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목숨을 건 약속?’
하현의 머리가 팽팽이 돌아간다.
투귀가 바다를 건너 해남파에까지 가서 신물을 훔쳐 나온 것에는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다.
“도둑 주제에 무슨 감상 놀이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이대로 가만히 옥룡에게 조각상을 넘길 거야?”
“그럴 수는 없지.”
“어떻게 하려고? 난 이미 옥룡한테 소개료로 어음도 받았단 말이야. 네가 어떻게든 한다며?”
“그건 단순히 소개료잖아? 노력했는데 물건을 가진 자가 팔지 않겠다고 하면 뭐 어떡할 거야?”
가만히 소리를 듣고 있는 하현의 눈썹이 꿈틀댔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하현의 돈을 떼먹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결국은 도둑과 사기꾼의 조합이겠어.’
하현은 둘의 관계를 유추했다.
암주화와 투귀가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인지는 관심이 없었는데, 일 적으로는 관계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도둑과 장물아비.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겠네.’
투귀가 어디선가 훔쳐 온 값비싼 물건들을 암주화가 암시장에서 유통하며 돈을 버는 단순한 구조로 보였다.
생각을 거듭하자, 조금 전에 가졌던 의문들도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각종 진법이나 기관까지 이용해서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거야.’
보통 사람들은 불가해한 현상 앞에서는 논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하현처럼 어떻게 한 것인지를 파악해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눈앞의 상대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이번 암주화의 경우에는 굉장한 고수로 보이려고 하거나, 혹은 신선 같은 존재로 보이게 하기 위함이겠지.’
그녀의 분위기를 고상하고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으로 꾸며 그녀가 어떻게 암시장에서 그런 물건들을 잘 구할 수 있는지 의문 자체를 가지지 않게 만든다.
제법 괜찮은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단, 하현처럼 상대의 기운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애초에 하현이 암주화에게 이상함을 느낀 이유도 그녀가 겉으로 보이는 신비로운 모습에 비해 너무나도 형편없는 무공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으니.
“일단은 이 어음을 정말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 어음인지부터 확인해 봐야 해.”
“남궁세가의 공자가 준 건데 문제가 있으려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황금 한 관이라면 이제 접선 장소를 또 바꿔야 해. 종무사는 너무 오래 썼어.”
“그래. 지금 사람을 보낼게.”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 사람의 기척이 사라졌다.
더 기운이 약한 사람이 나간 것으로 보아, 암주화가 나간 것으로 보였다.
어느새 하현은 통로 출구 가까이에 다가가 있었다.
‘하나, 둘, 셋…… 열넷, 열다섯. 강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한 번에 열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을 조용히 제압하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하현은 가만히 주변에 기감을 펼쳐 이곳에서 나가 투귀에게 가기까지 무공을 배운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를 확인했다.
그 숫자는 모두 열다섯.
고수라고 할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을 제압하려다 작은 소리라도 나면 투귀가 도망칠 것이 뻔했다.
‘만약 모두 죽이라고 하면 더욱 쉬울 텐데.’
오히려 그들 모두를 암살하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린다면……. 죽은 자는 소리를 내지 못할 테니.
하지만, 하현은 그의 필요에 따라 사람 목숨을 가지고 노는 살인귀가 아니다.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고민했다.
‘이대로 다른 사람은 무시하고 투귀를 잡으러 간다면?’
그러나 이 방법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투귀의 신법은 일절로 온 무림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
물론 취월걸개보다야 당연히 빠르지 못할 것이고, 하현도 그보다 느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사이에 암주화가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둘 중에 하나만을 잡으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쪽이 신물을 들고 도망가버리면 그만이기도 하거니와, 혹여나 둘 다 숨겨놓은 곳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보고 다시 오자. 기회는 지금뿐만이 아니야.’
하현은 섣부르게 나서서 일을 그르치기보다는 조금 더 준비해서 확실히 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왔을 때는 주변을 경계할 필요가 없기에, 통로의 길이와 구불구불한 정도를 모두 기억하며 신법을 전개했다.
