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하현 일행은 암주화가 사라지고서도 한참을 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현이 눈을 감고 미동도 하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느끼려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저기 대장…….”
한참을 기다리던 진유강이 하현을 불렀다.
그러자 하현이 슬며시 눈을 뜨며 말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설명해줄 틈이 없었어.”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것이오?”
“암주화의 기운을 쫓고 있었어. 아무래도 저기 법당에 무슨 진 같은 게 쳐져 있나 봐. 저기로 들어가니까 감쪽같이 사라졌네.”
하현은 법당 쪽을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운후에게 말했다.
“운후 아저씨.”
“네. 도련님.”
“진유강이랑 류 소저를 데리고 먼저 엄가상단에 돌아가 계실래요?”
“먼저라니. 도련님께서는요?”
“저는 암주화를 조금 쫓아보고 싶어서요. 돌아가는 길은 기억 하시죠?”
운후는 함께 가겠다고 말하려다가 그 말을 도로 삼켰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일에 하현을 따라갔다가는 짐만 되기에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장! 나는 같이 가고 싶소.”
“넌 안돼.”
“어째서 안 된다는 말이오?”
“넌 은신술이 거칠어. 암주화는 내가 볼 때는 무공 실력은 그저 그래도 기감은 뛰어난 편인 것 같았거든. 내가 아니라면 금방 들키고 말 거야.”
“끄응…….”
진유강은 별말도 못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공 실력은 뛰어났지만, 기를 숨기는 것은 운후보다도 서투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기운이 점점 멀어지니까, 빨리 출발해 볼게.”
그때 가만히 있던 류이영이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하현에게 말했다.
“혹시나 위험할 수도 있는데, 꼭 가셔야 하나요? 암주화가 엄가상단에서 기다리면 연락을 준다고 했잖아요. 중개료도 그렇게나 많이 지불 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요. 조금 전에 제가 투귀를 찾은 것 같다고 했죠?”
류이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암주화는 투귀의 행방을 알고 있거나……. 혹은 투귀를 보호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호한다고요……?”
“네. 뭐, 정확한 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쫓아보려고 하는 거고요. 그리고…….”
하현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제가 위험할 일은 없을 거예요. 혹시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도망치면 되죠. 취월걸개 사부님이 오시지 않는 이상 누구도 저를 잡기 쉽진 않을 테니까요.”
류이영은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하현은 잘 다녀올 테니 엄가상단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고는 법당으로 향했다.
법당 주변을 요리조리 살피던 하현은 법당 문을 열고 그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아…….”
류이영은 하현이 법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그만 한숨을 푹 쉬어버리고 말았다. 하현이 엄청나게 강한 것도 잘 알고 있고, 자신이 따라가면 방해만 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일 때문에 하현이 고생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류 소저.”
“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운후가 류이영을 불렀다.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혹시라도 소저 때문에 도련님이 위험한 곳에 가신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네?”
류이영은 운후의 말을 듣고서 뜨끔했다.
정확하게 그녀의 생각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도련님은 누구보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 같지만……. 오래 봐온 제가 봤을 때 그렇게까지 남을 위해 사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죠?”
“뭐, 다른 이유가 뭐 있겠소? 재밌어서 저러는 거겠지.”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진유강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류이영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그에게 물었다.
“재미요?”
“소저, 아직도 우리 대장을 모르겠소? 조금 전에 무슨 새 장난감이라도 산 아이처럼 눈이 반짝거렸는데 말이오.”
“그렇습니다. 이미 이 일은 류 소저의 일이 아니라, 도련님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도련님은 본인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무공 실력을 증진시켜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분입니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없으니까 하는 말인데, 얼마나 영악한 사람이오? 눈치도 빠르고 말이오. 아마 불리한 상황이 될 것 같으면 곧장 몸을 빼낼 것이오.”
운후는 대답하지 못하고 자신과 진유강을 번갈아 보기만 하는 류이영에게 웃어주고는 말했다.
“우리는 도련님 말대로 돌아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히 여기에 더 있다가는 신경만 쓰이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돌아가는 길은 제가 기억해 두었으니, 따라오시면 됩니다.”
운후는 말하고서는 훌쩍 신법을 전개해 절 바깥쪽으로 나가버렸다.
류이영은 진유강이 군말 없이 운후를 따라나서는 것을 보고서 그를 뒤따랐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신뢰할 수 있지?’
운후와 진유강이 말은 저렇게 했지만, 저렇게 하는 말들이 모두 신뢰에서 나온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현이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고, 하현이라면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와 믿음.
그러면서도 그녀는 조금 씁쓸한 감정이 일었다.
‘결국,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사실은 그녀도 보았다.
암주화를 쫓아가기 직전에 보였던 하현의 즐거운 듯한 얼굴을.
하지만,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나…… 정말 별로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운후와 진유강이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조금 전의 이야기를 해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 일로 그녀는 하현에게 절대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해. 무공 실력을 더 키워야 해.’
진유강의 뒤를 따르던 류이영은 종무사를 흘긋 뒤돌아보고는 다시 앞으로 보며 달렸다.
***
후욱-
법당 안으로 들어선 하현은 기의 흐름이 무언가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민이 형님, 소화누나와 정 대인의 장원에 갔을 때였어. 그게 처음으로 받은 임무였는데.’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소화와 신법으로 수백 리를 쉬지 않고 달리기도 하고, 환현문도를 만나 처음으로 생사결을 지켜보기도 했던 첫 임무.
