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77)

제3장 리벨리온

쿠로가네 시즈쿠에게는 마음속 깊이 사모하는 남성이 있었다.

그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함께했던, 무서운 표정뿐인 어른들 속에서 홀로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던 한 살 연상의 남자.

피가 이어진 오빠 쿠로가네 잇키였다.

4년 만의 재회에 느닷없이 입맞춤을 한 것도 바로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시즈쿠가 처음부터 잇키를 남성으로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시즈쿠는 지극히 평범하게 여동생으로서 잇키를 따랐다.

관계에 변화가 찾아온 때는 잇키가 가출한 이후였다.

그저 그것은 헤어지고 나서 깨달은 연모──따위 같은 로맨틱한 감정은 아니었다.

잇키를 잃게 된 4년 전.

자신의 아들이 사라졌는데도 찾으려 들지 않는 부모님이나 첫째 오빠, 그리고 집안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시즈쿠는 처음으로 잇키가 처했던 상황을 알았다.

그는 사라지기 전부터 없는 사람처럼 취급당했던 것이라고.

그 사실이 눈에 들어오자 시즈쿠는 스스로의 무지함과 뻔뻔함에 크게 충격받았다.

언제나 다정한 미소를 보내주었던 오빠가 품고 있던 아픔.

그것을 어째서 알아주지 못했던 것인가.

이런 식으로 오빠가 사라지기 전에, 어째서.

자신은 언제나, 그렇게 항상 그와 함께 있었는데──!

씻을 수 없는 후회는 시즈쿠의 마음을 괴롭혔고, 이윽고 그 죄책감은 집안사람들을 향한 분노로 바뀌었다.

그렇게나 다정하던 오빠를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멸시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집을 나가서 쿠로가네와의 관계를 끊은 오빠의 길마저 "쿠로가네가에서 F랭크를 내놓다니 수치다"라는 영문 모를 이유로 개입해 그의 미래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향한, 격한 분노와 증오로,

그렇기에──쿠로가네 시즈쿠는 결의했다.

금기니 뭐니 알 게 뭐냐.

아버지가, 어머니가, 세상이 오빠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제 더 이상 상관없다.

그들 따위에게, 이미 무엇 하나 바라지 않는다.

아버지의 사랑도, 어머니의 사랑도, 형의 사랑도, 여동생의 사랑도, 친구의 사랑도, 연인의 사랑도──모두.

모두 자기 혼자서 오빠에게 베풀어주자.

세상에서 이만큼 사랑받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여길 만큼, 오빠를 사랑해주자고.

──그러나, 그렇기에 매우 마음에 안 드는 문제가 눈 앞에 존재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바로 오빠의 하인을 자처하던 스텔라 버밀리온이었다.

스텔라는 틀림없이 잇키에게 이성으로서의 흥미를 품고 있다.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같은 여자다.

그런 속내는 보면 안다.

약속을 구실로 오빠를 옭아매어 유혹하는 여자.

정말로 눈에 거슬렸다.

게다가 저쪽도 오빠에 대한 일선을 넘은 시즈쿠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는 모양인지 몹시 시비를 건다.

오늘 일도 그렇다.

간신히 근신이 풀린 터라, 그 기념이라는 구실로 어제 오빠에게 영화를 보자고 청했는데, 옆에서 불쑥 끼어들어 자신도 간다고 말을 꺼냈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든다.

오빠도 그렇지 "이 나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니까 안내해 줘"라는 그럴싸한 이유에 홀랑 속아서, 동행을 인정하니까 더욱 화가 치민다.

아니 물론 화가 치미는 대상은 그 여자일 뿐 오빠가 아니다.

당연하다.

쿠로가네 시즈쿠의 오빠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성이니까.

그리고 그렇기에 그에게 들러붙는 스텔라를 용서할 수 없다.

"……그 암퇘지."

"어머머, 오늘은 또 거친 상태네."

독설을 내뱉은 시즈쿠의 말투에 쓴웃음을 짓는 사람은, 시즈쿠의 젖은 머리카락에 드라이기를 대고서 빗질하고 있는 그녀의 룸메이트 아리스인 나기였다.

"또 그 문제의 황녀님과 무슨 일 있었어?"

"…………있었어."

시즈쿠는 아리스인에게 머리를 맡기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잇키는 물론이고 스텔라를 대할 때조차 기본적으로는 정중한 말투로 접하는 시즈쿠지만, 아리스인에게는 허물없다.

표정도 평소 같은 새침한 얼굴이 아니라 볼을 부풀리고 부어 있었다.

아리스인은 그 토라진 아이 같은 표정을 거울 너머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후후. 사랑에 빠진 소녀는 참 큰일이구나."

아리스인은 이미 시즈쿠가 오빠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안다.

전부 시즈쿠 본인이 이야기했다.

……이상한 일이라고, 시즈쿠 본인도 생각한다.

시즈쿠는 인간 혐오인데 이는 동성도 이성도 관계없다.

남자든 여자든 시즈쿠는 동등하게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다지 좋아할 수 없었다.

본디 심했던 낯가림이 잇키의 가출을 계기로 인간 불신으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도 있다.

그런 세상에서 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그러나 룸메이트인 아리스인에게는 오빠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지극히 사적인 일까지 털어놓았다.

아직 만난 지 고작 일주일쯤 되었을 뿐인데.

'뭐라고 해야 하나, 아리스랑 얘기하고 있으면 즐거워…….'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고, 들어주었으면 하는 말을 들어주고, 시즈쿠가 기뻐하는 일을 제 일처럼 기뻐해준다.

그러면서도 파고들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부분에는 절대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시즈쿠에게는 '오빠'뿐이라 상상만 해볼 따름이지만, '언니'라는 존재에 이상형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아리스인 같은 인물이리라.

그래서 결국 쓸데없는 말까지 늘어놓는다.

"있잖아, 아리스."

"왜애?"

"……오빠를 좋아하는 여동생이란,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물어보고 나서, 시즈쿠는 어리광 부리는 질문이었다고 후회했다.

그런 관계는 당연히 이상하다.

일부러 물을 필요도 없다.

그것을 어째서 묻는가.

이유는 하나.

이쪽의 마음을 헤아려 다른 답을 해주었으면 하기에.

그리고,

"일반적인 윤리에 비추어 말하자면 역시 이상하겠지. 세간에서도 받아들여질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그런 사실은 새삼 말할 것도 없이 시즈쿠 역시 이해하잖아? 그래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충분히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해."

아리스인은 역시 헤아려주었다.

"……미안, 아리스. 나, 지금 굉장히 한심한 걸 물어봤어."

"어머, 상관없잖아.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기운을 차리지. 안심하는 마음이 되기도 하고. 그건 정말로 멋진 일이야. 말은 서로 헐뜯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지탱해주기 위해 태어난 거니까. ……게다가, 나는 진심으로 시즈쿠의 사랑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진짜라고 생각하는걸. 멋지잖아. 그 정도까지 한 사람을 사모할 수 있다니."

"고마워. ……나도 이 마음을 부끄러워할 생각은 없어. ……그렇지만, 오라버니에게 받아들여질지 어떨지는 굉장히 불안해."

"그 부분은 끈기의 승부구나. 상대편은 역시 '여동생'이라는 인식이 강하니까, 이걸 '여자'로 바꾸는 것이 꽤나 어려울 거야. 그런 의미에서는 뛰어넘을 장애물이 없는 황녀님 쪽이 제법 유리한 위치에 있는 거지."

"우우………………."

냉정한 아리스인의 분석에 풀이 죽은 시즈쿠.

사실 시즈쿠는 그렇게까지 머리의 나사가 풀린 소녀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오빠에게 이해받기 어려울지, 그런 문제는 진작부터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머리의 나사를 다소 느슨하게 풀어서라도 파고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일단 포화공격으로 잇키가 인식하는 쿠로가네 시즈쿠의 위치를, 여동생에서 여자로 바꾼다.

4년 만에 막 재회해서 거리감이 애매한 지금 그것을 이루지 않으면 자신에게는 기회조차 없다.

그러나 아무리 포화공격을 퍼부어도 자신이 오빠에게 있어서 매력적이지 않으면 그런 행동은 심술일 뿐이다.

자신의 행위는 오빠의 노여움을 사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여동생으로서도 사랑해주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시즈쿠는 언제나 울고 싶을 만큼 불안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렇게 풀죽은 표정 짓지 마. 상대편은 상대편 나름대로 '신분'이라는 커다란 장애가 있으니까. 괜찮아. 여자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데 싫어할 남자는 없어. 그것도…… 시즈쿠처럼 귀여운 여자라면 더더욱."

아리스인은 시즈쿠의 낙심을 헤아리고 곧바로 격려해주었다.

'정말로 그럴까…….'

어쨌거나 시즈쿠는 여자라서 잘 모른다.

그러나 아리스인이 그렇다고 하면, 남자라는 존재는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아리스인은 자신보다는 확실하게 남성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고마워, 이리스. 덕분에 기운이 났어."

"천만의 말씀♪ ……그렇지만 정말 만나자마자 갑자기 키스라니 너무 심했어. 스스로 첫발을 내딛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갑자기 크게 한 방 처넣으면 오히려 상대의 방어가 단단해진다고."

"……그건 솔직히 반성하고 있어……."

"그럼 됐어. 남자의 이성을 녹이는 방법은 느긋하게 천천히…… 혀로 사탕을 녹이듯이 달콤하고 부드럽게 하는 게 기본이야. 뭐, 내일 데이트는 나에게 맡겨둬. 이 이상 없을 만큼 완벽하게 시즈쿠를 꾸며줄게♡"

"그렇구나. 나에게는 아리스가 있는걸. 그런 녀석에게 절대 지지 않아."

상대가 '절대복종'의 약속을 자기 좋을 대로 내세운다면, 이쪽은 '여동생'이라는 입장을 좋을 대로 이용해줄 뿐이다.

물러설 마음은 없다.

고독한 오빠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나고 자란 집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다정한 오빠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그런 여자에게 맡길 수 없다.

타인 따위에게 기대지 않는다.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만을 생각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그러나 자신만은 결코 오빠를 배신하지 않겠다.

슬프게 하지 않겠다.

계속 그의 곁에 있겠다.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영원하다고 지금 여기에서 맹세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은 오빠를 따라 여기에 온 것이다.

'절대로…… 그런 여자에게 안 넘겨줘.'

스텔라의 데이트 난입으로 시들해진 기분에 힘이 되돌아왔다.

아리스인의 말은 항상 자신에게 용기를 준다.

"나, 힘낼게."

"그 기세야, 그 기세. ……자, 다 됐어."

머리 손질을 끝마친 아리스인이 드라이기를 껐다.

고개를 살짝 흔들자 시즈쿠의 은색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가느다랗게 춤추었다.

스스로 머리 손질을 하던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생각하며 아리스인의 기술에 감동했다.

이 솜씨를 알게 되니 스스로 손질할 마음이 안 들어, 시즈쿠는 아리스인에게 응석을 부릴 뿐이었다.

'나중에 나도 무언가 해줘야지………….'

