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철매화(鐵梅花) 유민민.
그녀는 여류 고수로서는 처음으로 무림맹주의 자리에 올랐었으며, 또 처음으로 구파의 장문인 자리까지 오른 무인이다.
그녀는 회의실에서 수많은 장로들이 올린 보고서를 읽으며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에효……. 이 짓은 언제까지 해야 하지.’
하지만, 그녀는 이런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복잡한 서류와 그것보다 더 복잡한 정치관계, 그리고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을 왔다 갔다 하게 할 수 있는 명령권도 그녀에게는 항상 하루하루가 부담이었다.
물론 그녀의 호불호를 떠나서 능력 자체로만 따지면 그녀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정파는 수백 개 이상의 문파를 합쳐 정파라고 부른다.
군소방파까지 합하면 천 개의 문파는 족히 될 수도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물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그 중심을 잡아준다고는 하지만, 사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사이에서도 알력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민민이 무림맹주로 있던 때는 문파 간의 갈등이 거의 없었다.
많은 무인은 그게 다 유민민의 천부적인 정치 감각 덕분이라고 소리 높여 칭송하곤 했다.
‘난 그냥 귀찮은 말싸움이 싫었을 뿐인데.’
하지만, 그것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그녀는 문파에 틀어박혀 서류작업이나 하고, 명령이나 내리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무인이다.
나이가 환갑을 갓 지났다고는 하지만, 무인에게 있어 환갑이라는 나이는 아직 한창때다.
하지만, 그녀는 직접 검을 든 것이 언제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혹시라도 전쟁에서 무림맹주가 사망하게 되면 정파 전체에 큰 혼란이 올 것을 방지함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화산파의 장문인이다.
직접 검을 들고 나서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똑똑-
그녀가 한창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문인. 지금 많이 바쁘십니까?”
“아니. 무슨 일이야?”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나 일할 때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그랬잖아.”
“그게 검존 어르신의 서신을 가지고 온 자여서…….”
평소 유민민은 서류작업이라던가, 회의하고 있을 때 그것을 방해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할 말이 있거나 손님이 오거든 해가 지고 나서 전달해 달라고 그의 부하들에게 신신당부해 놓았었다.
하지만 그것에도 예외는 있었으니, 검존, 취월걸개, 주원대사 등등과 같은 전대 고수들과 관련된 일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우선순위로 하라는 것이었다.
“검존 어르신께서? 누구를 보냈는데 그래? 당장 모셔 와.”
“알겠습니다.”
유민민은 그중에서도 검존을 가장 좋아하고 따랐다.
그녀 역시 검을 쓰는 무인으로서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고, 다른 전대 고수들과는 다르게 그 인품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다른 전대 고수들과는 달리 그의 스승인 화산제일검 단목성은 외부 활동을 잘 하지 않아 다른 무인들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는데, 유일하게 남궁무룡과만 막역하게 지내기도 했다.
“누가 왔으려나? 남궁기현은 이제 서신을 전달할 시기는 진작 지났고, 혹시 민이가 왔으려나? 그 잘생긴 얼굴 오랜만에 보겠네?”
그녀는 무림맹에서 남궁민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환갑의 나이라고는 하지만, 그녀 역시 여인이다.
남궁민의 조각과도 같은 외모를 싫어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외견만을 본다면 삼십 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이기도 했다.
“장문인. 들여보내겠습니다.”
“응. 어서 들여보내.”
드르륵-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그녀가 기대하던 남궁민은 아니었다.
그는 사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고, 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생겼어……!’
남궁민의 잘생김과는 그 느낌이 조금 달랐다. 남궁민이 선이 굵은 조각 같은 외모라면 지금 들어온 아이는 머리가 길면 여인이라고 믿을 수도 있을 정도로 여리한 얼굴선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반해 몸은 잘 단련되어 있어 이질적인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저 맑고 깊은 눈.
그녀는 저 눈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저 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할 수 있었다.
‘남궁영령?’
