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7)

제1장 천재 기사와 낙제 기사

'블레이저'

자신의 혼을 무기──'디바이스'로 구현해, 마력을 이용하여 이능의 힘을 조종하는 천 명에 하나 꼴로 나타나는 특이한 존재.

옛 시대에는 '마법사'나 '마녀'라고 불리던 그들은 과학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최고 클래스쯤 되면 시간의 흐름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최저 클래스라도 신체 능력을 초인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인간이면서 인간을 뛰어넘는 기적의 힘.

무술이나 무기로는 맞설 수조차 없는 초월의 힘.

지금 와서는 경찰이나 군대도──전쟁조차 블레이저의 힘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러나 커다란 힘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이 따른다.

그중 하나가 '마도 기사 제도'이다.

마도 기사 제도란 국제기관의 허가를 받은 블레이저 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만이 '면허'와 '마도 기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아 능력 사용을 인정받는 체계를 말한다.

그리고 여기 일본 도쿄 도에 도쿄돔 열 배 크기의 크고 넓은 부지를 가진 '하군 학원' 역시 그 면허를 취득하기 위한, 일본에 일곱 개 있는 '기사 학교' 중 하나이다.

이곳에서는 젊은 블레이저들이 '학생 기사'로서 나날이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으며 수련에 힘쓴다.

그 하군 학원 이사장실에, 쿠로가네 잇키는 비명 소리를 듣고 찾아온 경비원에게 치한으로 몰려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끌려왔다.

"과연, 사고로 속옷 차림을 보게 되었으니 자신도 벗어서 되갚으려고 했다고?"

가죽 소파에 앉아 담배를 문 정장 차림의 미인.

하군 학원 이사장 신구지 쿠로노는 일련의 소동이 일어난 원인과 경위를 잇키로부터 끝까지 전해 듣고──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너 바보지?"

"50 대 50으로 신사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요."

"확실히 다른 의미에서 신사적이긴 하구나."

"아니, 변태 신사라는 의미가 아니라……. 뭐, 지금 생각해보면 갑작스러운 일이라 저도 정신이 없었네요."

"흠. 즉, 그녀의 매력적인 나체를 보고 자제력을 잃고 자기도 모르게 옷을 벗어 던졌다고?"

"……분명 그렇긴 하지만, 그런 말투는 그만두시죠. 왠지 제가 매우 위험한 인간 같지 않습니까?"

"쿠로가네,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봄방학에 사람 적은 학생 기숙사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갑자기 본 적도 없는 남자가 들어와 천천히 옷을 벗는다. 어때?"

"엄청 위험한 사람이었군요……."

이사장 말대로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잇키는 전율을 느꼈다.

"……하아. 스텔라 양에게는 유학 첫날부터 면목 없는 짓을 해버렸군요. 이 일로 일본을 싫어하게 되면 안 되는데."

"뭐야, 쿠로가네는 버밀리온을 알고 있어?"

"방금 떠올랐어요. 맞닥뜨렸을 때는 당황해서 잊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름은 스텔라 버밀리온.

유럽에 있는 작은 나라 버밀리온 황국의 제2황녀.

그녀가 일본에 있는 하군 학원에 입학한 일은 그럭저럭 커다란 뉴스거리였다.

'10년에 한 번 나올 천재 기사! 버밀리온 황국 제2황녀 스텔라 버밀리온 하군 학원에 역대 최고 성적으로 수석 입학!'이라는 표제로 나온 신문 기사는 아직 기억에 뚜렷했다.

"진짜 공주님이 수석 입학하다니 굉장하네요."

"그것도 크게 앞질러 넘버원이라고. 모든 능력이 평균치를 큰 폭으로 웃돌고, 블레이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인 '오라'는 신입생 평균의 약 30배에 이르는 진정한 A랭크 괴물이야. ……능력치가 너무 낮아 유급해서 또다시 1학년에 다녀야 하는 F랭크 누군가와는 엄청난 차이지. 어때, 그렇게 생각하지? '워스트원'."

"내버려 두세요."

뚱한 표정으로 쿠로노의 핀잔에 항의하면서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어쨌든 쿠로가네 잇키의 '오라'는 평균치에서 고작 10분의 1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곤란하게 되었구나. 유학하려면 이런저런 수속이 필요하니까 입학보다 빨리 일본에 오도록 했는데. 첫 날부터 이런 해프닝이 벌어질 줄이야. 뭐, 어쨌거나 이번 일은 섣부르게 굴면 국제 문제로 번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쿠로가네에게 잘못은 없지만…… 책임져야겠어. 억울하겠지만 남자의 도량을 보여줘."

"……남자는 어째서 이렇게 적당할 때만 이용당하는 걸까요?"

잇키는 자기 신세에 한숨지었다.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이사장실 문이 열리고 문제의 소녀 스텔라 버밀리온이 들어왔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제대로 옷을 입었다.

시크한 색조의 고상한 상의.

하군 학원의 교복 차림이었다.

튀지 않는 색조가 불꽃 같은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해 매우 잘 어울렸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이 가씀께였다.

제복 위에서도 도드라지는 풍만함이 리본을 밀어 올리며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 존재감에 잇키는 저도 모르게 아까 전에 보았던 그녀의 속옷 차림을 떠올릴 뻔했으나…… 곧 그녀의 표정을 보고 숨이 막혔다.

울었던 것일까?

한이 서린 시선을 던지는 눈가는 붉게 부어 있었다.

"미안."

그래서 그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남자는 여자를 울려서는 안 된다.

설령 자신에게 잘못이 없어도, 그녀가 그 순간 느꼈을 공포는 진짜이기에.

"그건 불행한 사고였고, 나도 딱히 스텔라 양이 옷 갈아 입는 모습을 엿보려고 한 건 아니야. 다만, 본 건 본 거니까 남자로서 책임지겠어. 스텔라 양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삶든지 굽든지 마음대로 해."

"……의연하구나. 이게 사무라이의 마음가짐인가."

"말주변이 없는 것뿐이야."

맑고 듣기 좋은 스텔라의 목소리에 잇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스텔라도…… 굳은 표정을 풀고 옅게 미소 지었다.

"후후…….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본에 오자마자 갑자기 치한을 만나다니, 정말 최악의 나라인가 싶어서 진심으로 이 나라가 싫어질 뻔한 데다 국제 문제로 삼을까도 생각할 정도였어. 하지만 당신 덕분에 마음이 조금 변했어. 당신이 그 정도의 마음가짐을 보여주었으니 나도 왕족으로서 관대한 정신으로 답해야만 하겠지."

방에 들어왔을 때 보였던 적의는 이미 사라졌다.

그 호의적인 표정을 보고 잇키는 인식을 고쳤다.

황녀라고 하니 거만하고 까다로운 아이일 거라 상상했는데, 말귀를 잘 알아듣는 좋은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잇키. 당신의 의연함을 봐서 이 사건, ──할복하면 용서해줄게."

……정말로 생각만으로 그쳤다.

"아니, 잠깐 기다려. 뭐라고? 많이 봐주고 봐줘서 할복이야?!"

"그건 뭐, 공주인 내게 그런 무례를 저질렀으니 사형은 당연하잖아? 본래대로라면 통나무에 묶어 국민 모두 돌 하나씩 던지게 할 걸. 정말로 특별히 봐주는 거야."

"그건 이미 처형이 아니라 고깃덩어리 다지기일 뿐인데."

"명예사로 정해준 것만으로도 출혈 대서비스야."

"피 흘리는 건 나인데?!"

"하하하. 쿠로가네, 제법 혀가 잘 굴러가는구나."

"아니, 이사장님도 교육자라면 웃지만 말고 이 교내 살인 행위를 막아야죠?!"

"쿠로가네. 네 목숨 하나로 일본과 버밀리온 왕국의 항구적인 평화를 살 수 있어. 값싼 거래라고 생각하지 않나?"

"남의 목숨 내놓고서 값싼 거래라는 말은 너무 하잖아요?!"

잇키 입장에서 보면 지독한 바가지였다.

"저, 저기 말이야, 스텔라 양. 조금 더 다른 해결 방법은 없는 거야?"

"우, 뭐가 불만이야? 일본 남자에게 있어서 할복은 명예로운 거잖아?"

"아니. 난 현대에 태어난 평화주의자라 사무라이는 관계 없다고! 힙합 같은 거 엄청 듣는다고YO!"

"어색한 캐릭터 설정이구나."

"이사장님은 말릴 생각이 없으면 가만 좀 계세요!"

헤살을 놓는 쿠로노에게 큰소리치는 잇키.

그러나 잇키의 낭패한 그 모습을 보고, 스텔라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졌다.

"뭐야! 아까 삶든지 굽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잖아! 남자라면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라고!"

"변명과 발뺌을 일삼는구나, 쿠로가네. 남자로서 책임이란 뭐였던 거지?"

시끄럽다.

그런 것보다 당장 목숨이 중요했다.

"……어, 어쨌거나 고작 속옷 본 것 가지고 목숨까지 내놓을 순 없어!"

"고, 고작이라고?! 미, 미미미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이 변태! 시집도 안 간 공주의 살결을 더렵혀 놓고 무슨 변명이야?! 아버님께도 보인 적 없는데!!"

잇키의 부주의한 말을 듣고 스텔라의 눈동자에 분노의 불꽃이 타올랐다.

아니, 불타는 것은…… 눈동자뿐만이 아니었다.

스텔라의 주변 공기가 화끈거리는 열을 품고 빛을 흩뿌렸다.

'그러고 보니 신문에 쓰여 있던 스텔라 양의 능력은─────.'

"이제 용서할 수 없어! 당신 같은 변태·치한·무례한의 스리 아웃 평민은 이 몸이 직접 재로 만들어버리겠어!! 섬겨라! '레바테인'!"

순간, 이사장실에 열을 품은 극광이 비추며 스텔라의 양손에 불꽃을 두른 대검이 나타났다.

그것은 블레이저의 혼을 구현화한 디바이스.

'성검', '마궁', '저주 도구', '보구'──.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전설이나 전승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마법의 지팡이'였다.

블레이저는 이 매체를 이용해 스스로의 이능──노블아츠를 구사한다.

그리고 '홍련의 황녀'가 지닌 능력은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작열의 불꽃──!

"각오하라고, 이 변태……! 이 세상에서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증발시켜버릴 거야……!"

"지, 진심이야?!"

"문답무용!!"

내려치는 화염검.

잇키는 그 공격을 순식간에 방어했다.

"이리 와줘! ──'음철'!!"

까마귀처럼 검은 강철의 일본도.

F랭크 기사 쿠로가네 잇키의 고유 디바이스 '음철'을 이용해, 스텔라가 내려치는 공격을 막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설픈 저항이네!"

"앗, 뜨거?!"

"뜨거운 게 당연하지! 내 노블 아츠 '드래곤 브레스'의 불꽃을 두른 '레바테인'의 온도는 섭씨 3000도! 발톱을 막는다 해도, 비룡은 그 위광만으로도 적을 불태워 물리친다고!"

"정말 터무니없는 힘이다……."

잇키는 이를 갈며 스텔라 가까이에 머무는 것을 꺼려 가능한 한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후, 후후후……. 바보 같긴. 이 좁은 방에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잖아. ……곧 재로 만들어서 시집도 안 간 살결이 더럽혀졌다는 내 오점을 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겠어!!"

"잠깐, 잠깐! 좀 진정하라고! 더럽히다니 그런 듣기 거북한……, 딱히 아무 짓도 안 했잖아!"

