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극한의 신법을 펼치며 전각에서 나온 검성을 따라 나머지 모두 전각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검룡 현무도장 역시 함께였다.
검성은 뒤따라온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현을 보며 말했다.
“이 검흔…… 그리고 비급을 보고서 느낀 바가 있다는 것이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 비급은 정확히 말하면 비급이 아니었어요.”
“비급이 아니었다니……?”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입니다. 하지만, 곧 의미 있는 단어의 집합체입니다.”
검성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하현의 말이 소림의 승려들이나 할 것 같은 선문답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해주게나. 부탁하네.”
검성은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평생의 목표를 이룰 기회다.
상대가 다른 문파의 아이이든, 혹은 저잣거리의 비렁뱅이여도 상관없다.
이 실마리를 줄 수만 있다면 그가 아무리 검성이라 하여도 기꺼이 고개를 숙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비급이라 생각하신 것 자체가 접근 방식이 틀렸습니다. 비급에 쓰인 글자들은 아마도 무당파의 선조 누군가께서 태극혜검을 접하시고 든 생각을 손 가는 대로 써놓으신 것 같습니다.”
“그 말뜻은……?!”
“네. 애초에 태극혜검의 비급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지요.”
“원시천존……!”
검성은 자기도 모르게 도호성을 내뱉었다.
지금껏 생각도 하지 못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면 태극혜검은 조사께서 창안하시고서는 후대에 전달하지 않으려 하셨다는 말인가?”
“그게 아닙니다. 무당의 조사께서는 따로 태극혜검의 비급을 남기실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어째서인가? 구전으로 구결을 전한 것도 아닌데.”
“태극혜검의 가장 큰 흔적을 이미 무당산에 새기셨으니까요.”
“가장 큰 흔적이라면 혹시…….”
검성이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리저리 흙이 파헤쳐진 땅으로 향했다.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 봉우리에 새겨진 검흔이 조사께서 남기신 비급 그 자체입니다.”
“무량수불…….”
검성은 말을 잇지 못했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 봉우리에 처음 살기 시작하신 분은 아마도 태극혜검의 검흔이 모두에게 보이는 것이 걱정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위를 흙으로 덮으시고 전각을 세워놓은 것일 거고요.”
대답도 못 하는 그를 보며 하현이 빙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비급만 보면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지만, 검흔을 확인하고 나서 비급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이 태극혜검은……. 저는 익히지 못할 것 같군요. 무당의 심법을 익히지 않았기에 제 내공과 맞지도 않고, 억지로 배운다고 하여도 좋은 성취를 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현 소협……. 지금까지 말한 것은 결국, 태극혜검이 어떤 것인지 깨우치기는 했다는 것인가?”
검룡이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현에게 물었다.
“제가 느낀 이것이 정말 태극혜검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스윽-!
하현은 또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제가 보고 느낀 것을 보여드릴 터이니, 도장께서도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봉우리의 흙을 치우고, 전체적으로 완성된 검흔을 처음 바라보았을 때, 하현은 태극혜검에 쓸려나가는 봉우리의 조각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장삼풍 조사가 이 봉우리를 베어낼 때 했던 생각, 그 영감들이 전해져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현은 지금껏 수많은 검법과 심법을 익혔다.
그렇기에 검과 내공을 다루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 검흔을 본 순간 하현은 자신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우웅-
흑룡검이 하현의 생각에 반박이라도 하듯, 거칠게 울어댄다.
하현은 들릴 리도 없는 말을 생각으로나마 전한다.
‘그래. 단기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야. 네가 산을 가르게 해줄게.’
촤아악-!
그 생각과 동시에 하현이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듯 보였다.
“와아…….”
조용히 있던 류이영이 하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남아에게 이런 말이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정말이지 선녀가 내려왔다 하여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자태였다.
쑤욱!
흑룡검은 휘몰아치는 바람을 다독이면서도 그 바람에 제 몸을 맡긴다.
