말이다. 실전되었다고 보기도 애매하지. 비급은 남겨 두셨으나, 그걸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야.”
“익히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이 곧 실전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여 남겨주신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실전은 잃어버린 것이고, 우리는 우매한 것이고.”
그의 냉정한 말투에 검룡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검성은 그를 보고서 혀를 쯧쯧 차고서는 하현을 보며 말했다.
“쓸데없이 우리 문파의 사정까지 신경 쓰게 했군.”
“쓸데없다뇨. 어느 문파나 가문이나 각자 사정은 있는 법이니까요.”
그는 어른스럽게 말하는 하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네는 이렇게 어른스러운데, 우리 현무는 언제쯤 철이 들려나 모르겠어.”
“아! 그러고 보니, 현무 도장은 지금 어디 있나요? 예전에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는데.”
“현무는 한창 수련 중이네. 한 시진쯤 후면 끝날 거야. 그렇지 않아도, 현무에게 자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자신보다 뛰어난 무재 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현무가 말을 잘못 전했군.”
그는 하현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현무 놈이랑은 비교할 수도 없는 자질이다. 평생 내가 걸어오면 느낀 검의 길을 그 짧은 생에 모두 느낀 것 같구나.”
분명 그의 말은 하현을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하현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의 눈이 하현을 꿰뚫어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검성은 이미 검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경지의 최고점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현의 능력이 눈으로 보이는 듯했다.
“그래. 그러면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여기까지 온 용무가 무엇이지?”
정상에 올라오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하현은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현은 검성에게 최대한 상세히 현재 상황을 설명했고, 그가 남궁세가로 가주었으면 한다는 말까지 전달을 마쳤다.
그러자 검성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나, 가기는 힘들 것 같군.”
“아……. 그렇습니까?”
“혹시나 오해는 하지 말게. 재미가 없어 보여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도 주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를 잘 알고 있는지 하현에게 부연 설명했다.
“우리 무당에는 태극혜검이라는 검법이 있네.”
“네. 저도 소문으로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 무당파의 오의를 담고 있다고요.”
“그래. 우리 무당의 개파조사이신 장삼풍 진인께서 창안하셨고, 이렇게 산을 깎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검법의 정수를 녹여놓은 검법이라고 알려졌지.”
그는 조금은 슬픈 눈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들었겠지만, 그 검법이 거의 실전된 것이나 다름없는 형국이네. 나는 내 남은 생을 태극혜검의 복구에 바치기로 마음먹었지.”
“그래서 이곳에서 두문불출하시는군요?”
“맞네.”
그는 고개를 돌려 검룡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하현에게 말했다.
“내가 제자를 들인 까닭도 그것이네. 나 혼자만은 도저히 검법을 복구하기가 힘들겠더군. 그래서 제자를 들였지. 그들도 최고의 검수로 키워내면 태극혜검의 실마리를 함께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검룡은 이미 이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은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하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태극혜검의 복구 때문에 그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순순히 인정하는 하현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검성은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미안하네. 검존 어르신께서 직접 부르신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그 부름에 응하지 못한 것도 죄송하다고 전해드리고.”
“아닙니다. 할아버지께서도 모두 이해하실 겁니다.”
하현의 말투와 목소리만은 검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하현의 표정을 눈치챈 검성이 하현에게 말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가?”
“음……. 사실 있습니다.”
“무엇인가? 무슨 말이든 해보게. 원래 말이라는 건 머리에 들이찼을 때 해야 하는 것이라네.”
“조금 외람된 말일 수도 있으나…….”
휘잉-
하현이 잠시 말을 멈추자, 시기 좋게 바람이 불어와 그들을 감싸고 지나갔다.
그 사이 하현은 한 번 더 공터를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혹여나, 태극혜검을 복원할 만한 작은 실마리라도 얻으시면 남궁세가로 가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하하! 내가 무당을, 이 봉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그것인데, 만약 그리된다면 내가 가지 않을 이유가 무엇에 있겠느냐?”
명쾌한 대답에 하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 비급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저에게도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비급을?”
“옥룡 소협!”
검룡이 깜짝 놀라 하현에게 언성을 높였다.
다른 문파의 비급을.
그것도 비기라 일컬어지는 비급을 보여달라는 것은 엄청난 실례다.
하현이 그것이 실례라는 것을 모르면서 한 말은 아니겠지만.
“흠…….”
검성이 침음성을 흘리며 하현을 지긋이 보았다.
정확히는 하현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았다.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던 검성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한 번 보겠느냐?”
“사부님!”
검룡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문파 밖의 사람에게 무당의 비급을 보여주신다니요. 옥룡 소협. 제 말에 서운케 생각하지 마시게. 자네도 이해하지 않는가?”
“네. 절대 오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검성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했다.
“현암아. 지금껏 많은 무인이 그 비급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비급의 내용을 해석하지 못했다. 비급을 보아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지 않으냐?”
“만약 그 비급을 해석해 낸다면요?”
“그러면 더욱 잘 되었지. 드디어 태극혜검을 복구할 실마리를 찾는 것이니.”
그는 검룡을 달래듯 계속해서 말했다.
“현암아. 얼른 가져오거라. 얼른.”
“사부님……!”
“맞고 가져올 테냐?”