그러나 자신이 아리스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개를 기울이며──시즈쿠는 딱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렇지. 저기, 아리스. 내일 영화, 아리스도 같이 갈래?"

"어머, 괜찮아? 모처럼 하는 데이트인데."

"괜찮아. ……그 여자가 따라오는 시점에서 데이트는 망했는걸."

"후후. 그것도 그러네. 그럼 실례해볼까. 시즈쿠가 자랑하는 오라버니와는, 한번 제대로 이야기 나눠보고 싶기도 하고."

'다행이다. 기꺼운 모양이야.'

그렇다면 서둘러 잇키에게 사후 승낙의 문자를 보내야지.

어차피 저쪽도 룸메이트 동반이니까 거절할 리는 없으리라.

"내일이 기대된다아. 멋진 남자면 나도 노려볼까."

"어? 미안, 잘 안 들렸어. 다시 한 번 말해봐. 할 수 있는 말이라면."

"미안해요. 농담이에요. 경동맥에 닿은 요이시구레를 거둬주세요."

농담이라니 다행이다. 진심이었다면 설령 아리스인이라고 해도 피를 봐야 할 참이었다.

     ◆

시즈쿠와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한 날 아침.

학교 정문에서 시즈쿠와 아리스인을 기다리는 쿠로가네 잇키와 스텔라 버밀리온의 모습이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평상시 교복과는 달랐다. 잇키는 셔츠에 청바지라는 편한 차림. 스텔라는 산뜻하게 만들어진 흰 블라우스 위에 봄에 어울리는 밝은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늦는구나. 뭘 하고 있는 걸까."

"같는 기숙사라면 함께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잇키와 스텔라는 제1학생 기숙사.

시즈쿠는 제2학생 기숙사에 방이 있다. 각각은 본 교사를 사이에 두고 정반대 위치에 있어서, 이렇게 교문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시즈쿠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뭐, 분명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올 거야. ……그건 그렇고 의외였어. 스텔라가 영화에 그렇게 흥미가 있을 줄이야."

잇키는 시간 때우기 잡담으로 시즈쿠가 영화를 보러 가자고 청했을 때, "나도 갈 거야! 절대로 갈 거야! 안 불러도 따라갈 거야!"라고 굉장한 기세로 달라붙던 스텔라를 떠올렸다.

"……그치만, 그런 어두운 곳에 시즈쿠와 잇키를 둘만 있게 하다니 너무 위험한걸."

"어? 뭐가 위험해?"

"너의 그 사자 옆을 그냥 지나가려 하는 위기감 부재가 위험하다고! 첫날 있었던 일 잊었어?"

"아아……."

아니, 뭐, 아무리 잇키라도 그 일은 기억한다. 잊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툭 까놓고 말해서 그것은 잇키의 첫키스였다. 그러나,

"그 일이라면 다음 날 시즈쿠가 '4년 만의 재회에 감격한 나머지 지나쳤다. 반성하고 있다'라며 사과했고―― 애당초 시즈쿠에게 있어서도 나는 오빠일 뿐이니까, 그렇게 덥석 잡아먹을 리 없어. 첫날만 특별했대. 그러니까 괜찮아."

"……그런 건 진짜로 물러서니까 일단 거리를 둔 것뿐일 텐데……."

"어? 지금 뭐랬어?"

"시스콤이라고 했어."

"시, 시스콤이 아니야! 아니 뭐, 시즈쿠는 소중한 동생이니 정말 좋아하지만, 이미 몇 번을 말했다시피 시즈쿠는 내 여동생이야. 그것도 완벽하게 혈연이라고. 4년 떨어져 있었다고 해서 여자로 의식하는 일은 절대 없다니까!"

"정말로? 앞으로 시즈쿠에게 넋이 나가거나 하지는 않아?"

"당연하지."

여동생을 이성으로 의식하다니 있을 수 없다.

'……그보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잖아.'

첫날에 벌어진 불찰 탓이라고는 해도, 그런 당연한 사실조차 의심받는 신세가 서글펐다.

자신의 신용이 없음에 잇키가 한숨을 쉬고 있노라니.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기다리셨죠, 오라버니."

"아, 시즈쿠――."

"늦었어. 뭘 하느라…………."

뒤돌아보며 맞이하는 잇키와 스텔라의 표정이―― 찡 하고 얼어붙었다.

"죄송해요. 몸단장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려서."

꾸뻑 머리를 숙이며 사죄하는 시즈쿠가……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예뻐 보였다.

그것도――조금 범상치 않은 상승 폭으로.

오늘 차려입은 그녀의 복장은 은색 머리카락과 아담한 체형을 살리는 고딕 롤리타.

이 옷차림은 본디 비스크 인형을 연상시키는 시즈쿠의 분위기에 매우 잘 어우러져 그녀의 매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교복 차림보다도 외모가 도드라지는 것은 이 복장의 영향도 있으리라.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시즈쿠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옷차림이라 잇키에게는 친숙한 모습이었다. 따라서 평소라면 그 옷차림에 어릴 적 시즈쿠를 겹쳐 보아 한층 강하게 4년 만에 재회한 여동생을 여동생이라 인식했으리라.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시즈쿠에게 행해진 어떤 종류의 마법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예, 예쁘다.'

햇빛 속 주변 풍경이 흐릿해질 정도로, 가만히 서 있는 시즈쿠에게 시선이 빨려 들어갔다.

오늘 어째서 이렇게까지 눈을 끌어당기는 마성이 그녀에게서 감도는 것일까.

잇키는 '시즈쿠에게 넋을 잃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입에 침도 마르기 전에, 그녀에게 넋을 잃고는…… 잠시 후 그 마성의 정체를 깨달았다.

화장이었다. 잘 관찰해보면 눈꺼풀에 옅게 아이섀도를 칠했고, 입술에는 연한 색 립스틱을 발랐다.

그 외에도 눈썹은 하나도 남김없이 컬 정돈을 했고, 시즈쿠의 특징인 은색 머리카락도 그 하나하나가 바람에 나부끼며, 부드럽게 흩어져 은색 빛을 내뿜었다. 마치 시즈쿠 본인이 빛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리고 그 모든 요소가 시즈쿠라는 최고의 소재를 죽이지 않은 채 오히려 두드러지는 절묘한 안배로 조금 어려 보이는 용모의 시즈쿠를 '여동생'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한 사람의 정말로 매력적인 '여성'으로 완성하고 있었다.

"뭐, 뭐야 그게! 반칙이야! 명백히 평범한 사람 솜씨가 아니잖아, 그 볼! 그렇다면 스타일리스트를 불렀던 거야?!"

"황녀님이 아니니까 그런 거 할 수 없고 하지도 않아요. 이건 제 룸메이트가 해준 거예요."

"룸메이트?"

"아아, 그건 오늘 따라온다고 말했던 아리스인 양?"

이미 문자로 연락을 받아서 이름까지는 알고 있었다.

시즈쿠 말로는, '연상의 언니' 같은 사람이라는 모양이었다.

"네. 이제 곧 따라올 텐데……."

"아, 정말 시즈쿠 너무 빨라. 그렇게 서두르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모처럼 한 화장이 망가지잖아?"

시즈쿠가 말한 대로 아리스인은 금방 스텔라와 잇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어?""

두 사람의 표정이…… 다시 돌처럼 굳었다.

어째서냐 하면, 시즈쿠에게 프로에게 뒤지지 않는 화장을 해준 그녀의 룸메이트 아리스인이,

……아무리 보아도 남자였기 때문이다.

     ◆

"우후후. 만나서 반가워. 오늘은 불러줘서 고마워. 내가 시즈쿠의 룸메이트인 아리스인 나기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싫으니까, 아리스라고 불러주면 기쁘겠어♪"

시즈쿠와 마찬가지로 모노톤 바탕의…… 흔히 말하는 비주얼 계열 복장을 몸에 두른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남자는, 중절모를 벗으며 공손하게 인사하더니 상쾌한 미소로 스텔라와 잇키 두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 그러니까, 잘 부탁해."

"참 예의 바르네……."

악수를 요구받은 두 사람은 머뭇머뭇 그것에 응하면서도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저기, 잠깐, 이건 어찌 된 일이야.'

'……아니, 나한테 물어봐도 곤란해.'

두 사람은 아리스인이 틀림없이 여성이리라 생각했으나, 아리스인은 아무리 보아도 남성이었다.

남자치고는 선이 가느다란 편이지만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는 아니다.

키도 잇키보다 커서, 아마도 180센티미터 이상은 되리라.

'그렇지만 말투나 행동은 여자 맞지? 개그야? 웃으면 돼?'

'그걸 나한테 물어도 곤란하다니까.'

"후후. 봐, 시즈쿠. 내 아름다움에 두 사람이 당황하고 있어."

""이 무슨 긍정적인 사고방식이야?!""

스텔라와 잇키의 딴죽이 겹쳤다.

"그러니까. 아리스 양?"

"그냥 이름으로만 불러요. 딱딱한 건 질색이야."

"……아리스는, 그, ……트랜스젠더야?"

"달라. ……나는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소녀야."

"뭐, 뭐가 다른 걸까, 스텔라……?!"

"나에게 말 돌리지 마!"

"역시 당황스러운가요?"

시즈쿠는 눈에 띠게 동요하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자신들의 당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잇키는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었다.

"아, 아하하. 응, 뭐라고 해야 할지,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실제로 만나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어떻게 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미안."

"우후후. 사과할 것 없어. 나는 익숙하니까. 그렇지만 시즈쿠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지."

"나는 성별 같은 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처음 만나는 트랜스젠더라는 인종에게 당황한 자신과는 달리, 그런 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하는 시즈쿠의 모습에 잇키는 감동을 느꼈다.

'시즈쿠, 잠시 못 본 사이에 정말로 어른이 되었구나.'

다양한 가치관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정신을 지니고 있다.

자신들 역시 보고 배워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아무래도 좋아요. 인간아라는 시점에서 동등하게 싫으니까."

앞서 한 말 철회.

누가 내 여동생의 뒤틀린 마음에 바를 바셀린을 가져다 주세요.

"뭐, 분명 아리스는 그다지 본 적 없는 종류의 인종이지만, 본인은 여성으로서 취급받길 원하는 모양이라 저는 여성으로서 대하고 있어요. 오라버니도 스텔라 양도 될 수 있으면 아리스를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대해주세요."

"가능한 한 노력해볼게……."

"후후. 고마워. 그렇지만 무리는 하지 마. 어색한 건 싫으니까."

옆에서 적당히 도망칠 길을 준비해주는 점에서 아리스인은 제법 빈틈이 없었다.

"뭐, 어쨌든 이걸로 전원 모였으니 슬슬 영화관에 갈까."

"그러네. 언제까지 여기에서 서 있는 것도 지루하고."

"아직 영화 상영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걸어가요, 오라버니."

시계를 보면서 제안하고 나서, 시즈쿠는 매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잇키의 팔에 자기 몸을 휘감았다.

그것은 어린 시절 시즈쿠가 곧잘 차지하던 위치였지만,

"우왓."

