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
텔라가 떠난 뒤, 아리스인은 자기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때는 어떻게 될까 걱정도 했지만, 확실하게 이겼네."
"그러게나 말이에요. 사람 걱정 끼치는건 오라버니 시합만으로도 충분하다구요."
"왠지 미안하네.."
찔리는 데가 있어 쓴웃음을 짓는 잇키.
자신의 지인이 무사히 이겼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에, 세 사람 사이엔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스텔라와의 접점이 전혀 없던 '백의의 기사' 야쿠시 키리코에게 있어, 이 시합의 파괴적인 결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엄청난 기술이었지. 링 위의 모든 것을 뒤덮을 정도의 광범위한 공간을 순식간에 불태워버리는 작열의 힘. 이 정도의 열을 기체화 상태로 피하려 하다간, 기체화된 체세포가 전부 증발해 버렸을지도 몰라. 이른 단계에 견학해 둬서 정말 다행이야."
"확실히..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스텔라 씨의 싸움에선 '청색 윤회'를 사용하는 건 극히 피하는 편이 좋겠네요.
하지만 링 전체를 뒤덮는 엄청나게 큰 범위 공격인 '폭룡의 포효'를 체술로 피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정말 어이없는 기술이야, 하고 시즈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만만하게 입장한 뒤, 사대 일의 핸디캡 대결을 하자고 선언한 것도 납득이 가네요. 스텔라 씨는 '야차 공주'와의 특훈으로 엄청난 힘을 손에 넣게 된 것 같네요. 오라버니."
시즈쿠는 그리 말하며 잇키에게 동의를 구해 왔다. 하지만, 이 시즈쿠에 말에 잇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라고 봐."
"네?"
무엇이 아니라는 것일까.
그건, 시즈쿠가 '폭룡의 포효'를 가리켜 엄청난 힘을 손에 넣었다, 라고 말한 점이었다.
"'폭룡의 포효'는 사이쿄 선생님과의 특훈에서 얻은 힘이 아니야. 왜냐면, 이건 입학 직후 즘의 스텔라도 쓸 수 있는 능력이었을 테니까."
"그,. 그랬어요!? 하지만 한 번도 저런 건 못 봤는데요?"
"본 적 없는 게 당연해. 저런 무차별적인 기술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상황에서 쓸 수는 없을 테니까."
"그건 나도 동감이야."
잇키의 의견에 이사장, 쿠로노도 찬동했다.
"애초에 저 '폭룡의 포효'이라는 노블 아츠는, 무로토 선배가 힘껏 소리를 내지를 뿐인 능력이야.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는 노블 아츠가 아니지. 처음부터 특훈을 필요로 하는 기술이 아니라는 말이야. ....뭐, 주변을 신뢰해 자기 능력을 전부 발휘하는 대담함을 손에 넣은 건 어느 의미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겠다만, 그것만이 1주일간의 특훈의 성과라고 보자면 너무도 짜 보이는군."
"그럼, 특훈의 성과는 없었다는 건가요?"
그 시즈쿠의 말에, 잇키는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아니라고 봐. 입장했을 때, 스텔라에겐 확실한 자신과 확신을 느꼈어. 1주일 전의, 패배의 쇼크를 재대결의 흥분으로 바꾸어 낼 만한 무언가를, 사이쿄 선생님과의 특훈을 통해 몸에 익혔을 거야. 하지만 그건 '폭룡의 포효'가 아니야."
즉..
"스텔라는 아직 자신의 힘의 일부분밖에 보여주지 않았다는 거야."
" " "윽.....!" " "
그 잇키의 말에, 시즈쿠를 시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그녀들은 그 때, 떠올렸던 것이다.
대결 도중, 한 순간 보였던 그 환영.
스텔라의 등 뒤에 떠 있던, 하늘을 찌를 정도로 거대한 용의 모습을. 그런 환영을 보일만한 위압감을 내뿜는다면, 잇키의 말도 완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같은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는 건, 악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즈쿠와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경직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악몽같은 주장을 입으로 꺼낸 잇키의 표정만은 달랐다.