남궁세가에서 왔다는 말을 미리 듣지 못했다면 기억할 수 없었겠지만, 이미 알고 있었기에 떠올릴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내의 눈은 독심미화 남궁영령의 그것을 빼다 박았다.
“혹시…… 남궁하현?”
“아! 제가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남궁세가에서 온 남궁하현입니다.”
“역시. 검존 어르신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유민민이라고 해요.”
“네. 저도 할아버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유민민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하현을 유심히 살폈다.
‘검존 어르신께서 이례적으로 천고의 기재라고 그렇게 자랑하셨는데, 취월걸개 어르신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녀는 잠시 취월걸개가 무림맹에서 하현의 자랑을 얼마나 많이 했었는지는 상기하고는 다시 하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특별한 무언가가 보이지는 않는데? 겉으로 흘러나오는 기도만 봐서는 우리 일대 제자들이랑 비슷한 정도……? 혹시 나한테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기도를 갈무리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아무리 뛰어난 자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상식선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요. 무슨 일로 온 건가요? 검존 어르신이 직접 보내셨다면 보통 일은 아닐 텐데.”
“제 설명을 들으시기보다는 이 서신을 보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하현은 공손하게 서신을 건넸고, 유민민은 재빠르게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그녀는 서신을 보고서는 빙긋 미소 지었다.
“마교의 삼대 가문 중에 또 한 군데를 박살 낼 수 있는 기회네요. 이런 일에 우리 화산이 빠질 수는 없죠. 제 사부님과 사숙들을 꼭 설득해서 보내 볼게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남궁세가도 돌아가는 건가요?”
“아니요. 한 군데를 더 들를 곳이 있어서 그곳에 들렀다가 집으로 되돌아갈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공동파에 갑니다.”
“아, 감숙성은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요.”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진유강과의 일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기에 부연해 설명하지는 않았다.
“곧바로 떠날 생각인가요?”
“네.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면 모르지만, 일단은 임무부터 수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유민민은 아주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저 잘생긴 후기지수를 이대로 보내기는 영 아쉬웠기 때문이다.
잘생겨서 아쉬운 것은 아니고, 그녀가 검존과 취월걸개에게 지금까지 받아온 은혜와 호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천고의 기재라는 후기지수에게 나도 은혜를 베풀어 볼까?’
그녀는 속으로 빙긋 웃고는 하현에게 말했다.
“만약 시간이 그리 촉박하지 않다면 제 사부님을 만나보실래요?”
“사부님이라면……. 화산제일검 단목성 대협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무표정에 가깝던 하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유민민은 그 미소에 봄바람이 일 듯 훈훈함을 느꼈다.
“제가 뵙고 싶다고 해서 바로 뵐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도 일정이 있으실 터인데요.”
“일정? 하하.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사부님이 온종일 하시는 거라고 해봐야 하늘에 구름을 바라보고, 강아지 밥이나 주고 하는 게 전부니까요.”
“강아지 밥이요……? 그리고 은거하셨으면 깊은 산 속에 있으시거나 하시진 않으시고요?”
하현은 바로 전에 들렀던 종남파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종남파의 종남귀검은 종남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여서 설수황이 모든 무인을 풀어 그를 찾아 나서기까지 했다.
“우리 사부님은 다른 어르신들처럼 자연 속으로 은거하시거나 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냥 화산파에 계세요.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시면서요.”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하현은 화산제일검에 대해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할아버지에게 듣기로 그는 말이 없고 과묵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게다가 화산파 밖을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앞으로 나서는 법이 없어 친우를 사귀기 힘들었다고 하셨다.
‘취월걸개 사부님, 주원대사님, 유엽진인 이렇게 세 분은 서로 잘 싸우기도 했지만, 죽이 잘 맞아서 곧장 어울려 다녔고, 홀로 동떨어져 있는 화산제일검 대협을 할아버지께서 자주 챙기셨다고 하셨지.’