잇키는 놀란 목소리를 내버렸다.

솔직히 오늘 시즈쿠와 엮이는 것은 괴로웠다.

아까 다짐한 결의가 갑자기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잇키는 떨어져 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후후. 이렇게 함께 걷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오라버니."

"어, 우, 응. ……그렇구나."

추억을 그리워하듯이 미소 짓는 시즈쿠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즈쿠가 자신을 오빠로서 따르며 접촉을 원하는데, 자신은 여동생으로서 볼 수 없다니 너무 꼴사납다.

뭐…… 그것이야말로 시즈쿠가 노리는 바였으나――.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스텔라가 아니었다. 당연히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들었다.

"이봐아! 너 나오자마자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뭐라니, 지극히 일반적인 남매의 스킨십인데요? 예전에는 곧잘 이렇게 걸었어요. 그렇죠, 오라버니?"

"그, 그게……. 아하하, 뭐 그렇지……."

"그,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제대로 준비해 왔어요. 자요, 목줄. 부디 마음껏 하인의 스킨십을 즐기세요."

"어머, 제법 세심하잖아―― 아니 무슨 배려야, 이게!"

"그치만 하인 주제에 주인 옆을 걷다니 용납될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오라버니의 하인이라고 말하며 제게 덤벼든 주제에. 불리한 점은 그냥 넘기는 건가요? 버밀리온 황족의 밑바닥을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우……."

"아뇨, 괜찮아요. 스탤라 양도 오라버니와 손을 잡고 싶으면 잡으셔도 상관없잖아요? 다행히 오라버니의 손은 두 개 있으니. 그렇지만 육친도 아닌 이성과 손을 잡고 싶다니, 마치 특별한 감정이라도 있는 것 같네요. 혹시 스텔라 양은 오라버니를――."

"그, 그렇지 않아! 나는 결투에서 져서 잇키의 하인이 된 것뿐이니까! 정말로, 그것뿐인 관계야!"

그런 말을 들으면 자존심 강한 스텔라는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꿰뚫어 본 시즈쿠의 유도에 스텔라는 뜻대로 조종당해,

"그럼 손을 잡을 필요는 없겠네요."

깨끗하게 쫓겨나 버렸다.

"우으으……."

"자, 가요, 오라버니."

"으, 응……."

"……뭐가 이제 넋이 안 나가, 이 시스콤. 변태……."

시즈쿠와 함께 걷는 길. 뒤에서는 저주 같은 스텔라의 목소리가 잇키를 찔렀다.

과연 이 두 사람울 데리고 오늘 하루 평온하게 지낼 수 있을까.

그런 불안함을 느끼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

하군 학원 근처에는 전국에 지점이 있는 대형 쇼핑몰이 있다.

그곳의 최상층인 4층에 잇키 일행의 목적지인 영화관 시네마랜드가 있었다.

그러나 일동은 곧장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시즈쿠가 오늘 볼 예정인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일찍 올라가 보았자 4층에는 영화관과 상영작 관련 상품을 취급하는 상점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네 명은 아리스인의 제안으로 1층 푸드코트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으으음, 이 크레이프 맛있어어."

아리스인이 추천한 가게에서 구입한 크레이프의 맛에 스텔라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분명, 크레이프는 쓸데없이 비쌀 뿐이라고 생각해서 외면했는데, 이건 괜찮네요."

시즈쿠도 같은 의견인 모양인지 오물오물 작은 입술을 움직이며 크레이프를 베어 먹었다.

"그치? 여기 푸드코트에서 파는 크레이프는 크림이 짙고 풍부해♪ 그렇지만 아이스 계열은 그저 그래. 그쪽을 공략하려면 3층에 있는 서틴 아이스크림 쪽이 좋아."

"너 이것저것 많이 아는구나."

"먹으러 다니면서 조사했어. 간식은 여자의 삶의 보람인걸♪"

"맛있는 과자와 예쁜 옷에 대한 건 아리스에게 물어보면 틀림없어요. 스텔라 양도 뭔가 필요하면 그녀에게 부탁하면 될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황녀님이 입을 만한 옷을 파는 가게는 모르지만, 맛있는 디저트 가게라면 몇 곳 소개해줄 수 있어. 원한다면 오늘 안내해줄까?"

"정말로? 와아, 기대된다! 다른 곳은 어떤 가게를 알고 있어?"

"이 쇼핑몰에 있는 카페인데, 거기 티라미수가――."

크레이프를 먹으면서 다른 단것 이야기를 시작하는 여자들(?)을, 잇키는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았다.

이런 여자 특유의 텐션은 불편하다.

잇키 본인은 그렇게까지 단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도 곁들어져, 회화에 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아리스는 어느새인가 녹아들었네.'

처음에는 당혹스러움을 보이던 스텔라도, 이제 아리스인의 성별을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같은 반 남자들보다도 훨씬 가까운 거리감으로 대하고 있었다.

의외로 언니 타입은 여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리스인은 본디 상당한 미형이라서,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가만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홀로 무리 밖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잇키는 시즈쿠의 볼에 크레이프 크림이 묻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런.'

이래서는 모처럼 한 화장이 허사이다.

조금 전 화장으로 문자 그대로 변화한 시즈쿠의 분위기에 허둥지둥하던 잇키였으나, 아무래도 뺨에 크림을 묻히고 있어서야 긴장이고 뭐고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잘 아는 연하의 소녀라고 다시 인식할 수 있어서 안심될 정도였다. 고마울 지경이다.

'그렇지만 모처럼 멋 부리고 왔는데 저래서야 안쓰럽구나.'

"시즈쿠, 잠깐만."

"네?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시즈쿠에게 말을 걸어 돌아보게 한 뒤, 잇키는 손을 뻗어 시즈쿠의 뺨, 입술 바로 옆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뺨에 묻었어. 모처럼 예쁜 모습이니 조심해야지."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핥아 먹었다. 순간――

"으으으으으으으으!"

시즈쿠는 불붙은 듯 얼굴 전체가 새빨개져서는 황급히 아리스인의 뒤로 숨어버렸다.

그 행동은 예전부터 있었던 시즈쿠의 버릇.

시즈쿠는 부끄러운 일이 있으면 곧장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

"어머머, 혹시 시즈쿠는 공격력만 세고 수비력이 전혀 없는 타입?"

"시시시끄러워, 아리스! 가,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놀랐을 뿌뿌, 뿌뿌뿐이야!"

아리스인의 뒤에서 큰소리치는 시즈쿠의 모습을 보고 잇키의 입가에 활짝 웃음이 어렸다.

"크림이 좀 묻은 거 가지고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힐 필요없는데."

"아니, 문제는 그 부분이 아닌데. ……제법이네, 오빠."

"제법이라니, 뭐가?"

"우후후♪ 그건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야."

아리스인이 얼버무리자 잇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으흠. 으흠."

스텔라가 작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스텔라? 기침을 다 하고, 감기라도――."

돌아보자 산타클로스처럼 입 주변에 크림이 잔뜩 묻은 스텔라가 있었다.

"왜 그래, 잇키.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오히려 안 묻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운데?!"

"뭐, 뭐가 묻었으면, 그…… 시즈쿠에게 해준 것처럼 닦아줘도, 괜찮아."

"아니, 그건 이미 손가락으로 닦을 차원이 아닌데. 어쨌거나 수건 빌려올 테니까 기다려."

"아………… 잠깐!"

스텔라가 막을 틈도 없이 잇키는 가게 점원에게 수건을 빌리러 가버렸다.

"……저기, 스텔라 양. ……혹시 당신 바보예요?"

"어머, 서툴러서 귀엽잖아. 조금 응원해주고 싶어졌어."

"시, 시시시끄러워! 별로 딴마음이 있었던 건 아닌걸! 손이 미끄러져서 입에 묻었을 뿐인걸! 정말이라니까!"

     ◆

크레이프를 다 먹고 잡담을 하고 있노라니 어느새인가 시간은 흘러 예정 시각이 되었다.

"슬슬 시간이 다 되었으니 4층으로 가요."

시즈쿠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일동은 푸드코트에 가지런히 놓인 테이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스텔라는 새삼스러운 일을 잇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잇키, 오늘 무슨 영화를 보는 거야?"

"그건 나도 아직 몰라."

어쨌든 4년 만에 재회한 귀여운 여동생이 한 부탁이었다.

애당초 거절이라는 선택지가 없었던 터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단번에 오케이했다.

"……너, 뭐 하러 온 거야?"

"스텔라가 그런 말을 하다니 뜻밖이야."

"나는 감시하러 온 거니까 괜찮아. 이봐, 시즈쿠. 오늘 볼 영화는 어떤 거야?"

"지극히 평범한 러브 스토리예요."

"……역시. 따라오길 잘했어."

그럴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며, 스텔라는 한숨을 쉬었다.

"참고로 제목은 뭐야?"

"「나는 여동생을 사랑했다 ※ 15세 이상 관람 가」."

"그게 어디가 평범한 러브 스토리야!"

"평범한 순애예요. 두 사람이 남매 사이라는 점만 눈 감으면."

"그런 부도덕한 순애가 어디 있어! 너 얼마만큼 망설임이 없는 거야! 잘도 이런 걸 친오빠랑 둘이서 보러 가려는 생각을 하네?! 그거 어떤 분위기가 되는 거야! 이제 기절초풍을 뛰어넘어 새삼 다시 평가해야 할 지경이야!"

"클래스메이트들 앞에서 하인 선언이나 하는 사람에게 망설임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아요."

지당한 의견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잇키 역시 이런 영화를 여동생과 함께 볼 정도로 상식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시, 시즈쿠……. 이건 좀, 그만두자."

"에에, 어째서요? 뭐가 문제죠."

"오히려 문제가 없는 부분을 못 찾겠어……."

무엇이 아쉬워서 친여동생이랑 여동생을 상대로 하는 15세 이상 관람 가 연애 영화를 보러 가야만 하는가.

"어, 어쨌거나 이거 말고! 다른 걸 보자!"

"우우. 오라버니가 싫으시다면 할 수 없네요……. 그럼 어떤 걸로 할까요?"

그렇게 말하고 시즈쿠는 자신의 학생 수첩으로 시네마랜드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세 사람에게 대안을 물었다.

"아! 이거 어때? 「사막의 왕녀 카르나」. 사막의 도적단에게 납치된 카르나 공주가 젊은 도적의 우두머리와 사랑에 빠지는 애니메이션이래. 왠지 로망이 있어서 멋져――."

"각하."

"어째서!"

"출신 성분도 모르는 불량배 상대로 다리를 벌리는 창녀가 나오는 영화 따위 보고 싶지 않아요."

"자기 오빠를 상대로 15세 이상 관람 가 지정 판정을 받을 만한 내용이 나오는 변태 영화에 비하면 훨씬 낫다고!"

"어휴. 이래서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정 안 나겠네. 좋아, 그럼 여기서는 내가 절충안을 내서――「남자들의 실낙원 ※15세 이상 관람 가」로 하자."

""누가 성별을 절충하라고 그랬어!!""

