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하현이 기관진식을 통과하고도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회상도인은 하현의 옆에 바짝 붙어서 기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에 대한 의논을 계속했다.
그 시간이 하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하현은 굉장히 만족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얘기로만 해서는 더 정확한 계획을 만들 수 없으니까 기관을 더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그것 좋은 생각이군! 내가 십응검객이 된 지도 벌써 십 년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말이야.’
그는 회상도인과 송결자를 설득해 기관진식에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며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어내었다.
물론 그곳에서 얻어내고, 깨달은 것을 하현 혼자만 알고 끝내지는 않았다.
회상도인에게 최대한 알기 쉽게 풀어주었고, 그 덕에 그는 앞으로 공동파 무인들이 어떤 수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체계를 잡아갈 수 있었다.
하현이 회상도인과 오늘치의 의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는 숙소로 가는 길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진유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유강. 여기는 왜 나와 있는 거야?”
“뭐. 그냥 방에만 있기도 답답하고, 날씨도 쌀쌀하고 하여…….”
“시간이 남으면 수련해야지.”
“오늘 온종일 수련한 것 안 보이오? 지금도 팔다리가 후들거리는데.”
하현은 피식 웃었다.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진유강이 웃겼기 때문이다.
“왜. 나한테 할 말이 있어?”
“할 말은 아니고 그냥…….”
진유강은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하현은 길옆에 있는 작은 풀밭으로 걸어가더니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일로 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말을 해야지.”
진유강은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더니, 곧 하현의 옆으로 가 앉았다.
이미 해가 진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질 듯 반짝였다.
“무슨 일인데? 말 해봐.”
“별 건 아니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공동파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오? 이러다 공동파의 세력이 너무 커져 버리면 곤란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 때문이야?”
“어쩐지 남 좋은 일만 하는 것 같아서 말이오.”
지금까지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진유강은 조금은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공동파와 송결자에 좋은 감정만 남길 수는 없는 성격이었다.
하현이 기관진식을 통과하기 직전까지도 그를 소유물 다루듯 했던 송결자다.
공동파가 너무 잘 나가게 되는 것도 어쩐지 마음에 들지만은 않은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는데.”
“쳇. 무슨 말씀하실지 알고 있소. 이렇게 해야 우리 정파 무림 전체의 전력이 올라간다 이 말 아니오?”
“그것도 맞는 말인데, 그것뿐만은 아닌데?”
“또 뭐가 있소?”
“이건 정말 너한테만 말해주는 거야. 여태까지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말해본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이번 일은 너와 진하게 엮여 있으니까.”
“도대체 무슨 말인데 그러는 것이오? 왠지 무서워 지려 하는데?”
하현은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고 말했다.
“과연 공동파가 이렇게 백 년을 수련한다고 하더라도, 남궁세가를 넘을 수 있을까?”
“……!”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껄껄 웃었다.
하현의 말에 담긴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하하! 공동파 한가운데에서 공동파 출신 무인에게 그런 소리를 해도 되오?”
“뭐 어때. 듣는 사람도 없고.”
“하긴, 대장이 앞으로 백 년은 더 살 수도 있으니, 그동안은 남궁세가가 최고겠지.”
“나뿐만이 아니야. 내가 없더라도 남궁세가의 전력은 강해.”
하현은 진지하게 말하고서는 이번에는 살짝 장난기를 품고서 말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
“무슨 걱정?”
“공동파가 여기서 문도들에게 시킬 수련은 전부 내가 기억하고 있거든. 너도 다 할 거야.”
“아니, 그건……!”
“그러니까 너도 공동파 문도들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는 거지. 너무 기대되지 않아?”
“아니, 기대는 무슨!”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는 그를 보며 하현은 마음 놓고 웃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보다 진유강과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한 하현이다.
그래서 진유강을 위해 이 먼 길을 달려왔다.
“집에는 언제 돌아가는 것이오?”
진유강의 입에서 집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에게도 이제 집은 남궁세가다.
“앞으로 이틀 후에 출발할까 싶어.”
