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말의 목줄을 길게 묶어 자유로이 풀을 뜯도록 하고서 산을 오르는 하현은 공동산에 오르면서도 감탄을 몇 번이나 내뱉었다.
산의 경치도 일절인데, 하현은 산기(山氣)에서 영험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무당산의 영기가 가장 강하다고 들어왔는데, 공동산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은데?”
“역시 대장은 기감이 남다르구려. 이 공동산은 옛 황제 헌제가 광성자(廣成子)라는 도인을 직접 찾아와 가르침을 얻었다고 할 정도로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지.”
“그러게. 이곳에서 오래 지냈다면 분명 무언가 느끼는 게 있었을 것 같은데……. 너는 왜 이 모양이야?”
“하하! 그것을 못 견뎠으니 뛰쳐나온 게 아니겠소?”
하현은 진유강의 너스레에 피식 웃고는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류 소저. 올라올 만해요?”
“그럼요. 이제 아픈 것도 다 나았다고요.”
“잘 되었네요.”
류이영은 다리가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폴짝 뛰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며칠 전보다 다리가 훨씬 가벼운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걷지도 못한 이유는 심한 수련을 했기 때문이다.
수련 직후에는 근육의 힘을 모두 소모하고, 근섬유가 모두 찢어진 통증으로 제대로 걷기도 힘들지만, 곧 회복되면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두꺼운 근육이 붙게 된다.
그 후로도 다리를 회복하며 계속해서 수련했으니, 단시간에 다리의 근력이 붙은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수련은 수련 축에도 못 끼는 것 같아.’
그녀는 하현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왜 이렇게 강한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남파에서는 육체 수련은 크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너무 크고 단단한 근육은 움직임을 둔하게 만든다는 생각에 근력 수련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아니야. 잘 닦여진 육체가 바탕이 되어야 내공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거야.’
빨리 남궁세가로 돌아가 사형제들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평경을 비롯한 사형제들이 남궁세가의 수련법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대장. 이제 거의 다 도착했소. 저 능선만 넘으면 바로 공동의 입구요.”
진유강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공존했다.
도망쳐 나온 사문에 제 발로 걸어간다는 두려움과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을 다시 찾는다는 기대감이었다.
“그래. 나도 조금씩 기운이 느껴져.”
하현의 기감에 무인들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그 무인들이 있는 곳이 공동파의 입구이리라.
잠시 후, 그들은 공동파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동파의 건축 양식은 중원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감숙성에 있긴 하지만, 감숙성과 사천의 경계에 걸쳐 있어서 그런지 사천의 느낌도 났다.
“멈추시오. 이곳은 공동파의 입구요. 공동파에 볼 일이 없는 자는 발걸음을 돌리시오.”
입구에 서서 문을 지키고 있는 도사 한 명이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입구를 지키고 있음에도 도복에 도관까지 갖추어 입은 자였다.
‘상당한 고수야.’
허나 그가 내뿜는 기도는 만만치 않았다.
단순한 문지기인 것 같지는 않았다.
하현은 빠르게 그에게 다가가 포권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남궁세가에서 공동파 장문인께 보내는 서찰을 가지고 온 남궁하현이라 합니다.”
“남궁세가?”
그는 하현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하현의 외모와 행색을 보고서는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보낸 서찰이오?”
“가주님이신 검존 남궁무룡님입니다. 저는 그분의 손자이자 남궁세가의 정예대원 입니다.”
“손자라고?”
하현은 순간 그에게 쏟아지는 맹렬한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 속에는 아주 조금이지만, 살기마저 느껴졌다.
휘익-!
도인이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현의 앞에 나타난 그의 손이 하현에게 쏘아졌다.
하현이 느낀 것처럼 엄청나게 빠른 보법이었다.
‘금나수!’
처억- 타닥!
그 속도에도 불구하고 하현은 여유롭게 그의 손을 받아넘겼다.
금나수의 수를 써서 하현을 붙잡으려던 도인은 하현의 반격에 깜짝 놀라 뒤로 몇 발자국을 물러났다.
