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하현이 그의 집무실로 찾아가자, 총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엄상지는 지금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현은 결국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인이 내어주는 차향을 맡으며 잠시 명상을 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바깥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
드르륵-
“대협! 기다리셨습니까?”
그리고는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엄상지가 뛰어 들어왔다.
하현이 기다리기 시작한 지 일다경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의 뒤에는 조금 전 하현을 가로막았던 총관도 그를 따라 들어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하 교육을 잘못했습니다. 대협께서 부르실 때는 언제든, 무슨 일이 있든 우선순위라고 말해 놓았는데, 그만 결례를 범했습니다. 뭐 하느냐? 빨리 사죄드리지 않고!”
총관은 쭈뼛쭈뼛 하현의 앞으로 다가와 그에게 부복하고는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귀인을 몰라뵙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일어나세요.”
하현은 급히 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키고는 엄상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달라는 뜻이었다.
엄상지는 눈치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곧장 입을 열었다.
“대협을 이곳으로 보내고 나서 이놈이 찜찜했는지, 저한테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조금 전에 전했습니다. 저는 그 길로 바로 오는 거고요.”
“급한 회의가 있으시면 끝내고 오셨어도 괜찮은데요.”
“아닙니다. 세상에 어떤 회의보다 대협이 훨씬 중요하십니다.”
총관은 엄상지가 장 노야 말고 이렇게 대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도대체 이 소년이 누구인지를 고민하다가 갑자기 퍼뜩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치켜들었다.
“단주님! 혹시 이 분이……?”
“그래. 이 분이 남궁공자시다. 우리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
“아……! 정말 죄송합니다. 공자님!”
“이제 괜찮으니까, 두 분 다 볼일 보러 가셔도 좋습니다. 엄 단주께서도 하시던 회의 마저 하시고 오셔도 되고요.”
“그 회의라면 이미 파하고 다음에 다시 모이는 거로 했습니다. 저는 지금 시간 괜찮습니다.”
“그래요? 영 죄송한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총관을 내보낸 하현과 엄상지는 마주 보고 앉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부탁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사야 하는 물건이 있는데, 돈이 얼마가 필요할지를 몰라서요.”
“네. 알겠습니다. 어떤 형태로 준비해드릴까요?”
“무슨 물건인지 묻지도 않으시는 겁니까?”
엄상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협께서 허튼 곳에 돈을 쓰시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니까요.”
“제 개인적인 일로 돈을 쓰는 거라고 해도요?”
“물론입니다. 인제 와서 황금으로 전부 달라고 하셔도 곧바로 힘들지만,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준비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현이 조금은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지금 그의 태도는 하현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대협이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할까요? 엄가상단의 백지어음을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금액만큼 적어서 물건을 지불하시면 될 겁니다. 한도는 황제의 궁궐을 사시지 않는 한 모두 우리 상단에서 내드릴 수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총관을 다시 불러 어음을 가져오라 했다.
총관은 경공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마치 바람이 휘날리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어음을 가져와 그들 앞에 대령했다.
“이렇게까지 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대협께서 우리 상단에 해주신 게 있는데, 이 정도도 약소합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돈밖에 없지만, 언제든 돈이 필요하면 저를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엄상지의 태도는 실로 절묘했다.
너무 과하면 부담이 되는데, 정말로 하현이 그에게 돈을 가져다 써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하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에게 돈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니지만, 하현은 마음 한쪽이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종무산은 고시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이다.
말을 타고서 반나절은 가야 할 거리.
하현은 그의 일행들과 함께 엄가상단을 나섰다.
이번에는 움직임에 유연성을 위해 말을 타지 않고 경공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제가 달리는 속도에 맞춰 주시면 시간 안에 충분히 갈 거예요. 지도는 제가 이미 다 외워 두었으니 잘 따라오세요.”
하현이 꽤 빠른 속도로 달렸지만, 나머지 셋은 곧잘 따라왔다.
