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네, 네가 어떻게?”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것에서 패배했을 때, 그 패배감을 훨씬 크게 느낀다.
지금 투귀가 그랬다.
그는 신법에 있어서는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조금 전 그의 움직임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움직임이었다.
“제법 빠르기는 하지만, 세상에 당신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조금 전에 사부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던데, 당신은 사부님과 비교할 수도 없어. 그분이 얼마나 빠르신데.”
“사부님……? 넌 나를 어떻게 알고 쫓는 것이냐? 목적이 뭐지?”
“목적?”
하현이 왜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도둑을 잡는 데 이유가 있나?”
“뭐라고?”
“그래. 뭐, 그건 중요한 건 아니지. 궁금한 것도 조금 있고 말이야. 당신 해남파와 무슨 관계지?”
순간 투귀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하현의 입에서 갑자기 해남파라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무슨 관계냐니. 그게 무슨…….”
“다 알고 왔어. 해남파와의 목숨을 건 약속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묻는 거야.”
“뭐?!”
투귀의 얼굴은 놀람을 넘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해남파와의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약속한 해남파 사람을 제외하면 암주화 단 한 명뿐.
“어디서 그걸 알게 되었지? 혹시 암주화가?”
“아니. 이걸 보면 대답이 될까?”
“무엇을……!”
투귀는 또 하현에게 무엇인가를 물으려다가, 하현이 보인 행동에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스릉-
하현은 이번에는 검집에서 적룡검을 꺼내 들더니, 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런데 그가 즐겨 쓰는 남궁세가의 기수식은 아니었다.
검막이쪽에 손가락을 더욱 붙이고, 언제든지 팔이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살짝 든 상태의 자세.
게다가 검을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쥔 좌수검(左手劍).
바로 해남파의 검술을 펼치기 위한 기수식이었다.
“어떻게 해남의 무공을……?!”
샤악-!
그가 경악성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하현에게 물었지만, 하현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휘익!
하현의 손에서 중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상리를 가진 검법이 펼쳐진다.
비스듬히 눕혀진 하현의 검은 날카롭게 대기를 갈랐다.
‘류 소저에게 배운 기본기……. 그리고 조각상을 보았을 때 느꼈던 깨달음을 하나로 합치면…….’
무공은 의기의념과 초식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제대로 된 하나의 무공을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하현에게 있어 초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초식은 검로가 지나갈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을 연구하여 그 길을 실전에 쓰기 전에 사전에 익혀 놓는 것.
즉, 하현처럼 본능적으로 어느 검로가 가장 최적의 검로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그 초식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억-
한참 동안 검을 휘두르던 하현의 검이 멈추었다.
하현은 진중한 표정으로 여유롭게 투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넘어갔나……?’
그가 펼친 무공은 엄밀히 말하면 해남파의 무공과는 조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해남파의 무공을 창시한 종사와 하현의 깨달음이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으니.
‘넘어갔다.’
하지만, 투귀의 표정을 본 하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투귀의 안목으로는 그의 검법이 해남파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
아까 뽑아 들었던 단도는 어느새 다시 검집에 갈무리한 채였다.
“해남파에서 오신 겁니까?”
심지어는 하현에게 존댓말까지 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옥룡은 분명히 남궁세가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검존의 손자…….”
“내가 그것까지 말 해줘야 합니까? 지금 당신에게 중요한 건 ‘어떻게’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났다는 게 중요하죠.”
하현도 조금 전까지 보이던 적대적인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그에게 말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투귀는 지금 하현의 말에 거의 다 넘어간 것 같았다.
하현은 쐐기를 박으려 그에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지금 남궁세가에서는 해남파의 제자들과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남궁세가에, 그리고 또 일부는 저와 함께 이 주변에 있습니다. 모두 당신을 찾기 위해서.”
그러자 투귀가 하현에게 한 발자국을 크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그러면 해남파가 드디어 중원으로 나오기로 결정된 겁니까? 이제 그 지긋지긋한 논쟁이 끝난 겁니까?”
하현은 아주아주 조금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나 하지 않았다.
‘투귀는 정말로 해남파와 연이 있는 거였어.’
그가 하현에게 묻는 것으로 보아, 해남파의 사정을 꽤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보였던 그의 감정은 ‘기쁨’이다.
해남파가 중원으로 진출하기로 결정된 것이, 아니 그 전에 해남파의 내부 갈등이 끝난 것에 대한 기쁨이다.
그렇기에 하현은 투귀와 해남파의 관계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는 해남파와 연이 있다고 하기보다는 해남파 내부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두 부류 중에서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무인들과 연이 있다고 할 수 있어 보였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 갈등은 아직도 진행 중이에요.”
“아…….”
투귀의 얼굴에서 진한 아쉬움이 스쳐 나온다.
그러더니,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하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신물은 드릴 수 없습니다.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제 약속은 해남파가 중원으로 진출하기로 결정되면 그때 돌려주기로 한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알고서 저를 찾아오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다시 찾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땅을 구르느라고 옷에 잔뜩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내더니, 하현에게서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하현은 아주 잠깐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언뜻 정신을 차리고는 그를 다시 불렀다.
“저기요. 제가 언제 돌아가라고 했어요?”
“네……?”
“아직 궁금한 것, 물어볼 것이 태산인데 이러고 돌아가신다고요?”
투귀는 당황한 듯 하현을 돌아보았다.
하현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제가 이 상황에 사연이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하면서 보내드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해남파에서 문파의 일이 정리되지 않고서 저를 찾으라 사람을 보냈다면 그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보낸 겁니다. 오해가 있으니 일단 내부의 일을 정리하고서…….”
