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쿠구구 콰앙-
시간이 조금 지난 후, 하현은 동굴에서 빠져나와 다시 바위를 밀어 입구를 막아 두었다.
바위를 밀면서 기관진식이 와드득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하현은 그에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해야 투귀가 다시 이 동굴에 못 들어가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차라리 잘 됐어.’
그는 투귀의 무공 실력으로는 절대 이 바위를 밀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면 이제 할 거는…….’
하현은 투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아직 희미하지만, 느껴진다. 일들이 모두 정리되면 사천이나 다녀와야겠어. 만리향 한 병만 더 달라고 해야지.’
파앙-
하현은 가볍게 발을 굴러 신법을 전개했다.
그런데, 그의 방향은 만리향이 느껴지는 방향이 아니었다.
일단 그가 향한 곳은 남쪽. 엄가상단을 향해서였다.
쏜살같이 신법을 전개하며 달려가는 하현의 왼손에는 해남파의 신물이 꼭 쥐여 있었다.
***
시간은 아직 한낮.
엄가상단으로 돌아온 하현은 숙소에서 오매불망 하현만 기다리고 있던 운후와 진유강, 그리고 류이영을 불렀다.
“도련님, 성과가 있으셨습니까?”
“표정을 보니까 분명히 뭔가 해내신 것 같소만?”
하현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역시. 우리 대장이 나서면 안 되는 일이 없다니까?”
“공자! 그렇다는 것은……?”
류이영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하현에게 말했다.
그녀의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하현이 성과를 보았다고 하니 이게 현실인가 헷갈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스윽-
하현은 그녀에게 싱긋 웃어주며 품에서 조각상을 꺼내 앞으로 내놓았다.
그 조각상을 본 류이영의 눈이 두 배쯤은 커졌다.
“이, 이것은……! 지금 이게 꿈인가요?”
“틀림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아마 진품인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요?”
“맞아요. 틀림없는 진짜입니다.”
하현은 그것을 류이영에게 건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녀와 운후, 진유강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이상하네. 그건 나한테만 보인 건가.’
하현은 이 신물을 처음 보는 순간, 이 조각상을 만든 해남파 사조의 깨달음이 그에게로 흘러들어왔다.
괜히 신물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느껴버린 것이다.
해남파의 사조는 조각상을 만들 때 엄청난 쾌검으로 조각했다.
일필지휘로 글씨를 쓰듯, 한 호흡에 수십, 수백 번의 칼질을 하며 그 검흔을 남기기 위해 애썼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이 조각상을 보고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범인을 아득히 넘어서는 재능을 가진 진유강조차도.
“저는 이제 또 나가볼 거예요. 신물을 찾은 것은 정말 운이 좋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투귀를 잡으시려는 겁니까?”
“네. 모르고 있었으면 모르지만, 알고서 그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하현은 고개를 저었다.
“투귀를 잡으러 가는 건 저 혼자가 될 겁니다.”
“나도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 텐데…….”
“아니, 도와주려는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너나 운후 아저씨의 신법으로는 투귀를 잡을 수 없어.”
“투귀의 신법이 그 정도란 말이오?”
“응. 아마도 투귀가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활동하는 협객이었다면 무림에서 제일 잘 달리는 사람으로 손꼽혔을 거야.”
“허어-. 대장이 그리 말할 정도라니. 깨끗하게 포기하겠소.”
진유강이 아주 조금 장난기가 들어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하현은 그 누구에게도 실력으로는 농담하지 않는다.
그가 투귀의 실력이 저 정도라고 말했을 정도면 그가 마음먹고 도망친다면 운후나 자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다른 걸 부탁드려요.”
“무슨 일인지 말씀만 하십시오.”
“저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게요.”
하현은 비장한 표정의 류이영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류 소저는 일단 이번 일에서는 같이 안 다니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째서요? 제가 무공이 약하기 때문인가요?”
“아뇨. 설마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에요.”
“그러면……?”
