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으아악!”
어두컴컴한 방에 누워있던 한 남자가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종남파의 후기지수인 운명학이었다.
“여기는…… 내 방이잖아?”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금방 이곳이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까 분명히 하현이라는 놈과 대련을 했고……. 졌구나.”
그는 금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현과 대련하던 그는 제대로 공격 몇 번 해보지도 못하고, 하현의 검면에 얼굴을 맞아 기절하고 말았었다.
하현에게 맞은 뺨이 아직도 얼얼하다.
동경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얼굴에는 시퍼런 멍이 든 것 같다.
“그렇게 손쉽게 지다니. 말도 안 돼. 그리고 놈이 썼던 그 수법은 분명히…….”
저절로 말문이 막힌다.
하현은 그가 평생을 공부했던 중검의 묘리를 단숨에 뺏어가 버렸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바람? 바람이라고?”
바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운명학은 자신이 기절하기 바로 직전, 깨달음이 오려 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가 사용하는 검법은 유유무극검(幽幽無極劍)이다.
사실 이 검법은 엄밀히 말하자면 중검만을 위한 검법은 아니었다.
‘기운으로 검을 움직여 검을 가볍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검법이지.’
어릴 적 운명학은 우연한 기회에 이 검법을 알게 되었고, 검을 가볍게 만드는 검법의 특성을 활용해 대검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유유무극검을 익히고, 사용하기 전까지 유유무극검은 종남파에서 사장된 검법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지금까지 그 누구도 유유무극검을 제대로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운을 이용해 검을 통제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내공을 다루는 감각과 기감이 엄청나게 뛰어나지 않다면 검이 제멋대로 튀어 나가 제어할 수 없다.
‘나도 결국 보통 검을 쓰는 걸 포기 했었는데…….’
귀찮은 것을 정말 싫어하고,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은 더더욱 싫어하는 그가 대검을 쓰게 된 연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유유무극검의 원리를 이용하여 기운을 운용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일반적인 검을 쓰기에는 기운이 너무나도 제멋대로였다.
그 제멋대로인 기운을 어떻게든 통제하고자 생각해낸 방법이 바로 검의 무게를 늘리는 것이다.
기운을 통제할 수 있는 무게를 조금씩 늘리다 보니, 이렇게 큰 대검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 번에……. 직접 봤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고.’
만약 그가 직접 보지 않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로 들었다면 절대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유무극검을 운용하는 자신이 그토록 바랬던 경지를 하현은 보통의 검으로 몇 번 휘두르더니 도달했다.
너무나도 큰 재능의 차이에 질투라는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는 정신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든 타격이 얼마나 셌는지, 일어나고 보니 목과 얼굴을 물론 머리까지 띵 하고 울렸다.
하지만, 그는 구석에 세워져 있는 그의 중검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연무장이다.
“바람…… 바람…….”
그는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바람이라는 말만을 중얼거리며 무거운 검을 땅에 끌지도 않고 걸어갔다.
열 살도 되기 전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고서 벌써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지금처럼 검을 휘두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후우-.”
이윽고 연무장에 도착한 그는 달빛 아래서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까 하현과 비무할 때 깨달았던 그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떠올리고자 했지만, 한 번 지나쳐버린 깨달음은 쉬이 다시 오지 않았다.
‘난 지금까지 내공에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하현은 검을 움직이는 그 기운을 바람이라고 칭했다.
바람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피부로 느껴지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등 분명히 실존한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공은 실체가 있는 힘이야. 그러니까 내공만으로도 검을 움직이지.’
그는 새삼 검을 처음 잡던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가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우우웅-
일부러 검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기운이 따라 올라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항상 검을 들기 싫어 마지못해 들곤 했는데, 지금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검을 들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검을 떠받친다는 생각으로.’
부웅!
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런데 그 느낌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하현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검은 억지로 검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이 생명이라도 가진 듯 저절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운명학은 지금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수년간 그를 괴롭히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아……!”
운명학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라고 해서 처음부터 이렇게 게으르고, 모든 것이 무료하던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그도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무공이 발전하지 못하여 종남파의 과도한 기대가 부담으로 다가오기 전까지는.
부웅- 후웅-!
그는 그 뒤로도 수십, 수백 번이나 검을 더 휘둘렀다.
한참 동안 전력을 다해서 검을 휘둘렀는지, 어느새 온몸에는 땀이 흥건했다.
내공이 모두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나서 그는 연무장에 벌렁 누워버렸다.
“허억, 허억…….”
어찌나 힘들게 검을 휘둘렀는지 그는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온 힘을 다 써서 수련해본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는 슬그머니 웃음이 떠올랐다.
기분 좋게 힘을 다 빼서인지, 갑자기 하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후후……. 하현이라는 놈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이제는 네 대장인데, 놈이라는 말은 좀 그렇지 않아?”
“……?!”
운명학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무장 구석에서 한 사람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달빛에 비친 시리도록 잘생긴 저 얼굴. 하현이었다.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지?”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가 먼저 여기에 와 있었어. 나중에 온 건 너야.”
“뭐라고?”