스텔라와 시즈쿠의 추궁이 겹쳤다. 의외로 사이가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제멋대로네에. 그렇지만 그럼 남은 건 하나. 액션 영화 뿐이야."

"상영작이 적네."

"작은 영화관이니까 어쩔 수 없어요."

"그렇지만 액션 영화라면 장르 면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즐길 수 있을 거고 좋지 않을까? 어때, 두 사람 모두."

"우우. 매우 유감이지만, 오라버니가 그게 좋다고 하시면……."

"어쨜 수 없네. 뭐, 나는 액션도 좋아하니까 괜찮아."

"그럼 그걸로 결정이구나. 마침 이제 곧 영화 시작이니까 딱 좋네."

"아리스, 그런데 액션 영화 제목은 뭐야?"

"「간디: 분노의 해탈」."

"""뭐야, 그게. 굉장히 신경 쓰여."""

사이트에 올라온 포스터 사진에는 간디라는 타이틀 아래에 불꽃을 배경으로 한 스님 머리 상반신 반라의 울퉁불퉁한 마초맨이 중화기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선전 문구는 '용서가 강한 자의 특권이라고 했나. 그건 거짓말이다'.

이것은 너무하다. 뭔가 이것저것 섞여 있고.

그러나 그 지나치게 카오스 넘치는 모습에 이끌려 순조롭게 의견이 정해졌다.

잇키 일행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 푸드코트에서 4층 시네마랜드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 도중, 때마침 3층에 다다랐을 때, 문득 잇키는 떠올렸다.

"다들 미안. 먼저 화장실 들렀다 갈 테니, 내 몫까지 표 사둬."

"어머, 그럼 나도 같이 갈까."

잇키의 이탈에 아리스인도 뒤를 이었다.

"그럼 저희가 표를 사둘 테니 돈은 나중에 주세요."

"시작되기 전에는 돌아와. 이제 별로 시간 없어."

"응, 되도록 서둘러 갈게."

"시즈쿠, 시즈쿠. 나, 잇키 옆자리가 좋아아♪"

"오라버니. 그럼 세 사람 몫의 표를 사서 기다릴게요."

"미안해! 거짓말! 농담이에요!"

이렇게 스텔라와 시즈쿠를 먼저 보내고, 남자 두 사람은 3층 화장실을 향하게 되었다.

"우후후♪ 겨우 두 사람이 되었구나."

"아니, 동의를 구해도 말이지."

"어? 화장실에 가자는 건 그런 신호가 아니야?"

"전혀 아니야!"

"후후. 알고 있어, 이것도 농담이야. 정말 잘 먹히는구나아."

"……미안. 아리스 같은 사람과 이야기해보기는 처음이니까, 아직 거리감을 파악 못 해서."

"평범한 여자로 접해주면 돼."

"응. 그거 무리야."

"그치만 안심해. 나는 일반은 건드리지 않으니까."

"이, 일반?"

"요컨대 네게 성적인 흥미는 없다는 말이야."

"아, 아아. 그렇구나. 응, 그거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만 너랑 한번 둘이서 얘기 나누고 싶었던 건 정말이야. 시즈쿠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어떤 사람인지 신경 쓰였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려나."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이건 예상 밖의 전개네. 그럼 지금부터 둘이서 「남자들의 실낙원 ※15세 이상 관람 가」를 보러 갈까!"

"그런 의미의 흥미가 아니라니까! 그게 아니라, 시즈쿠는 꽤나 낯가림이 심하니까, 다른 사람을 그리 쉽게 따르는 애가 아니야. 특히 이성에게는.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흥미가 있었어."

"저런. 난 여자인데?"

"……."

"뭐야, 그 눈은. 뭐 불만이라도 있니?"

"아니? 별로……."

'진심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모르겠다. 아무래도 역시 만난 적 없는 인종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잇키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섣부르게 파고들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시즈쿠가 나에 대해서 말했다고 했는데, 그건 어떤 내용이었어?"

"그건 여자끼리의 비밀."

아리스인은 피아니스트처럼 길고 가는 검지를 입술 앞에 세우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제 와 성별에 딴죽 걸기도 멋쩍은 일이리라.

"……그치만 그 애가 말하는 쿠로가네 잇키는 정말로 강하고 멋진 남성이었어. 그리고 오늘 이렇게 널 만나고 보니 말 그대로의 사람이었어. 그렇지만 그렇기에 신경 쓰이는 점이 있는데 물어봐도 되니?"

"뭔데?"

"너는 작년에는 집안의 방해로 결국 한 번도 싸워보지 못했지?"

"으, 응. 학교에서 전투행위를 일절 금지당했으니까 말이지. 물론 수업도 모의전도 전부."

대답하면서 시즈쿠가 그런 사실까지 말했나 하고 잇키는 내심 경악했다.

쿠로가네가와 자신 사이의 알력.

그것은 말하자면 집안의 수치라고나 할까, 그다지 밖으로 새어 나가 좋을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 쿠로가네가의 보호 아래 있는 시즈쿠의 입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면, 상당한 신뢰와 신용을 얻어야만 하리라.

"그렇지만 올해는 괜찮아. 새 이사장님이 방침을 바꾸셨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그건 정말로 운이 좋았던 것뿐이잖아? 혹시 새 이사장 선생님이 오지 않았다면, 너는 어땠겠어?"

"마찬가지야.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지. 애당초 내가 유급 받았을 때, 나는 그녀의 부임도 방침도 몰랐고 말이야."

"그건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아?"

"생각 안 해. 아리스라면 알고 있겠지만 기사 학교 교원은 거의 전부 프로 마도 기사야. 당연히 실전을 보지 않아도 학생이 어느 정도 강한지 대강 파악할 터. 그리고 기사 학교에 있어서 '칠성검왕을 배출한다'는 사실 만큼 명예로운 일도 없어. 그러니까 '나라면 칠성검왕이 될 수 있다'고 그들을 납득시키면 돼. ……나를 원하게 할 만큼 강해지면 돼. 설령 몇 년이 걸려도 말이야."

그렇다. 현재 자신에게는 학교가 쿠로가네가의 요구에 굴복해서 팔아치울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가치를 올려서 학교 측에 아깝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잇키는 줄곧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힘을 복돋아 왔다.

"그래도 지금 이사장님에게는 감사하고 있어. 나 역시 다른 길이 있다면 굳이 고난을 헤쳐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과연. 잘 알았어."

순간, 잇키는 자신을 높은 시점에서 바라보는 아리스인의 얼굴에 한 가지 감정이 깃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연민이었다.

"잇키…… 너는, 상처 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

"아리스?"

"이건 내 경험에 비추어 얘기하는 거니까, 너에게 들어 맞는다고는 단정 지을 수는 없는데. ……강인함은 결국 '인내'야. 얼마만큼 참을 수 있는가. 그 허용량의 차이일 뿐이야. 본질적인 마음에 부담이 계속 쌓이는 행위, ……어디선가 토해내지 않으면 마음에 계속 부담이 커져서, 나중에는………… 파직 부서져버리지. 맥없을 만큼 쉽게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마음은 반드시 비명을 질러. 분노나 슬픔, 초조함, 그런 감정이 '누가 이 괴로움을 들어줘', '내 아픔을 알아줘'라는 충동이 돼서, 어떤 때는 온화하게, 어떤 때는 폭력마저 동반하는 격정이 되어 빠져나오지. ……하지만 너에게는, 무엇이든 너무 허용해버리는 너에게는, 이미 그 비명이 들리지 않을 거야."

쓰라린 듯 침통한 표정으로 고하는 아리스인의 말을 듣고 잇키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그의 말이 지금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자신은 아직 초조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

아리스인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아리스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들리지 않아. 적어도 지금 너에게는. 왜냐하면 그 소리가 들린다면 그렇게나 온화한 상태를 유지할 리 없어. 부드럽게 웃고 있을 수가 없어."

'……분명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결코 순풍만범()은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지나친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진지하게 말해도 쓴웃음만 나왔다.

얼버무리는 듯 웃는 잇키의 모습에 아리스인은,

'뭐, 내 말이 전해질 리도 없지.'

작게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어차피 오늘 막 만난 타인이었다.

그 말에 얼마나 힘이 있으랴.

그러나 아리스인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말해두고 싶었다.

눈치채도록 쐐기를 박아두고 싶었다.

시즈쿠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점도 물론 있지만, 아리스인 자신이 오늘 만난 쿠로가네 잇키라는 청년을 기껍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니까――아리스인은 마지막으로 격려하는 미소를 보이며,

"언젠가, 너도 눈치채지 못한 마음의 비명을 너 대신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면 좋겠어. 그런 날이 오기를 친구로서 진심으로 기도할게."

목에 건 은색 로사리오에 키스를 하고서, 아리스인은 잇키의 행복을 기원했다.

그 바람을 이때의 잇키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하나?

그런 어긋난 당혹스러움만이 떠올랐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아리스인의 말은 잇키의 안에 남아 계속 울려 퍼졌다.

마치 무언가의 계시처럼.

"윽!"

문득 갑자기 아리스인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는 아까 전까지 보이던 슬픈 빛을 지우고 경계와 긴장을 눈동자에 물들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리스?"

"잇키, 잠시 이리 와봐."

아리스인은 갑자기 잇키의 팔을 붙들고 뛰기 시작했다.

"어?! 어, 어?!"

"됐으니까 달려."

아리스는 다짜고짜 잇키를 그들이 향하던 화장실 안으로 이끌었다.

혹시 그렇게나 급했던 것일까.

잇키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으윽?!"

잇키의 귀를 파고드는 것은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유리의 파열음.

그리고――――총성과 비명이었다.

     ◆

쿵쾅쿵쾅 거친 발소리를 내며 검은 전투복과 가스마스크를 몸에 두른 남자 이인조가 잇키와 아리스인이 있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좋아, 남은 곳은 이 남자 화장실뿐이야. 개인 칸은 내가 뒤질 테니 기다려."

"하나하나 뒤지다니 답답한 짓 할 필요 없다고."

"이, 이봐."

경박한 말투로 고한 또 하나의 남자는, 상대방의 제지도 듣지 않고 손에 든 어설트 라이플 M4의 탄창에 잠든 납 탄알을 전부 개인 칸을 향해 수평으로 쏘아댔다. 작은 화장실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발포음이 잦아들 무렵에는, 개인 칸 문은 전부 구멍투성이가 되었다. 혹시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무사할 리 없으리라. 그러나 반쯤 부서진 개인 칸에서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됐다. 아무도 없어."

"제멋대로 무슨 짓이야! 손님은 인질로 삼는다고 그랬잖아!"

"마구 갈기고 싶은 기분이었어. 상관없잖아. 피가 안 튀겼으니 안에 아무도 없었다는 거라고. 켈켈켈."

"……비쇼 대장에게 죽어도 몰라."

비열한 웃음소리를 내며 남자들은 화장실을 뒤로했다.

화장실에 남은 것은 타는 냄새와 파괴의 흔적, 그리고 천장의 형광등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서 마치 물에서 얼굴을 내밀 듯이 나타난 잇키와 아리스인뿐이었다.