“이틀. 알겠소.”
“그러면 이제 들어갈까? 꽤 찬 바람이 부네.”
하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정말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면 또 한 번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할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할 필요 없는 것이 검존 걱정이라지만, 하현은 이번에는 힘을 보태고 싶었다.
‘지금쯤이면 신강양가의 위치를 파악하셨으려나?’
계속해서 문파를 이동하여 서신을 주고받을 새가 없었기에, 현재 어느 정도까지 수색이 진행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현이 하루빨리 돌아갈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지금 빨리 걷는다고 집으로 빨리 가는 것도 아니건만, 하현은 잰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
이틀 후.
하현은 공동파를 떠났다.
애초에 이곳에서는 송결자와 회상도인 이외에 다른 사람들과는 아예 교류하지 않았기에 그를 배웅해줄 사람도 얼마 없었다.
그나마도 송결자는 남궁세가로 미리 떠났기에 회상도인 한 명뿐.
‘언젠가 꼭 공동파에 돌아와 주게나. 그리고 자네가 만든 결과를 꼭 두 눈으로 확인해 주게.’
그와의 짧은 인사를 마친 하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도련님. 남궁세가로 가시는 길에는 어디 들리실 계획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한 군데도 없어요. 중간중간 객잔에만 들려 쉬어갈 예정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들은 공동산 밑 객잔에 맡겨둔 말을 타고 동쪽을 향해 달렸다.
감숙성에서 안휘성까지 가려면 섬서성, 호북성을 관통해야만 하지만, 관도를 따라 직선으로 갈 것이기에 올 때보다는 시간이 훨씬 단축될 것이 분명했다.
“류 소저. 돌아가는 길에 중원에서 유명한 곳에도 들려보고 하면 좋을 텐데 여유가 없어서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지금까지 경험한 것만 해도 정말 엄청났는걸요.”
그녀의 말에는 일말의 주저함이나 거짓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최근 하현과 함께한 두어 달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나날들이었다.
평생 해남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는 섬 소녀에게는 대모험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그리고 어디에 들리지 않더라도 하현과 앞으로 며칠간은 계속 같이 다닐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녀가 전혀 아쉬움을 갖지 않는 이유였다.
“그러셨다면 다행이고요.”
하현은 빙긋 웃으며 말하고는 선두에서 선풍을 몰았다.
보통 말들보다도 반 배는 큰 몸집의 선풍 위에 올라탄 하현의 모습은 햇빛에 비쳐 장관을 이루었다.
어쩐지 하현은 남궁세가에서 출발했을 때보다 그새 키가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현은 계속 앞장서서 말을 몰 뿐이었다.
칠 주야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그동안 그들의 하루는 매우 단순했다.
말을 달려 남궁세가로 향하다가, 말이 지치면 풀을 뜯게 하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고, 밤이 되면 가까운 객잔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꽤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기에 굳이 야영은 하지 않았다.
남궁세가로 돌아가면 곧바로 싸움에 들어갈 수도 있기에 최대한 몸 상태를 유지하며 가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중에도 수련은 빼먹지 않았다.
말이 쉬는 시간이나 밤에 혼자 있는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이번에 익힌 수많은 무공과 깨달음을 정리하는 데에 썼다.
자연히 그를 따라서 운후와 진유강, 류이영도 열심히 수련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하남성 고시(固始)현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들이 고시현에 도착했을 때는 막 해가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도련님. 오늘은 이만 이 도시에서 쉬어 가는 건 어떻습니까? 객잔을 알아보겠습니다.”
운후가 객잔을 알아보려 하자, 하현은 그를 제지했다.
“잠시만요. 여기에서는 잘 곳이 있어요.”
“아, 고시현에 아는 분이 계시는 겁니까?”
“네. 운후 아저씨도 잘 아시는 분일 텐데요.”
“저 말입니까?”
그는 하현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그가 무림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뒷골목 왈패들이나, 남궁세가의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 장 노야가 계신 곳이 이곳이었군요.”
“네. 이제야 기억하시는군요.”