“야간 수련을 하려는데, 종남파의 허락을 받진 않아서 인기척이 들리기에 몸을 숨기긴 했어. 끝까지 눈치를 못 챌지는 몰랐지만.”
하현이 씨익 웃으며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그는 어느새 운명학을 하대하고 있었다.
“지는 사람이 부하라고? 그게 진심이었어?”
“무인이 한 입 가지고 두말하기야? 아까 얘기를 들은 사람이 많아. 만약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번 일을 종남파뿐만 아니라, 내가 가는 어디에든 퍼트리고 다닐 거야. 용봉지회에서의 활약으로 종남파의 운명학은 유명하다지?”
운명학이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하현의 말대로 약속을 해버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힘으로도 하현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 알겠다. 나를 부하 삼아라.”
“삼아라? 말이 짧다?”
“삼……으세요.”
그는 말을 내뱉고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자연스럽게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낮에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을.’
종남파 장문인 설수황은 항상 그에게 말했다.
언젠간 임자를 제대로 만날 수도 있으니, 평소에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인제 와서 그 말을 들을 걸이라고 뼈저리게 후회해도 아무 소용 없다.
“조금 전에 검을 휘두르는 걸 봤는데, 아직도 기운을 쓰는 게 조금 어색해. 물론 지금까지 해온 습관이 있겠지만, 네 재능이라면 금방 고칠 수 있을 거야.”
“어색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자연스럽게 한 거 같은데.”
“그러니까……. 아니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나을 거 같아.”
하현은 자연스럽게 조금 전 운명학이 땅에 눕혀놓은 대검에 손을 가져갔다.
운명학은 자신의 애검에 하현이 손을 대자 움찔했지만, 강하게 거부하지는 않았다.
타인이 자신의 검을 집는 것보다 새로운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더 큰 까닭이었다.
척-
하현은 운명학의 대검을 아주 가볍게 들었다.
“무게가 상당한데? 이런 검이라면 나도 들고 다니기 쉽지 않겠어. 이 수법을 종남파에서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검법을 하려고 하면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을 거야. 그러다 보니 통제를 쉽게 하려고 검의 무게를 점점 늘렸을 거고…….”
부웅- 와앙-
하현은 검을 몇 번 휘둘러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다 검을 통제하기에 적당한 무게를 찾았고, 그게 이 검이겠지.”
운명학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의 말은 조목조목 틀린 말이 없었다.
마치 그를 오래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했다.
“이것 봐. 지금 너는 기운을 이런 식으로 쓰는 거야.”
하현은 운명학이 하던 것을 최대한 따라 하며 검을 휘둘렀다.
기운의 실체를 느낀 것까지는 아주 좋았으나, 그 운용이 서툴러 툭툭 끊기는 느낌이었다.
운명학도 자신이 할 때는 몰랐으나, 하현이 보여주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하는 걸 잘 봐. 내가 굳이 바람이라고 한 이유가 이거야.”
이번엔 하현이 스스로 깨달은 그대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우웅- 와아앙!
조금 전보다 훨씬 힘을 주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검이 움직이는 속도나 예리함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유유무극검은 오랜 시간 익힌 자가 없던 검법이기에 그는 다른 사람이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하현이 하루아침에 유유무극검을 그에게 선보인 것이다.
심지어는 유유무극검이라는 검법의 이름 자체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는 놀라면서도 하현의 검이 멈출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 그는 하현의 검법을 보며 실시간으로 깨달음을 얻어가는 중이었다.
“후우-. 잘 봤어?”
하현도 꽤 열심히 했는지, 숨을 몰아쉬고는 물었다.
“잘…… 봤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운명학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무인에게 무공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작은 깨달음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 무인들도 많다.
지금 그는 하현이 스승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현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내가 뭘 하면 될까요? 종남을 떠나야 하나요?”
“아니? 종남파를 왜 떠나?”
“이제 부하가 됐는데, 같이 다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나는 네가 종남에 계속 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운명학이 고개를 갸웃했다.
같이 다니지 않을 거라면 굳이 왜 부하를 삼는다는 것인지 이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현도 그 표정을 알아챘는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에 종남에 있으면서 해줬으면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어.”
“종남에서……? 혹시 몰라서 말하는데, 무공을 빼돌리거나 종남에 해가 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겁니다.”
운명학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아무리 하현이 무공광이라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선은 있었다.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잘 들어. 첫 번째. 내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비밀로 할 것.”
“비밀로 하라고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비밀로 하라는 거에요?”
“전부 다. 내가 네 무공을 한 번 보고 따라 한 것도 그렇고, 그걸 넘어서 너에게 이 검법의 운용법을 보여준 것도 그렇고.”
“도대체 왜요? 나 같으면 여기저기에 소문을 내고 다닐 것 같은데.”
“너무 많은 관심은 독이야. 나는 지금 정도가 딱 좋아.”
운명학은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은 알겠노라 대답했다.
“그러면 두 번째 명령은 뭡니까?”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거지.”
“도대체 무엇이기에…….”
“매일 열심히 수련할 것, 그래서 언젠간 종남파의 장문인이 되었으면 좋겠어.”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