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청홍쌍괴?”
“청홍쌍괴라고?”
단목성과 유민민이 한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사제관계가 아니랄까 봐 표정도 비슷했다.
“네. 두 분 다 청홍쌍괴는 잘 알고 계시죠?”
“당연하지. 그런데 내가 알기로 청홍쌍괴는 분명 남궁세가의 무사들에……. 아! 남궁세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유민민은 스스로를 자책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남궁세가가 남궁민을 구하러 이곳 섬서성에 왔을 때 그녀는 무림맹주였기에 그 상황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민민아. 남궁세가와 청홍쌍괴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 사부님은 모르시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그녀는 단목성에게 간략하게 그날의 일을 설명했다.
화산파 바깥의 일은 크게 관심이 없던 단목성이기에 그는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는 하현에게 물었다.
“그러면 홍괴의 혈수마공을 익혔더란 말이냐?”
“네. 홍괴의 혈수마공은 단순히 견식한 것만 아니라, 실제도 수십 합을 겨루었거든요. 그래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죠.”
“허허…….”
화악-!
하현은 기운을 바꾸어 지금 양손에 타오르는 보라색 불꽃을 붉은색으로 바꾸었다.
일렁이는 불꽃의 모양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완벽한 혈수마공의 구현이었다.
“이게 혈수마공이에요. 제가 홍괴의 혈수마공을 익힐 때 가장 힘들었던 이유가 어딘지 모르게 부족했기 때문이거든요. 제 본능은 분명히 이렇게 하면 어설픈 무공이 생긴다고 경고하는데 그걸 무시하는 게 제일 힘들었죠.”
“허허, 정말로 재능이 하늘에 닿아 있구나.”
하현은 그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자신이 남들보다 많이 특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이 백회혈이 열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인지는 모르지만.
화악-!
하현은 대답 대신에 혈수마공을 운용하던 방식을 바꾸어 이번에는 불꽃을 푸른색으로 바꾸었다.
조금 전의 붉은 기운과 일견 비슷해 보이면서도 음의 기운을 간직한 불꽃이었다.
“이것이 청괴의 청수마공이겠죠. 저는 청수마공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이렇게 하는 것일 것에요. 자하신공에서 혈수마공에 들어가는 원리를 제하면 남는 게 이거거든요. 쉽게 말해서 두 무공을 합쳐서 완성본으로 만든 게 자하신공이고요.”
후욱!
하현의 손에 타오르는 불꽃이 보라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하현은 공력을 거둬들였다.
보랏빛의 불꽃은 서서히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하현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세상에 자하신공을 알고 있는 분은 이제 두 분밖에 없다고 하셨죠? 그래서 청홍쌍괴의 사부님이 화산제일검님의 사형분일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 일리 있는 말이다.”
유민민이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다가 말을 꺼냈다.
“대외적으로 청홍쌍괴의 스승은 이미 죽었다고 알려져 있으니, 결국 사백께서는…….”
“죽었겠지. 언젠간 화산에 돌아올 것이라 해놓고서는 결국은 화산 땅은 밟아보지도 못하고 객지에서 그렇게 갔구나.”
단목성의 얼굴에 회한이 깃들었다.
사형이 떠난 지 오십 년이나 지났기에 당연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죽음을 확인하지는 않았기에 어쩌면 중원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형이다.
그런데 이미 죽었다는 말이 쉬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백께서는 어째서 자하신공을 둘로 나누신 것일까요?”
“그건 제가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네가?”
그 대답을 한 것은 하현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듣기로는 장문인께서는 자하신공을 익히지 못하셨다고요?”
“맞아. 자하신공은 우리 화산의 비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특별한 무공이지만, 화산에 입문한 모든 제자가 육합신공 다음으로 배워보는 신공이기도 해.”
“입문 제자 중에 자하신공과 체질이 맞는 제자를 찾는 것이군요.”