"거짓말! 내 알몸을, 지, 지지지, 징그러운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본 주제에!"

"확실히 봤지만, 그건──그, 그건 그…… 스텔라가 너무 예쁘니까 넋을 잃고 본 거야!"

"후엣?!"

순간, 분노로 들끓던 스텔라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잇키는 쓸데없이 화나게 만들었나 생각해 식은땀을 흘렸지만.

"무, 무무무무슨 소, 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 미, 미혼 여성에게 가볍게, 예, 예쁘다는 말을……. 이, 이래서 섬세함 없는 서민은……!"

순식간에 '레바테인'에 깃든 불꽃이 기세를 잃고 깜박깜박하는 약한 불로 잦아들었다.

스텔라 본인도 아까의 험악한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마음이 불편한 듯 시선을 굴리며 머뭇거렸다.

보고 있노라니 아까까지 치켜 올라갔던 눈꼬리도 힘을 잃고 축 내려가고, 눈동자도 당황한 듯이 젖어들었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뜻박이다. 스텔라 양 정도로 예쁘면 이런 말에 익숙할 줄 알았는데.'

뭐, 어쨌든 스텔라의 기세가 잦아든 것은 잇키에게 기회였다.

이때를 틈타 잇키는 어떡해서든 스테라를 설득하려 들었다.

"어쨌거나 말이야, 이번 일은 원래 그쪽이 착각해서 내 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게 근본적인 원인이니까, 할복은 좀 봐줘."

그러나 이러한 잇키의 설득에 스텔라는 다시 표정이 험악해졌다.

"무슨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방에 멋대로 들어온 건 너잖아! 난 제대로 이사장 선생님에게 받은 열쇠로 그 방에 들어갔다고?! 그러니까 착각할 리 없어!"

"……어?"

잠깐만.

생각해보면 애당초 잇키는 자기 방문을 잠가놓았다.

그러니 스텔라가 방을 착각했어도 들어갈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녀는 안에 있었다.

어째서인가.

그 이유는 지금 스텔라가 말했다.

쿠로노에게 열쇠를 받았다고.

"……이사장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크, 크크크……."

"……이사장 선생님?"

두 사람이 나란히 쿠로노에게 시선을 향하자 그녀는 아무래도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인지 쿡쿡 웃으며,

일러

"후후, 이런, 미안해. 아무래도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기에 무심코 장난쳐 버렸어. 아니 뭐, 어찌 된 일이고 뭐고, 그렇게 된 거야. 하군 학원 기숙사가 2인 1실이라는 사실은 쿠로가네라면 알고 있을 테지. 즉, 쿠로가네도 버밀리온도 둘 다 방을 착각한 게 아니야. 간단히 말하면…… 너희는 룸메이트야."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어,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어찌 된 일이에요. 이사장 선생님! 제가 이, 이 변태와 룸메이트라니!"

"말 그대로의 의미야, 스텔라 버밀리온. 무슨 문제 있어?"

"아주 많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하군 학원 기숙사는 2인 1실이지만, 남녀가 함께 쓴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어요."

"그건 내가 이사장에 취임하기 전이었던 작년까지의 이야기야. 쿠로가네, 너에게는 이미 말했잖아. 내 방침을."

"……완전한 실력주의. 철저한 실전주의…………였던가요."

"그래, 그게 내 방침이야. 하군 학원은 요 근래 일본에 있는 다른 여섯 개 기사 학교에 비해 장점이 없어. 1년에 한 번, 일곱 학교가 합동으로 주최해서 가장 강한 학생 기사를 결정하는 무의 제전 '칠성검무제'에서도 연달아 지고 있지. 나는 그런 하군 학원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이사회의 부름을 받았어. 이 방 배치는 그 첫걸음. 출석 번호도 성별도 다른 무엇도 관계없이, 힘이 가까운 사람끼리 같은 방으로 배정했어. ──서로 수련에 힘쓰라는 뜻에서 말이지. 동등한 존재가 가까이에 있으면 거기에서 경쟁이 생기는 것은 당연해. 이 방 배정은 그 경쟁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기 위해 궁리한 거야."

'어떠냐, 굉장하지'라고 뽐내듯이 뻔뻔하게 자기 생각을 밝히는 쿠로노.

그러나 잇키는 그 논리에 의문을 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하잖아요. 스텔라 양은 내로라하는 넘버원이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학년 꼴찌에 유급까지 한 저랑 같은 방인 겁니까?"

"유, 유급?! 너, 너 유급생이야?!"

"부끄럽게도, ……종합 랭크도 F야."

"F……, F랭크랑 내가 실력이 가깝다니……, 어, 어찌 된 일이에요!"

"크크. 그게…… 뭐랄까, 너희는 특례라서, 툭 까놓고 말해서, 버밀리온만큼 뛰어난 사람도, 쿠로가네만큼 못난 사람도 너희 자신 말고는 없어. 즉── 너희는 둘 다, 각각 정 반대의 이유로 짝될 수 있는 학생이 없었던 나머지야. 그 때문에 나머지끼리 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이해하겠어?"

"이해할 리 없잖아요?!"

'탁!' 하고 스텔라는 이사장 집무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치고 항의를 이어갔다.

"도, 도대체 우리 연령대의 남녀가 같은 방에서 지내다니, 상식에 어긋나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쩔 거예요!"

"오 이런, 버밀리온은 과년한 남녀가 함께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꼭 들어보고 싶네에."

"그, 그건…… 그러니까, 우우…………."

"뭘 술 취한 아저씨처럼 생트집 잡는 겁니까?"

잇키는 부끄러운 나머지 눈물이 맺힌 스텔라를 동정해 쿠로노를 말렸다.

그러나 쿠로노는 '농담이다'라며 옅게 웃을 뿐, 결정을 뒤집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이건 결정 사항이야. 너희 이외에도 남녀가 짝이 된 사람들도 있어. 그 모든 사람의 편의를 봐줘서는 본말전도가 따로 없지. 그러니까 버밀리온, 네가 황녀라고 해서 특별 대우는 없어. 마음에 안 들면 자퇴해도 괜찮아."

자퇴.

그 말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라 스텔라가 쩔쩔맸다.

일부러 바다 건너 일본으로 유학 왔다.

잇키는 그 안에 무슨 목적이나 뜻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퇴는 바라는 바가 아니리라.

"……………………알았습니다."

결국 스텔라도 쿠로노 앞에서 꺾이고 말았다.

"괜찮아?"

"어, 어쩔 수 없잖아. 그게 이 학원의 방침이라면."

잇키의 물음에 멍하니 답하고서.

"단지, 너와 같은 방을 쓰는 데 세 가지 조건이 있어!"

스텔라는 잇키에게 세 손가락을 세우며 조건을 제시했다.

이 제도에 관해서는 잇키 자신도 뜻하지 않은 바이니 그런 조건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이유는 없지만…… 이쪽은 일단 연상이고 남자니까 그 정도 협력은 해주자고 마음 먹었다.

"고학력, 고수입, 고신장 같은 터무니없는 조건이 아닌 한 노력할게."

"그런 거 안 바라. 당신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야."

조건은 세 가지.

"말 걸지 말 것, 눈 뜨지 말 것, 숨 쉬지 말 것."

"그대로 따르면 잇키는 아마 죽게 되겠네."

"그 세 가지를 지킬 수 있다면 방문 앞에서 살아도 돼!"

"게다가 최종적으로는 쫓아내는 거야?!"

"뭐야, 못 하겠어?"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는 못 들어줘! 하다못해 숨은 쉬게 해줘야지?!"

"싫어! 어차피 숨 쉬는 척하며 내 냄새를 맡을 셈이지, 변태!"

"입으로 숨 쉴게! 그럼 냄새를 못 맡아."

"안 돼! 어차피 혀로 내가 내쉰 숨을 맛볼 셈이지, 변태!"

"그건 상상도 못 했어! 공주님의 발상력은 상상 초월?!"

"싫으면 자퇴해! 그러면 나는 1인실을 쓸 수 있다고!"

"그런 억지가……."

"이것 참. 이대로 가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겠어.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부터 둘이서 모의전을 치르고, 이긴 쪽이 방의 규칙을 정하는 거야. 자기 운명을 검으로 개척하는 게 기사도라면,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겠지?"

보다 못한 쿠로노가 끼어들어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것은 두 사람이 정정당당하게 시합을 치른 뒤 이긴 쪽 뜻대로 하는 단순 명쾌한 방법.

기사끼리 마찰을 해결하는 흔한 수단이었다.

"아아, 그건 공평해서 좋네요. 그렇게 하자, 스텔라 양."

잇키는 곧바로 찬성하고 스텔라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하, 하아?!"

스텔라는 시선을 돌리며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어? 그렇게 싫어?"

"아, 아니, 싫으나 마나 아무래도 좋다고나 할까, ……너, 너…… 자기가 무슨 소리 하는지 알고 있어?"

"……뭔가 이상한 소리를 했던가?"

"F랭크인! 진급조차 못 한 '낙제 기사'가! A랭크 기사인 나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

잇키는 그 말을 듣고서야 겨우 스텔라의 경악을 이해했다.

확실히 진급 수준도 채우지 못한 보잘 것 없는 능력치를 지닌 자신이, 10년에 한 번 나올 천재라고 소문난 촉망받는 루키를 상대로 "시합으로 정하자"라는 말 따위를 꺼내는 행위는 무모함을 뛰어넘어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러나──하고 잇키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치만 뭐, 승부는 해봐야 아는 거니까."

이 문제는 대화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리라.

스텔라는 양보할 생각이 없고 잇키 역시 자퇴할 수 없다.

그에게도 그 나름대로 '마도 기사'를 목표로 하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대화 말고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잇키는 시합을 하자고 스텔라에게 말했다.

그 말에 스텔라는────뚜껑이 열렸다.

"아우, 정마아아아알! 열 받아아아아아아!! 이 평민! 왕녀인 나에게 보고 벗고 변태짓 한 걸로도 모자라서, '낙제 기사'주제에 나를 이기겠다고?! 이런…… 이런 굴욕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정말 여긴 최악의 나라인 건가!!"

스텔라는 어느새 잇키에게 살기마저 어린 붉은 눈을 향하며 선언했다.

"좋아. 알았어, 알았다고요. 해주겠어, 그 시합. 그렇지만 나를 이만큼이나 바보 취급했으니까, 방 규칙 같은 사소한 내기만으로는 부족해! 진 쪽이 이긴 쪽에게 평생 복종! 어떤 굴욕적인 명령이라도 개처럼 따르는 하인이 되는 거야! 괜찮지?!"

"어, 어어어어어?! 그, 그건 좀 지나친 거 같은………………."

"이제 와서 겁먹어도 소용없어. 나를 여기까지 진심으로 만든 자신의 경솔함을 저주하도록 해. 이건 이미 모의전이 아니라 결투니까!"

"얘기가 정리된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제3훈련장을 쓰도록. 허가는 내가 낸다."

"이, 이사장님! 멋대로 정리하지 마세요!"

잇키가 항의할 때는 이미 늦었다.

스텔라는 "각오하라고!! 흥!!" 하고 코웃음 치며, 잇키를 남겨두고 이사장실에서 나가 버렸다. 

제3훈련장으로 향한 것이리라.

"……하아, 왠지 일이 커졌군요. 곤란해요, 이사장님. 이런 건……."

"크큭. 역시 하인은 싫은가?"

