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하현은 엄상지의 방에서 나와 운후와 진유강을 데리고 투귀의 비밀창고로 출발했다.
“대장. 꼭 이렇게 밤에 움직여야 하는 거요?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가도 될 것 같은데.”
“뭐. 그래도 되지. 그런데 아주 혹시라는 게 있잖아. 대신에 일찍 끝내면 내일은 수련 빼줄 테니까 지금 끝내놓자.”
“아니, 얼마나 대단한 것을 옮기기에 대장이 수련을 빼준다는 말까지 하는 것이오?”
“가 보면 알아.”
호들갑을 떠는 진유강을 보며 피식 웃은 하현은 잠깐 그가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공자. 투귀를 그냥 보내셨다니……! 저는 그에게 꼭 할 말이…….’
‘류 소저. 이번에는 저를 믿고 넘어가 주세요. 언젠가 그와 꼭 대면하게 될 날이 있을 겁니다.’
‘……공자의 말이니 따르겠습니다.’
동굴로 떠나오기 직전 류이영과 했던 대화였다.
하현은 괜스레 그녀가 신경이 쓰였다.
‘내가 너무 무심하게 일을 처리했나?’
솔직히 말해서 투귀와의 일을 처리할 때, 류이영에 대한 생각 자체를 못 했던 하현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도리어 그녀 생각이 더 나는 그였다.
실망한 류이영의 얼굴과, 가라앉은 목소리가 갑자기 떠오른다.
그래도 나름 오래 같이 다니며 정을 쌓았는데,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류 소저에게는 갔다 와서 제대로 설명해줘야겠어.’
이제 하현은 류이영에 대한 생각을 뒤로 하고 더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 덕에 운후와 진유강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 은근하게 느껴진다.
이전 같으면 용을 쓰며 쫓아왔어야 했을 속도인데, 숨도 거칠어지지 않은 것이 제법 여유까지 부릴 정도니.
“거의 다 도착했어요. 지금까지 오는 길은 잘 기억하고 있죠?”
끄덕-
운후와 진유강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현은 그들을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한 번만 데려다주고서는 제 속도로 달릴 거에요. 저 없다고 해서 길 잃으면 안 되니까요.”
말을 마친 그는 둘을 데리고 계속해서 동굴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하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번 일만 깔끔하게 마치면 드디어 고대하던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
하현과 운후, 그리고 진유강이 동굴에 있던 보물과 금은보화를 모두 창고에 옮긴 것은 결국 해가 뜨고 나서였다.
투귀의 비밀창고는 생각보다 더 컸고, 그 안에 있던 금은보화는 생각보다 더 많았다.
엄상지가 준비해 준 창고가 꽤 컸음에도 불구하고 창고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대장. 그러면 우리는 올라가서 쉬도록 하겠소. 오늘 하루는 편히 쉬어도 된다는 말. 까먹으면 안 되오.”
“그래. 이런 거 가지고 거짓말 안 해. 가서 푹 쉬어. 운후 아저씨도 좀 쉬세요.”
“도련님께서는 안 쉬십니까?”
“저도 쉬어야죠. 그런데 엄 단주님이랑 이 물건에 관해서 짤막하게 이야기 나누고 올라가도록 할게요. 먼저 가서 쉬세요.”
“알겠습니다. 도련님.”
운후와 진유강이 숙소로 올라가고, 하현은 창고로 향했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떴기에, 엄상지는 일꾼들을 데리고 창고에서 물건을 분류하고 있었다.
“단주님. 갑자기 일을 가져와서 죄송해요.”
“아니. 무슨 말씀을! 이런 일이라면 몇 배든지 환영입니다.”
그는 껄껄 웃다가 상자에 들어있지 않은 금이나 은 따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상단에 재투자하신다는 게 여기 이만큼입니까?”
“네. 그리고 왼쪽 보물 중에서도 주인이 없는 물건이 있어요. 그 물건도 금이나 돈으로 처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정 안되면 녹여서 금괴로 만들어도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하하.”
하현은 호탕하게 웃는 그를 뒤로하고 종이와 먹을 가져와 상자 하나, 하나에 물건의 주인과 장소를 적어 나갔다.
그의 손놀림에는 거침이 없었고, 금방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단주님. 이 물건들은 잘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 물건들은 언제까지 돌려줘야 합니까?”
하현은 질문하고 있는 엄상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하현은 그 욕심이 싫지 않았다.
‘이 물건들을 탐내서 저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야. 이 물건의 원래 주인인 고관대작들과 관련이 있을 때, 상단에 가장 유리할 때 저 물건을 돌려주며 생색내고 싶은 거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건 단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세요. 단, 너무 늦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엄가상단에서 투귀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은 언제고 퍼질 텐데, 너무 오래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엄상지는 감탄에 찬 눈으로 하현을 보았다.
물건을 언제까지 돌려줘야 하냐고 단 한 마디를 물었을 뿐인데,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할 일 다 했으니 올라가서 조금 쉴게요. 제가 투자하기로 한 금은보화는 수량을 헤아려서 저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죠. 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하현은 아주 조금의 의심도 없이 등을 돌려 창고를 나가버렸다.
엄상지의 옆에서 하현과의 대화를 듣고 있던 총관이 얼이 빠진 얼굴로 엄상지에게 다가왔다.
“다, 단주님…….”
“왜 그러느냐?”
“저분이 정말 아직 약관도 안 된 게 맞습니까?”
“그래. 얼굴만 보아도 앳된 게 보이지 않느냐?”
“허어…….”
총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현의 말, 행동 모두 기품이 있었고, 힘이 있었다.
그는 지금껏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단 한 명밖에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노야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군요.”