운후가 갑자기 옛 생각이 나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는……. 경황이 없었으니까요.”
처음 하현을 따라나서 취월걸개와 남궁민, 그리고 하현을 따라 남궁세가로 가던 도중에 들른 곳이 이곳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운후가 그때 온전한 정신으로 그 일을 했다기보다는 일단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고 목숨을 보전하려는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고.
“하여튼 따라오세요. 오늘은 장 노야께 하룻밤 쉬어가기를 부탁드리려야겠습니다.”
하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사람들도 돌아다닐 수 있는 길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하현은 고시현을 지나칠 때면 항상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취월걸개와 만난 곳이 이곳이어서 더욱 그럴 수도 있었다.
“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말을 몰던 하현이 갑자기 놀란 소리를 냈다.
이곳을 지나친 것이 겨우 이 년여 전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그의 기억 그대로인데, 갑자기 처음 보는 거대한 장원과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운후 아저씨. 혹시 이렇게 큰 장원이 있었는지 기억나요?”
“제 기억에 고시현에 이렇게 큰 장원은 장 노야의 장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죠? 이 년 만에 갑자기 엄청나게 큰 장원이 생겨났네요.”
하현은 그 앞을 천천히 지나가며 대문에 걸린 현판을 바라보았다.
현판에는 엄가상단(嚴家商團)이라고 적혀 있었다.
“엄가상단이라. 들어본 적 없는 상단이네요.”
하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앞을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작은 걱정이 일었다.
‘혹시 장씨상단이 여기 엄가상단 세력에 밀린 것인가?’
고시현은 이 부근에서는 꽤 크다고는 하나, 하남성이나 안휘성 전체로 보았을 때는 굉장히 작은 도시다.
이런 작은 도시에 거상이 둘이나 공존하기는 상식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빨리 장씨 상단의 장원으로 가서 장 노야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하현은 일행에게 서두르자고 말하려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혹시 남궁대협이십니까?”
목소리는 엄가상단의 대문 앞에 서 있는 사내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대협은 아니지만, 남궁세가의 사람은 맞습……엇?!”
“역시 대협이 맞으시군요! 너무 커져서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접니다. 유정협.”
하현은 깜짝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유정협.
그는 하현과 연이 깊은 사내다.
장 노야의 딸 장소유의 납치 사건 때 그녀를 구하며 진한 인연을 맺었었다.
“어떻게 자네가 여기서……?!”
놀란 사람은 하현뿐만이 아니었다.
운후 역시 그를 잘 알았다.
취월걸개가 시켰다고는 하지만, 서로 죽자 살자 싸우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물론 서로가 이겼다고 주장하는 무승부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연락 한 번 주실 줄 알았는데, 한 번도 주시지 않으시더군요.”
“매우 바빴습니다. 그런데 유 형은 이제 장 노야의 사위 아니에요?”
사위라는 말에 유정협이 방긋 미소 지었다.
그가 혼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현의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맞습니다. 그때 직후 소유와 혼인하여 지금은 아들도 하나 나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정말 축하드려요. 그런데 이곳은 도대체 어디에요? 엄가상단? 왜 여기서 나오시는 건가요?”
“저는 지금 장인어른의 대리인으로 엄가상단에 전달한 것이 있어서 잠시 찾아온 겁니다.”
“장씨상단은 다행히 건재한가 보군요?”
“건재하다마다요. 그때 이후로 성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곳 엄가상단과의 합작으로 날로 커져가고 있습니다.”
하현은 두 상단의 관계가 나쁘지 않나보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현판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는 언제 생긴 건가요? 제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는 이런 곳은 없었는데요.”
그러자 유정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협, 정말로 이곳이 어딘지 모르시는 겁니까?”
“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상단 이름인데요?”
“상단의 대주주께서 모르신다니. 저는 농담하시는 건 줄 알았습니다.”
“대주주요?”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이곳은 대협께서 황금 스물아홉 관을 투자한 상인 엄상지님이 장씨상단에서 독립해 세운 상단입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