"후우. 아무래도 간 모양이네."

적이 멀리 떠나간 사실을 확인하고 아리스인이 '그림자'라는 검은 물에서 올라왔다.

그의 손은 담흑색으로 빛나는 대거 나이프를 쥐고 있었다.

"제법 멋진 능력이지? 내 '다크니스 허미트(검은 은자)'의 힘은."

"'그림자'를 조종하는 능력인가. 확실히 편리한 힘이네."

"뭐, 조명으로 환히 비치는 데다 그림자를 만들 장애물도 없는 시합에서는 그다지 도움 안 되는 능력이라는 게 난점이지만."

그 부분은 잇키도 생각했던 점이다. 이 힘은 태양 아래 싸우는 기사의 능력이라기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어새신(암살자)을 방불케 하는 힘이라고.

"그렇지만 학교 밖에서 디바이스를 무허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들키면 꽤 성가셔질 거야."

"때가 때인걸. 어쩔 수 없어. 잇키가 입 다물면 괜찮아."

"당연히 밀고할 마음은 없어."

아리스인은 아직 그림자 속에 있는 잇키에게 대거 나이프를 쥐지 않은 쪽 손을 내밀었다.

잇키가 내민 손을 잡자 아리스인은 그를 검은 물속에서 끌어올렸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적의 수색을 피한 것과 끌어올려 준 것 양쪽에 감사 인사를 하며, 잇키는 새삼 자신들이 놓인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그 사람들 뭐야."

"리벨리온."

"?!"

아리스인이 망설임 없이 즉답으로 고한 이름에 잇키는 눈을 크게 떴다.

'리벨리온'.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범죄 조직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블레이저를 '선택받은 신인류'로, 그 이외의 인간을 '하등 인류'라고 규정짓고 그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블레이저는 힘없는 민중을 지켜야 한다'는 사회구조를 파괴하려고 획책한다.

모든 것은 '선택받은 신인류'인 블레이저가 '하등 인류'를 지배하는, 그들이 바라는 일그러진 낙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세계 각국에서 화제인 테러리스트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나타날 줄이야. 그렇지만 어떻게 그들이 '리벨리온'이라는 걸 알았어?"

"예전에 살던 곳에서 오늘 같은 사건에 휘말렸어. 그때 본 녀석들과 장비가 같았으니까. ……그보다 시즈쿠와 스텔라가 걱정이야."

"응. 그래도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잇키는 전자 학생 수첩을 꺼내 처음부터 주소록에 등록되어 있는 '긴급 연락용' 전화번호로 연락을 취했다.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어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표시되었다.

하군 학원 이사장 신구지 쿠로노였다.

「사태는 파악했어.」

쿠로노가 처음 꺼낸 말 덕분에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이미 쇼핑몰 밖에서도 사태가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에요. 그럼 '쿠로가네 잇키', '스텔라 버밀리온', '쿠로가네 시즈쿠', '아리스인 나기' 이 네 사람에게 부지 밖에서의 능력 사용을 허가해주세요."

「알았다. 네 사람에게 부지 밖 능력 사용을 허가한다.」

"이걸로 필요한 수속은 마쳤네."

"이사장님. 그쪽에서 파악한 상황을 들려주시겠습니까?"

「범인은 리벨리온. 규모는 20명에서 30명 정도. 전원 총기로 무장하고 있어. 목적은 몸값과 쇼핑몰의 금품. 요컨대 녀석들이 정기적으로 곧잘 하는 자금 조달이야.」

"사상자는 나왔습니까?"

「습격 당시 소동이 일어났을 때 황급히 도망치려다 넘어진 경상자가 몇 명 있는 정도야. 사망자나 중상자는 지금 상황에서는 제로야. 감시 영상을 주시하는 경비 회사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리벨리온은 쇼핑객 50명 정도를 인질로 잡고서 푸드코트에 모여 있다고 한다.」

"……푸드코트라고 하면 우리가 크레이프를 먹었던 곳이지?"

"응. 그 탁 트인 광장이야."

"거기라면 내 '섀도 워크(그늘 길)'의 범위 안이야. 여기에서 단숨에 이동할 수 있어."

"그렇다면 일단 보이지 않는 곳에 이동해서 상황을 살펴보자. ……분명 스텔라와 시즈쿠도 거기에 있을 거야."

그 두 사람이 인질을 남겨두고 도망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우선 틀림없이 마력을 감추고 인질들 사이에 섞여있으리라.

「알고 있겠지만 일반인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너무 무모한 짓은 하지 마.」

잇키는 그 말에 끄덕인 다음 정찰 중에 착신음이 울리지 않도록 수첩의 전원을 껐다.

"좋아, 가자."

"맡겨두시라고요."

잇키가 아리스인에게 손을 내밀자 아리스인이 그 손을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그림자'가 검은 물로 변하고, 두 사람의 몸이 지면에 '픙덩'하고 가라앉았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검은 수로를, 잇키는 숨을 죽이며 아리스인에게 이끌리는 형태로 헤엄쳤다.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이어지는 이 수로――'섀도 워크'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이는 '다크니스 허미트'의 주인이자, 이 공간의 지배자인 아리스인 단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었다.

"다 왔어."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어둠 속을 헤엄쳐서 목적지인 푸드코트 근처로 워프(도달)했다.

위치는 푸드코트 전경이 훤히 보이는, 트인 공간 옆에 있는 3층 기둥의 그림자였다.

두 사람은 섀도 워크에서 빠져나와 기둥 그림자에서 푸드코트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쿠로노의 정보대로 푸드코트에 인질이 모여있었고, 그들을 포위하듯이 검은 전투복의 남자들 열 명 정도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잇키, 저기."

속삭이는 목소리로 아리스인이 가리킨 곳 앞에는, 예상대로 인질 사이에 섞여든 시즈쿠의 모습이 있었다.

"그렇지만 스텔라가 없네."

"……아니, 스텔라도 있어. 시즈쿠 옆에 있는 챙 넓은 모자를 쓴 애야. 스텔라는 기사로서 얼굴이 널리 알려졌으니까 숨어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신문 같은 데서 나왔지, 저 애. 그렇지만 조금 안 좋은 상황이네."

"응. 인질과 범인들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섣불리 돌입하면 인질들 중 사망자가 나올 거야. 게다가 '리벨리온'의 머릿수가 부족해."

"분대 행동을 하고 있는 걸까? 어쨌거나…… 잠시 기다려야만 하갰네."

분대가 합류했다고 쳐도 리벨리온의 규모에 비해서 인질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도망칠 때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 틈을 노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은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두 사람은 판단했다.

――그러나 사태는 두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엄마를 괴롭히지 마아아아아아!!"

""윽!""

갑자기 인질 중 초등학생쯤 되는 소년이 총을 겨눈 리벨리온 중 한 사람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큰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잇키와 아리스인은 소년을 막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소년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병사에게 던졌다.

병사의 바지에 하얀 반점이 찍혔다. 그러나 그런 것이 공격력이 있을 턱도 없었다.

단지 상대를 격양시키기에는 효과가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 꼬맹이가아아아아아!!!!"

병사는 화가 치밀어 올라 자신의 허리만큼도 못 미치는 아이의 얼굴을 용서 없이 걷어찼다.

"아윽."

"신지!"

이름을 부르며 인질의 무리에서 뛰어나온 20대 중반쯤 되는 여성은 소년의 어머니일까.

가느다란 손발에 비해서 배가 부풀어 올랐다. 소년의 동생을 품었으리라. 그러나 무거운 몸을 느끼지 못할 만큼 빠르게, 그만큼 필사적인 움직임으로 어머니는 소년과 병사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이, 저리 비켜 이년아! 방해된다고!"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직 어린애예요……! 용서해주세요!"

"이봐, 너 무슨 짓이야!"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내 옷에 아이스크림을 던졌다고! 쳐 죽여버리겠어!"

"나이 처먹고 그깟 일로 열 내지 마, 멍청아! 인질에게 손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겠냐! 네놈이 쓸데없는 짓을 해서 비쇼 대장 손에 뒈지는 건 상관없지만, 그 사람이 열 받으면 두 자릿수는 죽어야 진정된다고! 우리에게까지 불똥 튀잖아!"

"시끄러워! 이렇게 많으니까 하나둘쯤 쳐 죽여도 알게 뭐냐!"

열 받은 병사는 제지를 뿌리치고 라이플 총구를 모자에게 겨누었다.

"힉! 부탁드려요! 목숨만은……!"

"택도 없지! 돼지 주제에 앞으로 찾아올 '유토피아(신세계)'의 '명예시민'인 이 몸의 바지를 더럽혔겠다아! 죽음으로 보상해라!!"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당기는 방아쇠.

순식간에 토해내는 납의 폭력.

다가올 습격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인지 어머니는 무거운 몸으로 아이를 보호하듯이 감쌌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무의미하다.

납으로 된 탄두는 그녀의 몸을 간단히 꿰뚫고, 아래에 있는 아이에게 파고든다. 그렇게 될 터였다.

그러나―― 납 탄두는 어머니에게 도달하지조차 못했다. 어째서인가 하면,

모자와 탄환 사이에 끼어든 스텔라의 불꽃이 그을음조차 남기지 않고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

「뛰어드는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해.」

「어차피 내 정체는 곧 들킬 거야.」

「괜찮아. 일국의 황녀라면 금방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시즈쿠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좀 더 숨어 있어.」

만류하는 시즈쿠에게 그렇게 말하고서 스텔라는 사선()에 끼어들어 총탄을 녹여버렸다.

갑작스러운 위협에 '리벨리온'의 병사들이 동요했다.

"블레이저라고……?!"

"이런!"

그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스텔라를 향해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어지럽게 날아드는 납덩어리. 그러나――.

"'엠프레스 드레스(비룡의 날개옷)'."

스텔라가 두른 불꽃의 날개옷은 그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납은 전부 스텔라에게 도달하기 전에 증발했다. ――그러나.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인질들에게는 다르다.

격렬한 소리를 내며 뿜어지는 발포에 인질들은 공황에 빠졌다.

M4는 다루기 쉽도록 의도적으로 전체 길이를 줄인 만큼, 사격 정밀도가 떨어지는 어설트 라이플이다.

이대로는 인질이 탄환에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스텔라는,

"진정해!!!!"

""""――――윽?!""""

연속으로 쏘아대는 발포가 연주하는 폭음조차 억누를 정도로 크게, 그리고 군말 없이 사람의 움직임을 제지하는 '위엄'을 품은 목소리로, 허둥대는 습격자들에게 큰소리쳤다. 그 외침을 듣고 갑작스러운 블레이저의 개입에 불안해하던 병사들 전원이 야단맞은 아이들처럼 떨면서 그 자리에 굳었다.

"그다지 너희와 전투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진정하고 내 얘기를 들어."

그렇게 말하면서 스텔라는 안도했다.

'어쨌든 공황 상태는 수습됐구나.'

스텔라는 일본에서는 그저 유학생이지만, 버밀리온 황국의 황녀이다.