그를 노려보며 하현이 조금 노기를 담아 말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남궁세가의 일원을 사칭하다니. 나 회상도인(回想道人)을 속이지는 못 하리라!”
“사칭이라니요?!”
“내 검존 어르신의 손자들을 모두 만나보았느니라. 넌 남궁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궁환도 아니다. 내가 그분을 만나 뵌 것이 오 년 전이니, 그 사이에 손자가 태어났더라도 겨우 다섯 살일 터. 네가 다섯 살은 아니지 않으냐?!”
“그게 아니라…….”
쒜에엑-!
그는 하현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서는 또다시 바닥을 박차 하현에게 쇄도했다.
하현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오 년 전이라면 하현이 아직 남궁세가에 없을 때다.
그 이후로 자신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후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하현은 심호흡을 내뱉으며 제대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검을 뽑지는 않고 양손을 허리춤에 가져다 대었다.
상대도 검이 아닌 육장을 부딪혀 오기 때문이었다.
“복마장(伏魔掌)……!”
무슨 상황인지 이제야 겨우 파악한 진유강이 소리쳤다.
공동파의 대표적인 무공인 복마(伏魔)의 무공.
마를 굴복시킨다는 그 이름처럼 무척이나 패도적이고 묵직한 공격이었다.
우우웅-!
도인의 두 손은 공기와 공명하며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하현의 지척에 다다랐다.
하현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강맹한 기운을 느끼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쑤욱-! 콰아앙!
허리춤에 있던 손을 그대로 뻗어 도인의 육장과 부딪힌 하현.
그가 쓴 수법은 그가 아는 장법 중에서 가장 파괴력이 강한 개장의 항룡십팔장 항룡유회였다.
분명 육장끼리 부딪혔건만, 옆에서 듣는 사람들은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소리가 들렸다.
“크으윽……!”
그 충격을 견뎌낼 수 없었던 도사는 그대로 뒤로 퉁겨나가 버렸다.
약하게 내상을 입었는지 입에 가는 피까지 흘렸을 정도다.
하지만 하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충격을 해소하느라 뒤로 반 보정도 밀려난 것이 다였다.
“어, 어떻게……?!”
도인의 얼굴에는 경악이 깃들었다.
그는 지금 두 가지에 깜짝 놀랐는데, 첫 번째는 하현의 무공이 너무나 고강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지금 하현이 펼친 무공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항룡유회를?! 네놈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냐?”
“남궁세가의 남궁하현이라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남궁세가의 무인이 어떻게 개방의 무공을 알고 있는 것이지?”
“그건 제 스승님이 취월걸개셔서…….”
“이제는 취월걸개 어르신까지? 그분께서 평생 제자를 들이지 않으셨다는 건 온 무림이 다 아는 사실일 터!”
그는 진심으로 노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하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한 번의 부딪힘으로 알았다.
‘이 사람은 나에게 상대도 되지 않아.’
단순한 어림짐작이 아니다.
하현은 그와 부딪힌 순간, 지금까지 그가 만나왔던 다른 무인들보다 격이 낮다는 것이 정확하게 느껴져 왔다.
그 와중에 그들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이가 또 있었으니, 그는 진유강이었다.
‘회상도인이라면 십응검객 중의 하나인데……. 저렇게 차이가 난다고?’
진유강은 막연하게 하현이 강하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현과 싸우거나 대련한 것도 열 손가락으로도 세기 힘들 정도이고, 하현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것도 꽤 된다.
하지만, 십응검객이 누구인가?
공동파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을 꼽은 자들이 아니던가?
‘그러면 대장의 무공은……. 일파의 장문인과도 맞붙을 수 있을 정도란 말인가?’
그는 새삼 하현의 무공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스르릉-
회상도인이 허리춤에 꽂혀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조금 전과는 또 다른 기도가 느껴졌다.
‘공동파에서도 주로 검을 쓴다고 했지. 이곳은 무슨 검을 쓸까? 장법처럼 패도적인 검법일까?’
하현은 그 순간에도 공동파의 검법에 흥미를 느꼈다.