“그건 해남파와 투귀 그쪽의 일이고요. 저는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왜 도둑을 그냥 보내줘야 하죠? 그것도 중원에 이름을 날릴 정도로 큰 도둑을. 바로 조금 전에도 금관을 훔쳤잖아요? 당장 관아에 넘겨도 뭐라 할 말 없는 거 아니에요?”
투귀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조금 흐르기 시작했다.
하현이 말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조금 전 투행에서 걸리지만 않았어도.’
그는 바로 직전에 도둑질을 하고 나온 것마저 하현에게 들켰기에 발뺌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세요. 첫째로, 관아에 넘겨져서 죗값을 치르시거나…….”
투귀는 이 선택은 추호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무림에서만 활동하는 도둑이 아니다.
고관대작, 상인 등등. 황제의 하사품들도 여럿 도둑질한 적이 있는 도둑.
그렇기에 아마 관아에 잡히면 가벼운 형벌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심하면 그대로 목이 잘릴 수도 있다.
“둘째. 왜 이렇게 도둑질하고 있고, 해남파와는 무슨 일을 사연이 있는가를 나에게 납득 시키는 것.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를 설득할 수 있으면 당신을 놓아주죠. 참고로 말하자면 나에게서 도망칠 수도 없거니와, 혹시나 도망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해도, 황천에 있는 당신의 은신처도 알아놓았으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건 어떻게……?!”
하현은 대답 대신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노려보는 것으로 응했다.
투귀는 잠시 동안 우물쭈물하더니,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하현에게 말했다.
“그러면 그 전에 한 가지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뭔데요?”
“공자께서는 해남파와 무슨 인연이십니까?”
하현은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말해야 그에게 더 유리할까.
또 어떻게 해야 투귀가 모든 말을 하게 만들까.
찰나의 순간 동안 고민한 하현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가 모아온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나온 말이었다.
“해남파의 갈등이 끝나기를 바라는 자입니다.”
투귀는 그 말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하현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그 방법으론 해남파를 중원으로 끌어낼 수 없어요. 도리어 갈등만 심해질 뿐입니다.”
“그게 무슨…….”
“그리고 신물을 돌려줄 수 없다고 했는데, 이미 그것도 확보했어요.”
“뭐라고? 그걸 어떻게?”
“어떻게는 뭘 어떻게예요? 당신의 비밀창고를 찾아냈으니까요.”
“……?!”
투귀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본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그의 은신처를 찾아냈다는 말에는 이렇게까지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 주변에는 사람이 살고 있기도 하고, 그곳을 들락날락하는 사람도 다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비밀창고는 다르다.
그는 그 아무에게도 그곳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암주화에게도 말이다.
암주화가 종종 그에게 물건을 숨겨놓는 창고의 위치를 묻곤 했지만, 투귀는 그럴 때마다 절대 알려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긋고는 했었다.
“거, 거짓말 하지 말아라. 나를 떠보려는 것이지?”
그는 순간 비밀창고를 향해 뛰어가려고 하다가 겨우 이성을 붙잡았다.
“그래. 이렇게 내가 그곳으로 뛰어가면 나를 뒤쫓아 위치를 알아내려고 말이야. 하하! 해남파와 중요한 연이 있는 사람인 줄 알고 예의를 차리려 했건만, 이렇게 뒤통수를 치려 하다니!”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거짓말하지 말아라! 만약 위치를 찾는다 해도, 절대 그것을 빼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현은 그의 말에 여유롭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로 못 할 정도는 아니던데요? 물론 꽤 힘들긴 했어요. 바위를 여는 법은 결국 알아내지 못했거든요. 강제로 열어버리기는 했지만.”
“강제로 열었다고?”
“장인 유사와는 무슨 관계죠? 그 사람이 당신을 위해 그 기관진식을 만들어주었을 리는 없고……. 이미 만들어진 기관을 산 건가요?”
그는 하현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그대로 인정하고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네가 뭘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하현이 그를 보고는 히죽 웃었다.
그는 너무나도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다 주인 없는 물건들이네요? 당신께 아니라는 거죠?”
“……그래.”
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하현은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적이 무엇이든 남에게 피해를 끼치며 이루는 목적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고요.”
콰앙-!
순간 하현이 바닥을 박차며 투귀에게 달려들었다.
어찌나 강하게 발을 굴렀는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화악!
속도에 일가견이 있는 투귀마저 하현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다.
하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눈이 아닌, 휘몰아치는 강풍으로 어렴풋이 겨우 느낄 수 있었다.
휘릭- 팍!
하현은 놀랄만한 속도로 그에게 다가가 투귀의 혼혈을 짚었다.
그는 제대로 반격할 새도 없이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으으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투귀는 신음성을 내며 겨우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혹시나 밤이라 이렇게 어두운가 싶었지만, 잠시 후에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이곳은!”
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은은한 야명주로 겨우 주변이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동굴.
이곳은 그의 비밀창고 안이었다.
“일어났어요?”
“남궁……하현!”
갑작스레 들려오는 하현의 목소리에 놀란 투귀는 고개를 휙 돌려 하현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상자 안에 고이 모아두었던 물건들이 모두 가지런히 꺼내져 있었다.
하현은 그에게 물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서, 누구에게 이 물건들을 훔쳤는지 말하세요.”
“왜……? 어째서 그런 일을?”
이어지는 하현의 말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돌려드리려고요. 원래 주인들에게.”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