따라서 국제 범죄 조직인 '리벨리온'에 대해서도 제법 들안 사실을 알고 있다.

이를테면 '리벨리온'의 부대 구성.

리벨리온은 그 사상 때문에 일반적으로 블레이저만으로 구성된 조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구성원 대부분은 '신봉자'라고 불리는, 리벨리온이 내세우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찬동하는 비()블레이저이고 '사도'라고 칭하는 블레이저는 극히 일부뿐이다. 일부 블레이저가 비블레이저를 병사로서 지휘한다. 그것이 '리벨리온'의 부대 운용이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전원이 '리벨리온'의 신봉자이다.

그렇다면 리더인 '사도'는 분대를 이끌고 다른 행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정도 규모의 부대라면 이끄는 '사도'의 수는 한 명. 그 녀석이 나올 때까지는 섣불리 움직이고 싶지 않았는데…….'

이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선수를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스텔라는 그렇게 깨끗이 받아들이고 다시 병사들을 날카로운 안광으로 위압하면서 알렸다.

"여기에 있는 인질을 대표해서, 너희의 대장과 교섭하겠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계집. 네년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아무래도 병사들은 자신이 아직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스텔라는 혼란스러운 와중 재빨리 가게에서 가져다 썼던 챙 넓은 모자를 벗고서,

"나는――."

"이런 이런 이러언? 이것 참 터무니없는 분이 섞여 있었군요오."

스텔라가 자신의 정체를 알리려했을 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열 명 정도의 완전무장한 병사들을 줄줄이 이끌고 걸어오는, 얼굴에 문신을 새긴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스텔라와 눈이 마주치자 문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버밀리온 황국의 제2황녀님 아니십니까아. 히히히."

"검은 천에 금 자수가 들어간 외투…… 리벨리온의 '사도'가 착용하는 법의지, 그거. 즉 네가 여기 있는 바보들의 대장이라고 보면 되나?"

"히히히. 잘 아시는군요. 네, 그 말씀대롭니다. 제 이름은 비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주님."

남자――비쇼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이름은 댄 다음, 인질을 둘러싼 부하들에게 스텔라에게 향했던 것과는 다른 공격적인 눈빛을 보냈다.

"이봐. 뭘 수선 떠는 거야. 네놈들은 보초도 제대로 못서는 거냐아."

"힉."

"내가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지이? 소중한 인질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했었지, 내가아?"

"우, 우리도 말렸어요! 그렇지만 야킨 놈이 말을 안 들어서!"

"야아킨……, 이 소동의 원인은 네놈이냐?"

"아, 아니, 아닙니다! 저, 저 꼬맹이가 내 바지를 더럽혀서……."

"어엉?! 고작 그딴 일로 어수선하게――――……아니."

문득 비쇼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다물더니,

"히히히."

"비, 비쇼 대장?"

"……아아, 야킨. 그거 참 재난이었구나아. 동정한다고, 나도오."

갑자기 아까 전과는 태도를 싹 바꾸어, 바지가 더러워진 부하의 양 어깨를 두드리더니――

"그러나 안심해라. 네놈들 '명예시민'의 명예는 우리가 지켜줄 테니."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그 총구를 어머니가 감싸고 있는 아이에게 겨누었다.

"뭐, 뭐 할 셈이야?!"

"뭐 하다니 그야 뻔하잖습니까아, 공주님. 이 꼬맹이에게 자신이 한 일의 매듭을 짓게 해주는 거죠오. ……그거 인간으로서 중요한 일이잖습니까."

"인질에게는 손 안 댄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야 얌전히 있으면…… 말이지요오. 이 꼬맹이는 얌전히 굴지 않았어요. 아아, 뭐 아직 어리니까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이 꼬맹이가 한 짓은 죄입죠. '명예시민'인 이놈들의 명예를 훼손한 죄. 그건 목숨으로 보상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죄에는 벌을, 벌에는 용서를―― 그게 내 신념이라서요……."

방아쇠에 걸린 비쇼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으읏!!!!"

순간, 스텔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 남자가 진심으로 방아쇠를 당기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스텔라는 즉시 '레바테인'을 구현하여,

"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바닥을 박차고 비쇼에게 덤벼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비쇼가 옅게 웃었다.

'유인당했다?!'

그러나 신경 쓸쏘냐. 디바이스를 전개할 틈 따위 주지 않겠다.

비쇼의 무기는 거버먼트 권총 한 자루.

그런 것으로 힘을 실어 넣은 '레바테인'의 내려치기를 막을 수 있겠는가――!

권총째로 베어버리겠다. 그 기개를 품고 스텔라는 '레바테인'을 내려쳤다.

그러나 그 검신은 비쇼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 가로막혔다.

"엇?!"

"히히히. 유감이야아. 빠르다. 그리고 강하다. 과연 소문으로 듣던 A랭크.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이 넓고 무섭다는 사실을 모르네."

스텔라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힘껏 내리친 일격을 맨손으로, 손가락 힘만으로 받아내다니 인간의 능력이 아니다.

그런 짓을 하면 손가락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팔이 옆으로 찢어진다.

혹여 받아냈다고 해도, '드래곤 브레스'의 뜨거운 불꽃이 팔을 태워버릴 터였다.

그런데 비쇼는 무게도 화염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레바테인'을 받아내었다.

어째서?

그러나 답이 나오기도 전에 비쇼의 오른쪽 주먹이 스텔라의 복부를 꿰뚫었다.

"으, 헉……."

파고드는 충격에 스텔라의 무릎이 일격에 꺾였다.

'엠프레스 드레스'를 넘어서, 일격에 자신의 체력을 송두리째 가져가는 공격력.

'어째서. ……그렇게 힘 있는 블레이저로는 안 보였는데.'

이 터무니없는 공격력은 대체 뭐냐고 생각하며, 스텔라는 괴로움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로 비쇼를 올려다보고서는,

"그…… 반, 지!"

비쇼의 공격과 방어 사이에 있는 구조를 깨달았다.

그의 양손 중지에서 불길하게 붉은빛을 뿜는 반지.

얼핏 보면 단순한 패션으로만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비쇼의 디바이스――.

"두 개가 한 쌍인 디바이스 '저지먼트 링(대법관의 반지). 그 특성은 '죄'와 '벌'. 왼쪽 반지는 나에 대한 온갖 위해를 '죄'로써 흡수하고, 오른쪽 반지는 그 힘을 '벌'이라는 마력으로 바꾸어 적을 물리칠 수 있지. ……히히히. 즉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강해진다는 말이야아."

"과연. 나는 내 전력으로 얻어맞았다는 말이네."

어쩐지 일어설 수 없더라니 하고 납득했다.

"상대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느닷없이 달려들면 아니 됩죠오, 공주님. 히히히."

"……그렇게, 만든 건, 너잖아."

"히히히. 이것 참, 죄송합니다아. 어쨌든 상대가 그 '홍련의 황녀'쯤 되면, 나로서도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랍니다. ……그렇지만 감탄했습죠오, 공주님. 얌전히 숨어 있으면 좋았을 것을. 일국의 황녀이신 육체로, 이런 시시한 꼬맹이 한 마리를 위해서 방패가 되어주실 줄이야……. 정말이지이, 실로 훌륭한 생각입니다아. 황족의 귀감이라 해야 마땅합죠오. 그래서 이 비쇼, 스텔라 공주님의 용기에 경의를 표해, 그 꼬맹이의 목숨을 구할 제안을 드리지요."

"어떤, 건데?"

"지극히 간단한 일인뎁쇼. 누구나 다 아는 간단한 속죄 방법. 나쁜 짓을 했으면 사과해야죠. 그뿐입죠. 공주님에 그 꼬맹이 대신 사과하는 겁니다.

 ――알몸으로 엎드려서 말이죠오. 카카카카!"

     ◆

"――――윽!"

그 요구를 듣고 위에서 홀의 상태를 살펴보던 잇키의 혈압이 분노로 치솟았다.

곧바로 뛰어나가 비쇼를 베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등떠밀렸다. 그러나,

'……안 돼……!'

뛰어들면 난전이 된다. 인질에 피해가 나온다.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만 한다.

"히히…… 물론 억지로 시키지는 않겠습니다마안. 공주님에게 명령을 내리다니 이 비쇼는 그런 황송한 일은 못합니다. 그러니 싫으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습죠. 그때느은…… 예정대로 그 꼬맹이에게 책임을 물으면 그만일 뿐입지요오."

'……추잡한 놈이다!'

잇키는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꽉 깨물며 분노를 억눌렀다.

비쇼는 스텔라가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굳이 선택하게 하려 드는 것이다.

그저 그녀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스텔라의 답은 역시 잇키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알았어."

분한 마음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레바테인'을 거두고 수락의 뜻을 표하는 스텔라.

(202p~203p 없음)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살결을 감싸는 것은 하얀 레이스 속옷만 남았다.

"우하아. 엄청 큰 가슴이다. 정말로 학생인가아."

"못 참겠는 거얼!"

"비쇼 대장! 사진 찍어도 됩니까?"

"쫑알쫑알 시끄러워, 조루 놈들아! 본방은 지금부터라고오. 히히히."

"으으으으으으으으읏!"

참고 듣기 힘든 지저분한 목소리.

그것이 맨살에 직접 전해지자 스텔라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때, 잇키는 스텔라의 볼에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눈물.

그 작은 빛이 눈동자 속으로 날아든 순간, 잇키는 무언가가 '빠직!' 하고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잇키가 깨문 입술이 찢어지는 소리였으나, 동시에 그의 안에서 그를 그곳에 잡아두던 '이성'의 그물 또한 찢어졌다.

'――스텔라!'

"진정해."

그러나 잇키의 충동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어질 수 없었다.

"욱."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에 못이 박힌 듯.

어찌 됀 일인지 살펴보니 아리스인이 자신의 디바이스 '다크니스 허미트'의 날을 잇키의 그림자에 박아 넣고 있었다.

'섀도 바인즈(그림자 꼬매기).'

상대방의 그림자를 매개로 움직임을 봉하는 아리스인의 노블 아츠가 잇키의 행동을 봉한 것이었다.

"……냉정해지라고. 지금 나가서 어쩔 거야."

"그랗지만……, 지금 안 나가면 스텔라가……!"

"괜찮아.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믿을 수 없는 말에 잇키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시즈쿠가 움직이고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 조금만 더 기다려."

"시즈쿠가…………?"

"응. 마력을 숨기면서 인질 전원을 지킬 물의 결계를 준비하고 있어."

그 말을 듣고 잇키는 다시 한 번 홀을 내려다보며 마력의 기운을 찾으려고 눈을 부릅떠보았지만,

"……그런 거, 아무 데도 안 보이는데."

"그야 그렇겠지. 시즈쿠는 B랭크 기사로 전체적인 능력치는 스텔라보다 떨어지지만 '마력 제어'만큼은 금년도 단독 넘버원이니까. 그 하나만 따지고 보면 시즈쿠는 A랭크에 맞먹는 힘을 지녔어."

"!"