“그래. 노야께서도 젊을 때는 대단하셨지. 지금이야 많이 유해지셨다고 하더라도……. 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네?”
“노야의 젊은 시절 같다고 하기에는 우리 남궁 공자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일 수도 있네. 그는 나도, 노야도 할 수 없는 판단력과 결단력을 가지고 있으시니 말이야.”
총관은 엄상지의 말에 허허 하고 웃음을 흘리다가 갑자기 엄상지에게 포권했다.
“단주님. 단주님의 선택을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저도 앞으로는 사람 보는 눈을 더 기르겠습니다.”
“하하. 이 사람아. 그걸 이제야 깨달았나?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빨리 분류작업이나 하게. 공자께서 이 일이 끝나시면 남궁세가로 돌아가신다고 하였으니 우리가 빨리해야 빨리 보내드릴 수 있네.”
“알겠습니다. 단주.”
총관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다시 금은보화 더미로 뛰어들었다.
엄상지는 그런 모습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되었다.
운후와 진유강은 어제 밤새도록 왔다 갔다 한 것이 힘들었는지, 내일 아침까지 잘 모양이었다.
하현은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가만히 놔두었다.
그리고 잠을 자는 대신 운기조식으로 정신을 맑게 한 하현은 숙소를 나왔다.
휘잉-
완연한 가을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새삼 날이 많이 차가워졌다는 생각이 일었다.
하현은 시간이 빠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겨울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겨울에는 신강양가와의 결전을 치러야 하니까.’
싸움이 싫다거나, 사람이 죽어 나가야 하기에 싫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무림에서 활동한 것도 벌써 수년째.
이미 무림의 생리는 뼈에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다.
다만, 하현은 할아버지나 그의 가족들이 싸우고, 다치는 것이 싫었다.
물론 할아버지가 쉬이 다칠 사람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하압!”
그때 멀리서 희미하게 누군가 내지르는 기합성이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류이영의 목소리였다.
오늘은 운후와 진유강이 쉬는 김에 함께 쉬라고 했는데, 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현은 슬그머니 수련하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쉬쉭!
역수로 쥔 검이 순식간에 빛을 번뜩였다가 다시 회수된다.
쾌검을 주로 사용하는 해남파의 검.
아직 마음의 검의 경지는 오르지 못했는지, 출수와 회수가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하지만 하현과 처음 만났을 때 비하면 많이 발전했다.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지금 소저에게 다른 소리를 하는 건 자존심만 상하게 할 뿐이야.’
하현은 류이영이 이토록 수련을 열심히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 때문이다.
하현은 이번에 투귀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면서 해남파의 신물을 가져다주고 나머지는 모두 그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행동했다.
물론 그 행동이 틀린 행동은 아니었고 오히려 적절한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는 건 확실했다.
‘자신이 조금 더 강했다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전에도 그녀는 한 번 하현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조금 더 강했더라면 도움이 되었겠냐고.
하현은 지금도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는 류이영을 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동정이나 위로를 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어. 그리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 것 같아.’
하현은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해남파의 신물을 보고 느꼈던 그 깨달음.
그것을 해남파의 제자인 류이영에게 돌려주는 것.
그는 그렇게 결심하고서 앞으로 나서며 류이영에게 말했다.
“소저. 수련 중이시네요.”
“아, 공자 나오셨어요?”
“네. 오늘은 쉬시라니까 나오셨네요.”
“가만히 있기 뭐해서요.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그녀는 하현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서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지만, 쉬이 말할 수는 없는 상황.
이 침묵을 깬 것은 하현이었다.
“조금 전의 동작에서는 마지막에 회수하기 직전에 팔꿈치를 조금 더 튕겨줘야 했어요.”
“네……?”
“그리고 다리에 조금 더 힘을 주셔야 해요. 하체가 제대로 몸을 지탱해주지 못하면 그만큼 상체에 힘을 줄 수 없거든요. 뭐랄까. 하체를 지렛대로 쓰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공자. 지금 뭐 하시는……?”
하현이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무공을 가르쳐 드리고 있죠. 소저가 더 강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그런데 지금 이건 해남파의 무공…….”
“만류귀종(萬流歸宗). 모든 물줄기는 결국 바다에서 하나가 되죠. 무공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해남파의 무공을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제가 평소에 생각하던 쾌검의 원리를 적용하면 결국 해남파의 무공과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
류이영은 순간 하현의 말이 맞는 소리인가 의심이 들었는데, 그의 말이니 또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하현은 언제나 맞는 말을 해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하현을 보던 것을 거두었다.
“알겠어요. 어떻게 하라고요? 다리 끝에 이렇게 힘을 주면 되나요?”
그녀는 생각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강해지고 싶으면 죽을 듯이 수련을 하면 된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든 배울 수 있는 건 배워야 한다.
그것이 지난 몇 달간 하현과 함께 다니며 절실히 익힌 마음가짐이었다.
“좋아요. 오늘은 조금 더 힘들 수도 있으니까, 잘 따라오셔야 해요.”
“알겠어요.”
하현은 이날 새벽 늦게까지 류이영에게 그의 깨달음을 모두 전수해 주려 했고, 류이영은 그에 잘 따랐다.
류이영은 자존심이나 의문 따위는 버리고, 순수하게 무공만을 익히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제 남궁세가로 돌아가면 이것도 끝이겠지.’
긴 여정이었다.
해남파의 사람을 제외하고서 이렇게 오래 붙어 있던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그리고 그 긴 여정은 끝을 보인다.
남궁세가로 돌아가면 그녀의 사형제들을 이끌고 해남도로 돌아가야 하기에.
‘그러니까 더 후회 없이 해야 해.’
그런 생각이 들수록, 그녀는 더더욱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지금 휘두르는 검이 마지막인 것처럼.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