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취월걸개는 짧은 인사를 마치곤 곧장 하현의 방에서 나왔다.
돌아오자마자 만사 제쳐두고 하현부터 만나러 온 까닭이었다.
사실 그는 남궁무룡에게 전해야 하는 급한 소식이 있었다.
순식간에 남궁무룡의 처소로 향한 취월걸개는 늦은 밤임에도 개의치 않고 문을 두드렸다.
쾅쾅-
“무룡. 나다. 빨리 문 좀 열어봐.”
“취월?”
남궁무룡이 곧바로 문을 열어주고, 취월걸개는 그 안으로 바로 들어갔다.
“자네가 어떻게 오늘 왔는가? 총타에 들렀다 와야 해서 이틀은 더 걸릴 거라고 하더니.”
“급히 말해줘야 하는 게 있어서 좀 달렸다. 너무 빨리 달렸더니 귀가 다 먹먹하군.”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무슨 일… 있지.”
취월걸개는 한숨을 돌리고서는 말을 이었다.
“마교놈들이 다시 땅속으로 숨어들려 하는 것 같네.”
“뭐라고?”
“우리가 감시하고 있던 마교의 지부로 의심되는 곳들, 그리고 마교와 연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던 상단과 표국들…. 그들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하네.”
개방에서는 평소에 마교와 관련될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상시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을 통해서 마교의 본거지를 알아내거나, 혹은 그들이 움직일 시기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였다.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남궁무룡은 턱을 쓸었다.
그가 우려하던 바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마교는 굳이 지금 무림을 정복하려 애쓰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음지에서 힘을 더 키우고 키워, 중원을 온전하게 잡아먹을 때까지 기다릴 작정으로.
“신강양가의 동태는 좀 어떤가?”
“그곳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네. 우리의 움직임을 경계하면서도 특별히 도주를 시도한다던가, 혹은 어디론가로 파발을 보낸다거나 하지 않고 있다네.”
“혹시 그곳도 대산천가처럼 버려지는 것인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네. 꼬리 자르기를 하는 대신 마교의 본진이 제대로 숨어들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남는 장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도대체 그놈들 머릿속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어.”
취월걸개가 분통이 나는지 씩씩거렸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떴다.
“혹시….”
“무슨 생각이라도 났는가?”
“마교 놈들에게 우리가 이용당하는 건 아니겠지?”
“이용?”
취월걸개는 잠시 눈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지금까지 입수한 수많은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친다.
중원 각지에서 찾아낸 여러 조각의 정보가 점차 하나로 합쳐지며 하나의 진실을 만들어냈다.
“혹시 이 모든 것이 마교의 권력 싸움일 수도 있네. 마교의 삼대 가문이 마교를 지탱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지. 천마유가는 온건파인 것에 비해 신강양가, 대산천가는 급진파이기도 하고.”
취월걸개는 말하면서도 계속 머릿속으로는 정보와 자료를 정리해 갔다.
“자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네. 마교는 원래 지금 세상에 나오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런데 마교놈들 중에서도 혈기가 왕성한 자들이 있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들은 계속 머리를 누르려 해도 자꾸 튀어나왔겠지.”
“그러니까, 지금 와서 마교가 갑자기 활동을 시작한 것이 사실은 교주의 뜻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게다가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마교의 본산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건 천마유가니까.”
“허허허….”
여기까지 들은 남궁무룡은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조금은 허탈한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천마유가에서 차도살인지계를 펼친 거라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순식간의 둘의 표정이 굳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들어맞는 부분이 많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의 침묵이 지나가고.
무언가 결심한 표정의 남궁무룡이 말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네. 애써 본거지를 찾아놓은 신강 양가를…. 게다가 호전적인 성격의 그들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 그건 당연한 말이지.”
“그래도 내 계속 여러 방향으로 생각은 해보겠네.”
“그러면 나는 이제부터 조금 전에 이야기한 내용을 중심으로 더 정보를 모아 보겠어.”
“그래 주게나. 그러면 바로 개방으로 돌아가는 겐가?”
취월걸개는 즉각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심각했던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따뜻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중원에서 그를 이렇게 웃게 만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아니. 하현이가 검성이랑 비무하는 건 보고 가야지.”