올 때에 비해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건만, 하현의 머릿속에는 통로의 생김새와 지형이 모두 각인되어갔다.
***
엄가상단으로 돌아온 하현이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지도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지도가 아닌 주변 지형이 아주 세세하게 나 있는 고가의 지도.
다행히 엄상지가 쓰던 지도가 하나 있었고, 그는 그것을 하현에게 내어주었다.
“단주님. 이 지도 제가 마음대로 해도 되죠?”
“그럼요. 지도는 또 사면 됩니다. 어차피 낡아서 새로 살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낡았다고 하기에는 종이가 아직도 빳빳했지만, 하현은 지도를 받아 들었다.
하현에게 무언가 하나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긴 그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장씨상단의 산하 상단주에 불과했던 그가 독립해서 거상이 되도록 해준 황금 수십 관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투자한 투자자가 얼마나 예뻐 보이랴.
“붓도 잠깐 쓸게요.”
하현은 지도에 이어 붓도 빌리더니, 지도를 펼치고 종무산을 찾았다.
“종무사는 종무산 서쪽 중턱에 있었고, 통로는 종무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쭉 내려갔으니까…….”
하현은 혼잣말하며 종무사에 붓을 가져다 대더니, 아래쪽으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긋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제 지나왔던 통로가 다시 펼쳐진다.
그 길이와 높낮이 등등을 고려하며 계속 선을 그었다.
통로가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인지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우뚝-
어느 순간, 붓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종무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있는 황천(潢川)이라는 지역이었다.
“이곳에 있군.”
하현이 지도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는지, 엄상지는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여기 황천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여기에 아마 금덩이가 숨어있을 거예요.”
“금덩이요?”
“아직 자세한 걸 말씀드리기가 좀 그래서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부탁드릴 게 하나 있어요.”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아마 머지않아서 어제 저한테 주셨던 어음을 금으로 바꾸겠다고 오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황금 한 관을 적었습니다.”
황금 한 관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썼다고 얘기하는데도, 엄상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현이 썼다면 꼭 필요한 곳에 썼으리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네. 금 한 관을 준비해 주었다가, 전달하겠습니다. 그게 부탁이신 겁니까?”
“아니요. 부탁은 이제부터인데.”
하현은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어 엄상지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내용물이 거의 없는데요?”
“이건 사천당문의 만리향이라는 건데요. 그자에게 건넬 금에 딱 한 방울만 떨어뜨리시고, 나머지는 저에게 돌려주실래요?”
“만리향이라면……?”
“그자를 추적하려고 해요. 아마도 황천에 숨어있긴 할 것 같은데,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을 테니까요.”
엄상지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일이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기도 했고, 하현이 무슨 일을 하는지 호기심도 들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대신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지어져 가면 저에게도 꼭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고요.”
“지금도 충분히 많은 도움 받고 있어요. 감사할 따름이에요.”
하현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그가 머물고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운후와 진유강, 그리고 류이영은 하현이 들어오자 눈을 빛내며 그에게 물었다.
“어디인지 찾아내셨습니까?”
“응. 황천이라는 작은 마을이야.”
“그러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곳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니오? 무공 실력도 그리 뛰어나지 않다면서 당장 그 연놈들을…….”
“진유강. 흥분하지 마. 네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그렇게 접근하다간 죽도 밥도 안 될 수도 있어. 끝까지 모른다고, 자신은 투귀가 아니라고 잡아떼면 어떡할 거야?”
“본인 입으로 투귀라고 했다는 걸 대장이 들었지 않소? 잡아다가 몽둥이찜질이라도 해 주면…….”
하현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고문이라도 하자는 거야?”
“흠흠. 꼭 그러자는 건 아닌데…….”
“류 소저는 어떻게 생각해요? 투귀가 목숨을 건 약속이 어쩌고 이런 말을 하긴 했는데,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요.”
