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하현은 순간 놀람을 숨기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의 자질을 이렇게 한번에 꿰뚫어 본 것은 단목성이 처음이다.
“할아버지께 들으셨나요?”
“무룡과 막역한 사이이긴 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하지는 않는다네. 그리고, 사실 확신은 없었지. 자네의 반응이 대답해주긴 했지만.”
“아……!”
하현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일종의 유도신문에 넘어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에 조금 놀람이 스쳤다.
‘지금까지 한 번에 알아본 사람은 없었는데.’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고수들은 하현의 이런 재능을 꿰뚫어 보지는 못했었다.
“사부님. 그런데도 자하신공을 보여주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내 유일한 친우의 손자다. 이 정도 선물은 줘도 되겠지. 그리고 나의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아이는 욕심이 굉장히 많은 아이야.”
단목성은 하현을 보고서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욕심이 많은 아이는 절대로 자신의 무공을 남에게 허투루 나누지는 않거든. 그렇지?”
하현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절대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을 것이지? 라며 당부를 하는 것 같았다.
“어휴……. 알았어요. 어차피 하현이 느꼈다는 그 익숙함이 혹시나 ‘그자’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검존 어르신께는 도움을 받은 것도 많고요.”
“그래. 흔쾌히 허락해 주어 고맙구나.”
말을 마친 단목성은 가뿐하게 몸을 일으켜 초가집에서 나섰다.
하현과 유민민이 그를 따라나서자, 그는 마당에 심어진 매화나무로 다가가 어른 팔뚝만 한 크기의 곧은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우웅-
그리곤 손에 기운을 모아 그 나뭇가지를 쓸었다.
하현은 그의 손을 보고서는 눈이 동그래졌다.
‘수강(手罡)이다. 저토록 쉽게 수강을……?’
단목성의 손에는 보랏빛이 일렁였다.
어째서 자하신공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내공과 수강의 색이 모두 보랏빛으로 물들기에 저렇게 부르는 것이리라.
‘그런데……. 저 수강은 더 익숙한데?’
하현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가득 들이쳤다.
단목성의 손에 일렁이는 저 수강은 분명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단목성이 하현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익히고 배운 신공은 화산의 자하신공이네.”
“자하신공. 그 이름을 저도 들어 보았습니다.”
“그래.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오십 년 전. 나한테는 사형이 있었지.”
“있었다는 것은 지금은……?”
단목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화산에서 자하신공의 구결을 익히고서는 도망쳐서 지금껏 생사도 알지 못하고 있지.”
“아……. 그렇군요.”
“그리고 내 유일한 제자는 여기 있는 민민이건만, 나는 이 아이에게는 자하신공을 전수하지 않았네. 이 자하신공은 체질을 타고 나야만 익힐 수 있는데, 아쉽게도 민민이는 익힐 수 없는 체질이었거든.”
그는 애틋한 눈으로 유민민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외견이 삼십 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미 환갑에 다다른 그녀다.
허나 그의 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전대 무림맹주에 현 화산파 장문인임에도 그랬다.
“그래서 지금 무림에 자하신공을 익힌 사람은 단 두 명뿐이지. 나와 내 사형.”
“제가 그 기운에 익숙함을 느꼈다고 했으니, 그건 화산제일검이 아니시라면 사형분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시군요?”
“정확하네.”
하현은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지금 단목성은 화산의 비전심법인 자하신공을 외부인에게 유출 시켜서라도 그의 사형의 흔적을 찾고 싶은 것이다.
만약 하현이 착각한 것이라도, 무림의 미래에 도움을 주는 것이니 나쁜 것은 없다.
휘익- 휘이익-
하현과 말하는 사이 어느새 훌륭한 목검 하나를 뚝딱 완성한 단목성은 그 목검을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하지만, 그 위력만은 가볍지 않았다.
그저 휘두른 것뿐이지만, 강풍이 휘몰아치고 살갗이 에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얼마 만에 검을 드는 것이지?”
“오 년은 된 것 같아요. 사부님.”
“세월은 이리도 빠르구나. 도무지 잡을 수가 없어.”
