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엄상지?!”
하현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한 사내를 떠올렸다.
장 노야가 휘하에 만든 열 개의 상단 십점.
그 십점의 점주 중에서도 가장 행동력이 좋고 결단력이 좋은 상인이 바로 엄상지였다.
그렇기에 그에게 황금을 맡기기도 했고.
“십점 중의 하나였던 엄가상단이 대협의 황금을 투자받고서는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랐습니다. 그 결과 하남과 호북지역까지 상권을 넓히며 급격하게 덩치를 불렸고, 결국 독립하여 엄가상단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장씨상단과 협력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엄상지님께서 대협을 많이 보고 싶어 했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하현은 그의 일행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원래는 오늘 장씨상단에 신세를 지려 했는데, 이렇게 엄가상단으로 가볼까 싶어요. 괜찮죠?”
어차피 그들은 장씨상단으로 가나, 엄가상단으로 가나 아무 상관도 없었기에 괜찮노라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엄상지는 능숙하게 문을 다시 두드려 엄가상단의 하인을 부르고, 하인에게 말을 맡겼다.
마치 제집에서 하인을 부리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에 오니 모두와 알게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들어오십시오.”
“시간이 늦었는데, 집에는 안 가봐도 돼요? 집에 장 소저와 자제분이 기다리실 텐데.”
“괜찮습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하현 대협을 만난 일인데……. 제 생각에는 외박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가 해맑게 웃었다.
하현이 그를 샐쭉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그것이 목적은 아니고요? 저를 팔아서?”
“아앗……! 아니, 꼭 그게 목적은 아니고…….”
“하하. 농담입니다. 엄 상인께 안내를 부탁드려요.”
유정협은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하현의 말에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엄가상단의 장원은 생각보다 작았다.
하지만 작은 장원에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는 모습이 효율을 중요시하는 상인의 특성이 보이는 듯했다.
이윽고 그들은 한 전각 앞에 도착했다.
그렇게 으리으리하지도, 하지만 초라하지도 않은 정갈한 전각.
유정협은 이곳이 엄상지가 머무는 처소라고 했다.
“도련님. 저희는 이곳에서 잠시 기다릴까요?”
“그러실래요? 금방 들어가서 오늘 머물 방을 부탁하고 나올게요.”
하현과 유정협은 나머지 셋을 놔두고 전각으로 들어섰다.
그는 닫힌 문 중에 하나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문을 쿵쿵 두드리고는 말했다.
“엄상지님. 유정협입니다.”
“정협? 무엇 놓고 간 것이라도 있는 것인가? 방금까지 여기 있었으면서.”
그러자 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현도 일전에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유정협은 하현을 보고 빙긋 웃고는 다시 말했다.
“놓고 간 것이 아니라, 누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데리고 와?”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고, 문에서 엄상지가 나왔다.
“누구와 왔기에……. 엇……!?”
그는 하현을 보고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년 전에 비해 얼굴도 많이 성숙해졌고, 키도 많이 컸지만, 그는 한눈에 하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대, 대협!”
그는 맨발로 후다닥 하현의 앞으로 달려 나와 놀람과 반가움이 한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아니, 정협이와는 어떻게 같이?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얼른 들어오시죠. 날씨가 찹니다.”
그는 하현의 손목을 잡고 방 안으로 이끌었다.
그의 표정은 진심으로 반가움이 깃든 얼굴이었다.
방 안에 있는 작은 탁자에 나눠 앉자마자, 엄상지는 다시 하현을 보고 말했다.
“그건 어찌 지내셨습니까? 제가 남궁세가에 연락을 보낼 때마다 세가에 계시지 않는다는 대답만 돌아왔기에 그동안 안부 인사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계속 세가를 비우기는 했죠. 서신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서신도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장도 하나도 없어서…….”
“그러셨군요.”
하현은 머쓱한지 눈을 슬쩍 돌렸다.
남궁세가에서 오는 모든 서신은 일단 창천각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누구에게 오는 서신인지를 나눈 후에 하인들이 서신이 왔다고 이야기해 주면 본인이 그곳에서 직접 찾아가야 하는 체계다.
생각해보니, 중원 여러 곳에서 온 서신이 창천각에 쌓여간다고 하인들이 말해준 적이 있지만, 하현은 단 한 번도 서신을 찾아 읽어본 적이 없다.
“어쨌거나, 이렇게 직접 와주셨으니 그간 엄가상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즐거운 목소리로 하현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즐거울 수밖에 없다.
엄청난 금을 투자한 대주주 앞에서, 그간 승승장구했던 일을 설명하는 것이니 얼마나 즐거울까?
“우선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씀드리자면 대협께서 가지고 계신 우리 상단의 지분은 약 육 할입니다.”
“육 할이나요?”
“네. 나머지 이 할은 장 노야께서, 나머지 이 할은 제가 가지고 있죠. 즉 대부분의 지분이 대협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때 저에게 주신 황금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니까요.”
엄상지는 천상 장사꾼이었다.
철저하게 숫자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소리다.
그는 장사꾼인기는 하지만, 사기꾼들은 혐오했다.
그래서 하현에게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하는 중이었다.
“그때 저에게 맡겨주신 황금은 중원 각지의 공방들과 직접 연계하여 무기와 날붙이로 바꾸었습니다. 원래 장씨상단 휘하에 있을 때 제가 담당했던 영역이 무기였기에 수월한 진행이었죠.”
“제가 장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들인 무기를 다시 팔아야 이득이 남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사들인 무기는 어디에 파셨어요?”
엄상지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하현의 질문에 핵심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경제나 장사를 공부해본 적도 없건만, 이미 장사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
“장사의 기본은 정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파악한 정세에 건곤일척의 승부를 던지는 것이죠. 저는 전쟁이 일어날 조짐을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이라면 제가 모아놓은 병장기를 모두 팔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이라면……!”