“아닙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사제간의 애정이 듬뿍 담긴 대화가 오가고, 검룡은 공터에 세워져 있는 작은 전각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그런데, 하현은 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공터의 바닥 이쪽, 저쪽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장 뭐 하는…….”
“쉿!”
진유강이 하현을 부르려던 것을 운후가 막아 세웠다.
하현은 발로 땅을 헤쳐 바닥에 덮여 있는 흙을 뒤집기도 하고, 검집으로 땅을 긁기도 하며 한참을 돌아다녔다.
“사부님. 여기 있습니다.”
“잘했다.”
그러던 와중 어느새 검룡은 낡은 서책 한 권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 서책이 바로 태극혜검의 비급으로 보였다.
“하현 소협. 읽어보게나.”
검성은 하현을 불러 비급을 건네주었다.
하현은 선 자리에서 책장을 빠르게 건넸다.
너무나도 빠르게 책장을 넘겼기에 장난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검룡은 잠자코 있었다.
“다 읽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래. 시간을 얼마나 줄까?”
“한 시진……. 아니, 두 시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네. 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가?”
하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도움은 괜찮을 것 같아요.”
“하하! 그러면 우리는 다 같이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고 있지. 다들 따라오시게.”
검성은 모두를 이끌고 전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현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집중할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 하현은 고마움에 전각으로 들어가는 검성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이거……. 세월이 오래되기는 했는데, 검흔(劍痕)이 남아있어.’
솔직히 말해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이 넓은 산봉우리를 인간의 힘으로 베어냈다니.
말 그대로 천신의 힘을 지니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신의 힘이 아니야. 인간의 힘이다.’
물론 장삼풍 조사는 실존했는지도 의아할 정도로 전설 속의 인물이다.
그때 하현은 생각했다.
무당파의 조사는 도대체 왜 이곳에 이런 평지를 만들었을까?
이곳에 오두막이라도 짓고 산중생활을 즐기려 함이었을까?
‘아니. 말이 안 되지. 무당파의 본산이 바로 지척에 있는데.’
하현의 머리가 조금 더 팽팽히 돌아간다.
이해할 수 없는 비급의 내용.
이해할 수 없는 조사의 행동.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두고 생각하자, 머릿속에서 불꽃이 번쩍이는 듯한 착각마저 인다.
“태극혜검을 만들고, 그걸 자랑하기 위해 산을 베어낸 것이 아니야.”
스릉-
하현은 검을 뽑아내었다.
거무튀튀한 하현의 묵검이 빛을 받아 한층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돌연 하현은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지금까지 하현이 보였던 발검식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난생처음 취해보는 동작이건만, 하현은 오랜 기간 검식을 수련해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흐음…….”
그러다 움직임을 멈춘 하현은 침음성을 흘리며 턱을 쓸었다.
무언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보였다.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생각하던 하현.
순간 그의 눈에서 빛이 번뜩인다.
“아……!”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는 감탄사만을 내뱉고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또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하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전각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빗자루를 찾아내었다.
휘익-!
신법까지 전개해가며 빗자루를 집어 든 하현은 갑자기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박!
빗자루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날렵한 동작이었다.
그의 빗자루질에 바닥에 두껍게 쌓여 있던 흙이 조금씩,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우웅-
하지만 겨우 싸리로 만든 빗자루가 그 속도와 마찰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기에, 금방 부러지려 했고, 하현은 빗자루의 주변을 천천히 내공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려운데?’
빗자루에 내공을 담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애초에 재질 자체도 단단한 철로 되어 있고, 잘 제련하여 기운을 불어넣기 쉬운 검과는 달리 빗자루는 기운을 받아내기도 힘들고 여러 가닥을 묶어내어 한 줄, 한 줄에 기운을 따로 담아야 한다.
하지만, 하현은 집중력을 끌어올려 어떻게든 빗자루에 내공을 담아낼 수 있었다.
샤샤샥-!
하현은 공터의 이쪽, 저쪽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의 흙을 치워냈다.
얼마나 빗자루질을 계속했을까.
공터를 올라오는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에? 이게 무슨 일이지? 누가 땅을 이렇게 뒤집어 놓은 것이지? 엇?!”
“현무도장!”
“하현 소협 아니오? 여기에는 무슨 일로……. 그 빗자루. 이거 다 하현 소협께서 하신 것이오?”
“그렇게 됐네요.”
현무 도장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 피었다.
도무지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하현 소협.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
“설명하자면 조금 길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거의 다 한 것 같으니까요.”
“아, 알았소.”
하현의 단호한 말에 그는 멀찍이 떨어져 하현의 신들린 듯한 빗자루질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잠시 후.
“아하하! 그런 거였어.”
하현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검흔이에요. 태극혜검을 창안하시고, 시범해 보이신 게 아니라, 이 검흔을 남기고 싶으셔서 이 봉우리를 베어내신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해 주셔야…….”
촤르르-
현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이전에 전각에서부터 한 사람의 신형이 거의 허공을 밟다시피 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옷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그는 바로 검성이었다.
“사부님!”
현무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현무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는 하현의 어깨를 잡아버렸다.
“알아낸 것이냐? 정말로?!”
하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하현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내며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섰다.
하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빗자루에서 손을 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애석하게도 태극혜검 자체를 제가 깨우치기는 힘들 것 같군요.”
하현은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무언가를 안에서 정리한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느낀 바를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몸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검성님 정도라면 충분히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채실 수 있을 겁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