"싫어요. 이기든 지든 어느 쪽도 싫다고요……."

"이겨도 말인가……. 아까 그 애의 강한 힘을 봤겠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태우는 작열의 불꽃. 이미 거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위험. 대단한 능력이야. 그 정도까지 공격적인 능력을 지닌 데다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지. 평판에 거짓은 없었어. 그러나 그걸 보고도 너는 그 애를 이긴다고 말하는구나. ……재미있는 녀석이야."

"언젠가 이겨야만 하는 상대니까요. 그건 이사장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잖아요. 어쨌든 '칠성검무제에서 우승하면 능력치가 나빠도 졸업시켜준다'고 말한 사람은 이사장님이니까요. 그리고 칠성검무제에는 반드시 스텔라 양도 나올 겁니다. 말하자면 늦느냐 빠르냐의 차이일 뿐이지요."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망설일 필요 없을 텐데. 요는 내가 이기면 그만인 거지. 이겨서 내가 필요한 만큼 양보를 끌어내고서 하인 운운 따위는 물러버리면 돼. 그러면 만사 해결이야."

쿠로노는 툭하고 잇키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이사장실 밖으로 나갔다.

방에 남은 잇키는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뭐, 확실히…… 이기면 그만인가.'

물론 힘이 들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상대는 강적 중의 강적.

난적 중의 난적.

잇키는 한순간이지만 대치해보고 알았다.

스텔라의 재능은 압도적이었다.

감정에 호응하여 대기에 흩뿌리는 불빛.

의식하지 않아도 흘러넘치는 오라의 힘.

그녀 앞에서 잇키의 마력 따위는 정말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질 수 없는 싸움도, 도망칠 수 없는 싸움도, 언젠가 찾아온다.'

이미 각오한 바였다.

그날────그의 미소를 보고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한 때부터 줄곧.

"그럼, 해내야지."

잇키는 중얼거리며 이사장실을 나섰다.

결투의 무대로 향하기 위해서.

자신의 운명을 그 혼의 검으로 개척하기 위해서.

마도 기사가 국가의 전력으로서의 측면을 가진 이상 당연히 전투 기능을 요구받는다.

이는 국가 사이의 전쟁은 물론, 블레이저가 지닌 힘을 악용하는 '리벨리온'을 비롯한 테러 조직이나 범죄 결사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필수이다.

그 때문에 하군 학원의 부지에는 돔형 투기장 몇 개가 흩어져 있고, 내부에는 직경 100미터 정도의 전투 필드와 그것을 둥글게 감싸는 형태로 관객석이 설치되어 있다.

그중 하나, 제3훈련장의 중심에 쿠로가네 잇키와 스텔라 버밀리온의 모습이 있었다.

심판 쿠로노를 사이에 두고, 2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대치하는 두 사람.

그리고 관객석에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몇몇 시선이 있었다.

원래 이 훈련장을 이용해 훈련하고 있었거나, 소문을 듣고 견학하러 온 2~3학년 학생들의 시선이었다.

수는 20명 남짓.

봄방학 중 갑자기 정해진 모의전을 견학하러 온 학생치고는 수가 많았다.

그들 모두의 목적은 요란스럽게 입학한 슈퍼 루키 스텔라였다.

"저 애가 버밀리온에서 온 '홍련의 황녀'인가!"

"엄청 미인이잖아."

"머리카락이 예쁘다……. 불타는 것 같아서 멋져……."

"그런데 상대는 누구야?"

"…………쟤는 유급한 쿠로가네 아닌가."

"유급? 어째서 그런 애와 싸우는 거야? 스텔라 양은 분명 A랭크 천재잖아?"

"나도 몰라. ……이봐. 2학년 중에 작년에 쟤랑 같은 반이었던 사람 있어? 있으면 어떤 기사인지 가르쳐주라."

"저 녀석 나랑 같은 반이었는데, 실전 교과 수업을 들을 능력 기준에 능력치가 모자라서 실전 치르는 걸 본 적 없지 아마."

"진급은커녕 훈련 기준에도 못 미치다니………… 그거 좀 심하네."

"뭐어야. 시시해. 저런 놈 공주님이 순식간에 처리해서 끝나겠구만."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쿠로가네 잇키라는 남자의 정보를 듣고 스텔라는 실소했다.

"너, 들으면 들을수록 꽝이구나. 앞으로 마도 기사를 목표로 하는 건 관두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편이 너 자신을 위한 길이잖아."

"뭐, 그럴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승부는 해봐야 아는 거고."

"알고 있어? 지면 너, 내 하인이라고."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건 졌을 때 일이지. 그럼 내가 이기면 그만이야."

"…………끝까지 나를 이길 셈이로구나."

"그러려고 지금까지 노력은 해왔어."

스텔라의 가시 돋친 말에 곤란한 듯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잇키

그러나 잇키는 개시 선에서 그 다리를 뒤로 무르려 들지 않았다.

잇키는 이미 각오를 다졌다.

그 모습에 한층 더…… 스텔라는 화가 났다.

'노력…… 말이지.'

『노력하면 천재에게도 이길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 스텔라는 정말 싫었다.

어째서냐면 그런 인간들은 꼭 스텔라에게 졌을 때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노력했지만 재능을 이길 수 없었어』──라고.

마치 자기들만 노력하는 것처럼.

'마치…… 내가 재능만 가지고 이기는 것처럼.'

짜증 난다.

스텔라 역시 처음부터 강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린 시절 스텔라는…… 제대로 된 검사가 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들 했다.

너무 강한 스텔라의 능력은 오히려 그녀 자신의 몸조차 그 작열의 불꽃으로 태운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주변 모든 사람들도 스텔라는 기사가 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스텔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뛰어난 기사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버밀리온 황국처럼 작은 나라에 있어서, 강한 블레이저의 존재는 매우 소중한 것.

일찍이 벌어졌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극동의 소국이었던 일본을 승전국으로 이끈 대영웅 '사무라이 료마'처럼.

작은 나라는 강력한 마도 기사의 존재에 의해, 비로소 대국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으니까.

지금은 자신의 몸조차 태우는 이 힘.

그러나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면 나라의 모든 이를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스텔라는 포기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수행을 이어갔다.

그리고 3년에 걸쳐 간신히 '드래곤 브레스'를 습득했다.

그 사이, 몇 번이고 큰 화상을 입었다.

몇 번이고 꺾일 뻔했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재능이니 천재니 값싼 말로 단정 지으면 참을 수 없어!'

"그럼 지금부터 모의전을 시작하겠다. 양쪽 '디바이스'를 환상 형태로 전개해라."

"이리 와줘, '음철'."

"섬겨라, '레바테인'!"

스텔라는 혼을 구현한 검을 '환상형태'──인간에 한해서 물리적인 대미지를 주지 않고 체력을 직접 깎는 형태로 소환해 눈앞의 남자에게 맹세했다.

──때려눕혀 주겠어.

재능은 당해낼 수 없다.

천재는 특별한 존재이다.

그런 자기기만이 허망해질 만큼 압도적인 패배로 짓밟아 주겠다고.

"좋아. …………그럼, LET's GO AHEAD!"

이렇게 해서, 넘버원과 워스트원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아아아아아!"

개막과 동시에 스텔라는 잇키를 향해 달려들어, 불꽃을 두른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힘을 실어 내리치는 일격은 얼핏 보기에 거칠고 난폭하게 보이면서도 무섭도록 날카로웠다.

그러나 큰 휘두르기는 큰 휘두르기.

잇키는 그 검의 궤적을 정확히 파악해 '음철'로 막아──

"윽?!"

내려고 하는 행동을 급하게 멈추고, 뒷걸음질 쳐 뒤로 물러섰다.

순간 '레바테인'이 바닥에 내리꽂혀 쿠왕 소리를 내며──제3훈련장 그 자체가 격하게 흔들렸다.

"눈치가 빠르구나. 막았으면 그냥 못 넘어 갔을 거야."

"정말 터무니없는 공격력이다. 이사장실에서는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았구나."

"당연하지. 그런 곳에서 제 실력을 드러내면 교사 무너지는걸."

씨익 웃으며 추격 자세를 취하는 스텔라.

잇키는 간격을 다시 벌리려고 뒷걸음질 쳤다.

이런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치면 팔이 빠진다.

스텔라의 무기는 대검, 초중량무기이다.

이동속도로는 자신이 앞선다.

그렇다면 속도로 휘젓는다.

이는 공격력이 앞서는 초중량무기를 상대하는 정석이다.

그러나───── 그런 상식이 이 규격 외의 괴물을 상대로 통할 리가 없다!

"느려. 너무 느리다고."

"윽?!"

바람을 횡 가르며 스텔라는 잇키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속도라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유감이네. 마력 사용법은 꼭 공격만 있는 게 아니야. 발바닥에 모아서 폭발시키면 기동력을 끌어올릴 수도 있어. 그리고 내 오라는 웬만한 블레이저의 30배. 너희처럼 쪼잔하게 남은 마력을 생각하며 행동할 필요가 없어. 시합 중 이 속도를 계속 유지해도── 그래도 남아. 결국 너는 위력에서도 속도에서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야!"

이를테면 스텔라 버밀리온은 '무한 동력의 초고기동 중 전차'이다.

그 불합리하다고 해도 마땅한 성능을 눈앞에 두고 잇키는 쓰게 웃었다.

'이게…… A랭크인가.'

잇키가 노리는 학생 기사의 정점.

역대 '칠성검왕'조차 대부분 B랭크나 C랭크가 차지했다.

학생 신문에 A랭크라는 수준은 이미 학생의 정점으로 끝날 그릇이 아니었다.

역대 A랭크 기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역사에 이름을 새길 만큼의 대영웅이다.

10년에 한 명 나올 인재.

그 평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잇키에게 '홍련의 황녀'는 대지마저 흔드는 회피 불능의 섬광을 내리쳤다.

이미 속도에서조차 피해낼 수 없는 강철의 일격에, 잇키 또한 강철로 맞받아쳐 칼싸움이 시작되었다.

연이어 호쾌하게 울리는 소리가 제3훈련장에 모인 관중의 귓가에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오오오………!!"

커지는 환성.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레바테인'.

그 불꽃이 그리는 궤적이었다.

그것은 깔끔하게 갈고 닦은 검기의 궤적.

마도 기사 중에 검술이나 검기를 깊게 파고드는 이는 적다.

그런 일에 시간을 쓰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이능을 단련하는 편이 훨씬 강해질 수 있고, 무엇보다 학교나 사회에서도 그것을 장려하려고 마도 기사로서의 평가 기준에 무도나 검술을 넣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도 기사의 대다수를 차지한 반편이들의 생각.

정말로 강한 극소수의 기사들은 거의 대부분 이능뿐만 아니라 무도 역시 수련한다.

그들에게는 강한 힘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힘이 될 모든 것에 손을 뻗고, 그것을 익히고,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본다.

스텔라 버밀리온이 바로 그랬다.

버밀리온 황국의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는 스텔라의 '임페리얼 아츠'는 검무처럼 아름답게, 그러나 열화처럼 격렬하게 잇키를 몰아세웠다.

잇키는 빈틈없이 날아드는 스텔라의 검을 막기만도 버거웠다.

뒤로 뒤로, 계속 물러났다.

"역시 이렇게 되는구나. 저 유급생, 밀리감 나헨."

"그러네. 간신히 피한다는 느낌이야."

"이거야 원 시간 문제구만."