***
이틀 후. 드디어 찾아온 비무 날.
하현은 묘한 흥분감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잠을 많이 자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다.
탁자 위에 고이 개어져 있는 무복을 챙겨 입었다.
하현의 키는 이제 상당히 자라서 어지간한 성인과도 견줄 만하다.
눈썰미가 좋은 장칠은 딱 하현에게 맞는 무복을 가져다주었고, 마치 맞춘 옷처럼 꼭 들어맞았다.
“좋아. 나가 볼까?”
마지막으로 등과 허리에 메인 검까지 잘 확인한 하현은 상쾌한 기분으로 방을 나서 비무장으로 향했다.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하현을 할퀴었지만, 오히려 좋다.
조금은 들뜬 그의 마음을 냉정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으니.
“하현아. 잘해라.”
“오늘이구나. 나도 금방 비무장으로 가마.”
“도련님. 최선을 다하십시오.”
비무장으로 가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은 하현에게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비무는 화제였다.
남궁기철은 오늘만큼은 세가 주변 경비도 서지 말고, 비무장에 오고 싶은 사람은 와서 구경하라 일렀다.
사실 이토록 많은 고수가 모여있으니 누군가 급습해 오지도 않을 것이다.
“왔느냐?”
“네. 할아버지.”
비무장에 도착하자, 언제부터 나와 있던 것인지 남궁무룡이 하현을 반겼다.
오늘의 비무는 남궁무룡이 직접 주관하기로 했기에 직접 준비하는 중이었다.
사실 남궁무룡 정도 배분의 고수가 직접 나서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하현은 그의 행동 속에서 진한 애정을 느꼈다.
남궁무룡은 조금 떨어진 공터에 쳐진 천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로 들어가 있거라. 한 시진 정도 명상하며 준비하고 있으면 시작될 것이야.”
“네. 할아버지.”
하현은 충분히 준비하고 왔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할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그가 준비한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곳 주변으로 모이는 것이 느껴진다.
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며 하현은 비무의 시작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고 있으니.
‘……왔다.’
거대한 기운이 옆 천막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만나본 적 있는 기운. 검성의 기운이다.
무당산에서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감각.
그때는 구름 같았다면, 지금은 무당산을 옮겨놓은 것 같다.
영험하면서도 산세가 사나운 무당산 그 자체를.
하현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제 와서 검성의 기운을 파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금은 그의 안으로 더 침잠해 가야 할 때다.
하현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명상에 빠졌다.
“하현아 나와.”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누군가 그의 천막에 와 하현을 깨웠다.
반가운 얼굴. 남궁환이었다.
“환이 형. 심부름하는 거야?”
“응. 어쩌다 보니 내가 하고 있네. 이제 시작할 거래.”
“고마워.”
하현은 남궁환과 함께 비무장을 향해 걸어갔다.
비무장까지 가는 길에도 수많은 응원이 들려왔다.
하지만, 하현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 응원과 환호에 대한 감사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돌려주면 된다.
이윽고 그는 그 위에 섰다.
그 주위에는 무인들이 구름처럼 모여있다.
그중 대부분이 무림에서 익히 절정 고수라고 부를만한 이들이고, 청룡각 수련생들도 오늘의 비무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비무장에 올라 그들을 둘러보며 하현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내 강호출도 날이야.’
이렇게 많은 고수 앞에서 제대로 실력을 보이며 강호행을 할 수 있는 무인이 얼마나 될까?
하현은 새삼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그 환경을 만들어 준 할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저벅-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하현은 고개를 돌려 비무장의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검성.
검의 별이라는 그 별호처럼 잘 벼려진 검 한자루가 비무장에 올라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의 몸 주위에는 기운이 휘몰아치며 기이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무당산에서 봤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어.’
하현은 이제야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의 직감과 감각, 그리고 오성이 그에게 주는 경고다.
검성과 싸우게 되면 그가 질 것이라는 그런 경고음.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게 정신없이 차례가 흘러갔다.
할아버지가 자신과 검성을 소개하고, 이번 비무의 취지를 설명하고는 더 시간 끌 것 없이 하현과 검성을 마주 보게 했다.
