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그날 밤. 하현은 류이영을 더더욱 몰아쳤다. 그도 이제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류이영 역시 필사적인 마음이었으므로 하현의 지도를 잘 따랐다.
그녀는 조각상에 녹아 있는 깨달음을 스스로 알아챌 정도의 자질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그 깨달음을 말과 구결로 풀어주었을 때 익힐 수 있는 정도의 재능은 되었다.
그녀가 해남도로 돌아갈 때까지 며칠 남지 않았지만, 그 안에 모든 깨달음을 전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하현과 그의 일행은 말을 몰고 엄가상단을 나섰다.
오전에 장씨상단에 들러 장 노야에게 인사까지 하고 나서였다.
엄상지는 하현에게 언제든 들르라 했고, 서신을 꼬박꼬박 보내겠다고 했다.
게다가 가는 길에 노자로 쓰라며 상당한 은자를 쥐여 주었는데, 상단의 돈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라 하여 하현도 부담 없이 받았다.
“운후 아저씨. 세가에서 연락 온 건 따로 없었죠?”
“네. 없었습니다.”
“그러면 곧장 가면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하현은 그제 아침에 세가에 무슨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을 주고, 별일이 없으면 굳이 답변하지 말라는 서신을 보냈다.
답변이 없었으니 남궁세가에는 별다른 일이 없다는 뜻.
그들을 남궁세가가 있는 합비를 향해 말을 몰았다.
“여기서 합비까지는 말을 타고 가면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요. 밤이 되면 중간에서 한 번만 쉬어가고 곧장 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도련님.”
“잘 따라오세요. 가자 선풍.”
하현은 곧장 선풍을 몰아 말을 달렸고, 나머지도 그의 뒤를 따랐다.
몇 달간의 여정의 끝을 알리는 말발굽 소리였다.
***
이틀간 크게 특별한 것 없는 여정의 끝에 그들은 드디어 남궁세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 대문을 두드리기 전인데도 세가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원래는 항상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남궁세가인데, 사람도 많고 조금은 소란스러운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동파까지 갔다 오는 사이에 다른 세가의 무인들이 와 계시는가 봐요.”
“그런가 봅니다.”
“일단 들어가죠.”
하현이 대문을 두드리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은 하현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어디선가 장칠이 특유의 통통 튀는 걸음걸이로 나타나 하현을 반겼다.
“도련님! 다녀오셨습니까? 그새 키가 더 크신 것 같습니다.”
“아저씨도 잘 지내셨죠? 세가에 별일은 없었고요?”
“그게…….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자세한 건 저보다 가주님께 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안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장칠은 운후, 진유강과도 반갑게 해후를 나눈 후에 그들을 가주실이 있는 전각으로 데리고 갔다.
보통 임무를 갔다 오면 가주에게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궁세가의 사람이 아닌 류이영은 따로 해남파 무인들이 있는 곳으로 먼저 가 있기로 하고, 나머지 셋만 가주실로 갔다.
“현아. 잘 갔다 왔느냐.”
“숙부님!”
가주실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남궁무룡이 아닌 남궁기철이었다.
“놀랐느냐? 나도 이렇게 빨리 가주가 될 줄은 몰랐다. 중간에 미리 연락을 줄까 했는데, 즉위식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모두 생략했기에 그냥 말하지 않았다.”
“이번 신강양가와의 결전을 치르고 나서 가주 자리를 이양하신다고 하셨는데, 생각이 바뀌셨나 보군요.”
“그래. 그런데 따지고 보면 모두 네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저요?”
하현이 의아한 눈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자, 남궁기철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가 무림 각지에서 여러 고수들을 불러준 덕분에 아버님께서 직접 그분들과 움직이고 싶어 하셨다. 그런데 남궁세가의 가주라는 자리는 그렇게 쉽게 현장에 뛰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 그래서 부랴부랴 나에게 가주 자리를 넘기신 거란다.”
“할아버지도 참…… 대단하신 분이군요.”
“그래. 어떻게 수십 년간 저런 성격을 숨기고 사셨는지 신기할 따름이란다.”
하현은 큰일이 아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남궁기철에게 물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나요?”