예상대로 일방적인 전개에 관객석에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뭐야…… 이거.'

그 전개에 스텔라 버밀리온은 참기 힘든 위화감을 느꼈다.

한 방에 대지를 크게 흔들 수 있는 스텔라의 검은 문답무용으로 상대를 깔아뭉개는 일격이다.

밀리기만 하는 전개는 본디 일어날 수 없다.

일어날 리가 없다.

당연하다.

본래 그녀의 일격은 받아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현재 상황은 어찌 된 일인가?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스텔라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피하고 있어?

방어할 뿐?

시간문제?

그것은 착각이다.

스텔라는 깨달았다.

'나를── 적당히 상대하고 있어!'

"하아아!"

스텔라는 눈앞의 적에게 '레바테인'을 내려쳤다.

그에 대해 잇키는 그것을 '음철'로 받아내야───── 아니, 받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받은 충격을 뒤로 향해 가는 힘으로 삼아 스텔라의 간격에서 스르륵 도망쳤다.

'……또!'

확실히 얼핏 보면 스텔라의 힘에 잇키가 밀리는 구도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잇키의 기교가 스텔라의 공격력을 봉쇄하고 있는 것이었다.

힘을 흘려 넘기는 부드러운 방어.

말로는 쉽지만 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아주 조금이라도 받아내는 힘이 강하면 스텔라의 단단한 검 앞에 팔이 바스러지고, 너무 약하면 문답무용으로 베어 넘어간다.

힘 조절, 각도, 타이밍. 

어느 하나가 미세하게라도 어긋나면 곧바로 무너지는 외줄타기.

그러나 스텔라 앞에 선 사무라이는 그것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손쉽게 해냈다.

그 사실에 서서히, 스텔라 안에 두려움과 함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배어 나왔다.

그것은 경종이다.

스텔라의 육감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적을 위험한 존재라고 경고한다!

"도망치기만큼은 잘하는데!"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스텔라가 칼로 베기 공격을 멈추지 않고 도발했다.

그러나──잇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까지 지었던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미소는 이미 사라지고,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표정으로 묵묵하게 아무 반응 없이 스텔라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거슬리는 눈이야!'

보고 있다.

옷을 투과하고 피부를 투과해서 근육 섬유의 움직임까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잇키의 시선에서, 스텔라는 뚜렷하게 그 불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잇키는 자신의 움직임에서 임페리얼 아츠를 꿰뚫어 보려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게 꿰뚫어볼 만큼, 내 검은 싸구려가 아니야!"

"────아니, 이미 꿰뚫어 봤어."

"윽?!"

순간, 갑작스럽게──전투의 흐름이 직변했다.

시합을 개시한 지 5분 남짓.

처음으로 쿠로가네 잇키가 공격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것은 자살행위다.

설령 탁월한 검기를 지닌 검객이라고 해도, 압도적인 공격력을 자랑하는 중전차 상대로 바로 정면에서 반격해서야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저 그 화력 앞에 무릎 꿇을 뿐.

그럴 터였다.

그럴 터일진대──.

"크읏!"

믿을 수 없게도 스텔라의 발이 뒤로 물러났다.

바로 정면에서의 칼싸움에서, 힘으로 앞서는 스텔라가 밀렸다.

어째서?

그 이유는 '음철'이 그리는 태양과도 같은 검의 궤적에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스텔라의 임페리얼 아츠였다.

"말도 안 돼……?! 어째서 내가 그걸 쓰는 거야?"

그렇게 물어본 순간, 스텔라의 뇌리에 섬광이 스쳤다.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두려운 가능성──.

"설마, ……이 시합 도중에 훔친 거야?!"

"뭐, 그렇지. 나는 예전부터 돌림쟁이라 아무도 뭘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남의 검을 보고 훔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이런 것만 잘 하게 되어버렸지. 웬만한 검술은 1분 쯤 맞서면 이해할 수 있어."

칼솜씨는 마음가짐을, 형태는 역사를, 호흡은 이념을 대변한다.

그것들의 '가지와 잎'을 더듬어 '이치'에 다다르면, 어떤 기술이 존재하는지 어떤 조합이 있는지 이쪽의 움직임에 대해 어떤 반격을 해 올지── 그것을 장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라고 잇키는 말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이해하게 되면 적의 검술을 모든 의미에서 웃도는 검술을 만들 수 있어."

──적의 검술을 완전히 봉쇄하는 궁극의 방법이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적의 검술이 지닌 결점을 모두 바로잡은 완전 상위 호환의 검술을 짜내면 된다.

구식이 신식보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신식은 구식의 결점을 모두 아는 데다가 그 결점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모든 공방에서 선수를 칠 수 있다.

"그 검술을 싸우는 중에 만들어내는 것이 내 검술 '블레이드 스틸'이야. 스텔라 양의 검기는 굉장히 깨끗하게 다듬어져서, 전부를 훔쳐내는 데 2분이나 걸렸고 뛰어넘는 데 30초나 써버렸지만 이미 모두 장악했어. ──그러니까 슬슬 반격에 들어가야지."

"이, 이봐, 뭔가, 황녀님이 밀리고 있는데?!"

눈에 띄게 열새로 몰리기 시작한 스텔라.

예상 밖의 사태에 관중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가장 놀란 사람은 스텔라였다.

당연하다.

그저 검술 실력만 뒤쳐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자랑하던 검을 도둑맞았을 뿐만 아니라 추월당했으니까.

검을 보기만 해도 그 안에 쌓인 예지를 까발리고 역사를 읽어내고 오의를 빼앗는다.

그 악마 같은 눈썰미.

흡사 조마경과 같았다.

그것도 그 정도의 일을 눈앞의 사무라이는 일절의 마력 행사 없이 해냈다.

이 사내에게는 임페리얼 아츠를 능가하는 검술도, A랭크 기사 스텔라 버밀리온의 맹공을 적당히 넘기는 기술도 모두──그저 평범한 체술일 뿐이었다.

대체 얼마나 수련을 쌓으면 그 정도 경지에 이르는 것일까?

'강해……!'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검술 실력에 한해서는 이 사내가 자기보다 몇 단계 위.

칼싸움에서 끌어낼 수 있는 패의 숫자에서 이미 승부가 되질 않는다.

스텔라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자세 또한 그녀의 힘이고── 더구나 그러면서도 상대의 우위를 점하는 것이, A랭크 기사 '홍련의 황녀' 스텔라 버밀리온이다.

이쪽의 검을 꿰뚫어 봤다면 그것을 이용한다!

스텔라가 '레바테인'을 내리치는 첫 동작을 보여주었다.

순간, 잇키가 아래쪽에서 비스듬하게 '음철'을 휘둘러 올렸다.

내려치기를 실마리로 막는 궤적.

첫 동작만으로 이미 잇키는 다음에 올 검의 각도도 위력도 완전히 파악했다.

이 대응은 필연.

그러나──그것이야말로 스텔라의 덫이었다!

'걸렸다!'

씨익 웃으며 스텔라는 내려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잇키가 이쪽의 검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선수를 잡았기에 이 속임수에 걸리고 말았다.

잇키의 베어 올리기는 크게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그 한순간을 정확히 노려, 스텔라는 텅 빈 옆구리를 향해 '레바테인'을 쳐 넘긴다.

지금까지 밀리기만 했던 스텔라의 갑작스러운 변모.

베어 올리기 자세를 풀고 크게 상공을 미끄러진 '음철'의 칼날은 이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레바테인'의 날은 잇ㅋ니의 텅 빈 몸을 깊숙이 파고들──터였다.

"움직임이 느슨해."

"윽?!"

'레바테인'의 날은 잇키의 몸에 닿지 않았다.

막아냈다.

'거, 거짓말이지?!'

리듬도 바뀌었다.

공격도 바뀌었다.

의표도 찔렀다.

'음철'의 검신은 이미 이 변화에 대응할 수 없는 위치일 터였다.

그런데 대응했다!

어째서?!

그 의문의 답은── 칼자루였다.

스텔라가 물러서면서 가로로 휘두른 검을 잇키는 '음철'의 칼자루로 막은 것이었다.

칼자루를 쥔 오른손과 왼손 사이의 작은 틈을 이용해서.

'이 녀석, 대체 동체 시력이 어떻게 돼먹은 거야?!'

"마음이 억눌려 있으니까 경솔히 승리에 안달하지. 도망치면서 베다니 네 스타일이 아니잖아. 그런 어설픈 검이니까 나라도 받아낼 수 있어. ──이 삐뚤어진 일격은 치명타야."

잇키는 그렇게 말하고서 '레바테인'을 크게 튕기고는,

"하아아아아아아!!"

비장의 수가 막혀 무방비 상태가 된 스텔라에게 '음철'의 날을 내리쳤다.

"결판났어?!"

"내리치기가 완벽히 들어갔어. ……이건 뭐 끝난 거겠지."

"거짓말이지? ……A랭크인 스텔라 양이 이렇게."

"방심한 걸 거야. 분명 그럴 거라고……."

"…………아니! 저걸 봐!"

예상 밖의 전개에 망연해진 관중의 시선이 스텔라의 오른쪽 어깨로 쏠렸다.

'음철'의 날은 스텔라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치고는────거기에서 멈추었다.

잇키가 온 힘을 다해 내리친 검은 스텔라에게 아무런 대미지를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역시, 이렇게 되나."

잇키가 분한 감정에 젖어 방사열을 피하려고 크게 뒤로 뛰어 간격을 벌렸다.

마력을 두른 블레이저는 같은 마력을 두른 공격으로만 쓰러뜨릴 수 있다.

마력이 방어막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잇키의 마력량은 적다.

가느다랗다.

약하다.

아무리 탁월한 기술을 지녔어도, 잇키는 블레이저로서 무엇보다 소중한 자질이 결여되었다.

그야말로 스텔라가 그저 그곳에 서 있기만 해도 떠도는 마력조차 깰 수 없을 만큼.

'오라'.

즉 블레이저로서 이능을 펼치기 위한 정신 에너지 총량은 노력 운운으로 늘릴 수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이 태어날 때 지닌 운명의 무게와 비례한다고들 말한다.

대성할 사람은 대성할 만해서 대성한다.

모든 것은 운명.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거스를 수 없는 절대 서열.

즉, 타고난 재능의 차이가 절대적인 벽이 되어 잇키의 칼날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꼴사납네. 이런 식으로 이기는 건……."

"……역시 스텔라 양은 알고 있었구나. 내 '음철'이 너를 베지 못하리라고."

"물론이지. 알면서 검술 승부를 벌인 거야. 마력뿐만이 아니라 검으로도 너를 이겨서, 내가 재능뿐인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리려고. 그렇지만 그건 이루지 못했네. ……인정할게. 이 싸움, 내가 이긴 건 내 재능 덕분이야."

잇키는 강했다.

그가 입에 올린 노력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스텔라가 쓰러뜨려 온 자들과는 무게가 다르다.

밀도가 다르다.

그가 평범한 사람만큼.

아니 평범한 사보다 아주 조금 떨어지는 정도만이라도 재능을 갖추었더라면──이 싸움에서 스텔라는 아까 전의 일격으로 졌으리라.

애석한 점은 잇키가 그 정도의 재능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

그러므로 설령 이 시합 후에 그가 "재능 때문에 졌다"라고 말해도 스텔라는 그를 비난하지 않으리라. 

그에게는 그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다.

그 정도로………… 강했다.

그러니까────

"최대한 경의를 품고 쓰러뜨리겠어."