경공이 항상 발목을 잡던 운후도 이제는 상당히 수준급의 경공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류이영도 최근에 진유강, 운후와 함께 수련하며 큰 발전을 이루었기에 종무산까지는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산 아래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에 그들은 종무사를 찾아 올라갔다.
해가 지고 시간은 술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약속 시간까진 한 시진 정도 남았지만, 하현은 미리 들어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는……. 참 기묘한 곳이네요.”
종무사에 들어간 류이영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적막한 밤에 사람 하나 없는 절을 돌아다니려니 으스스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건물이나 절은 깨끗해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더러워지기 마련인데 말이에요.”
하현의 말처럼 종무사는 깨끗했다.
건물들도 거미줄 하나 쳐진 것 없었고, 마당도 낙엽 하나 떨어진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주변에서 뭔가 느껴지시는 것은 없습니까?”
“오자마자 기감을 펼쳐봤는데, 느껴지는 건 없었어요.”
“그렇다면 세 가지 경우겠군요. 정말로 아직 사람이 없거나, 혹은 무공을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이거나…….”
“기척을 숨기는 은신술을 배운 경우겠죠.”
하지만 무엇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기에, 그들은 잠자코 약속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약속 시간이 되었다.
주변의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던 하현의 기감에 무언가 느껴졌다.
“어……?”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어떻게?”
그런데 무인의 기운이 느껴진 곳이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도 없던 법당에서 느껴진 것이다.
‘은신술을 쓰던 사람이 무공을 거둬들인 것인가?’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일단 하현은 그쪽에 신경을 집중하며 말했다.
“저기 법당에서 기척이 느껴져요. 그것도 여러 명이요.”
끼이익-
그때 하현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법당의 커다란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스스스-
그리고 법당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 안에서 사람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형체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미끄러지듯 법당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나타난 사람은 하현 일행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여인이었다. 머리끝부터 말끝까지 흑단으로 감싼 것같이 검은색 일색인 여인.
얼굴에마저 검정 면포를 뒤집어쓰고 있기에, 간략하게 얼굴의 형태만 겨우 보였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장씨상단에서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기에 장 노야가 오시는 줄 알았는데, 소문의 옥룡을 여기서 뵙는군요.”
그녀의 입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히 이곳은 야외이건만, 실내에서 말하는 것처럼 웅웅 울렸다.
“저를 알고 계세요?”
“그럼요. 지금 무림에서 가장 화제의 인물 중의 한 명인데, 제가 몰라서는 안 되죠.”
“암주화(暗駐花) 맞으시죠?”
“네. 맞아요. 제가 바로 암주화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을 중개하는 중개인이자, 장사꾼이랍니다.”
하현은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무공을 제대로 익힌 것 같지는 않은데.’
무공을 익힌 것은 확실한데, 그 수준이 높지는 않아 보인다.
하현의 일행 중에서 무공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류이영보다도 훨씬 못한 정도.
‘그런데 내가 왜 알아채지를 못했지?’
하현의 시선이 암주화를 지나쳐 그녀가 나온 법당으로 향했다.
‘아직도 저 안에 몇 명이 있어.’
법당 안에서는 아직도 기척이 느껴진다.
그들 역시 암주화의 호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한 기운을 가졌다.
그때 암주화의 목소리가 하현의 상념을 깨어버렸다.
“저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원하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네. 원하는 물건이 있습니다. 황금으로 된 조각상을 팔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고요?”
“아……! 그 물건 말씀이시군요. 검을 들고 있는 사내의 조각상을 말씀하시는 것 맞나요?”
하현이 류이영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러자 류이영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 물건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구매할 수 있죠?”
“솔직히 말해서 쉽지 않아요. 우리가 물건을 확보해 놓은 상황이라면 곧장 팔면 되지만, 저도 물건을 가지고 있는 자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자를 저희에게 소개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건 힘들 것 같네요. 그자가 워낙 사람들을 꺼리는 터라.”