하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귀주성?”
“맞습니다. 마교 대산천가와의 귀주성 전쟁입니다. 비록 그 전쟁은 대협의 조부님이신 검존님의 활약과 초고수님들이 나서주신 덕분에 보통 무인들이 나설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전쟁에 나설 때 무기도 없이 나설 수는 없으니, 그 전에 이미 무기를 샀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엄상지의 눈은 날카로웠다.
그는 무림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이용했다.
“그러면 지금은요? 큰 전쟁이 없는데 세력을 더 키우신 방법이 있으시겠죠?”
“무기 장사라는 것이 한 번 자리를 잡기가 어렵지, 자리를 잡고 나면 훨씬 수월해집니다. 귀주성 전쟁에서 한 번이라도 우리 무기를 써본 무인들이 우리 상단의 무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시작했고, 그 수요에 맞추어 병장기 가게를 차리고 무기를 공급하면 그때부터는 자생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품질이 최우선일 테고요. 엄 상인께서는 수십 년간 병장기 유통을 해오셨으니 그 품질을 유지하는 데에 그리 힘드시지 않았을 테니까요.”
엄상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지금 이 자리가 하현을 가르치려고 모인 자리는 아니나, 하현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니 백을 아는 아이였다.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아이라는 뜻이다.
“정확합니다. 워낙 잘 이해하셔서 나머지는 제가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저는 엄 상인께서 잘하실 줄 알았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안 궁금하십니까?”
“무엇이요?”
“우리 엄가상단의 세력이 그때에 비해 얼마나 더 커졌는지를요. 대협께서 투자하신 스물아홉 관의 금이 지금은 어떤 가치가 되었는지 안 궁금하십니까?”
“궁금하긴 합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황금 백 관이 넘습니다. 엄가상단은 그때에 비해 세 배가 넘게 성장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역시 능력이 출중하십니다.”
하현의 태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황금 백관이면 황제가 살고 있다는 황궁을 통째로 사고도 남는 돈이다.
거대한 무림 방파의 십 년 운영비이며, 평범한 양민들이라면 수백 년은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다.
그런데 하현은 기쁜 기색도, 흥분한 기색도 없었다.
다만 기분 좋은 얼굴로 싱긋 웃을 뿐.
“놀라시지 않는 겁니까?”
하현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네. 엄 상인님이라면 분명히 잘하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허허…….”
엄상지는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상인이 무림의 정세만큼 잘 보아야 하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
본디 투자를 할 때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사람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상인이라 할 수 있다.
엄상지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는 하현을 제대로 보았다.
앞으로 그의 미래를 계속 하현에게 맡겨도 되리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해주세요. 지금 제가 돈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 그 돈을 쓸 생각도 없고, 엄 상인께서 정말 잘하고 계신 것도 확인했으니 더 궁금한 것은 없습니다.”
“허…….”
“물론 저라고 해서 물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큰돈이 주는 편리함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남궁세가에서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고, 괜히 엄 상인님께서 잘하고 계시는데 신경 쓰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하현의 눈은 진중했다.
거짓 하나 들어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때 하현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부탁드릴 게 하나 있어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지금 전각 앞에 제 동료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을 묵어갈 수 있게 좋은 방과 맛있는 음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엄상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현이 바라는 일이 있다고 하여 무엇인가 했는데, 겨우 이런 것이라니.
“그것 말고는 없으신 겁니까?”
“네. 지금은 없어요. 다만 언젠가 제가 필요하다 할 때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엄상지는 마치 주군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수하의 마음가짐으로 하현에게 답했다.
‘평생을 걸어볼 만한 그릇이다.’
이제 겨우 하현과의 두 번째 만남.
하지만 엄상지는 평생 주인을 찾았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
다음 날이 되었다.
엄가상단에서의 대접은 정말 정성스러웠다.
음식도 쓸데없이 화려하고 과하지 않고 정갈하며 맛있는 음식이었고, 부족하지도 않았다.
숙소도 마찬가지였다.
크고 비싸고 쓸모없는 장식들로 가득 찬 방이 아니라 고급스럽고 기품있는 방이었다.
엄상지가 평소에 추구하고 있는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현 공자. 저기 두 사람은 지금 못 일어날 것 같은데, 둘이서라도 같이 식사를 하고 올까요?”
옆 방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하현이 있는 방으로 건너온 류이영이 침상에 쓰러져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운후와 진유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현은 그들을 보며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그럴까요? 제가 오늘은 맘껏 마시고 놀라고 말하긴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그들은 어젯밤에 말 그대로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원래는 운후와 유정협 둘만이 오랜만에 회포를 풀기로 했으나,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진유강이 그런 자리에서 빠질 리 만무했다.
“운후님이 저러시는 건 처음 보네요.”
“저도 오랜만이네요. 아마 운후 아저씨도 많이 참고 있었을 거예요.”
오랜 시간 동안 절제된 생활을 하던 운후지만, 옛 생각이 나서 그랬는지 이번만큼은 자제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그가 과거 왈패에 사파문도였다는 것을 모르는 류이영에게는 굉장히 낯선 모습이겠지만.
“오늘 하루는 완전히 푹 쉬도록 놔두죠. 우리는 밥 먹고 바깥에 나가볼까요? 어차피 장씨상단에도 노야께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해서요.”
“좋아요.”
하현은 운후와 진유강을 그대로 두고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그들은 지난 몇 개월간 정말 쉴 새 없이 하현을 따랐기에 때로는 이런 휴식도 필요한 법이다.
어차피 남궁세가에 돌아가면 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계속될 테니까.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