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275화 (275/304)

275화

철매화 유민민은 하현을 데리고 다시 화산파 안으로 들어갔다.

경공을 펼치기는 했지만, 조금 전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이제는 하현을 시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아이를 시험하려면 내 전력을 다해야 할지도 모르고.’

취월걸개가 언제나 과장되고 매사에 진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박하고 진중한 그다.

심지어는 그의 방파인 개방에도 맘에 드는 인재가 없다며 평생 제자도 들이지 않았었다.

‘취월걸개 어르신께서 틈만 나면 이 아이의 이야기를 하던 이유가 있었어.’

그녀가 무림맹주로 재임하던 시절 취월걸개는 언제나 하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때는 느지막이 들인 제자가 너무나도 귀여워 팔불출이 된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완벽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자질을 가지고 있는 아이인데, 보고 싶지 않을 리 없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미소 지었다.

하현보다 앞서 걸어서 그 얼굴이 보이지 않게 했지만 말이다.

“자. 여기야. 여기에 내 사부님이 계셔.”

“그렇군요.”

유민민은 하현은 어느 초가집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녀는 어느새 하현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조금 전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 때 얼버무리며 말을 놓아도 되겠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이가 수십 살이나 차이 나고, 무림 배분도 몇 배분이나 차이가 나는데 하현이 그 말을 거부할 리는 없었다.

“기운이……. 여기까지 느껴지네요.”

“뭐가 느껴져?”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한지 모르겠어요.”

“익숙하다니. 무슨 기운이 익숙하다는 거야?”

유민민은 하현에게 되물었지만, 하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느끼는 이 익숙한 기운이 어디에서 익혔는지 떠올리고 있는 까닭이다.

‘내가 화산의 고수를 만난 적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화산파의 무인을 만난 기억은 없다.

그런데 초가집에서 느껴오는 저 기운은 분명히 익숙하다.

하현은 결국 고민하기를 그만두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계속 고민하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화산제일검께서는 이 안에 계시는 거죠?”

“그런 것 같아. 네가 기감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취월걸개 어르신께 들었어. 네가 느낀 게 사부님의 기운인 것 같은데……. 일단 들어가 보자.”

“감사합니다. 장문인.”

유민민은 하현을 데리고 초가집 앞까지 걸어갔다.

하현이 느껴진다고 했던 특별한 기운에서 그녀는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긴 했다.

‘설마. 자하신공(紫霞神功)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자하신공.

한때는 화산의 유구한 역사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심법이었으나, 지금은 익히고 있는 자가 몇 되지 않는 화산의 신공이다.

원래라면 장문인에게 전수되어야 하는 신공이건만, 유민민 그녀는 또 다른 화산의 비전심법인 옥함신공(玉函神功)을 극성으로 익혔기에 자하신공을 익히지 않았다.

‘만약 자하신공을 느낀 게 맞다고 하더라도, 그걸 이 아이가 어찌 아는 거지?’

그녀는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을 멈추고 초가집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어차피 사부님이 나오면 알게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사부님. 저 민민이에요. 사부님?”

“…….”

유민민이 목소리에 내공을 조금 담아 초가집을 향해 말했지만,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부님. 안에 계신 거 다 알아요. 검존 어르신의 손자를 데리고 왔어요.”

“……무룡이의 손자?”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는 일이 없는 하현도 조금은 놀랐다.

마치 전설 속에서나 내려온다는 혜광심어(慧光心語)처럼 뜻 자체가 들려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끼이익-

낡은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흰 머리 하나 없이 빽빽한 흑발을 가진 중년인의 외견을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깡마른 몸과 커다란 눈은 평소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런데 하현의 눈에는 그의 외견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기운이…….’

하현은 하마터면 화산제일검 단목성의 앞에서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코를 막는 결례를 범할 뻔했다.

그는 아직 태어나서 매화를 본 적도 없고, 그 향기를 맡아본 적도 없다.

하지만, 지금 그의 코에 물씬 풍기는 이 꽃향기가 매화 향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산제일검을 뵙습니다.”