순간, 스텔라가 뒤쪽으로 크게 도약했다.

원형 링의 가장자리.

관객석과 링을 나누는 벽 옆까지.

최대한의 경의를 품고 쓰러뜨린다.

그렇게 말하며 한계까지 뒤로 물러선 스텔라의 행동에 잇키는 의문을 느꼈지만────다음 순간, 전율이 의문을 밀어냈다.

"푸른 하늘을 꿰뚫어라. 연옥의 불길."

'레바테인'을 하늘로 치켜든 순간, 검에 깃든 불꽃이 한층 더 그 밝기와 온도를 더해서──어느새 그 형태는 불꽃이 아니라 빛의 기둥으로 변해 돔 천장을 녹였다.

"뭐, 뭐야 이거어어어!"

"엄청 나다. 이게 같은 인간이라고…………!"

100미터를 훌쩍 뛰어넘는 빛의 검은──태양의 빛 그 자체.

모든 것의 존재를 이용하지 않는 소멸과 죽음의 오로라.

이것이야말로 A랭크 기사 '홍련의 황녀'가 자랑하는 최강의 노블 아츠.

이제 스텔라는 잇키와 검기로 맞서지 않을 셈이었다.

자신에게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자만하지 않을 셈이었다.

잇키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검객.

그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그녀는 자신이 가진 불평등이라고 해도 마땅한 재능의 힘으로 싸움터 전부를 태워버리기로 결심했다.

"끝이야. 발버둥 치지 말고 패배를 받아들여. 그편이 너에게도 좋을 거야."

마지막으로 거대한 검을 내려치기 직전, 스텔라가 입에 담은 말에는 존경마저 사려 있었다.

스텔라는 생각한 것이었다.

이 정도까지 자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단 하나, 치명적으로 재능이 없었던 '마도 기사'의 길을 빼고.

그래서 스텔라는 잇키를 위해서라도 패배를 안겨주리라 마음먹었다.

절대적인 재능의 힘으로──.

"'칼사리티오 살라만드라'────!!"

훈련장을 죄다 태우며 내리치는 빛의 검은 멸망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우, 우와아아아아!"

"도망쳐! 휘말린다!"

"이것 참……. 그건 사람 하나 쓰러뜨릴 기술이 아닐 텐데."

관객인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쿠로노는 무너져 내리는 훈련장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압도적인 열량으로 밀려드는 패배를 앞에 두고.

……기막히게도 쿠로가네 잇키는 미소 지었다.

"여동생도 자주 말했어. '오빠는 마도 기사 말고 다른 거라면 뭐든지 될 수 있으니까, 그쪽을 목표로 하는 편이 좋아'라고. ……확실히 그럴지도 몰라. 나에게는 마도 기사의 재능이 없으니까."

쿠로가네 잇키가 마도 기사가 되려면, 최소한 칠성검무제에서 우승해야만 한다.

그 시도는 마치 나뭇잎 배로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무모하다.

그 사실은 잇키도 알았다.

아마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물러설 수 없어. ──마도 기사가 되는 건 내 꿈이니까. 지금 여기에서 포기하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맹세가 용납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생각했어. 최약이 최강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내가 나를 관철하는데 무엇을 하면 되는지를. ──지금 여기에서 그 답을 보이겠어."

잇키는 음철의 칼끝을 들어 올리며 스텔라를 향해 고했다.

"내 최약으로 네 최강을 때려 부수겠다─────!"

순간, 그 말과 함께 잇키의 전신과 '음철'의 검신에서 빛이 떠올랐다.

푸른 불꽃처럼 흔들리는 옅은 반짝임이.

자신과 같은 화속성의 능력인가.

한순간 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바로 아니라고 눈치챘다.

저 일렁임은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높아진 '마력의 빛'이었다.

'마력이 증폭하고 있어……?!'

아니, 그럴 리 없다.

마력은 타고난 양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모르겠다.

마력을 증폭시키는 능력 따위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하나 아는 것은, 저 푸른빛을 두른 '음철'에는 자신을 쓰러뜨릴 힘이 있다는 사실.

──그렇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야?!

어떤 힘을 지녔든 태양 앞에서는 삼라만상이 평등하게 재로 변할 뿐!

'끝까지 내리쳐라! 단지 그것만 하면 이 싸움의 승리는 나의 것이야!'

양쪽 간격은 60미터 이상.

적이 무엇을 하든 빛의 검이 먼저 닿는다.

그것이 이치다.

그러나── 그 최악은 그 이치를 때려 부순다고 말했다!

"엇?!"

빛의 검이 잇키를 후려치려는 찰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의 속도로 도약해 빛의 검을 회피한 것이었다.

"──윽?!"

예상치 못한 헛휘두르기에 스텔라가 눈을 크게 뜬다.

'지금 그거, 뭐야?!'

놀라면서도 곧바로 피해낸 잇키를 향해 다음 검을 후려쳤다.

'칼사리티오 살라만드라'는 실체 없는 열기와 빛의 검.

그 때문에 그 검속은 칼날의 길이가 100미터를 넘는 대검이라고는 생각 못 할 정도로 빨라서, 도무지 인간이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잇키는 그것을 피했다.

두 번째의 큰 검도 세 번째의 큰 검도, 빛의 검이 휘두르는 사이를 누비고 질풍 같은 속도로 전장을 가로지르며 계속 회피했다.

따라갈 수 없다.

검은커녕 그를 쫓는 시선마저도 잇키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스텔라는 서서히 잇키를 시야에 담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큭, 대체 뭐야, 그 힘?! 어째서 갑자기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거냐고!"

"그게 내 능력이니까. 스텔라 양이 불꽃을 다루는 것처럼 나 역시 블레이저로서의 이능을 지니고 있어."

잇키의 이능은──신체 능력 배가.

그 힘은 수많은 블레이저 능력 중에서 최저의 능력이라고들 한다.

블레이저는 따로 신체 능력을 강화하지 않아도 마력을 방출함으로써 검에 파괴력을, 행동에 추진력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스텔라는 시합 중 그 기술을 이용했다.

그것도 그때의 강화 배율은 배가 아니라 다섯 배나 여섯 배는 된다.

즉, 신체 능력 배가 기술은 블레이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의 하위 호환일 뿐이다.

그것은 F랭크인 잇키에게는 타당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말이야! 그 움직임, 두 배정도가 아니잖아! 게다가 신체 강화로 마력이 올라간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어!"

빛의 검을 휘두르며, 스텔라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몸에서는 눈으로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올라간 마력을 뿜으며, 시계로조차 잡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그런 힘이 고작 신체 능력 배가일 리가 없었다.

신체 능력 하나로 한정 지어봐도 확실히 열 배 이상은 뛰어 올랐다.

스텔라의 그 지적에 질풍 같은 속도로 빛의 검을 피하면서 잇키는 어딘지 자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네. 왜냐하면 나는 보통 쓰는 방법과 다르니까. 나는 이 능력을 평범하게 쓰지 않고 전력으로 쓰고 있어."

"하아?! 그런 마음가짐 하나로 능력이 오를 리 없잖아?!"

"그렇지만…… 그게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면 다르지."

"어……."

"나는 예전부터 의문이었어. 이를테면 100미터를 전력으로 달린다고 말해 놓고 그 마음가짐으로 달려도, 반드시 어느 정도 힘이 남아.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해. 정말로 전력을, 자신의 모든 힘을 다 낸다면──다 달린 순간 의식을 유지하다니 이상하잖아?"

어째서 그렇게 되지 않을까?

답은 인간이 생물이기 때문이다.

생물은 본능적으로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든다.

리미터.

그것은 무엇보다 우선되는 생명체의 절대 무의식.

그러니까 마음으로 아무리 전력을 다하려고 해도 본능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생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힘을, 통상의 힘과는 별개로 남겨둔다.

말하자면 그것은 생물로서의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인간은 체력도 근력도 마력도 타고난 스펙의 절반도 못 미치게 사용한다.

그것이 현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할 수 있다면?

"너, 설마……."

"그래. 이 마력은 오른 게 아니야. 리미터를 의도적으로 파괴해 본래 쓸 수 없는 힘에 손을 댄 것뿐이야!"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스스로 가장 잘 안다.

그저 노력하는 정도로는 재능의 차이를 메울 수 없다.

당연하다.

천재 또한 노력한다.

천재가 재능만으로 싸우다니, 그런 생각은 그들에 대한 모독이다.

적어도 잇키는 그런 분별이 있다.

때문에 차이가 벌어지기는 해도 줄어들지는 않는다.

재능의 차이란 그만큼 크다.

그것을 뒤집겠다고 자부한다면, 이미 보통 수단으로는 어림없다.

──수라가 되어야만 한다.

잇키는 그 사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피하지 않고 하나의 방법에 다다랐다.

재능을 넘기 힘들고 자기 자신의 힘도 빈약하다면 더 이상 배부른 소리는 하지 않겠다.

딱 1분이면 된다.

그 후는 아무래도 좋다.

1분.

그 짧은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말자.

그 누구라도 쓰러뜨리도록 하자.

──그것이 쿠로가네 잇키가 내놓은, 최약이 최강에게 이기기 위한 답.

스스로 지닌 모든 힘.

자기 자신의 전부를 딱 1분 사이에 다 쏟아부어 최약의 능력을 몇십 배나 되는 강화 배율로 이끌어내는 노블 아츠──.

"'일도수라'!"

순간, 이미 시선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천장을 휘젓던 잇키가, 그 경이적인 속도로 스텔라의 안쪽 깊숙이 파고들어 와──모든 것을 결판냈다.

챙.

반격도 방어도 비명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속도 속에서, 스텔라는 '음철'의 번뜩임을 그 몸으로 받았다.

"아───."

발밑이 무너지는 감각과 함께 스텔라의 의식이 급속히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환상 형태'로 치명상을 입었을 때 특유의 블랙아웃이었다.

'일도수라'는 그 이름대로 단 한 번의 검으로 '홍련의 황녀'를 쓰러뜨렸다.

힘없이 지면으로 무너져 내리는 스텔라.

"거기까지! 승자, 쿠로가네 잇키."

심판 쿠로노가 승자의 이름을 고하는 와중.

그 장소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눈앞에서 벌어진 너무나도 예상 밖의 결과에 그저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는 '낙제 기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으, 응."

하얀빛이 시야에 서서히 스며들어 스텔라의 각성을 재촉했다.

눈을 뜨자 보이는 모습은 제법 낮은 천장과──

"깨어났나, 버밀리온."

스텔라가 누운 침대 옆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정장 차림의 쿠로노였다.

"이사장 선생님………… 여긴?"

"네 방이야. 쓰러진 원인은 '환상 형태'의 디바이스에 당해서 생긴 극도의 피로니까 말이지. 의사나 iPS캡슐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서 방에서 쉬도록 했어."

후우, 하고 립스틱을 바른 쿠로노의 입술에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분명 학생 기숙사는 금연이었을 텐데.'

그러나 스텔라에게는 주의를 줄 기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게 현실이었군요."

그 사실을 인식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꿈이라고 여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상황 좋게 흘러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자신은 졌다.

그것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참패를 맛보았다.

"……하아. 오랫동안 잊고 있었어요. 패배란…… 이런 기분이군요."

"뭐, 그리 의기소침해 할 것도 없어. 쿠로가네는 핸디캡을 두고 싸웠다고는 해도 이 몸에게도 이긴 녀석이야. 지금 시점에서 네가 이길 상대는 아니지."