하현이 생각하는 사이, 철매화는 서류와 보고서 따위를 한쪽에 밀어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오랜만에 사부님한테 가봐야겠네요.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따라오세요.”
“네. 장문인.”
그녀는 하현을 데리고 전각을 나섰다.
하현은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기로 한 손님 응접실을 흘긋 쳐다보고는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늦으면 알아서 숙소를 찾으러 일러 놓은 터였다.
“경공으로 갈 건데, 따라올 수 있겠어요?”
“다행히 취월걸개 사부님께 잘 배워서 빠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녀는 빙긋 웃더니 땅을 박차고 하늘로 붕 튀어 올랐다.
분명히 땅을 박차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화산파의 독문신법인 암향표(暗香飄)를 극성으로 펼친 것이었다.
‘와……. 대단해. 마치 나비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하현은 그녀의 신법을 보고서 속으로 감탄했다.
암향표가 극성에 이르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더니, 유민민이 그런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하지만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야.’
통-
하현은 취월걸개의 신법을 발전시킨 그의 신법을 펼쳐 유민민을 따라갔다.
쉬이익-!
암향표처럼 조용하고 은밀한 신법은 아니지만, 그 속도라면 하현도 그녀에게 지지 않았다.
그의 스승이 누구인가? 무림에서 신법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취월걸개다.
취월걸개가 직접 전수한 신법에 하현의 영감을 섞어 발전시킨 그 신법은 그야말로 쾌속이었다.
“엇?!”
그녀가 먼저 출발했지만, 금세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하현을 보며 유민민은 조금 놀랐다.
솔직히 말해 하현의 실력을 보고자 일부러 조금 빠르게 달린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와 이렇게 동등하게 달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취월걸개 어르신의 신법 덕인가?’
하현의 무공 수준을 파악하지 못한 까닭에, 그녀는 하현의 신법이 특별한 것으로 판단했다.
‘아니야. 혹시……?’
그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발바닥 용천혈에 기운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양발로 바닥을 쭉 밀어냈다.
부웅-!
그녀의 발에서 뿜어나온 그 기운은 그녀의 몸을 그대로 죽 밀어냈다.
그 순간, 그녀의 신형은 폭발적인 속도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이 역시 화산의 독문신법인 부운약표(浮雲躍飄)를 응용한 수법이었다.
암향표가 은밀함에 치중한 신법이라면, 부운약표는 순간적인 속도에 치중한 신법인 것이다.
어찌나 빨리 달렸는지, 바람은 살갗을 찢을 듯 그녀의 얼굴을 스쳐 간다.
그 속도에 적응이 될 때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는데…….
‘역시 없어. 아직 어린 애한테 너무했나?’
그녀의 시선에는 하현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너무 흥분했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연장자로서, 그리고 무림의 대선배로서 순간 부끄러운 마음마저 일었다.
“두 가지 신법을 쓰시는데도 그렇게 자연스럽다니. 수련을 얼마나 하시면 그렇게 될 수 있죠?”
“어엇?! 언제 여기에?”
그녀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소리를 치고 말았다.
하현은 그녀의 바로 옆에 있었다.
유민민이 뒤를 돌아볼 때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하현은 그녀의 오른쪽에 있었기에 뒤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부터 같이 따라왔는데요?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요.”
지금도 빠른 속도로 달리는 도중인데, 하현의 어투는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아직도 여유가 있다는 방증이었다.
‘내가 잘못 봤다는 거야? 신법만일 수는 있지만……. 이런 수준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안목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온 것 아니에요? 화산제일검 대협께서는 화산파 안에 계신다고 했는데, 여기는 이미 화산파를 벗어난 것 같아서요.”
“어……?”
유민민은 창피함에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하현의 말대로 그녀는 신법에 열중한 나머지 화산을 벗어나고 말았다.
‘쪽팔려…….’
평소 철두철미하고 냉정하기로 유명해서 별호에도 ‘철(鐵)’이 들어가는 그녀이건만, 벌써 하현의 앞에서 몇 번의 실수를 하는 그녀였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