아리스인의 말을 듣고 잇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마력 제어'란 쉽게 말해서 오라를 다루는 기교를 표시하는 항목이다.

이 항목이 뛰어난 자는, 평범한 블레이저가 10의 마력을 필요로 할 행동을 2나 3의 마력으로 행할 수 있기도 하고,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마력을 이용해서 '위장'이라는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 그리고 쿠로가네 시즈쿠는 특히 이 기능이 뛰어난 블레이저이다.

"시즈쿠 클래스의 술사가 제대로 위장을 걸면 아무도 간파하지 못해."

"그럼 어째서 움직인다고 단언할 수 있는 거야……!"

그 질문을 듣고 아리스인은 학생 수첩을 잇키에게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아리스인은 매너 모드로 바꾸긴 했어도 전원을 끄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화면에 비추는 내용은――시즈쿠에게서 온 문자.

「지금 결게편다 다되면심호보냄」

짧고 간단한, 오자투성이 문자였다.

아마도 주위를 경계하면서 제대로 화면도 보지 않은 채 친 것이리라.

그러나 의미는 전해졌다.

'――시즈쿠!'

잇키는 환희를 담아 마음속으로 여동생의 이름을 외쳤다.

순간, 그 바람에 응하듯이,

"'장파수련()'――――!"

물을 다루는 능력자 쿠로가네 시즈쿠가 만들어낸 물의 방벽이 인질과 리벨리온을 갈랐다.

그것이 신호였다.

     ◆

"뭐야아!"

갑자기 뿜어 오른 물의 벽.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이는 블레이저뿐이다.

스텔라 이외에도 기사가 섞여 있었다.

비쇼는 그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얌전히 있기 싫으며언, 전원 깡그리 죽여주겠어어어!! 이 자식들아! 인질을 마구 쏴버려라아아!"

비쇼의 명령을 듣고 신봉자들이 일제히 물의 벽 너머에 있는 인질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겼다.

갑자기 나타난 물의 벽과 연사하는 총성에 인질들은 크게 혼란에 빠져, 너 나 할 것 없이 기름이 끓는 큰 솥에 던져진 양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웅크렸다.

그러나―― 폭포처럼 소리를 자아내며 쏘아진 총탄은, 단 한 발도 인질들에게 닿지 않았다. 총탄은 모두 시즈쿠의 노블 아츠――'장파수련'이 막아내었다.

높은 곳에서 수면에 떨어지면 그 단단함이 콘크리트에 맞먹는다는 소리는 누구나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이리라. 사실 물이란 충격에 매우 강한 저항을 지닌 물질이다. 소총탄 같은 고속의 물체는 수면에 닿는 순간 되돌아오는 충격으로 탄환이 가루가 될 정도이다. 단순한 물만으로도 그렇다. 거기에 시즈쿠의 마력이 담겨 있다면 물의 방어는 그야말로 철벽. 납 따위에 뚫릴 턱이 없다.

그리고―― 움직인 이는 시즈쿠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윽!"

'장파수련'의 발동함과 동시에 잇키는 '일도수라'를 발동.

난간을 뛰어내려 비쇼의 바로 위에서 기습을 감행했다!

"칫! 위에도 동료가 있었나!"

그러나 비쇼도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테러리스트.

곧바로 기습을 눈치채고 신속한 대응을 보였다.

'음철'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드는 잇카에게 내미는 것은, 아까 전 스텔라의 '레바테인'을 받아낸 왼손.

온갖 공격을 '죄'로서 빨아들이는 '저지먼트 링'.

그 왼손에는 스텔라의 대지를 흔드는 일격조차 무력화하는 '이치'가 움직인다. 잇키의 검은 스텔라의 검에 비해 빠를 뿐이다. 위력은 몇 단계 떨어진다. 따라서 이 '이치'는 돌파할 수 없다.

기습은 실패한다. 내려치기는 '죄'로써 빼앗겨, '벌'이 되어 잇카를 꿰뚫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비쇼의 왼손이 잇키가 휘두른 검을 붙잡았을 때의 이야기!

"……하?"

순간, 비쇼는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핏방울을 흩뿌리며 날아가는 자신의 왼팔.

그렇다. 아무리 비쇼가 온갖 공격을 무력화하는 왼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공격을 붙잡을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러므로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잇키는 그렇게 했다. 인간의 동체 시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로 검을 휘둘러, 검을 휘두르는 모습 자체를 눈으로 인식할 수 없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참격. 그것이야말로 쿠로가네 잇키가 지닌 일곱 개의 오리지널 검술 중 하나.

"제7비검――뇌광()"

     ◆

「피라미는 내가 떠맡겠어. 그러니 잇키는 저 상스러운 보스 원숭이를 확실히 무력화시켜.」

아리스인의 말대로 잇키는 확실한 무력화를 수단으로 삼았다.

보이지 않는 참격 '뇌광'으로 죄를 빼앗는 왼팔을 뿌리부터 베어버리고, 칼날을 회수하며 오른팔도 절단했다.

비쇼의 디바이스가 다른 어떤 힘을 숨기고 있든지 간에, 양팔을 베어버리면 더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아아아아!! 팔, 내 팔이이이이이이!!!! 네, 네놈이 잘도――――."

"쫑알쫑알 시끄럽네."

"히……익."

그러나 비쇼의 항의는 잇키의 형상을 본 순간 목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이것도 살살한 거야. 네가 스텔라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아직 한두 개 남은 걸 날려버렸어도 좋았다고. 'iPS캡슐'을 사용하면 그 정도의 상처는 부상 축에도 못 끼는걸."

"――윽."

잇키는 얼어붙은 시선으로 비쇼를 침묵시키고, 더러운 것에서 눈을 돌리듯이 시선을 피했다.

보아 하니 인질에 피해는 없었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해냈구나."

아리스인이 어깨를 툭 쳤다.

"아리스. 그쪽도 끝냈어?"

"……끝냈다고 해야 하나, 끝났다고 해냐 하나. ……굉장해, 그 애."

'그 애?'

잇키는 아리스인의 말을 전혀 이해 못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 시야에 그 의미가 들어왔다.

여기저기에 쓰러진 병사들.

이미 누구 하나 서 있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 전장에 가만히 서 있는 뒷모습이 있었다.

"스텔라…………."

심홍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불꽃의 드레스를 두른, '홍련의 황녀'의 뒷모습이.

그녀가 손에 쥔 것은 빛을 흩뿌리는 '레바테인'.

치명타를 받고 그만큼이나 치욕을 겪었으면서도, 일이 시작된 순간 스텔라는 재빨리 움직여 병사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쓰러뜨린 것이었다. 아리스인이 나설 틈도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냉정하고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그만큼 약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력을 남긴 체력.

아리스인이 굉장하다고 말하는 것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외부에 보고는 내가 해둘게. 곁으로 가봐."

"고마워."

'무리했을 게 뻔해!'

"스텔라!"

잇키는 스텔라 곁으로 달려가 자신의 목소리에 뒤돌아보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흐엑! 어, 뭐, 뭐야?!"

갑작스럽게 끌어안겨서 당황하며 낭패스러워하는 스텔라.

그러나 잇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렇게 행동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속옷 차림의 스텔라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살결을 자신의 몸으로 감추었다.

이 용맹하고 다정한 소녀가, 더는 수치를 겪지 않게끔.

"미안…… 좀 더 빨리 도와주러 왔으면…… 이런 치욕은 겪지 않았을 텐데."

"잇키……, 윽!"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스텔라도 잇키의 포옹에 몸을 맡기고…… 작게 몸을 떨었다.

잇키는 스텔라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끌어안는 힘은 풀지 않았다.

"오라버니."

그때, 시즈쿠가 잇키에게 말을 걸었다.

"시즈쿠. ……고마워. 시즈쿠가 결계를 펼친 덕분이야. 다친 사람은 없어?"

"당연히 없지요. 제가 그런 실수를 할 것 같나요?"

뜻밖이라는 듯 시즈쿠는 분개한 표정을 보이며 손에 든 것을 스텔라에게 쓱 내밀었다.

그것은 벗느라 흩어졌던 스텔라의 옷이었다.

"모아 왔어요. 언제까지고 그 상태로 있을 수는 없잖아요."

"고, 고마워…… 의외네. 네가 나에게 신경 써주다니."

"실례네요. 누구 덕분에 살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정말이지 아무 생각 없이 뛰어들다니, 경솔함에도 정도가 있어요."

"우……."

시즈쿠가 힐끗 째려보자 스텔라는 거북한 듯이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렇지만…… 조금 다시 봤어요."

"어?"

"저는 그 모자를 도울 수 없었으니까요. ……있기는 하네요. 새빨간 남을 위해 목숨을 위험에 내놓는 인간도."

"……그, 그다지 다시 볼 일은 아닌데. ……뭐, 그렇지만 시즈쿠의 결계가 없었더라면 위험했을 거고. 너도 꽤 대단하구나……."

지금까지 실컷 적대시하던 상대인 만큼 솔직하게 평가하기가 부끄러운지, 스텔라도 시즈쿠도 미묘하게 시선을 굴렸다. ……그러나 서로 인정할 부분을 찾은 모양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이가 좋아졌으면 좋겠는데――.'

"아, 그렇지. 시즈쿠는 '치료'를 쓸 수 있어?"

"물론 할 수 있는데요? ……설마 오라버니, 어디 다치시기라도……."

"아니, 내가 아니라 저 녀석."

비쇼를 가리켰다. 출혈이 심한 탓에 이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었다.

인간이라는 물의 덩어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물을 다루는 높은 레벨의 능력자만이 쓸 수 있는 스킬(기술)이다.

"팔은 안 붙여도 돼. 지혈만. 또 날뛰면 번거로우니까."

"알았어요. 오라버니를 살인자로 만들 수는 없는걸요."

"무력화하긴 했지만, 일단 조심해――."

"움직이지 마아아아아아아!!"

"""――――윽?!"""

     ◆

갑작스럽게 죄어드는 비명과도 닮은 노성.

그것은 믿을 수 없게도 인질들 한가운데서 울려 퍼졌다.

잇키 일행은 일제히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리고 보았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가 중년 여성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댄 광경을.

"사, 살려줘요오오오!"

"꼬맹이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이 할망구의 머리를 날려버리겠어!"

"아뿔싸: 인질 속에 섞여 있었나……."

"……하하. 카카캇카카! 인질 속에 섞여 있던 것은…… 네놈들의 동료만이 아니었다고, 얼간아아!"

"비쇼…………."

베어져 나간 양 어깨에서 피를 세차게 뿜으면서, 문신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띠우는 범죄자.

앞으로 잇키 일행을 어떻게 요리할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봐, 거기 고스로리 꼬마!"

"꼬, 꼬마……라고요?!"

"아아, 그래, 너 말이야 꼬마. 너 치료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에. ……이리 와서 내 팔을 고쳐! 못 한다고는 말 못하겠지이? 히히히……."

비쇼의 웃음소리에 '히익!' 하고 중년 여성의 비명이 이어진다.

총구를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기라도 한 것이리라.

'……제기랄!'