“자네는 혹시……?”

“남궁세가의 남궁하현입니다.”

“아! 하현!”

그는 하현의 이름을 말하며 탄식했다.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듯한 눈치였다.

“내 유일한 친우에게 자네의 이야기를 들었지.”

스슥-!

단목성의 신형이 별안간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하현마저도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신속한 신법이다.

파앗-!

단목성은 하현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신법의 수준이 이 세상의 신법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형환위가 전설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다.

하지만, 하현은 그가 다시 나타난 순간 그가 펼친 수법을 이해해내었다.

‘암향표에 부운약표를 동시에 펼쳤어. 그것도 화산파 장문인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수준으로.’

조금 전 유민민이 몸소 두 가지의 신법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하현이라도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지만, 친절하게 모두 보여준 다음이다.

그녀가 이런 하현의 속을 알 리는 없지만, 하현은 그사이에 유민민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그래. 하현아. 한 번 얼굴을 보여주겠느냐?”

하현의 바로 앞에 나타난 단목성은 하현의 양어깨를 잡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는 단목성의 표정이 복잡하다.

아주 잠시동안 하현의 얼굴을 살피던 그는 갑자기 하현을 와락- 안아버렸다.

“어엇?!”

그의 돌발행동에 놀란 것은 유민민이었다.

지금껏 그녀의 스승이 저리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던 까닭이다.

“정말 고생이 많았다. 큰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이리도 단단해지다니, 네 존재 자체가 우리 정파 무인들의 홍복이다.”

“…….”

하현은 말없이 그에게 안겨 있었다.

단목성은 할아버지나 도제 팽길산처럼 넓은 가슴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굉장히 포근하다 느껴졌다.

“영령을 닮았다더니, 그 눈은 정말 빼다 박았구나. 처음 너를 보았을 때, 어린 영령이가 남장하고 나타난 줄 알았다.”

“저도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그래. 그간 정말 고생이 많았다.”

단목성은 하현의 등을 조금 더 토닥이다가 포옹을 풀어주었다.

심지어 그의 눈시울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하현은 그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이에게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건만, 그것 역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의 흔적을 찾은 기분에 기꺼운 마음마저 일었다.

“그래. 일단 들어오너라. 너무 오래 세워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그는 하현의 등을 쓸어내리며 문을 열어둔 초가집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유민민 역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초가집 안에 들어온 하현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방에는 작은 상 하나만 있을 뿐,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늙은이가 혼자 지내는 곳이다 보니 심심할 걸세. 조부께 차는 배웠나?”

“다도를 조금 배우긴 했지만, 제가 우둔해서 많이 배우진 못했습니다.”

“하하! 맛이 없으니 먹기 싫은 건 아니고? 자네 조부는 쓴맛이 나는 차를 좋아하니 말이야.”

“알고 계시는군요.”

하현과 단목성은 작게 웃었다.

같은 인물이나 기억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만큼 좋은 대화 수단은 없었다.

“자. 이걸 마셔보게. 다 식기는 했지만, 오늘 아침에 내가 내려놓은 것이니.”

그는 하현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차에서는 조금 전 하현이 느낀 그 향기가 물씬 풍겨온다.

“매화차인가요?”

“맞네. 한 번에 알다니 먹어본 적이 있는 건가?”

“아니요. 화산제일검께 느껴지는 기운과 그 향기가 거의 비슷해서 여쭤봤습니다.”

“내 기운과 비슷해?”

단목성이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기운에서 매화 향기를 느낄 정도면 기감이 얼마나 뛰어나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 표정은 금방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남궁무룡에게 하현이 얼마나 뛰어난 자질을 가졌는지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이 차는 맛있네요. 제가 지금까지 마셔본 차 중에서 제일 맛있는데요?”

단목성이 따라준 매화차를 호록 마신 하현의 얼굴에 화색이 깃든다.

하현이 지금까지 마셔본 차 중에 제일 좋아하는 차는 백호은침이다.