그녀는 살풋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자는 저를 믿고서 물건을 팔려는 거에요. 그러니 제 역할이 중요하겠죠? 이런 경우에는……. 중개비에 따라 제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움직이느냐가 달라지겠죠?”
“그렇군요. 중개비와 물건 가격은 얼마입니까?”
“물건 가격은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 물건 주인이랑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니까. 하지만 중개비는 지금 말씀드릴 수 있죠. 기본적인 중개만 원하신다면 은자 서른 개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기 위하면 은자 오십 개를, 마지막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원하신다면 금 한 관을 주시면 됩니다.”
암주화는 금 한 관이라는 말을 정말이지 쉽게 얘기했다.
은자가 백 개가 모이면 그것을 한 관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통의 양민들이 은자 하나면 일 년을 먹고 살 쌀을 살 수 있으니, 엄청난 돈이다.
“그런데 내가 그쪽을 어떻게 믿죠? 금을 줬는데, 그대로 도망쳐 버리면?”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죠. 암주화라는 제 이름이 이 시장에서 이토록 유명한 건 우연이 아니랍니다. 수많은 중개와 거래가 쌓여 많든 신뢰의 이름이죠. 못 믿으시겠다면 중개를 부탁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만, 그렇게 되면 그 황금 조각상을 가지고 있는 자는 굉장히 찾기가 어려우실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만만했다.
암시장의 모든 물건은 그녀를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소문이 날 정도의 명성을 가지고 있는 그녀다.
하현은 잠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황금 한 관으로 중개를 의뢰하죠.”
“탁월한 선택입니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겠어요.”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싶은데.”
“무엇입니까?”
“정보도 파십니까?”
“정보라……. 저는 사고,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취급합니다. 세상에 살 수 없는 정보는 없어요.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지 못했을 뿐이죠.”
“좋네요. 그러면 질문 하나에 답해주시는 데는 얼마입니까?”
“그건 질문을 들어봐야 알겠는데요?”
암주화는 하현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했다.
그녀의 말투에 하현이 아이라서 얕게 생각한다든가 하는 어투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질문을 듣고 가격을 말씀해주시죠.”
“네. 질문해 보세요.”
스윽-
하현이 천천히 그녀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너무나도 은밀하고 천천히 움직이는 통에, 하현이 그녀에게 가까워 짐에도 그 누구도 하현을 제지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암주화와 이 장(약 6m) 정도까지 다가왔을 때, 하현이 입을 열었다.
“혹시, 그 황금 조각상을 가지고 있다는 자가 무림에서 투귀로 불리는 자입니까?”
“……?!”
면포 사이로 그녀의 당황과 놀람이 전해져 온다.
암주화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 의뢰인에 대한 정보는 팔 수 없는 정보니까요.”
그녀가 금세 평온을 되찾으며 말하자, 어느새 암주화의 코앞까지 다가왔던 하현이 씨익 미소지으며 다시 그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멀리 떨어지더니 말했다.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면 말 안 하셔도 됩니다. 역시 의뢰인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조금 무리였군요.”
“이쪽 세계에도 철칙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제가 잘 몰랐습니다. 결례를 범했군요. 제가 가져온 건 엄가상단의 어음입니다. 여기에 지금 황금 한 관이라고 적겠습니다.”
하현은 어음을 적고는 그녀에게 주었다.
“잘 받았습니다. 앞으로 알아내거나 제가 공자와의 대화가 필요할 때는 엄가상단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이틀 내에 연락드릴 테니,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이 말만 남기고는 다시 법당 속으로 사라졌다.
나올 때의 그 여유로운 모습과는 달리, 몹시도 급하게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는 하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하현은 류이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류 소저, 투귀를 찾은 것 같습니다.”
하현이 질문하며 암주화의 가까이 다가간 이유는 단 하나.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의 의념을 읽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하현에게는 똑똑히 들리는 듯했다.
‘설마 이 자도 투귀를 쫓는 자였나?’라는 생각이.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