“가능하다면 그자와 대화해보고 싶긴 해요. 솔직히 말해서 이상한 점이 많긴 하거든요.”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애초에 우리 해남파의 신물이 있다는 것을 투귀가 어떻게 알았는지도 의문이고, 그것을 빼내려면 해남파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해왕각으로 들어가야 하거든요. 아무리 우리 해남파의 상황이 어수선하다고 할지라도 그자가 해남파의 가장 중심부까지 너무나도 쉽게 들어왔다는 것이 이해되지는 않았어요.”
“또 이상한 건 없었나요?”
“분명히 몇 가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일은 모두가 처음이라 그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서 한참을 고민하던 하현이 말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이렇게까지 고민한 제가 바보였어요. 대화로 풀어나가면 되는 일이었잖아요? 대화로.”
“대화요……?”
“네. 평화적인 대화.”
하현이 씨익 웃었다.
류이영은 종종 운후나 진유강에게 하현이 갑자기 미소를 지을 때면 뭔가 무서운 기분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녀만은 거기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진유강의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이틀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동안 하현은 황천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그곳의 지리를 모두 익혀 두었다.
게다가 암주화와 투귀가 숨어있을 곳으로 생각되는 전각도 미리 찾아 두었다.
야트막한 언덕에 전각 한쪽을 기대고 있는 전각이었는데, 그 언덕에서 종무산까지를 직선으로 그으면 하현이 지도에 그렸던 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선이 그려진다.
즉, 저 언덕 속에 종무사 법당과 통하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엄가상단에 한 사내가 어음을 금으로 바꾸러 나타났다.
그는 금을 받아 들고는 곧장 상단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졌고, 하현은 그가 충분히 이동하기를 기다렸다가, 기운을 끌어올려 만리향을 뒤쫓았다.
당가주 당규호에게 배워둔 수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
그런데 만리향을 느끼던 하현이 깜짝 놀란 소리를 내었다.
“왜요? 뭐가 잘못되었어요?”
“아니요. 너무 빨라서요. 신법이 뭐 이렇게 빠르죠?”
금을 가져온 사내의 신법이 생각보다도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분명히 겉으로 볼 때는 그리 강한 무공을 가진 자 같지는 않았는데,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수 있다니.
“설마……. 투귀가 금을 찾으러 직접 온 건가 봅니다.”
“그러면 조금 전의 그자가 바로……?”
“확실하진 않아요. 다만, 투귀의 신법은 신출귀몰하다고 했죠.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자는 흔치 않아요. 일단 제가 따라가 볼게요.”
하현은 류이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서는 곧장 몸을 날렸다.
신투가 달리는 방향은 황천 쪽이 아니었다.
엄가상단이 있는 고시현에서 황천으로 달리려면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는 북쪽으로 곧장 달리고 있었다.
“왜 위로 올라가는 거지? 그새 거처를 옮겼나?”
하현은 은밀히, 하지만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렸다.
투귀가 아무리 빨리 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현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둘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져 가고 있었다.
물론, 투귀는 하현이 그의 뒤를 쫓아온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여기가 어디지?’
얼마나 달렸을까.
투귀의 달리기가 점점 느려지는가 싶더니, 안휘성과의 경계 부분에 있는 야트막한 산 하나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산에서도 한참을 달리던 그가 도착한 것은 아주 커다란 바위 앞.
하현은 멀찍이서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육안으로 식별하기에는 꽤 먼 거리였건만, 하현은 안력을 돋워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드르륵- 구우우우-
그가 바위 앞에서 한참 무언가를 하더니, 갑자기 바위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옆으로 움직였다.
‘기관진식이다.’
하현은 얼마 전 공동파에서 저런 것을 본 적이 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위가 움직인 그 뒤에는 커다란 동혈이 나왔다.
‘……!’
햇빛이 비치며 동혈 안을 비춘다.
그리고, 그곳을 본 하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안에는 언뜻 보기에도 엄청나게 많은 금은보화가 쌓여 있었다.
‘이곳은 투귀가 훔친 물건을 숨겨놓는 곳……?!’
하현은 엄청나게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지금까지 그를 덮치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본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