“아버님께서는 지금 황산에 나가계신다.”
“황산이라면 신강양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 아니에요?”
“맞아. 이제 양가에 대한 수색을 끝냈거든. 혹시나 어디 도망가지는 않는지, 다른 곳에서 원군이 오지는 않는지를 감시하고 계시는 중이야.”
“그걸 직접 하신다고요?”
“그걸 하고 싶으셔서 가주 자리에서 내려오기까지 하신 거니 말이야.”
남궁기철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마 오늘 저녁에는 세가로 돌아오실 테니 밤에 인사드리면 되겠구나.”
“네. 저도 이제 막 집에 왔으니, 정리도 좀 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잘됐네요.”
“그나저나, 해남파의 신물을 찾아냈다고?”
“우연한 기회에 찾을 수 있었어요. 그 물건은 저와 함께 다녀온 류 소저에게 전달했고요.”
“그래. 잘했다. 해남파 무인들이 굉장히 좋아하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더 도움 줄 수 있는 게 없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말이야.”
남궁기철은 하현의 어깨를 두르려 주었다.
벌써 무림의 대소사에 큰 영향을 끼치고 다니는 하현에 대한 대견함이 듬뿍 담긴 행동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서 쉬거라. 이따가 아버님께서 오시면 따로 연락을 줄 터이니.”
“알겠습니다. 가주님.”
하현은 말하고서는 미소 지었다.
남궁기철에게 하는 가주라는 호칭이 아직은 어색했다.
***
운후와 진유강을 돌려보낸 하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해남파 제자들이 머무는 전각부터 들렀다.
하현이 도착했을 때, 평경과 영진, 단청은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마저 흘리려 하고 있었다.
평경은 하현을 발견하고는 곧장 그에게 다가왔다.
“대협! 그렇지 않아도 저희가 인사를 드리러 가려 했는데.”
“대협이라뇨. 가당치도 않아요.”
“겸손치 마십시오. 해남파의 은인이십니다.”
“그러면 더더욱 대협이라는 말은 그만해 주세요. 은인을 민망하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 그건 아닌데…….”
하현은 빙긋 웃었다.
그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십분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현은 그의 기도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궁세가에서 지내시는 동안 작은 깨달음이 있으셨나 보군요.”
“대……소협의 눈은 역시 피할 수가 없군요. 여기서 지낸 시간 동안 남궁세가의 무인분들과 함께 수련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덕에 조금 발전할 수 있었죠.”
하현은 평경은 역시 대방파의 대사형이라고 할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제 해남도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중원에서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모두 했으니까요.”
그는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말하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이, 남궁세가가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그는 어쩔 수 없는 해남파의 사람이다.
해남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쯤 돌아갈 생각이세요?”
“되도록 빨리 돌아갈 생각입니다. 신강양가와의 결전에 도움을 드릴 수 있으면 그때까지 남아있고 싶고, 가주님께 저희 뜻을 전달해 드리기도 했으나……. 저희의 실력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 없을 것 같더군요.”
평경은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싸움에 나서는 무인들의 수준은 너무나도 높았다.
전대, 전전대의 고수들은 물론 구파의 장문인이나 이름있는 세가의 가주들, 전대 가주들이 직접 나섰다.
이런 상황에 아직 후기지수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예 저희를 신경 쓰실 필요도 없게 며칠 안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며칠……. 알겠습니다.”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류이영에게 무공을 전수해 줄 시간이 며칠은 더 남았다는 뜻이었다.
평경에게도 깨달음을 전수해 줄까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자질이 모자라거나, 류이영과 특별히 더 가까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평경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하현이 지금 류이영에게 전수하고 있는 깨달음은 결국 해남파 조사의 깨달음.
그 깨달음을 사문의 어른도 아니고, 새파랗게 어린 외부인에게 배워야 하는 대사형은 자존심이 크게 상할 것이 분명하니까.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네. 소협.”
하현은 그들에게 인사하고는 그의 처소로 돌아왔다.
수개월 만에 오는 곳이지만, 어제까지도 썼던 방처럼 깨끗했다.
장칠이 하현이 있든 없든 매일매일 정성껏 청소해주는 덕분이다.