하현이 류이영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걸 들고 돌아다니실 거예요? 그것도 아니면 여기에 두고 돌아다니실 건가요? 만약 그렇게 하시면 불안해서 마음이나 놓이시겠어요?”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류 소저는 여기서 그 신물을 지키고 있어 주세요. 엄 단주님의 금고에 보관하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그것보다는 류 소저가 직접 지키고 있어 주시는 게 제가 더 마음이 놓일 것 같으니까요.”
“알겠어요.”
하현의 설명을 들은 류이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곧바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자신이 지켜야 마음이 놓인다는 말에 한 번에 넘어가 버린 것으로 보였다.
“그럼 저희 둘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오?”
“너와 운후 아저씨는 곧장 장씨세가로 가서 암주화에게 연락을 넣어달라고 부탁해.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그녀를 만날 약속을 잡아.”
“그리고?”
“그녀를 만나면 계속 시간을 끌어서 그녀를 잡아 두는 거야. 물건값을 협상해도 좋고, 그게 아니라면 다른 물건은 구할 수 없냐는 식으로 얘기해도 좋고.”
“다른 물건?”
하현은 투귀의 동굴 속에 있던 골동품 중 값이 나갈 것 같은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숨겨진 상자가 아닌 바깥 상자에 있던 물품 중에서 황실의 문양이 각인된 보검을 떠올렸다.
“보검. 그것도 황실에서 쓰던 검을 하나 구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끌어봐. 분명히 암주화는 네 이야기에 흥미를 보일 거야.”
하현은 암주화가 자신이 팔 수 있는 물건이라면 분명히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를 오래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직감처럼 다가오는 확신이었다.
“언제까지 시간을 끌면 됩니까?”
“제가 갈 때까지요. 만약 시간을 끌어도, 끌어도 제가 안 온다면…….”
하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더니 말을 이었다.
“제압해 버리세요. 그녀를 제압해서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면 됩니다.”
“그래. 그건 자신 있소.”
“호위들의 무공 수준은 솔직히 말해서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두 분이라면 충분히 이기실 수 있으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도련님.”
하현은 여기까지 말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슬슬 투귀에게 묻혀놓은 만리향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전 먼저 움직일게요.”
이 말만 남기고 숙소를 나간 하현은 발을 굴러 신법을 전개했다.
이제는 투귀를 만나볼 차례였다.
***
그날 밤이 되었다.
해가 져서 앞은 어두침침했으나, 투귀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는 황천의 그 은신처에 숨어있다가 나왔는데, 입고 있는 복색이 낮에 엄가상단을 다녀왔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까는 돈이 많은 어느 상단의 수하 같은 단정한 옷이었다면 지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두운 색의 야행복(夜行服)을 입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도둑이었다.
그의 신법은 실로 경쾌했다.
전체적인 무공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아닌데, 신법만은 정말 일절이라 할만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황천의 북서쪽에 있는 정양(正陽)이라는 지역에 있는 한 고관대작의 집.
황실에서 평생을 일한 그 고관대작이 은퇴하여 고향으로 내려오며 황제에게 보관(寶冠 : 보석으로 꾸민 관)을 하사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훔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투귀가 온 무림에서 유명한 도둑인 이유는 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물건을 훔치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값비싼 물건이 투귀에 의해 훔쳐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것이 투귀를 최고의 도둑으로 만드는 것이다.
처억-
투귀는 어느덧 정양 고관대작의 장원에 도착했다.
황궁에서 일하며 얼마나 큰 부를 쌓았는지, 장원의 크기가 과장을 조금 보태어 작은 마을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전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투귀는 기척을 완전히 숨기고 지붕에 바짝 엎드리더니, 그대로 기어서 살짝 열린 창문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허리와 팔, 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연체동물처럼 자연스럽게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 전각 주변을 지키는 수많은 경비병이 있었건만, 그들 중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쌍의 눈동자.
그 전각의 맞은편 지붕에 있는 하현의 눈동자만은 그를 쫓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하현은 투귀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뱀이 떠올랐다.
조금 전에 움직임은 마치 뼈가 없는 생물같이 기괴한 각도로 몸이 틀어져서 들어갔기 때문이다.
‘몸을 저렇게 만들어주는 무공이 있는 건가? 아니면 선천적으로 유연한 건가?’