그는 후후 웃으며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후욱-
지금까지는 몸풀기였다는 듯 단목성이 기운을 일으켰다.
순간 주변에서 매화향이 펑- 하고 터진 듯한 착각이 인다.
세상이 붉게 물든 듯하고 바람이 강하게 불지만, 신기하게도 머리칼을 흐트러뜨리진 않았다.
스윽-
단목성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시작한 자색의 기운은 손잡이를 타고 넘어가 검날에 조금씩 맺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하신공.’
같은 도가인데도 무당의 무공과는 그 궤가 전혀 다르다.
무당이 청명한 물이라면 화산은 뜨거운 불이다.
무당이 단단한 금속이라며 화산은 펄펄 끓는 용암이다.
키이이잉-!
하현은 순간 머릿속에서 바퀴 하나가 세게 굴러감을 느낌과 동시에 두통을 느꼈다.
백회혈이 뜨뜻해지다 못해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다.
무당에서 태극혜검을 만났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다.
어느 무공이 더 훌륭하냐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태극혜검을 만났을 때는 겸허한 마음으로 무당파 조사의 뜻을 받들었다면 이 자하신공은 하현을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온전한 나를 익히라는 것 같은…….’
그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큰 해일이 일었다.
하현은 그 순간 깨달았다.
자하신공을 보는 순간 왔던 이 충격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모두 그의 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난 이미 이 무공을 알고 있어. 익숙함의 기원은 나 스스로다. 도대체 내가 자하신공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그 순간 하현은 한 번 더 깨달았다.
그의 안에 있는 그 무공.
속되게 말해 언젠가 ‘훔친 적이’ 있는 바로 그 무공을.
저벅-
하현이 자기도 모르게 단목성에게 한 발자국을 다가갔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흑룡검, 등에 차고 있는 적룡검을 모두 풀어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유민민은 하현을 제지할까 하다가 평온한 단목성을 바라보고서는 그대로 두었다.
후욱-
그때 하현 역시 기운을 일깨워 온몸에 기운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세맥 하나하나를 두드려 깨우는듯한 느낌에 하현은 저도 모르게 빙긋 미소가 지어진다.
화악!
하현의 손에 붉은 안개 같은 것이 응어리지기 시작했다.
지금 하는 내공의 운용법은 일전에 한 번 성공해본 적이 있는 운용법이다.
다만 그때는 ‘장법’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선입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핵심은 이렇게 기운을 일깨우는 신공 그 자체다.
신공으로 일으켜진 기운을 검으로 펼치면 검법, 주먹으로 펼치면 권법, 장으로 펼치면 장법이다.
화르륵!
붉은 안개는 뭉치고, 뭉쳐지더니 어느새 하현이 손에 붉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예전 남궁민을 구하러 갔던 곳에서 만난 청홍쌍괴 중 홍괴가 쓰던 혈수마공이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유민민은 깜짝 놀랐는지 두 눈을 번쩍 떴다.
하마터면 하현에게 달려들 뻔했다.
하현이 펼친 무공은 자하신공과 어딘가 같았지만, 크게 달랐다.
정말 딱 익숙함을 느낄 정도.
“허어…….”
놀란 것은 단목성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하현이 그가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 했더라면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라는 마음가짐으로 펼쳐 보인 자하신공이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하현이 펼친 무공은 자하신공과 결은 비슷하나, 결국은 다른 무공이다.
하현이 지금, 이 순간 창안한 것이 아니라면 미리 익히고 있었다는 뜻이다.
슈우욱-
하현은 지금 무아의 지경에 빠진 듯했다.
단목성은 자신의 기운을 거두고 하현이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때 하현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혈수마공을 따라 하기 어려웠던 이유를.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일었기 때문이었지.’
혈수마공을 따라했을 때, 그는 처음에는 몇 번이고 실패했었다.
그 이유는 혈수마공이라는 무공이 그가 느끼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많이 드는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가 어떻게 부족한지도 모르는 느낌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헤매는 느낌.
그런데 그 부족한 부분은 조금 전 단목성의 자하신공을 보며 어디가 어떻게 부족했는지를 직감적으로 떠올렸다.