지금 이 느낌은 환현문도들이 정 대인의 장원에 펼쳐 놓았던 진법과 느낌이 비슷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각까지는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하현은 마치 며칠 전에 있었던 일처럼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면 진법은 확실하다는 거네. 점점 재미있어지네.’
내부는 생각보다 좁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따로 나가는 뒷문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암주화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하현은 법당 내부를 유심히 둘러보며 생각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해서 몸값을 부풀리기 위함일까? 아냐. 겨우 그걸 위해서만 그랬을 리는 없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어, 저건?’
그때 하현의 눈에 무언가 들어갔다.
법당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황금색의 불상이었다.
그 불상은 높이가 석 장, 폭은 일 장이나 될 것 같은 거대한 크기였는데, 묘하게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색이 달랐다.
하현은 그쪽으로 스르륵 다가가 불상을 똑똑 두드렸다.
통통-
그러자 울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하현이 웃음 지었다.
‘속이 비어있어.’
불상 주변을 더 꼼꼼히 살펴보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다리 밑쪽에 사람 손이 들어갈 만한 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속에 손을 집어넣자.
달칵- 끼이익-
불상의 하단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하현은 뒤로 물러서서 불상을 바라보며 검을 쥐고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철컥!
불상 하단의 움직임 멈추자, 그곳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틈이 생겼다.
그 안쪽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하현이 씨익 미소 짓는다.
‘역시, 귀신도 아니고. 사람이 그냥 사라질 리가 없지.’
암주화는 이곳을 통해 종무사와 바깥을 왕래하는 것으로 보였다.
인제 보니 불상은 작은 기관진식으로 보였다.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게끔 진을 쳐 놓은 거야. 정 대인의 장원에서도 비슷한 진이 처져 있었으니, 익숙한 느낌을 받은 거고.’
하현은 별다른 고민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쿵!
불상은 하현이 모두 지나가자, 마치 그를 잡아먹듯이 곧바로 닫혀 버렸다.
계단을 내려가자, 긴 통로가 나왔다.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곳곳에 값비싼 야명주도 박혀 있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진이.’
그리고, 하현은 이곳에서 또 한 번의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법당 안에 펼쳐져 있던 진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는 눈을 감고 기운의 흐름을 느껴보았다.
‘이건 기척을 지워주는 진이다. 이 덕분에 암주화가 법당까지 오는 데에도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거야.’
하현은 이제야 안개가 걷히듯 모든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이제 남은 궁금증은 두 가지뿐이다.
‘암주화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리고 투귀와는 무슨 관계인지.’
하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신기한 듯 통로의 벽을 어루만졌다.
‘진을 이런 식으로도 칠 수 있구나. 어떻게 이렇게 길게 진을 칠 수 있는 거지?’
진법에 대해서는 나중에 취월걸개나 할아버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하현은 계속해서 통로를 이동해갔다.
기척을 지워주는 진법은 하현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그도 타인의 기운을 알아볼 수 없지만,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휘잉-
얼마나 통로를 걸어갔을까? 하현은 아주 작게나마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공기가 움직여 바람이 인다는 것은 바깥과 연결된 곳이 있다는 것.
그는 주변을 더욱 경계하며 소리를 죽이고 은밀히 움직였다.
물론 잊지 않고, 기운을 갈무리하여 그의 안으로 숨기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진법이 어디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통로에 끝에 다다랐을 때, 하현의 귀에 무언가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희미한 소리였지만, 하현은 귀에 내공을 불어넣어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당신 남궁세가랑은 정말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대방파 물건을 훔친 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누누이 얘기했잖아. 그것도 중원 땅이 아니라 해남도여서 한 거라고.”
한 쌍의 남녀가 대화하는 목소리였다.
그중에서 여인의 목소리는 조금 전의 암주화의 목소리였다.
아까보다 더 기품이 없고, 어투가 경박해지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그녀였다.
그리고 남자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았지만, 조금 전의 대화에서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투귀……!’
하현의 예상이 적중했다.
암주화가 투귀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곧바로 만나고 있을 줄이야.
“그러면 남궁세가와 해남파는 무슨 관계라도 있어?”
“내가 알기로는 없어. 지금 해남파는 자기들끼리 싸우느라고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상황인데 남궁세가에 도움을 청할 새나 있었겠어?”
“나도 장 노야가 연락했을 때 어딘가 찜찜해서 사람을 풀어 장씨상단에 옥룡이 왔다는 걸 알아냈으니까.”
하현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여러 가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암주화가 자신이 오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들은 조금 전에 함께 왔던 류이영이 해남파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까지.
‘어떻게 해야 하나.’
하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저 둘을 모두 제압할 수도 있다.
느껴지는 투귀의 공력이 그다지 강하지도 않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물건을 혹시 어딘가에 숨겨 놓았다면?’
제압해 놓고 고문해서 그 위치를 알아낼 수도 있지만, 하현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잠시 생각하고 있을 무렵.
암주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돌려주거나, 아니면 정말로 팔아 버리면 안 되는 거야?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남궁세가는……. 부담스럽단 말이야.”
“절대 안 돼. 해남파의 문도들이 나를 찾으러 올 때까지, 나는 그걸 지키고 있어야 해. 내가 아무리 도둑이라도 목숨을 건 약속은 지켜야 하는 법이니까.”
하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는 더 은밀하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더 들어보고 싶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