지금, 이 순간, 하현의 손에서 무당의 비전 검법인 태극혜검이 재현되기 시작했다.
그 검법을 지켜보고 있는 검성은 하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도호를 외었다.
“무량수불……!”
* * *
“원한다면 자네에겐 무당의 심법도 전수해줄 수 있다니까?”
“하하. 아니에요.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검무를 마치고 전각으로 들어간 하현은 검성에게 두 손을 내저었다.
검성은 하현에게 무당의 심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하현이 무당의 심법까지 익히고서 태극혜검을 펼친다면 정말로 실전된 진짜 태극혜검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하현은 한사코 거절했다.
‘세상에! 내가 가르쳐준다는 무공을 거절하다니.’
하지만, 하현의 판단은 현명했다.
검성에게 무당의 무공을 배웠더라면 태극혜검을 완벽하게 펼쳐내기 이전에는 무당에서 하산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이런, 자네라면 분명히 이른 시일 안에 태극혜검을 복원해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건 검성님이나, 검룡 소협의 일로 남겨 두겠습니다.”
“그게 맞는 말이라 내가 뭐라고 할 수가 없군.”
그는 가벼운 농까지 던지며 하현을 흘겨보았다.
태극혜검을 목도하고 난 검성의 반응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전까지는 조금은 제멋대로이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인상이었다면 지금은 좀 생긴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다.
“내 제자가 잠시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군. 내 잠깐 자리를 피해주지.”
그는 하현을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그와 하현이 들어가 있던 방문을 드르륵 열었다.
그 뒤에는 검룡 현암도장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현암아! 무슨 말을 하려고 거기서 우물쭈물하는 것이냐?”
“우물쭈물 이라니요.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래? 문밖에서 침을 삼키고,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가 다 들리던데?”
“그걸 또 왜 들으십니까?”
“들리니까 들었지! 둘이 하고픈 이야기가 있나 본데, 나는 산책이나 다녀와야겠다.”
검성은 피식 웃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현암도장은 사부가 사라진 방향을 흘긋 보고는 방으로 들어와 하현의 앞에 털썩 앉았다.
“자네가 대단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군.”
“운이 좋았고, 시기가 좋았을 뿐이에요. 검룡 소협이었어도 언젠가는 알아냈을 일입니다.”
“하하. 그러면 나는 지금껏 운이 없고, 시기가 나빴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야. 내가 볼 때는 자네의 자질이 아니었다면 이것을 알아낼 수도 없었어.”
그는 목이 말랐는지, 검성이 마시다가 두고 간 찻잔의 차를 후룩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훗날 무당의 장문인이 되고 싶네.”
“멋진 목표로군요.”
“아마 태극혜검을 복원해낸다면 그 목표에 한결 더 가까워지겠지.”
그는 하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태극혜검의 복원을 도와주겠나?”
그 눈빛은 이글거린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현암 도장의 사부인 검성의 평생의 목표였으며, 동시에 그의 목표이기도 했다.
하현은 조금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되겠는가? 내 이렇게 부탁……하지.”
검룡은 말끝을 조금 흐렸다.
부탁한다는 말이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말을 하는 것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그 부탁의 내용이 문제다.
태극혜검의 복원을 도와달라는 이야기는 결국 하현이 깨달은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소리와 일맥상통했다.
비급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반대하며 소리쳤던 그였기에, 자기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좋아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어렵지 않다니?”
“천천히 말할 테니 모두 외우세요.”
“무엇을 말한다고?”
“구결이에요. 조금 전 제가 느낀 점을 구결로 풀어서 말씀해 드릴 테니, 잘 외우셨다가 조금씩 풀어가세요. 당연히 완벽하지는 않을 겁니다. 빠진 부분을 채워내는 것도 소협이 앞으로 해나갈 과제일 수도 있겠죠.”
현암 도장은 입을 딱 벌리고서 닫을 줄을 몰랐다.