그리고 하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스릉-
검성이 검을 뽑아 드는 소리 덕분이었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서 현실감을 되찾았다.
갑자기 눈앞의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뚜렷해진다.
왕왕거리는 것 같던 소리도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으며, 기이하게 휘몰아친다고 생각했던 검성의 기운 흐름이 똑똑히 보였다.
샤악-
하현은 가볍게 허리춤의 흑룡검을 뽑아 들었다.
“시작!”
남궁무룡의 외침.
그 외침에 검성과 하현은 곧바로 움직였다.
번갯불도 겨우 지나갔을 만한 짧은 순간.
서로의 시야에는 서로가 한가득하다.
둘의 거리가 한 자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좁은 틈에서도 둘은 검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쩌어어엉!
두 검의 첫 번째 만남은 격렬했다.
검의 충돌에서 생겨난 그 기파는 비무장 바깥에까지 퍼져나갔다.
쩌어엉!
두 번째 부딪힘에도 거대한 기파가 휘몰아쳤다.
둘은 지금 초식도, 기교도 없이 힘과 내공만으로 부딪히며 그 충격을 사방으로 퍼뜨리고 있다.
다행히 비무를 지켜보는 자들이 고수들이라 그 경력을 손을 털어 해소할 수 있었다.
‘이런.’
세 번째 충돌이 있기 직전, 검성의 검이 궤적을 달리했다.
이전처럼 그대로 맞붙는 검이 아닌 그의 감각을 이용해 상단으로 흘리는 쾌검이었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현의 검을 타고 그의 경력을 이용해 물 흐르듯이 지나가는 검.
하현은 이 검의 원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무당을 상징하는 단어.
‘태극. 계속해서 힘만으로 나오지는 않겠다는 뜻이야.’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보며 하현은 미련 없이 검을 회수했다.
검을 그의 몸쪽으로 잡아당기며 허리를 뒤로 젖혀 검성의 검을 피해냈다.
후웅-!
검 대신 검이 만들어 낸 강풍이 하현의 얼굴을 때려 머리칼을 흩뜨려 놓았다.
어찌나 날카로운 검공인지, 하현은 검풍만으로도 작은 생채기가 인 것을 느꼈다.
척-
둘은 조금 떨어져 서로를 바라보며 기수식을 취했다.
겨우 세 합. 그것도 찰나의 순간에 진행된 세 합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비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깨달았다.
‘하현이 검성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다.’
이로써 비무를 굳이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던 남궁무룡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비무를 멈출 수는 없다.
특히 지금 비무를 하는 두 당사자는 결코 여기에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역시. 역시 엄청나군.”
검성은 하현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는 하현이 자신과 동류(同流)라는 것을 깨달았다.
둘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흥을 즐기는 중이었다.
슈화아악!
검성의 주변에서 강력한 기운과 함께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의 평생 검법 공부가 지금 이 검에 담겨있다.
태청검법(太淸劍法).
어려서부터 그가 가장 좋아하던 검법이고, 가장 제대로 익힌 검법이다.
맑은 무당파의 기운을 내뿜는듯한 푸르스름한 강기가 비무장을 덮는다.
그 강기는 구름처럼 하현을 쓸어 담았다.
그에 맞선 하현이 택한 것은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
할아버지와 함께 보완하고 발전한 남궁세가의 비전이 그의 손에서 펼쳐지자, 검성의 것과 비슷한 파란 색의 강기가 피어올랐다.
쩌정! 콰과과가각!
두 강기는 서로 부딪히며 대기를 흔들었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남궁무룡이 특별히 지시하여 주변의 흙먼지를 깨끗하게 정리했으나, 연석으로 잘 다듬어 만든 비무대 자체가 흔들리며 나는 자욱한 흙먼지는 어쩔 수 없었다.
좌중은 경악했다.
하현의 검에서 보았던 푸른 빛. 그건 강기였다.
강기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맑고 선명했으며,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검성의 검강을 대등하게 막아내었다.
“옥룡…!”
누군가 하현의 별호를 감탄하듯 소리쳤다.
무림의 초신성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남궁세가 천재 외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