애초에 자신이 진다는 것은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은 하현이었다.
스윽-
하현도 조용히 그의 애검 흑룡을 꺼내 들었다.
그의 검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 보였는데, 이미 운명학으로부터 배운 중검술의 묘리를 체득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너에게 진실을 꼭 듣고 말리라!”
회상도인이 크게 소리치고는 하현에게 달려들었다.
하현은 그의 보법에 감탄했다.
훌륭한 보법을 능숙하게 펼친 덕에 그는 신형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하현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채앵-!
하현과 회상도인의 검이 강하게 부딪혀 불꽃이 튀었다.
하현은 그에게 반격하지 않았다.
그저 막아서기만 할 뿐.
채앵-! 챙! 챙!!
몇 번이나 검이 더 맞붙었다.
범인의 눈이라면 보이지도 않을 속도의 검이건만, 하현에게는 느리게 보이는 듯 정확하게 맥을 끊는 위치에 검을 가져가 막아내었다.
번뜩!
그때 하현의 눈에 회상도인의 허점이 보였다.
‘왼쪽 겨드랑이 아래가 비었어.’
그 허점으로 마음의 검을 찔러 넣었다면 이미 회상도인은 죽은 목숨이리라.
하지만, 하현은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죽이면 안 되기 때문에.
대신에 그는 그곳으로 강한 살기를 쏘아냈다.
“……!”
회상도인은 뒤로 보법을 펼쳐 하현에게서 멀리 떨어지더니,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현의 살기에 그는 검에 베인 듯한 착각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는 놀란 눈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하현은 웃고 있었다.
“더 이상이 경합은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도인.”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인가?”
“같은 정파의 사람끼리 서로를 죽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오해는 풀면 그만입니다.”
“자네 정말로……?!”
“저는 조부님의 외손자입니다. 남궁세가에 온 것은 사 년 전이니, 무림 소식에 정통한 분에게 여쭈시면 제 존재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조금 전 하현의 무공에 놀랐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이었다.
“외, 외손자? 그렇다면…… 영령이의 자식이라고?!”
“제 모친을 아시는군요.”
“이럴 수가……! 그래! 영령이에게 자식이 하나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게 자네였나?”
그는 갑자기 하현에게 달려들어 그를 껴안았다.
하현은 피할까 하다가, 그냥 그에게 잡혀 주었다.
“미안하네. 내가 정말 미안해. 수년간 산에만 갇혀 있었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네!”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오해는 할 수 있으니까요.”
그를 겨우 밀어내고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하현은 다시 그에게 입을 말했다.
“그러면 오해도 풀렸으니, 저를 장문인께 데려다주시겠습니까?”
“그래! 귀빈이 오셨는데, 얼른 모시고 가야지.”
회상도인은 조금 전과는 판이한 태도로 하현과 나머지 일행들을 데리고 공동산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내상을 조금 입었을 진데,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자. 나는 이곳까지네. 여기서 더는 벗어나지 못해서 말이야.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서 아무나 잡고 내가 입산을 허락했다 하면 모두가 이해할 거야.”
“어째서 벗어나질 못하시는 겁니까?”
“그건 우리 사문과 나의 사정이라네. 말해주기 힘들 듯하네.”
“흠……. 알겠습니다.”
하현은 그에게 정중하게 포권하고는 산길을 올랐다.
회상도인이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올라왔을 때, 하현은 진유강에게 물었다.
“진유강 회상도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아?”
혹여나 회상도인이 그를 알아볼까 싶어 지금까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진육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동파의 징계 중 하나요.”
“징계?”
“나도 저것을 본 것은 처음이지만……. 일정 기간 문지기를 하며 저 주위를 벗어나지 않고 도를 닦는 징계라오.”
하현은 회상도인이 보일 리도 없건만,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오해가 있어 손속을 나누기는 했지만, 올곧고 선한 기운을 가진 그였기에 하현은 조금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기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산을 올랐다.
긴 여정의 종점이 될 공동파에 이제야 제대로 첫발을 들였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