"이걸 세계 랭킹 3위인 '월드 클락'에게도 이기다니……. 그게 뭐에요."

괴물도 정도껏이다.

……아니, 그것도 새삼스럽나.

1분간 자신의 잠재력을 모두 끌어 쓴다.

그것은 평범한 신경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집중력의 극치였다.

대체 어떤 결의와 각오가 있으면 그런 곡예를 펼칠 수 있을까.

그 존재 방식의 그야말로 수라.

괴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앗.'

그러고 보니, 자신이 기력을 다한 후 그 남자는 어찌되었을까.

"이사장 선생님. 그 녀석은──무사한가요?"

스텔라의 물음에 쿠로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너보다 훨씬 중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는 상태야."

그리고 쿠로노는 2층 침대 위층에 시선을 던졌다.

스텔라가 침대에서 기어 나와 올려다보니 그곳엔 창백한 얼굴로 누운, 러닝셔츠 차림의 잇키가 있었다.

……약한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시체와 구분 가지 않을 만큼 잇키의 몸에서는 생기가 빠져 있었다.

'일도수라'는 생존 본능까지 무시하고 모든 힘을 끌어내는 노블 아츠.

그 힘을 쓰면 1분 후 제대로 숨 쉴 수도 없을 만큼 쇠약해진다.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뭐, 그래도 자력으로 방까지 돌아와서 교복을 벗을 정도로는 힘이 남아 있었지만 말이야. 그 정도도 못 하면 기술로 써먹기에 너무 불편해. 쿠로가네도 그 정도 조정은 했겠지."

"그런 건 남은 힘 축에도 안 들어가는 것 같은데요."

도무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한 번이라도 실수해서 제대로 끝장을 보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아웃.

지독한 자폭 기술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렇게 까다로운 기술을 자유자재로 쓰며 자신을 쓰러뜨려 보였다.

"……이사장 선생님, 이 남자는 대체 뭐예요?"

"뭐라니?"

"얼버무리지 마세요! 제 동체 시력을 웃도는 속도로 움직이다니, 범상치 않잖아요! 혹시 그거예요? 재패니즈 NINJA란 거?!"

"아니 전혀 다른데……."

"어쨌거나, 이 정도의 남자가 F랭크에 유급생이라니 이상하잖아요?!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주세요!"

"그런 소리를 해도 말이지. F랭크는 타당한 판정이야. 어쨌든 랭크는 블레이저로서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야. 실전 능력…… 즉 검술이나 체술 수준은 애초에 평가 항목이 없어. 어쨌든 본래 신체 능력은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발휘하는 노블 아츠 앞에서는 무력하니까 말이지."

그렇다.

뛰어난 이능 앞에 신체 기술 따위는 무가치하다.

이를테면 강철마저 베어버리는 검의 달인이 있다고 쳐도, 스텔라가 조종하는 태양 같은 작열을 앞에 두고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재가 될 뿐.

따라서 신체 기술은 동등한 이능을 지닌 블레이저 사이의 우열을 가르는 정도의 이점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현재 세간에 퍼진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야. 그러니까 지금 시점에서는 쿠로가네를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가 없지. 그리고 그 항목을 빼면 쿠로가네는……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최저야. 이렇게까지 뒤떨어지는 녀석도 드물어. 네가 10년에 한 번 나올 천재라면, 이 녀석은 10년에 한 번 나올 열등생이라고나 할까. 그 정도로 손쓸 도리가 없어. 그건 너도 직접 싸워봐서 알겠지. 이 녀석이 내리친 혼신의 일격은 무방비한 너를 상처조차 내지 못했어."

"……뭐,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유급'은 이해가 안 가요."

"어째서."

"저는 황족이에요. 국가에 있어서 강한 마도 기사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아요. 그리고 그건 국가에 마도 기사의 육성을 위임받은 학원으로서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니까 그만큼 싸울 수 있는 인간을 단위가 모자라다는 이유로 유급시킬 리가 없어요."

'리벨리온' 같은 사상 결사까지 나타나기 시작한 요즘, 강한 기사는 언제나 필요하다.

그것을 놀릴 이유는 없다.

스텔라가 그 점을 지적하자 쿠로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후후, 이것 참, 제법 아픈 부분을 찌르는구나."

체념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뭔가 이유가 있군요."

"그렇지. ……단위 부족 운운은── 학원 쪽 구실이야."

"구실……?"

"아아, 버밀리온……. '쿠로가네'라는 성을 들어본 기억 없어?"

"……그런 서민을 내가 알 리가."

없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지만, 단 한 사람 그 성을 지닌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사무라이 료마'말인가요?!"

"맞았어.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이끈 극동의 영웅 '사무라이 료마'. 본명은 쿠로가네 료마. 그는 쿠로가네의 증조부에 해당하는 인물이야. 쿠로가네가는 그 사람 외에도 대대로 우수한 블레이저를 배출한 메이저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본의 명문으로, 기사 세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지. 그 쿠로가네 본가가 하군 학원에 직접 압력을 걸어온 거야. '쿠로가네가를 뛰쳐나간 낙오자 쿠로가네 잇키를 졸업시키지 마라'라고 말이야."

"어째서 그런 짓을……."

"명문가의 체면이라는 거야. 가문에서 'F랭크'가 나오면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지금 기사 사회는 '랭크가 전무'니까. 그리고 전 이사장은 그 뜻을 받아들여 실전 교과를 수강하는 최저 능력 수준이라는 있지도 않은 규정을 멋대로 만들어 쿠로가네를 수업에서 배제했어. 유급은 그 부조리의 결과야."

"────윽."

그 진실을 들은 순간, 스텔라는 가슴속에서 끓어어로는 분노를 느꼈다.

"그게 부모가…… 교사가 할 짓이에요?!"

"안타깝게도 그런 어른은 있어. 물론 나는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을 셈이야.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 그 방면의 쓰레기는 철저하게 청소했지만……. 그래도 쿠로가네의 지나가 버린 1년은 돌아오지 않아."

그러나,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 녀석은 썩지 않았어. 집에서 쫓거나 기회를 부당하게 빼앗겨도, 손쓸 수 없는 낙제생이라고 뒤에서 손가락질 받아도, 자신의 가치를 믿고 멈추지 않았어. 천재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고 선을 긋지 않고, 자신의 무력함에서 도망치지 않고, 모든 부당함과 계속 싸운 결과 쿠로가네는 다다른 거야. 자신이 믿어왔던 자신의 가치. 그 모든 걸 부딪히는 방법으로, 10년에 하나 나올 천재라고까지 평가받은 '홍련의 황녀'조차 능가하는 '최강의 1분'에 말이지.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계속 믿는다.

자신의 가치를 계속 믿는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스텔라는 알았다.

뼈에 사무칠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다행히 스텔라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자신의 불꽃──그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면, 자신의 힘은 버밀리온의 큰 힘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잇키는 어땠을까.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

마력도 빈약하고, 비장의 수단인 노블 아츠조차 단순한 신체 강화.

그것만으로도 괴로울진대 잇키 주변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그의 앞길을 막으려 든다.

그런 상황에서 어째서 그는──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자신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대체, 무엇이 이 녀석을 그렇게까지 만드는 거죠……?!"

"……글쎄. 그건 쿠로가네에게 들어봐야 알 수 있지. 그저 나는 기대하고 있어. 쿠로가네라면 정말로 칠성의 정점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서 쿠로노는 담배를 휴대 재떨이에 쑤셔 넣고는 재차 스텔라에게 물었다.

"버밀리온. 너는 오늘 아침 내게 인사차 왔을 때 '어째서 유한 온 거냐'는 내 질문에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하나?"

"네. 그 나라에 있으면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 이에요."

그것이 스텔라가 유학 온 이유였다.

스텔라를 멋대로 쌓아 올린 '천재'라는 관념 속에 우겨 넣으려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정말로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믿게 된다.

우쭐해져서는 마음의 심지가 썩어든다.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아무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그런 생각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증식해서 저도 모르는 사이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볼 기력조차 깎여져 나간다.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자신은 이런 곳에서 멈추지 않으리라.

사랑하는 버밀리온 황국을 지키는 기사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그렇기에 스텔라는 자기보다 강한 존재를 찾아 일본으로 유학 왔다.

강한 기사와 싸우고 그들을 모조리 쓰러뜨려 칠성검왕이 되기 위하여.

"그렇다면, 스텔라 버밀리온. 일단 올 한 해, 쿠로가네의 등을 전력으로 쫓아가 봐라. 그건 분명 네 인생에도 도움이 될 거야."

"……아직 모르겠어요."

쿠로노가 재촉하듯 하는 말에 스텔라는 명확하게 답하지 않았다.

"저는 아직, 이사장 선생님의 말로만 그를 아니까요……."

"……그것도 그렇구나."

쿠로노도 스텔라의 말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서는,

'"그렇다면 스스로 확인해보도록 해. 아까 말했듯이 '일도수라'는 자신의 체력도 마력도 기력도, 전부 남김없이 쓰는 하루 한 번뿐인 큰 기술. 그것도 도중에 멈출 수도 없는 흉포한 말과 같은 능력이야. 그러니까 한동안 눈을 뜨지 않겠지만……. 뭐, 죽을 뻔했을 뿐 죽은 게 아니니까 말이지. 머지않아 깨어날 거야. ……확인한 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쿠로가네와 같은 방을 쓰기 싫으면 나한테 말해. VIP 대우라는 명목으로 특별히 1인실을 준비해주지."

그렇게 고하고 나서 쿠로노는 방을 나섰다.

방에 남은 스텔라는 2층 침대의 위층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자신을 무릎 꿇게 한 쿠로가네 잇키라는 남자에 대해서.

'……나는 결코 약하지 않아.'

스텔라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자만하지는 않지만, 웬만큼 강한 상대에게 압승을 내어줄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즉, 그만큼 잇키가 강했다는 사실.

그렇기에 신경 쓰였다.

그 강인함의 근원.

온갖 부당함에 굴하지 않고 줄곧 자신의 가치를 믿어온 그 강인함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쿠로가네 잇키."

그 이름을 입에 담자 신기하게도 쓰라림 비슷한 감각이 가슴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스텔라가 이만큼 남을 이해하고 싶다고 강하게 바란 적은 처음이었다.

위에서 고른 숨을 내쉬며 자는 소년이 신경 쓰이는 나머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가 일어날 때까지의 시간이 아깝기만 했다.

그래서 스텔라는 자신 안에서 흘러넘치는 호기심에 등 떠밀려 사다리를 올랐다.

잇키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어느새 뒤척인 모양인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등이 규칙적으로 느릿하게 호흡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까보다는 제법 회복된 것이리라.

그 등에서는 아까 전에 느꼈던,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위태로움은 없었다.

그 사실에 스텔라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잇키."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의외로 잠이 깊게 들었는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나 기분 좋게 자는데 억지로 깨우기도 미안했다.

자신도 나른함이 가시지 않았으니 밖을 조금 산책한 뒤에 잠시 시간을 두고 다시 찾아오기로 할까.

그렇게 스텔라가 생각했을 때,

"………………."

스텔라의 눈동자가 무의식중에 넓게 파인 러닝의 목덜미에서 보이는 잇키의 등을 향했다.

그 미덥지 못한, 얼버무리는 미소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넓고 두터운 등이었다.

아니, 체형으로 보자면 근육과 골격이 그리 튼실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선이 가느다란 부류에 들어가리라.