물론 하현도 저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기척을 완전히 죽이고, 소리를 하나 내지 않으며 창문에 매달려서 들어가는 것쯤은.
하지만, 저렇게 기괴한 각도로 몸을 꺾을 수는 없다.
그는 투귀에게 그것도 어떻게 하는 것인지 꼭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숨을 죽이고 그를 기다렸다.
스윽-
잠시 후.
투귀가 들어갔던 창문에서 그가 다시 빠져나왔다.
들어갔을 때와는 달리 등에는 작은 행낭 같은 것을 메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자연스럽게 다시 지붕으로 올라가더니 신법을 전개해 다른 전각 지붕을 밟으며 장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장원에서 벗어나 바로 옆에 있는 갈대밭으로 들어갔다.
갈대밭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그는 등에 메고 있던 행낭을 끌러 그 내용물을 확인했다.
번쩍-
소문대로 순금에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보관에 달빛이 반사되어 그 존재감을 뽐낸다.
투귀는 그 금관을 황홀한 표정으로 한참 구석구석을 면밀히 보았다.
아주 혹시나 가품은 아닌지, 혹은 가지고 나오면서 어디 손상된 곳은 없는지를 확실히 보려는 것이다.
“흐흐흐…….”
검수를 모두 마친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이번 작업은 생각보다 너무 쉬웠단 말이야. 꼭 이렇게 작업이 쉬우면 불운이 따르던데, 오늘은 그런 것마저 없군.”
그는 웃으며 금관을 다시 행낭에 조심스럽게 쌓아 넣고는 등에 둘러맸다.
이제 이것은 그의 보물창고에 들어가 암주화가 주인을 찾을 것이다.
그는 행낭이 단단히 묶인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정도의 물건이면 값이 얼마나 나가지?”
“……?!”
그때 그는 나직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투귀는 순식간에 경계태세를 취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냐니까? 말하기 싫은 건가? 아니면……. 팔기 싫은 물건인가? 해남파의 신물처럼?”
“뭐, 뭐라고?!”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갈대밭 사이에 누군가의 신형이 보였다.
“누구냐!”
챙!
그는 허벅지에 달려있던 단도를 역수로 뽑아 들고 나타난 사람을 노려보았다.
“누구긴. 네가 사기 치려고 한 사람이지. 네가 아니라 너희들이라고 해야 맞나? 암주화까지 껴있으니 말이야.”
“호, 혹시…… 남궁세가의 옥룡?”
“그래. 남궁세가의 남궁하현이다.”
스윽-
하현이 갈대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있었는데, 허리의 흑룡검이 아닌, 등에 메고 있던 적룡검을 들고 있었다.
“모두 알고 왔군.”
“그래. 그러니 모두 이야기해 줘야겠어. 지금 등에 지고 있는 물건은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내가 어째서?”
“넌 나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하!”
투귀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송아. 내가 여태까지 무림에서 투귀라는 이름을 받을 때까지, 이런 상황이 한 번도 없었을 거 같으냐?”
“뭐?”
“무림인들은 이게 문제야. 내가 이렇게 대치하고 있으면 어째서 싸워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펑!
그는 말을 마치는 순간, 바닥에 폭환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법을 발휘하여 그곳을 벗어났다.
파바바바박!
조금 전까지 그가 보였던 신법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가 펼쳐졌다.
중원 전체에서도 신법으로 따지자면 한 손에 꼽힐 자신이 있는 그였다.
그는 이대로 암주화에게 달려가 그녀를 데리고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달려 갈대밭을 벗어난 그는 껄껄 웃었다.
“하하! 남궁세가의 공자도 별 볼 일 없군, 나를 잡으려면 취월걸개는 와야……커억!”
콰당- 쿠당탕탕!
그는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갑자기 무언가 그의 발목을 강하게 타격해서 순간 균형을 잃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내공으로 몸을 보호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꽤 깊은 타박상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 갈대밭에 있었던 하현이 서 있었다.
어느새 그를 따라와 검집으로 그의 발목을 후려친 것이다.
하현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당신이 나와 순순히 싸워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