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겐가?”
송결자의 물음에 하현은 회상도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하현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렇지 않아도 주먹부터 나가는 성격 때문에 징계받는 중인데, 하현에게도 똑같은 일을 벌였다고 하면 얼마나 크게 혼날지 두려운 듯했다.
“회상도인께서 공동파 입구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한 번 인사드렸습니다. 기관진식에 대해 저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계셨다는 분이 이 분이시로군요.”
“맞네. 회상도인 자네 혹시 알고 있는가? 여기 있는 이 아이는 남궁영령의 아이라네.”
“들었습니다. 장문인.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혼인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그 아이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회상도인은 흐뭇한 눈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
“제 어머니와 인연이 있으신가 보군요.”
“그래. 인연뿐이겠느냐? 내가 도호를 받기 전 내 이름은 제연훈이라네. 나를 연훈 삼촌이라 부르며 잘 따랐지. 어렸을 때 참 총명하고 예쁜 아이였는데 말이야. 지금 영령이는 잘 지내고 있는가?”
“……?”
하현은 깜짝 놀란 눈으로 회상도인과 송결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자 송결자도 어찌나 놀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하며 급히 말했다.
“아, 아니. 오해하지 말게나. 지금 회상도인은 징계를 받기 시작한 사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어떤 속세의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다네. 세상과 단절하여 입구를 지키는 것까지가 그의 징계여서 그렇다네.”
“아……. 그랬군요.”
하현은 납득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을 모르니 저런 질문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자 이번에 도리어 놀란 것은 회상도인이다.
그도 송결자를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영령이에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게 말이지……. 일단 진정하고 앉게나.”
송결자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회상도인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는 콧김을 쉭쉭 뿜어대더니 다시 자리에 앉고서는 송결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빨리 설명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게 말이네……. 간단히 얘기하자면 사 년 전 마교가 무림의 군소방파들을 멸문시키고 다닌 일이 있었다네. 자네가 징계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였지…….”
송결자는 간결하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 해주었다.
말하면서도 그는 연신 하현의 표정을 살폈지만, 하현의 표정은 미동이 없었다.
이미 그 일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마음 한편에 잘 묻어두었기 때문이다.
순간 그 표정을 보고 있던 송결자가 하현이 도에 근접한 것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 그런 일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회상도인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사 년이라는 시간은 어찌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은 굉장히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만이 그 세계에 멈춰 있는 느낌이었다.
“영령……. 그러니까 네 어머니와는 내가 무림맹에 있을 적에 인연을 맺었단다. 참으로 총명하고 예쁜 아이였는데 말이야. ”
그는 하현을 보며 말을 꺼냈다.
옛날을 회상하는지, 혹은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지 눈을 슬며시 감고서는 말했다.
“그런데 그런 인연을……. 제대로 떠나보낼 기회조차 잃어버렸구나. 그것도 내 잘못 때문에.”
그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눈물이 맺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장문인. 사실 저는 지금껏 제게 이런 형벌을 주신 이유를 몰랐습니다. 괜히 시간 낭비나 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과 단절되어 사니 이렇게나 마음이 아프게 되는군요. 분명히 영령 말고도 제가 잊고 있던 인연이 있을 것인데…….”
그는 진심으로 후회하는 눈빛이었다.
하현과 송결자를 그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상도인이 스스로를 후회하며 마음을 성장시키는 도중이니, 그것을 기다려 주는 것이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회상도인은 그 정적 속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송결자도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징계를 내린 것은 아니다.
허나, 일이 이렇게 되어 회상도인이 자신을 바꿀 기회를 얻는 것.
그것 역시 그가 추구하는 도의 길 중의 하나였다.
“연훈아.”
오랜 침묵을 깬 것은 송결자였다.
그는 회상도인의 이름을 불렀다.
장문인으로서 문도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도사로서 후배 도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의도한 바는 아니다. 허나, 모든 게 돌고 돌아서 결국 네가 너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였기에 이런 일도 있는 것이다.”
“네. 장문인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니……. 받아들이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네 마음에 잡티 하나 남지 않도록 항상 도를 위해 움직이거라.”
“알겠습니다. 장문인.”
공동파에서 추구하는 도는 무당파에서 추구하는 도와 많이 다르다.
무당파는 정신적으로 완전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 속세와의 단절을 첫째로 생각하는 반면, 공동파에서는 같은 목표를 위해 더 속세에 뛰어든다.
인세 안에서 도리를 찾는 것이다.
“오늘부로 너의 징계를 해제한다. 내일부터는 문으로 나갈 필요 없다.”
“장문인……!”
“토 달 생각은 하지 말아라. 대신 너는 내일부터 할 일이 있으니.”
송결자는 지금까지도 똑같은 자세, 똑같은 표정으로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하현을 바라보았다.
하현은 그들이 마음의 정리를 끝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송결자는 하현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마음의 잡티가 없다……. 사실 이 아이는 이미 그 경지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과 그의 행동에서 물씬 풍기는 배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감정을 깨달은 듯한 저 표정.
송결자는 그 얼굴을 보며 수도 없이 감탄했다.
“내일부터 며칠간 여기 있는 하현 소협과 함께 기관진식을 살피며 앞으로 우리 공동파 문도들의 수련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게나. 이 훈련의 책임자는 내일부터 자네이니.”