그러나 강철 같은 강인함 때문에 그 등이 실물보다도 훨씬 크게 보였다.

'……조, 조금이라면, 상관없겠지? 얼굴도 저쪽을 향하고 있고.'

스텔라는 마음속으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확인한 뒤, 슬쩍 잇키의 등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잠든 잇키의 등을 천천히 매만졌다.

"우…………아."

손바닥을 통해 잇키 몸 안에 흐르는 피의 고동이 두근두근 스텔라 안에서 울려 퍼졌다.

딱딱했다.

그리고── 타들어 갈 듯이 뜨거웠다.

그러나 만져보고 느낀 인상은 강철과는 조금 달랐다.

생명의 온도가 강하게 느껴져서일까.

비유한다면 대지에 뿌리내린 커다란 나무줄기 같은 묵직한 강인함을 느꼈다.

'……이게 남자의 등………… 이구나."

처음 느껴보는 감촉에 스텔라가 열중하고 있노라니──

"으응."

"꺄……앗."

갑자기 잇키가 뒤척이며 바로 누웠다.

그 사이 스텔라의 오른팔이 말려 들어가 깔려버렸다.

'큰일이야.'

지금 깨어난다면 변명할 만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떨어지려 해도 잇키의 몸이 의외로 무거워 손이 빠지지 않았다.

억지로 잡아 빼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지만, 잇키가 깰지도 모르고 반동으로 사다리에서 떨어질까 무서웠다.

'……어쩔 수 없지.'

스텔라는 숨을 죽이고 잇키의 침대로 오른 뒤, 무릎을 세우고 그를 올라타고서는 왼손으로 잇키의 왼쪽 반신을 아주 조금 들어 올렸다.

……슬쩍……, 슬쩍.

"우우, 응!"

"─────윽!"

"………………쿨……."

'……까, 깜짝 놀랐다아…………."

스텔라는 등에 식은땀이 퍼지는 감촉을 느끼면서도, 간신히 왼손으로 공간을 확보해서 오른팔을 조용히 빼내는 데 성공했다.

탈출 성공이었다.

그러나───그건 그렇고, 하고 스텔라는 잠자는 잇키를 내려다보았다.

"……전혀 깨질 않네, 이 녀석."

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써버렸으니 잠이 깊게 드는 것도 당연하지만──

"───."

무슨 짓을 해도 깨지 않는 잇키의 모습에 스텔라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녀의 시선은 뒤척임으로 러닝이 조금 말려 올라간 잇키의 복부를 향했다.

'……남자의 배………….'

본 적은 있어도 만진 적은 없다.

대체 어떤 감촉일까.

"……이런! 뭐, 뭘 생각하는 거야, 스텔라! 안 돼. 미혼인, 그것도 공주인 내가, 여, 연인도 뭣도 아닌 남자의 몸에 흥미를 갖다니……. 경박해."

아니, 경박하지는 않나?

그다지 그런, 야한 마음으로 흥미를 품지는 않았다.

자신을 쓰러뜨린 쿠로가네 잇키라는, 지금까지 만나본 적 없는 첫 존재.

그에 대한 기사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분명.

아마도.

"무, 무엇보다, 이 녀석도 내 속옷 차림을 허락 없이 봤으니까, 쌤쌤, 이지……?"

완전히 궤변이었지만 스텔라는 그 핑계로 자신을 정당화한 모양이었다.

스텔라는 자신을 이긴 첫 존재에 대한 호기심에 등 떠리며 잇키의 허리에 올라탄 채, 슬쩍 그의 말려 올라간 러닝셔츠 틈새에 가느다란 손가락을 집어넣고 천천히 명치 부근까지 걷어 올렸다.

"……이게, …………남자의, 몸…………."

맨몸을 이만큼까지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해서 너무 놀란 나머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이렇게 새삼 보고 있자니 몸에 새겨진 근육의 음영이 여자인 자신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역시 감촉도 다를까.

"하아………… 하아…………."

미지를 향한 흥미에 스텔라의 뇌가 익었다.

열병이라도 앓는 듯 어질어질하고 숨이 거칠어졌다.

이제 스텔라는 멈출 수 없었다.

"…………꾹."

흠칫거리는 손놀림으로 잇키의 복부를 찔렀다.

그러자 얇은 피부 아래에서 강한 섬유의 감촉이 되돌아왔다.

탄력성도 풍부하고 보들보들하면서도 힘을 겸비했다.

만져본 적 없는, 처음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숨은 막대한 에너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굉장해…………."

일러

마구잡이가 아니라 정해진 목적과 확실한 방법론에 의해 만들어진 전사의 몸.

스텔라는 여자이기 이전에 전사라는 사실을 스스로 새기며 훈련하고 있기에, 이 정도까지 몸을 갈고 닦으려면 얼마나 어려움이 따르며 그것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큰일인지 잘 알았다.

쿠로노가 한 말을 의심할 마음 따위는 이미 사라졌다.

잇키는 분명 고난 속에 있으면서도 결코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의지를 결정화한 것만 같은 이 근육이 무엇보다 큰 증거였다.

그러나…… 쿠로노의 과대평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했기에 스텔라는 한층 더 강하게 알고 싶어졌다.

쿠로가네 잇키라는 인간을 알고 싶다고.

알면 알수록 한없이 흘러넘치는 잇키에 대한 흥미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마치, 자기 안을 그로 채워가는 듯한──희미한 열기를 띤 종잡을 수 없는 감각.

그 느낌이 싫지는 않지만 또한 신기했다.

"하아. 아…… 나, 어떻게 된 걸까."

하얀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잇키의 몸의 언덕을 더듬으며, 더위에 허덕이는 듯한 목소리로 상대방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아니, 그건 내가 듣고 싶은데. ……스텔라 양, 뭐 하는 거야?"

자신의 허리에 올라타 자신의 살을 만지작거리는 스텔라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잇키가 되물어왔다.

"끼,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 스텔라가 격렬한 절규를 지르며 잇키에게서 홱 물러섰고.

"앗! 그렇게 기세 좋게 일어서면……."

잇키의 주의도 덧없게, 스텔라는 굉장한 기세로 천장에 머리를 부딪쳐 "켁" 하고 그대로 2층 침대 위에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스, 스텔라 야아아아아아앙?! 괜찮아?! 지금 머리부터 세게 부딪혔지?!"

"괘, 괘괘괘괜찮아! 조금 떨어져서 아래 있던 토마토 주스를 뒤짚어썼을 뿐이니까."

"아니, 그거 전혀 안 괜찮아! 스텔라 양 몸속에 있는 토마토 주스인걸! 어쨌거나 가만히 있어! 지금 치료해줄 테니까!"

"이제 됐어."

잇키는 방에 있는 서랍 속에 처박힌 구급상자를 꺼내 스텔라를 치료했다.

"능숙하구나."

"중학생 때부터 혼자살았으니까. 뭐든 할 수 있어야지."

'……이제 그 집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으니.'

그렇게 잇키가 내심 한숨을 쉬자, 스텔라가 희한한 소리를 했다.

"……잇키에 대해서 들었어. 이사장 선생님으로부터."

"나에 대해?"

"잇키가 지금까지 친가나 학교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말이야."

"어……, 어째서 그 사람은 남의 집안 민감한 문제를 퍼뜨리는 거야. ……미안해. 듣고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지?"

"그런 건 상관없어. ……그보다 가르쳐줘."

"뭘?"

"어째서 잇키는 그런 꼴을 당하면서도 아직 기사가 되려고 하는 거야?"

"……?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야?"

"그, 벼, 별로 너에 대해 알고 싶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고?! 착각하지 마! 그저 너 같이 마력도 최저고 능력도 최약인,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에 걸맞지 않은 미숙한 블레이저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노력하는지 흥미가 있을 뿐이라고!"

"어째 그렇게까지 심한 소리를 들으니 오히려 후련하네."

……뭐, 그다지 숨길 일은 아니다.

굳이 입 밖에 내는 것은 조금 부끄럽지만, 스텔라가 그렇게까지 바란다면 상관없으리라."

"나에게는 목표로 삼은 사람이 있어."

"목표로 삼은 사람? ……그 사람은 설마 사무라이 료마?"

쿠로가네가 출신이 목표로 삼을 만한 가까운 영웅.

당연히 그 이름이 나오리라고 잇키도 생각했다.

"응. ……그 말대로야. 나는 예전부터 재능이 없어서 말이지. 줄곧 부모님이나 친척들에게 쓸모없는 취급을 받아왔어. 대대로 이어져 온 기사 가문이었으니까. 재능이 없는 아이는 존재만으로도 민폐야. 그래서 분가의 아이도 받을 수 있는 마력 제어 수업에도 참가할 수 없었어. 그리고 매년 열리는 일족이 모이는 신년회에도 내 자리는 없어서, 줄곧 밖에서 문이 잠긴 내 방에 갇혀 지냈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마.』

그것이 다섯 살 생일.

친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건 말이었다.

그 이후 아버지는 잇키에게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시야에 들어간 적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주의 의지는 일족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모든 이는 쿠로가네 잇키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무척이나 괴로웠다.

정말로 사라져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럴 때, 료마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주셨어."

지금도 그 눈 내리는 날의 일을, 쿠로가네 잇키는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날은 설날이라 집에서는 일족 전원이 모였다.

잇키로서는 그 상황이 바늘방석과도 같았다.

더 이상 집에 있는것조차 괴롭고 방에 틀어박혀 있어도 들려오는 즐거움 서린 목소리에 쓸쓸해져서, 잇키는 집을 빠져나와 뒤편에 있는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해가 저물자 기온이 점점 내려가고, 가루눈은 눈보라로 바뀌어갔다.

그래도……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했다.

없는 사람을 찾을 이유가 어디 있으랴.

여기에서 잇키가 남모르게 동사해도 그 사실을 부모님도 친척들도 슬퍼하지 않으리라.

그들에게 있어서 쿠로가네 잇키는 없어도 되는 존재니까.

단 한 사람, 여동생만은 슬퍼해줄지도 모르지만…… 그래 보았자 한 사람뿐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분해서 참을 수 없었다.

재능 없는 자신에게──가 아니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해서 눈물이 났다.

……그럴 때였다.

흰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큰 몸집의 노인, 쿠로가네 료마가 잇키 앞에 나타난 것은.

그는 눈물을 흘리는 잇키에게 말했다.

──그 분한 마음을 버리지 말라고.

그 분한 마음은 아직 잇키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에.

『잘 들어라, 꼬맹아. 지금은 그저 작은 꼬맹이지만,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녀석들 같이 재능 따위의 사소한 것에 만족하는 그릇이 작은 어른은 되지 말거라. 분수에 걸맞다는 듣기에 좋은 포기로 어른인 척 유세 떠는 어른이 되지 마라. 그런 것 문제 삼지 않는 둥 큰 어른이 되어라. ──포기하지 않는 마음만 있으면 인간은 뭐든 할 수 있어. 어쨌든 인간이라는 존재는 날개도 없는데 달까지 간 생물이니까 말이지.』

노인은 잇키의 머리에 쌓인 눈을 털면서, 소년처럼 웃는 얼굴로 그렇게 단언했다.

"……정말로 기뻤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순간이었으니까. 그게 그저 말뿐이라는 건 어린애였던 나도 알았어. 료마 할아버지가 내 인생에 무슨 보장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기뻤다.