‘혹시……?’
하현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사라졌다.
유민민은 여기서 끝인가 하여 하현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려 입을 뻐끔거렸지만, 단목성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하현이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잠깐 이대로 있어 보자. 이 아이가 어디까지 하려나.
단목성의 전음에 유민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하현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홍괴의 혈수마공이 있다면 청괴에게는 청수마공이 있었어. 그 부족한 부분은 청수마공을 구성하는 부분이겠지.’
단목성의 추측처럼 하현은 지금 무아의 지경이었다.
미지의 공간에서 밀려드는 깨달음과 영감의 해일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지만, 그는 꿋꿋이 버티며 그 깨달음을 모두 몸으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화륵!
그리고 그때, 하현의 손에서 다시 한번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 불꽃이 색은 파란색이다.
눈으로 직접 본 적도 없는 청괴의 청수마공을 하현이 펼쳐낸 것이다.
지금 하현의 얼굴에는 무리라는 느낌 하나 없이 평온했다.
‘역시 이것도 가능해. 청수마공과 혈수마공은 본디 하나였던 거야. 하나의 무공을 반으로 나눈 것 같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하현은 백회혈이 너무 뜨거워 머리통이 녹아버리는 건 아닌가 싶으면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우우- 와아앙-
그때 하현의 양손에서 다시금 기운이 뻗쳐 나온다.
그런데 그 기운의 파장은 사뭇 달랐다.
한 번에 두 가지 무공을 일으키는 것은 몸에 굉장한 무리를 주지만, 하현은 거침없이 그것을 강행했다.
청수마공과 혈수마공은 같이 일으켜도 몸에 무리를 주지 않을 것 같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화륵- 화륵!
그 순간 양손에서는 불꽃이 일렁인다.
왼손에는 붉은 불꽃이, 오른손에는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하현이 집중할수록, 그 불꽃들은 점점 더 커져갔다.
양손의 불꽃들이 하현의 머리통보다 조금 더 커졌을 때.
스으윽-
하현은 옆으로 벌렸던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두 손을 맞닿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일이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두 가지의 기운을 따로 일으키면서도 움직이지 않으려 버티는 듯한 팔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움직여라아……!’
하현은 안간힘을 쓰며 힘겹게 팔을 움직였다.
어찌나 힘을 썼는지, 팔에서 뿌득뿌득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흐아아압!”
결국 소리까지 지르며 힘을 쏟아붓자 양팔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양손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하현의 이마와 목에서는 핏줄이 불거지고, 얼굴을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 무슨 상황인지도 잘 모르는 유민민이 어느새 하현을 응원하고 있을 정도였다.
텁-
그렇게 안간힘을 쓰기를 잠시.
하현은 결국 두 손을 마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절대 그 손이 풀리지 않게 하려는 듯 손가락 사이를 교차하여 깍지까지 꼈다.
“으윽!”
그 순간 온몸에 퍼져나가는 고통에 하현은 신음을 흘렸다.
그럼에도 손은 풀려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을 주어 꽈악 잡았다.
붉은 불꽃과 푸른 불꽃은 처음에는 서로를 이질적으로 느끼는 듯, 한데 뭉치지 않고 서로의 영역을 지켜가며 타오르는가 싶더니.
후와아악!
두 불꽃은 어느 순간 섞여서 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섞이고 섞이던 그 두 불꽃의 색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보랏빛.
빨강과 파랑이 만나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것이다.
“자, 자하신공!”
단목성이 놀라 크게 소리쳤다.
그가 놀란 이유는 하현이 자하신공을 펼쳐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하신공을 이미 알고 있었다니. 어떻게 알고 있던 건가?”
하현은 단목성의 자하신공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현은 이미 자하신공을 알고 있었다.
고오오오-
하현의 몸 주위로 보라색의 기운이 쉴 새 없이 일렁인다.
그의 표정에서 고통은 이미 사라졌다.
평온한 얼굴의 하현이 신기한 듯 자신의 손을 움직이며 단목성에게 말했다.
“아마 사형께서는 화산을 떠나시어 두 명의 제자를 두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별호는……. 청홍쌍괴였을 겁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