백호은침은 은은한 단맛이 돌기 때문인데, 지금 그가 마시는 매화차는 단맛이 가득했다.

“그런가? 맛있을 수밖에 없지. 하하하.”

단목성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웃는 연유를 몰라 하현이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유민민이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안을 보여주며 말했다.

“에효. 이것 봐. 여기 붉은 건 매화꽃이고, 아래에 갈색 뿌리 보이지? 그게 다 감초야. 이건 매화차가 아니라 매화 향 나는 감초차라고 봐야지.”

“아, 그래서 이렇게 단 거네요.”

“사부님은 연세가 저렇게 많으신데도, 입맛은 꼭 아이 입맛이셔.”

하현은 단목성에게 의외의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쩐지 그가 나이를 먹는다고 쓴 차가 맛있어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온 건가? 그냥 나를 한번 보고 싶어서 왔을 리는 없고.”

“이걸 한 번 읽어 보시겠어요?”

유민민은 하현에게서 받은 서신을 단목성에게 건넸고, 그는 순식간에 모두 읽었다.

“허허……. 내가 무림을 떠난 지가 벌써 십수 년째인데.”

“부탁드리는 것뿐입니다. 내키지 않으시면 참여하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래. 이건 생각을 좀 해보겠네. 혹시 몰라 하는 말인데,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고 너무 서운해하지는 말게나.”

“전혀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하현은 빙긋 웃었다.

그가 하는 말은 진심이었다.

하현은 이곳에서 잠시 단목성과 대화하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느껴지는 듯했다.

‘본인의 마음이 일어야 움직이실 분이야. 세상에 불편한 것은 피하며 사시다 보니 친우를 만들기가 어려우셨겠지. 타인과 살을 부대끼며 사는 것은 불편한 것 천지니까.’

그렇기에 더욱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때 유민민이 말을 꺼냈다.

초가집에 들어오기 전 하현이 했던 말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현아. 너 사부님의 기운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말하지 않았어?”

“아. 그랬었죠.”

“지금은 그 익숙한 기운이 뭔지 알겠어?”

하현의 미간이 약간 좁혀지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모르겠네요. 제가 비슷한 무공과 착각하고 있나 봐요.”

유민민과 하현의 대화가 재밌어 보였는지, 단목성이 유민민을 보며 물었다.

“익숙하다니. 하현이가 내 기운을 익숙하다고 했다고?”

“네. 처음 사부님의 처소에 오자마자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래? 무슨 기운과 익숙하다는 것이야?”

하현을 보며 단목성이 말했지만, 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화산의 무인을 만나 뵙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이 느낌은 분명히 제가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긴 합니다. 무언가 원리가 비슷한 무공 때문에 헷갈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현의 말에 단목성이 유민민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민민아……. 설마 ‘그자’는 아니겠지?”

“설마요. 사부님. 여태까지 무림에 나타나지 않을 것을 보면 어디선가 비명횡사했을 거예요.”

“그래도 아주 혹시, 혹시 그럴 수도 있지 않으냐?”

갑자기 둘은 하현이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현은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잠자코 있었다.

단목성은 무언가를 다짐한 얼굴이더니, 유민민에게 말했다.

“민민아. 혹시 모르니, 하현이에게 자하신공을 한 번 보여줄까 싶은데……. 괜찮겠느냐?”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사부님께서 하시고 싶으시면 하시는 거죠.”

단목성은 하현을 흘긋 보더니 말했다.

“저 아이에게 이걸 보여준다는 건, 자하신공을 가르쳐 주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그랬다. 그래서 화산의 장문인에게 미리 허락받는 것이지.”

“한 번 보여주는 것만으로 자하신공을 익힐 수도 있다고요? 말도 안 돼요.”

유민민은 단목성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하현을 돌아보았다.

딸꾹-

그런데, 하현은 그만 깜짝 놀랐는지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그의 표정에, 그리고 그 행동에 유민민도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하현의 자질이 하늘에 닿아 있음을.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