검흔을 보고서 태극혜검 복원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도 대단했는데, 그것을 곧바로 구결로 엮어낸다니.
천재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일 줄이야.
“시작합니다. 잘 들으세요…….”
하현은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현암은 대답도 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그 구결을 외워나갔다.
그 말소리는 한참이나 울려 퍼졌다.
* * *
“달포 뒤까지는 사부님을 모시고 남궁세가로 가도록 하지.”
“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부탁은 무슨. 자네가 준 실마리가 아니었다면 평생 나는 허튼짓만 할 뻔했지 않은가.”
하현과 그의 일행은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을 챙겨 검성의 봉우리에서 내려갈 채비를 마쳤다.
그들의 배웅은 검성과 현무 도장 단둘이었다.
“하현 소협. 오랜만에 봐서 정말 좋았소. 너무 짧아서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열심히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이번에 확실히 알았소.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협을 따라가긴 힘들 것 같다는 것을.”
“왜 그렇게 단정 지으세요. 현무 도장의 자질도 뛰어나 보이는데.”
“말이라도 고맙소! 그나저나…… 사형은 정말 안 나올 생각이신가?”
하현과 인사를 나눈 현무가 전각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던 검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심마(心魔)에 든 게지. 자네의 자질에 큰 충격을 받아서 말이야.”
그는 걱정스러운 눈을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현암은 태어난 직후부터 계속 천고의 기재라며 떠받들어졌네. 심지어는 용봉지회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서인지, 검룡이라는 거창한 별호를 받아왔고 말이야.”
“그런 분이 어째서 심마에 드셨을까요.”
“태어나 처음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난 기분이겠지.”
“세상에 넘을 수 없는 벽은 없어요.”
검성은 하현의 말에 빙긋 웃었다.
하현의 사고방식이 굉장히 건강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검룡 소협과는 연이 깊은데, 떠날 때 보지 못하니 조금은 아쉽군요.”
“날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죠. 검룡 소협과는 앞으로 무림에서 계속 마주칠 테니까요.”
하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무당파의 본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당파를 떠나기 전 장문인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는가?”
“이제 섬서로 올라갈 생각입니다.”
“화산이나 종남으로 가겠군.”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며 산을 내려가는 도중이었다.
꼭대기부터 누군가 빠르게 산을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현, 조금 더 쉬다가 가지 않고 왜 이리 빨리 내려가는 것이야?”
“검룡 소협!”
현암도장이었다.
어찌나 급히 내려왔는지, 그가 쓰고 있던 도관이 흐트러져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이대로 인사도 못 하고 보냈다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거야. 사부님. 여기부터는 제가 하현 소협을 모시겠습니다.”
“그러면 같이 내려가자. 나도 장문인께 남궁세가에 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려야 하니.”
“알겠습니다.”
비록 그보다 사제이지만, 장문인의 예는 꼬박꼬박 다하는 검성이었다.
“까먹기 전에 미리 주겠네. 받으시게.”
검룡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하현에게 건네주었다.
이전에 받아본 적 있는 검정색의 단약. 미청단이었다.
그는 하현뿐만 아니라 운후와 진유강, 류이영에게까지 미청단을 하나씩 건네었다.
“받아주시게. 내 마음이니.”
“이렇게나 많이 주시다니…….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사부님 서랍에 많거든. 그걸 좀 가져왔지.”
검성이 눈에 불을 켜고 검룡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러면 왜 내 것을 가지고, 네가 생색을 내느냐?”
“제가 언제 생색을 냈습니까? 그냥 나눠준 것을 가지고.”
“에잇. 현암이 나눠준 미청단을 다시 내놓아라. 내가 다시 나누어 줄 터이니.”
“사부님. 쩨쩨하게 그러시깁니까?”
“쩨쩨하기는! 내가 그걸 어떻게 모아놓은 건데!”
그들은 산을 내려가는 동안 내내 투닥거렸다.
하현은 사제 간의 이런 분위기도 굉장히 좋다고 느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