잇키는 이를 갈았다.

'일도수라'는 아직 이어지고 있지만, 이렇게 총구를 가까이 붙이면 폭발할 우려가 있었다.

"얼렁 이리 오라고 했잖아!"

"오라버니..."

"....어쩔 수 없지. 지금은 그 말대로ㅡㅡ."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갑자기 다른 어디도 아닌, 마치 직접 머릿속에서 말을 거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바람을 슝 가르는 소리를 내며. 잇키의 바로 옆을 수많은 빛이 통과했다.

그것은, ㅡㅡ하늘색 빛을 내뿜는 마력의 화살.

"우아아아아아!"

"갹, 아.....!"

마력의 화살은 비쇼와 인질을 붙잡은 남자를 몇 번이고 꿰뚫어,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갑작스러운 일에 동요하는 스텔라. 그러나ㅡㅡ

'이 기술은...'

잇키는 이 기술을 알고 있다.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

"후후후. 거참, 결국 손을 빌려주고 말았네. 남의 공적을 가로채는 모양새라 싫었는데 말이야아."

눈앞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빛나기 시작하며, 비늘이 벗겨져 떨어져 나가듯 풍경이 무너졌다.

그 붕괴 속에서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활 모양을 한 디바이스를 든, 잇키 일행과 같은 또래의 선이 가는 소년이.

"어찌 된 일이야? 내가 기척조차도 못 느끼다니..."

비쇼 일당의 습격조차 그보다 훨씬 전에 기척을 잡아내었던 아리스인이었으나, 그의 기운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ㅡㅡ 그의 능력 특성.

잇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잇키의 전 클래스메이트였으니까.

"오랜만이네, 키리하라."

키리하라 시즈야. 전년도 '수석 입학자'이자ㅡㅡ 작년 칠성검무제 대표 중 한 사람이었다.

"아아. 오랜만이네, 쿠로가네 잇키."

옛 급우와의 재회에 키리하라는 조용히 미소 짓고는.

"너, 아직 학교에 남아 있었구나."

가늘게 뜬 눈꺼풀 틈새에서, 비웃는 시선을 건네었다.

""윽.""

스텔라와 시즈쿠 두 사람이 확연히 불쾌감 어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뒤치다꺼리를 해준 이상,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키리하라아! 무서웠어어!"

갑자기 인질 중에서 일곱 명 정도의 소녀가 뛰어나와, 잇키 일행을 밀쳐내고 키리하라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들은 오늘 키리하라와 함께 이 쇼핑몰로 놀러 온 그의 여자 친구들이었다.

"한심한 후배들 탓에 무서운 꼴을 당했구나. 그렇지만 이제 괜찮아."

"응. 키리하라가 구해줄 거라고 믿었어."

"아앙. 키리하라 니임. 멋졌어요오. 역시 기사는 강하군요오."

"...왠지 기분 나쁜 녀석."

"당신과 마음이 맞는 건 처음이네요."

옷을 에쁘게 차려입은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떠받들어지는 키리하라의 모습을 보고 스텔라와 시즈쿠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키리하라가 자리를 정리한 뒤 곧바로 아리스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경찰이 푸드코트로 뛰어 들어와 리벨리온을 구속하고 인질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휴일의 소동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ㅡㅡ윽."

긴장이 풀린 쿠로가네 잇키의 몸이 휘청 기울어졌다.

'일도수라'에 의한 피로가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오라버니."

"잇키! ...괜찮아?"

"...아, 아. ...응. 괜찮아. ...조금 쉬면 걸을 수는 있을 거야."

"잠시 앉는 편이 좋겠다."

아리스인이 푸드코트 벤치에 잇키를 앉혔을 때, 네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말을 건 사람은 달려온 경찰 책임자였다.

"이봐. 너희가 사건을 해결해준 학생 기사지? 지금부터 조서를 작성할 테니, 서까지 같이 가주겠어?"

"아차. 타이밍이 나쁘네. 될 수 있으면 잇키를 쉬게 해주고 싶은데ㅡㅡ."

그렇게 말하며 아리스인이 여자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키리하라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뒤치다꺼리는 해줬어. 귀찮은 사정 청취는 너희에게 부탁해도 되지?"

아무래도 키리하라는 거기까지 함께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말붙일 틈도 없이 거절하고는 둘러싼 소녀들과 이 사건의 기분 전환으로 어디로 놀러 갈지 말하기 시작했다.

"됐어, 아리스. 괜찮아. ...경찰차 안에서 잠시 쉬면 어느 정도 회복될 거야."

"잇키. 무리하는 거 아니야?"

"괜찮다니까. 그다지 다치지도 않았고..."

잇키는 피로의 빛이 짙은 표정으로 허세 부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키리하라 쪽을 돌아보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정말 살았어. 키리하라. 고마워."

"감사 인사 따위 필요 없어. 약자를 지키는 게 강자의 의무니까 말이야."

하나하나 가시 박힌 말을 속삭이는 키리하라의 태도에 스텔라와 시즈쿠가 다시 험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남자를 물고 늘어지는 것보다 잇키를 조금이라도 빨리 쉬게 해주는 일이 중요했다.

그래서 스텔라는 잇키에게 어깨를 빌려주며 그를 경찰차로 유도하려고 했다.

그러나ㅡㅡ 그 등을 향해.

"그렇지만 쿠로가네. ...너는 아직 그 비참한 힘으로 기사도를 계속 나아갈 셈이냐?"

비웃는 말투로, 키리하라는 이번에야말로 무시할 수 없는 말을 걸었다.

"너.... 작작 좀 해!"

"스텔라, 됐다니까."

"안 괜찮아! 이렇게 제멋대로 말하는데 참을 필요 없어!"

잇키의 제지를 뿌리치고, 눈꼬리를 치켜 올린 스텔라가 키리하라에게 검지를 들이밀었다.

"아까 전부터 제멋대로 실컷 떠들어대는데, 너 같은 거보다 잇키가 훨씬 강해! 잇키의 강인함을 바로 내가 증인이야! 너 따위는 잇키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고!"

거침없이 내던진 스텔라의 말은 사실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스텔라는 키리하라의 힘을 몰랐다.

그렇다ㅡㅡ 그녀는 모른다.

키리하라와 잇키 사이에 놓인 절망적인 차이를.

그리고 그것을 아는 키리하라에게,

"...하하, 아하핫하핫하하하핫!!!!!"

스텔라의 말은 우스갯소리일 뿐이었다.

"어, 뭐가 우스워!"

"우습고 말고. 이걸 안 웃고 배기겠어. 거기 있는 '낙제 기사'가 나보다 강하다니...하하핫! 이건 걸작이야. 아무래도 쿠로가네는 자신에 대한 걸 꽤나 멋들어지게 붙어넣은 모양이구나. 제대로 가르쳐줘야 하잖아. 네가ㅡㅡ 예전에 나랑 싸우기가 무서워서 도망친 겁쟁이라는 사실을 말이지."

"엇...."

잇키가 승부에서 도망쳤다.

그 믿을 수 없는 말에 스텔라가 놀라서 잇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잇키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키리하라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잇키가 승부에서 도망치다니. 스텔라에게 있어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키리하레에게 강한 시선을 보냈다.

"거짓말이야! 그런 일 있을 리가 없어!"

"후후후, 무슨 소리를 들어도 보멀리온은 그 녀석이 나보다 강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로군."

"당연하지! 잇키는 나를 이긴 단 하나뿐인 기사니까!"

"ㅡㅡ그렇다면 버밀리온. 내기 하나 할래?"

".......내기, 라고?"

키리하라는 그 시점에서 한 번 스텔라로부터 잇키에게 시선을 옮기고.

"네 말이 정말인지 아니면 착각인지. 그 진위를 확인할 곳은 사실 이미 준비되어 있어. 쿠로가네. ...학생 수첩의 전원, 꺼놓았지? 켜봐."

".........."

잇키는 재촉대로 전자수첩의 전원을 넣었다.

그러자 기동과 동시에 문자 수신이 시작되었다.

보내는 이는... 선발전 실행 위원회!

그리고 문자의 내용은,

『쿠로가네 잇키 님의 선발전 제1시합 상대는 2학년 3반 키리하라 시즈야 님으로 결정되었습니다.』

"ㅡㅡㅡㅡ윽!"

"그래, 네 1회전 상대는 작년 칠성검무제 대표였던 바로 나.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가진 키리하라 시즈야라고. 우리는 이미 싸우기로 결정되었어. 그러니ㅡㅡ버밀리온의 말대로 내가 지면 나는 오늘 말한 모든 모욕을 취소하고 사과하겠어. 그러나 내가 이기면... 내 여자 친구 중 하나가 되어줘."

"키리하라! 바보 같은 소리는ㅡㅡ."

내기 내용에 잇키는 당연히 항의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좋아. 그 내기, 받아들이겠어."

"스텔라?!"

스텔라는 그것을 선선히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만둬, 스텔라.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 나는 딱히 키리하라의 사죄 따위 필요 없다고!"

"잇키가 필요 없어도 나는 필요해. 내가 이길 수 없었던 기사를 약하다고 말하면 내 입장이 뭐가 돼!"

잇키가 단념하도록 타일러도 스텔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에서 물러설 성격이 아니다.

따라서 이 내기는 성립되고 말았다.

"정해졌구나. 후후, 당연히 이기고도 남을 시합이지만, 조금은 의욕이 나려나. ...그럼 쿠로가네. 다음에는 결전의 장소에서 보자. 알고는 있겠지만 그런 허술한 힘으로 내 앞에 설 거라면 그에 합당한 각오를 하고 오라고. 어쨋든 선발전은 모의전과 다른 '실전'이니까. 살아남으려면 힘껏 노력해봐. 아하하."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하지 않는 큰 웃음소리와 함께 소녀들을 거느리며 떠나가는 키리하라.

그 불손한 태도에 스텔라와 시즈쿠, 그리고 아리스인도 키리하라에 대해 좋은 인상을 품지 못했다.

"후우. 얼굴은 괜찮은데 저렇게까지 성격이 삐뚤어져서야 못 쓰겠네에."

".....불쾌해요."

"흥. 저런 거 잇키라면 낙승이야. 누가 뭐래도 나에게조차 이겼으니까. 그렇지?"

스텔라의 물음은 잇키의 똑 부러지는 긍정을 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ㅡㅡㅡ.

"....어떠려나. 그는 나에게 최악의 상대니까."

"잇키....?"

기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리도 아닌 이야기였다. 잇키는 스텔라와는 다르게 키리하라의 너무나도 강한 노블 아츠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런 확약은 할 수 없었다.

이 싸움은... 아마도 힘겨우리라. 그 예감을 잇키는 확실히 느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칠성검무제를 향한 선발전이 시작되었다.

스텔라, 시즈쿠, 아리스인의 1회전은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워요일.

잇키의 1회전. 키리하라전은 그 다음 날인 화요일.

잇키에게 있어서는 첫 '공식전'.

지금까지의 모의전과는 다른ㅡㅡ진정한 의미에서의 싸움.

그 데뷔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