그저 말뿐이라도, 정말로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결심했어. 어차피 어른이 될 거라면, 나는 료마 할아버지 같은 어른이 되자고. 언젠가 나랑 같은 처지의 사람을 봤을 때, 아버지와 친척들처럼 '포기하라'고 외면하는 어른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재능 따위는 인간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고, ──료마 할아버지의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어른이 되자고, 그렇지만 그러려면 지금 이대로는 안 돼. 강해져야만 해. 료마 할아버지처럼 강하게. 그렇지 않으면 내 말은 그저 패배자의 궁색한 변명일 뿐이야. 그렇기 때문이야. 이런 곳에서 포기할 수 없어. 쿠로가네 료마와 맞먹을 만큼 강해지려고 마음먹었으면, 칠성검왕 정도는 되어야 말이 되니까 말이야."

"…………그래, 그게 잇키의 '꿈'이구나."

"역시…… 무모하다고 생각해?"

정곡이었다.

스텔라는 어색하게 낯빛을 흐렸다.

잇키의 바람.

그것은…… 스텔라도 정말로 멋지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느냐 하면──.

"……딱히 말 안 해도 돼. 그리고 미안한 표정 짓지 않아도 괜찮아. 나 역시 알고 있어. 그게 보통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는 사실을. 그래서 말이지──스텔라 양, 스텔라 양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하나 같이 '너에게는 무리니 포기해'라고 말한다고 쳐. 그렇다면…… 스텔라 양은 얌전히 자기 꿈을 포기할 수 있어?"

"아─────."

순간, 스텔라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붉은색 눈동자에 서서히 무언가를 이해한 듯한, 납득한 듯한 빛이 번지고.

"……후훗, 아하핫."

스텔라는 갑자기 미안한 표정을 지우고 커다란 웃음소리를 냈다.

"응, 그렇구나. 포기할 수 없어. 크게 데여도 포기할까보냐."

잇키의 말을 듣고 스텔라는 떠올린 것이었다.

자신 또한 일찍이 그랬다는 사실을.

"아아, 그런가. 확실히 그렇구나. 이뤄지든 말든 그런 걸 생각할 필요도 없어. 할 만큼 해보고 안 되면, 그건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그렇지만 하지 않고 안 된다고 단정 짓는 건 우리는 할 수 없어."

"그래. 재능이 없어도, 주변에서 아무리 무리라고 말해도, 그런 건 무엇 하나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이유가 못 돼. 특히 우리는 지는 걸 싫어하니까."

"나보다 더 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어."

스텔라는 말하고 나서 쿡쿡 웃는다.

그것은 기가 막힌 듯하면서도 매우 기쁜 듯한 웃음소리였다.

이윽고 스텔라는 몸에서 힘을 빼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아. ……졌어. 천재라든가 범재라든가, 그런 시시한 척도로 너를 짜 맞추고 진정한 너를 보지 못한 건 내 쪽이야. 이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너처럼 지기 싫어하는 녀석에게 이길 리 없었어. ……내 완패야, 잇키."

고하는 말에는 어딘가 후련함조차 느껴졌다.

스텔라 안에서는 이제 쿠로노의 말을 의심하는 마음은 없었다.

잇키는 자신과 같은 혼의 형태를 지닌, 자신보다 강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배워 마땅한 점이 있었다.

그의 등을 쫓다보면 분명 자신은 더 강해지리라.

그렇게 확신하며 스텔라는 진심으로 이 만남을 기뻐했다.

당연하다.

그런 만남을 찾아서 스텔라는 바다를 건너 온 것이기에.

그리고 잇키는 그녀의 개운한 표정에서 잇키 자신에 대한 이해를 엿보았다.

아무래도 이쪽 대답에 스텔라는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럼 납득한 걸로 알고──────중요한 얘기를 하자, 스텔라 양."

"응? 중요한 얘기가 뭐야?"

"아니, 그러니까 이 결투, 내가 이긴 거지?"

"응, 물론. 나는 지기 싫어하지만 패배를 인정 할 정도로는 체념이 빨라."

"그럼, 스텔라 양은 내 하인인 거지?"

"………………헤?"

갑자기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스텔라.

"그거, 약속했잖아.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평생 복종. 어떤 명령이라도 따르기로."

"………………………………………………………………으으으읏?!?!"

순간, 스텔라의 표정이 한층 달아올라 새빨갛게 익더니 그 다음으로 창백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일이 많이 일어나서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겼으니까 당장 명령하는데──."

"후, 그, 그그그, 그건, 저기! 마, 마마말이 그렇다는 거지, 조, 조금 분위기에 휩쓸려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나 할까……."

"으음, 우선 어떤 명령을 내릴까. 뭐든지 하는 말 들어주는 거지?"

"뭐, 뭐뭐뭐뭐뭐든지이이이이이?! 아, 아니, 그, 부부분에 뭐든지라고는 했지만, 뭐든지는 안 돼?! 아, 안 된다니까?!"

잇키에게서 도망치려는 듯이 허둥지둥 침대 구석으로 들어가, 이불로 자기 몸을 감추는 스텔라.

체념이 빠르다는 말을 무엇이었던 것일까.

"어어? 그럼 스텔라 양은 스스로 한 말을 뒤집는 거야?"

"윽."

"뭐, 스텔라 양이 무슨 일이 있어도 싫다고 말하면 어쩔 수 없네에. 아아, 버밀리온 황족은 자기가 한 약속도 안 지키는구나아."

"아, 우……."

"조금 실망했다아."

"기, 기다려봐."

잇키의 그 싸구려 도발에, 아니나 다를까 스텔라는 걸려들었다.

침대에서 기어 나와 이미 반쯤 울음 섞인 눈동자로 강하게 잇키를 노려보았다.

"누가 안 지킨다고 했어! 조, 조조조, 좋아! 하인이든 개든 뭐든지 해주겠어! 뭐든지 들어주면 되잖아! 음흉한 명령 들어주면 되잖아! 이 변태! 바보! 진짜 싫어!"

"지금 되레 성내는 거야?!"

'……아니 뭐, 나도 장난이 좀 지나쳤지만.'

너무도 간단히 자기 자신을 내건 스텔라에게, 여자아이가 함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 했는데 조금 심했다.

잇키는 반성했다.

애당초 잇키는 처음부터 스텔라를 하인으로 삼을 마음이 없었다.

그가 바라는 바는──

"그럼 명령인데, 스텔라 양. 내 룸메이트가 되어줘."

이 방을 함께 쓰는 것뿐이었다.

"어…………, 그, 그것뿐?"

"응. 싸워보고 생각했어. 우리, 제법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스텔라 양과 더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졌어. 그러니 명령이라기보다 부탁이라고나 할까."

잇키는 알고 싶어졌다.

자신과 어딘가 닮은 빛나는 혼을 지닌 이 소녀에 대해서, 더 많이, 더 깊게.

그리고 잇키의 그 말에,

"후아…………우."

기묘하게도 잇키와 완전히 같은 생각을 했던 스텔라의 뇌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너, 너, 너도 참, 무슨 말이야……. 미혼인 공주에게, 예쁘다든가……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든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정말, 섬세함이 없다니까…………."

더 이상 제대로 잇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지, 얼굴이 귀까지 빨개져서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잇키는 화난 줄 착각해버렸다.

"아, 여, 역시 싫구나. 남자랑 한방을 써야 하다니, 미안. 상식 없는 소리를 해서. ……음, 그럼 지금부터 함께 이사장님 계신 곳에 가자. 부탁드리면 이사장님도 아마 방 하나 정도는 내어주실 거고……."

"기다려!"

그러나 물러서려는 잇키를 스텔라가 붙잡았다.

"……지, 아."

"어?"

"그, 그러니까! 시, ……싫지 않아."

"정말로 괜찮아?"

"마, 말해두는데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어서야?! 버밀리온 황족이 거짓말쟁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하고. ……정말로, 그뿐이라고?! 나, 나는 별로, 너 따위랑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 요만큼도 없다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도도하게 말하는 스텔라.

정말 여러모로 번거로운 표현이었지만, ……승낙의 뜻은 잇키에게 전해졌다.

그 사실이 잇키는 기뻤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스텔라 양."

"……어쩔 수 없으니 잘 부탁하라고. ……흥."

고개를 홱 돌린 스텔라와 악수를 나누었다.

스텔라의 손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차고…… 상상했던 것보다 더 뜨거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영토 문제를 마무리 지었을 때── 기숙사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여덟 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런, 제법 오래 잔 모양이야, 곤란하네."

"여덟 시면 뭐 문제라도 있어?"

"여기 식당. 여덟 시면 문 닫아. 저녁 어쩌지."

'……폐문 시간은 아홉 시니까 슈퍼에 가서 뭔가 사 올까. 그렇지만 '일도수라'를 쓴 후라 근육이 아파서 괴로우니, 그다지 요리하고 싶지는 않은데.'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그렇게 잇키가 팔짱을 끼고 고민하자,

"그,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줄게."

어쩐지 묘하게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스텔라가 제안했다.

"어? 괜찮아?"

"그치만, 잇키는…… 그, 심히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내, 주, 주인님…… 같은 존재니까. 주인이 배고프면 요리를ㄹ 가져다주는 게 메이드가 할 일이고."

"……가능하면 그 하인 얘기는 없던 일로 치면 안 될까?"

"그, 그건 안 돼! 황족은 한 번 입에 담은 약속은 절대로 깨지 않아!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꿍얼대지 않고 봉사하겠어!!"

굉장히 거만한 메이드였다.

그렇지만…… 솔직히 여자가 손수 만든 요리는 끌렸다.

잇키는 그런 면에서는 남자인 것이다.

"알았어. 그럼 함께 이 근처 슈퍼에 가자. 짐은 들게, 스텔라 양."

"윽."

'……어, 어럽쇼? 어쩐지 스텔라 양의 표정이 갑자기 포악해진 것 같은데…….'

"…………그거 금지."

"그거?"

"스텔라 양이라고 부르는 거. 잇키는 주인님이고 나보다 연상이니까 양을 붙이는 건 이상해. 그냥 이름으로 불러."

"어어……. 그건 저항감이 드는데에, 스텔라는 진짜 공주님이고……."

"그 공주님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 건 어디 사는 누구야?"

"윽."

"친구 사이에 양을 붙여 부르다니 이상하잖아."

아니, 분명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면 친구 사이에 주인님이니 하인이니 따지는 것도 이상하잖……."

"그건 그거. 이건 이거야."

"어어어어어어……."

"어쨌든!"

스텔라가 검지를 '척!'하니 잇키의 코끝에 세우고는,

"스텔라라고 불러야 대답할 거야."

화난 듯하면서도 어딘가 부끄러워하는 듯한, 귀여운 얼굴로 명령했다.

과연 공주님 상대로 그냥 이름만 부르기는 저항감이 들지만, ……그렇지만 분명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말한 사람은 잇키 본인이니까, 이쪽에서 벽을 만드는 것은 잘못이었다.

"…………후우. 알았어, 스텔라."

결국 잇키는 스텔라의 뜻대로 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줄곧 대화 페이스도 결정권도 스텔라가 쥐고 흔들었다.

굉장한 메이드도 다 보겠다.

그래도──

"응. 그럼 가자, 잇키! 내가 일본을 아직 잘 모르니까, 제대로 에스코트하라고."

"예이예이."

그저 이름으로 불렀을 뿐인데 이렇게 기쁘게 웃어준다면, 앞으로도 스텔라를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자.

잇키는 스텔라의 웃는 얼굴에 이끌리듯 미소 지으며 그렇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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