“그래. 하지만 사부님 이후로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익힐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긴 했지만, 하현이 자하신공을 배울 수 있는 체질이라는 것은 굉장히 희귀한 일이었다.
‘자하신공은 무당의 무공과 굉장히 흡사하면서도 완전히 달라. 비슷한 면이 있는 건 같은 도가의 정종무공이라서 그런가?’
자하신공은 음양의 조화가 가장 중요한 신공이다.
이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체질이란 사람이 타고난 양기와 음기가 정확하게 반반인 체질을 말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면 자하신공을 배우다가 주화입마에 들 가능성도 있기에 애초에 배우질 않는 것이다.
“나는 여인의 몸이기도 했고, 태어날 때부터 음기가 강해서 배우질 못했어. 그런데 이게 상관이 있는 거야?”
“네. 아마도 화산제일검 어르신의 사형님께서는…… 화산을 나서고 나셔서도 계속 자하신공을 연구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음이 오신 겁니다.”
화륵-
하현의 양손에 각각 붉은 불꽃과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자하신공은 이렇게 두 가지 신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요. 어떻게 그걸 알게 되셨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이것저것을 실험해 보셨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한순간의 깨달음일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혹시……?”
“맞습니다. 자하신공을 기반으로 한 이 두 무공 중에서 양기가 더 강한 사람이 익힐 수 있도록 나눈 것이 바로 혈수마공, 음기가 더 강한 사람이 익힐 수 있도록 한 것이 청수마공인 것입니다.”
“……!”
단목성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던 일이지만, 하현의 입으로 들으니 그 충격이 또 달랐다.
“사형이…… 허허…… 결국 내가 사형에게 졌다는 것이로군. 허허허.”
단목성이 슬픈 목소리로 웃음을 흘린다.
그는 수십 년간 사형을 원망하며 살았다.
그의 나이가 팔순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속세의 어지러운 감정을 잊으려 부단히 노력했기에 그 감정이 매우 옅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그 감정은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묻어두었을 뿐.
“어떤 연유로 청홍쌍괴가 그분의 제자가 되고, 또 어쩌다가 그들이 마교에까지 흘러갔는지는 모릅니다.”
“그래. 이미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알아보려 해도 알아내기가 힘들겠지.”
“그런데 저는 한 가지는 확실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이 무공은…… 마공이라고 이름 붙을만한 무공이 아닙니다. 무공은 날카로운 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자가 어떻게 휘두르냐에 따라 마공이 될 수도 있고, 신공이 될 수도 있죠.”
단목성과 유민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전대, 전전대의 고수로 무림에서 활동한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난 노고수들이건만, 하현의 말은 그들마저 경청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은 진리의 힘이었다.
“이 무공은 애초부터 화산을 위해 만들어진 정종무공입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하현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마교의 무리들과도 제법 싸워본 하현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풍기는 어두운 느낌의 마기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혈수마공과 청수마공에는 그런 기운은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화산을……. 화산을 위해 만들어진 무공…….”
단목성은 천천히 하현에게 걸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굳은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미 그는 세상을 등진 노고수의 자태를 하고 있지 않았다.
앙다문 입술과 힘이 들어간 두 눈은 그를 ‘화산제일검’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듯하였다.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말씀하시지요.”
“혈수마공과 청수마공……. 아니, 이제는 홍수신공과 청수신공이라 하겠네. 두 무공을 나에게 전수해 줄 수 있겠나? 나의 여생은 그 두 무공을 화산의 제자들이 배울 수 있도록 개량하고 발전시키는 데 사용하고 싶네.”
하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애초에 화산의 무공입니다. 부탁이 아니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자하신공을 익혔다는 것은 홍수신공과 청수신공 둘 모두를 익힐 수 있는 체질이라는 소리이기에 하현은 그에게 두 가지 신공을 모두 전수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아닙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이 무공을 통해 화산의 전력이 강해지고, 그 덕에 정파무림의 힘이 더 강해지면 그걸로도 족합니다.”