“잠깐만 쉬어볼까?”
하현은 푹신한 침상에 털썩 누웠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기 때문일까?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 같다.
“아직 잘 시간은 아닌데…….”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하현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고, 결국 스르륵 눈을 감아버린 그는 잠이 들고 말았다.
***
“현아…….”
하현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몇 달간 이렇게 꿈까지 꾸며 잠든 적이 없었는데.
집은 정말 마음의 안식처였다.
“하현아…….”
하현은 번뜩 눈을 떴다.
꿈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허허. 얼마나 깊게 잠이 들었으면 내가 여기까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누?”
남궁무룡의 얼굴은 이전보다는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최근 신강양가를 수색하는 일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기력을 많이 소모한 것으로 보였다.
“잘 다녀왔느냐?”
“네. 저는 잘 다녀왔어요. 서신도 전부 전달했고, 공동파와도 이야기가 잘 되어서 이제는 온전히 우리 세가의 무인이에요.”
“잘했구나. 그렇지 않아도, 우리 세가에 도착한 무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너를 칭찬하더구나. 특히 검성은 네 자질이 하늘에 닿아 있다며 나에게 부럽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도 모르겠어.”
“검성님이요? 그분은 벌써 세가에 와 계시는 거예요?”
“그래. 얼마 전에 도착했지. 모두 네 덕이다.”
남궁무룡은 연신 하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가움과 대견함이 뒤섞인 행동이었다.
“형, 누나들은 만나 봤느냐?”
“아, 아직이요. 방에서 조금만 쉬었다가 보러 가려고 했는데 그만 깜빡 잠들었지 뭐예요.”
“그랬구나. 환이와 소화가 네가 오는 날을 그렇게 학수고대했는데, 서운하겠어.”
“그래요? 그러면 지금이라도 가봐야겠네요. 지금 시간이…….”
“이제 막 해가 졌으니, 아직 자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현이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남궁무룡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다.”
“아, 그런데 할아버지.”
그런데 하현은 이대로 할아버지를 보낼 수 없었다.
기왕 만난 김에 하고 싶은 말을 하자고 생각하는 그였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네. 맞아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신강양가와의 전투, 이번에는 저도 할아버지 옆에서 함께하고 싶어요.”
“뭐라고?”
남궁무룡은 천천히 하현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역시 남다른 기운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인원을 모으고 있다.
철저히 소수 정예, 아니, 다수 정예로 이끌어갈 생각인 것이다.
“흐음……. 네가 실력이 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도 하현이 네가 내 옆을 지켜준다면 든든할 것 같구나. 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네 실력을 지금은 나만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야. 다른 문파엔 후기지수가 아닌 절정의 고수들만을 데려오라 해놓고서는 우리 세가에서는 후기지수가 둘이나 나선다면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지.”
“둘이라니요? 아! 혹시 민이 형도?”
“그래. 민이도 이번 싸움에 참여하기로 했지. 모두에게 인정받아서 말이야.”
“어떻게 인정을 받은 겁니까?”
남궁무룡은 잠시 생각하더니, 하현에게 말했다.
“민이는 수색 과정 중에 만난 신강양가의 고수와의 싸움에서 홀로 승리함으로써 자신의 강함이 다른 후기지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직접 입증했단다.”
“그런데 저는 그럴 상황이 아닌 거군요.”
“그래.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남궁무룡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비무를 한번 해볼 테냐?”
“비무요?”
“그래. 누가 좋을까……. 그래 검성에게 말해 둘 테니 그와의 비무로 너의 강함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지.”
“아직은 제가 검성님을 이길 수는 없을 텐데…….”
“그것은 걱정할 필요 없다. 꼭 이기라고 비무를 하는 건 아니야. 그저 다른 이들이 납득할 만한 힘을 보여주면 될 뿐이지.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거라.”
하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할아버지.”
“오냐. 그러면 나는 처소로 가기 전에 검성에게 들러서 이야기부터 해볼 테니 쉬고 있거라.”
남궁무룡은 하현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주고는 방을 나섰다.
지금 검성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향하는 남궁무룡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의 양옆을 두 손자가 지킨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든든한 그였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