송결자는 어느새 하현을 소협이라고 높여 부르고 있었다.
“제가 어찌 그렇게 하겠습니까?”
“내가 아는 한 기관진식에서 가장 빨리 통과한 사람은 여기 있는 하현 소협이네. 물론 그 차이는 많이 나지만.”
회상도인도 십응검객으로 선발될 당시에 겨우 세시진 만에 기관진식을 통과한 전력이 있었다.
그만큼 무공이 뛰어남은 물론 기관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는 뜻이다.
“아니, 그 전에 하현 소협의 의견부터 물어봤어야 했군.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긴 시간은 힘들겠지만, 며칠이라면 제가 함께 고민해드리겠습니다. 진유강을 보내주셨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겠지요.”
하현이 평온하게 말했지만, 회상도인의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뭐라고? 진유강……?! 그러면 그때 입구에서 자네 뒤에 숨어 있던 그 청년이……?!”
“맞습니다. 저는 진유강이 남궁세가에 정식으로 소속되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여기에 온 것입니다.”
“정말 진유강이라니!”
회상도인 역시 진유강을 잘 알고 있었다.
진유강이 종종 자신은 공동파에서 가장 촉망받던 후기지수가 될 뻔했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허풍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송결자는 이번에도 회상도인에게 하현이 이곳에 온 목적과 기관진식을 한 시진만에 통과했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역시 그랬군. 자네 실력이 범상치 않은 정도가 아니더라니.”
회상도인은 감탄한 눈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송결자가 물었다.
“자네가 하현 소협의 실력을 어찌 아는가?”
“그, 겉보기에 그리 보였다는 말입니다. 제가 눈이 좋지 않습니까?”
송결자는 그를 수상한 눈으로 보다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진유강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되었으니, 괜한 일 벌일 생각하지 말게.”
“장문인 저도 조금 전에 깨달은 게 있습니다. 이전이었다면 곧바로 발 벗고 진유강에게 달려갔을 테지만, 이제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
“네. 다만 가서 인사나 한 번 하겠습니다. 진유강도 소중한 인연이지 않습니까?”
“그 정도야 뭐…….”
송결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회상도인을 보다가 하현을 바라보았다.
하현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그들도 며칠간 이곳에 있을 터이니 언제 한 번 들러보게.”
“감사합니다. 장문인.”
잠시 그들이 대화를 끝나기를 기다린 하현이 슬그머니 말했다.
“그러면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자네도 피곤할 터이니 들어가게.”
“감사합니다.”
하현이 일어나자 회상도인도 엉거주춤 일어나며 말했다.
“징계도 끝났으니, 내일은 내가 찾아가겠네.”
“좋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왕궁 밖으로 나가버렸다.
송결자는 하현이 나간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무엇이 이상합니까?”
“자네도 느꼈을지는 모르지만, 저 아이 도가의 무공을 익힌 것 같네. 선기를 다룰 줄 알아.”
“저도 어렴풋이나마 느꼈습니다.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 아이지 않습니까?”
송결자는 회상도인의 말에는 즉각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하지만 무언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무언가였다.
‘어제와는 또 무언가 달라진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내 마음이 달라진 거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정말로 하현의 선기가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로.
***
천왕궁에서 나온 하현은 처음에는 천천히 걷다가 조금씩 발걸음이 빨라졌다.
급기야 잠시 후에는 경공을 펼치기까지 했다.
그는 신법을 펼치며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그를 보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한층 더 속도를 높여 날 듯이 뛰어 공동파를 벗어나 버렸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공동산 어딘가로 깊숙하게 들어가 버린 하현은 기감을 펼쳐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 오십 장 이내에는 사람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선기를 다루는 것은 서툴러. 조금 더 익숙해져야해.’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평소처럼 하단전에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닌 오롯이 상단전의 기운만을 사용하는 운기조식이었다.
씨익-
저도 모르게 하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 기관진식에 들어간 것은 정말 운이 좋았어.’
공동파 사람들은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했지만, 기관진식에는 공동파의 무공이 제대로 녹아져 있었다.
단순히 검법, 보법 같은 형식뿐만 아니라, 전대 장문인과 유사가 선기와 내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아내야만 하는 층도 있었다.
적절한 내공을 불어넣어야만이 기관이 작동하는 층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말인즉슨, 하현은 공동파의 중요한 무공을 모두 손에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기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더 잘 알겠어. 무당파와는 또 다르게 접근하기 때문에 생각의 영역을 넓힐 수 있었지.’
하현은 앞으로 선기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또 어떻게 쌓아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복마검법.’
하현은 공동파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복마검법도 어떤 원리인지 곧바로 파악해낼 수 있었다.
선기와 내공의 적절한 소화가 파사현정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
그것이 복마검법인 것이다.
하현은 공동파의 무공 이외에도 파사현정의 기운을 가진 무공과 기운을 알고 있다.
소림의 무공이 그랬고, 무당의 무공이 그랬다.
그리고 공동의 무공까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하현은 그가 더 성장할 수 있는 분명한 목표점을 보았다.
진유강도 진유강이지만, 이것이 그가 공동파에 와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