단목성의 말에 하현은 즉각 즉각 대답했다.
그런데, 그가 대답할 때마다 단목성의 얼굴에 핀 미소가 조금씩 더 깊어져 간다.
“그래? 정말 그렇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부탁을 한 가지 더 해도 되겠는가?”
“네. 얼마든지요.”
그는 어느 순간 바닥에 떨어뜨렸던 목검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 목검. 자네가 볼 때는 어떤가?”
“금방 만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완성도가 높습니다. 무게중심도 틀어져 있지 않고요.”
“그렇지? 자네 눈에도 이 목검이 굉장히 좋다는 것이지?”
“네. 그렇습니다.”
단목성은 장난스럽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이 검으로 검술 수련이나 해볼까 싶구나.”
“검술 수련이요?”
“우리 화산파의 자랑인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라고 들어 봤는가?”
“사부님!”
유민민은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지금 그의 말은 오늘 처음 본 하현에게 화산의 절기를 전수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민민아.”
“네. 사부님.”
“무공으로 입은 은혜. 나는 무공으로 갚고 싶구나.”
“아무리 그래도…….”
“이미 이 아이는 자하신공까지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깟 검법도 알고 있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단목성의 말에 유민민은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하현은 화산의 비전 중의 비전이라는 자하신공도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 검법 하나를 더 가르쳐준다고 하여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알겠어요.”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단목성은 그녀를 향해 빙긋 미소 지어주었다.
사실 아무리 유민민이 화산의 장문인이라고 할지라도, 단목성이 억지로 하겠다고 하면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목성은 장문인으로서의 체면을 지켜주고자 했고, 유민민도 결국은 그의 뜻을 따랐다.
촤악-!
그가 검을 흩뿌렸다.
목검이기에 햇빛을 반사할 리가 없건만, 그의 검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오는 착각이 일었다.
“오랜만에 검을 집어 드는군. 잘 보시게. 이게 바로 화산의 검이라네.”
스으윽-!
단목성의 검은 어지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산의 검법. 특히나 매화검법은 아주 오래전에는 사파의 검법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끊임없이 상대의 눈을 현혹하고, 변화 속에 진초를 숨기는 매화검법 특유의 간사함 때문이다.
허나, 화산파는 검법이 사이하다는 말을 들을수록, 매화검수의 행동거지를 바로 잡았다.
그 결과 당대에 와서 화산파는 정파 중에서도 가장 의협심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금 전 무공은 날카로운 검과 같고, 누가 사용하느냐에 다라 달라진다는 하현의 말.
사실 그것은 화산파 무인들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아……!”
첫 번째 감탄은 하현이 아닌 유민민에게서 나왔다.
십수 년 만에 검을 잡는 것이건만, 화산제일검의 검초는 완벽했다.
사십오 년 전쯤, 유민민이 처음 단목성에게 무공을 배울 때와 별다를 것 없이 강하고 절제된 저 검법.
유민민은 순간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마저 들었다.
“이것이 화산제일검…….”
두 번째 감탄은 하현에게서 나왔다.
단목성의 검은 남궁무룡의 검과는 또 달랐다.
검존 남궁무룡의 검이 세상을 오시하고, 태산으로 찍어누르는 듯한 중압감이 있다면 단목성의 검은…….
‘아름다워…….’
말 그대로 아름다운 검법이다.
매화검법이라는 이름처럼 수천, 수만 송이의 매화꽃이 만발하는 것처럼 눈이 즐겁다.
심지어는 꽃향기마저 풍겨오는 것 같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 했지만, 하현은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벅-
그는 앞으로 한 발자국을 크게 내디뎠다.
손에는 어느새 흑룡검이 들려 있었다.
부웅- 후욱!
그는 단목성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유민민의 얼굴에는 경악이 깃든다.
“정말…… 정말 말도 안 돼…….”
하현은 단목성을 거울에 비춘 듯, 그리고,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오랜 시간 익히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검법을 펼쳐내고 있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