그는 경직되기는 커녕 미소조차 띠고 있었다.
'....정말로, 너무 멋진 여자야, 스텔라는.'
확실히, 어떻게 싸워야 할지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무거워지는 상대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잇키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스텔라가 무사히 재기하여, 더욱 강해져 돌아온 그 사실이.
'난 몰랐어. 약하다는 게, 이렇게나 괴로운 거였다니..'
....그런, 충격을 받아 기운을 잃은 스텔라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아파왔다.
그녀는 언제나 우러러볼 정도로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존재가 되어 줬으면 했다.
그야말로, 천공에서 빛나는 별처럼.
그래야 그 곳을 향해 나아갈 보람이 있으니까.
'누구보다도 가까운 데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한 편, 누구보다도 먼 곳에 있어 주었으면 한다니. 나도 참 제멋대로인 녀석이구나.'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이 지나고...
'회장에 있는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지금부터 링 재설치, 그리고 청소를 위해 20분 정도의 휴식을 갖겠습니다. 작업이 끝나는대로 D조의 시합을 개시하겠사오니, D조 선수 분들은 대기실에 집합하여 주십시오.'
운영 위원회의 공지가 들려왔다.
그 방송을 듣고,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쿠로노였다.
"난 여기서 실례. 링 수리엔 내 능력이 필요할 테니까."
그리 말하고, 쿠로노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앞으로 점프해, 검게 타 버린 링 외곽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녀에 이어 D조에 소속되어 있는 시즈쿠와 키리코도 움직였다.
"그럼 우리들도 가 볼까? 여동생 양?"
"네. 슬슬 몸이 근질근질하던 찰나였어요."
친선전을 관전하는 것 같았던 분위기와 표정을 전투 모드로 바꾸는 둘.
스텔라의 시함을 본 뒤라서 그런 것일까. 두 사람 의 눈엔 투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런 둘을 보고 아리스인이 응원을 보냈다.
"둘 다 힘 내~ 나도 여기서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고마워, 아리스. .......하지만 오라버니는 좀 더 쉬어 주세요. 너무 무리하시면 내일 시합에 영향이 갈 거에요."
"아니, 난 괜찮아. 시즈쿠. 마력 쪽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스텔라의 시합을 관전하고 있는 틈에 체력 쪽은 꽤 많이 회복됐고, 뭣보다 내 소중한 동생의 시합이니까. 아리스랑 같이 관전하고 있을게."
"감사합니다..."
겉꾸밈 없는 잇키의 부드러운 그 말에, 시즈쿠는 기쁜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시즈쿠의 뒤에서 키리코가 잇키를 향해 뚫어져라 힐난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 왔다.
"어머나~ 내 응원은 안 해 주는 거야? 이 누나와 쿠로가네 군의 사이는 고작 그런 거였어~?"
"어제 막 만난 사이인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물론 야쿠시 씨의 시합도 기대하고 있어요. '백의의 기사'가 의사만이 아닌 기사로서도 일급이라는 소문은 자주 들었으니까요."
잇키의 그 말은 아부도 뭣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키리코는 자신의 입장은 기사가 아닌 의사 쪽이다, 라고 생각하여 칠성검무제엔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참가만 한다면 최저 베스트 4 안엔 들을 정도의 블레이저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잇키는 어제 파티 회장에서의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게 그저 헛소문만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어떤 싸움을 보여줄 것인가, 실로 흥미로웠다.
....거기에, 또 다른 이유로서
"....야쿠시 씨의 시합은 대전 상대 쪽도 신경이 쓰이니까요."
"내 상대? 아카츠키 학원의 시노미야 군?"
잇키는 끄덕였다.
그렇다. D조의 제 4시합.
'백의의 기사' 야쿠시 키리코의 첫 상대는, 잇키에게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아카츠키 학원의 시노미야 아마네였다.
"흐응~ 아카츠키 학원 멤버 중엔 그다지 패기가 없는 아이 같아 보였는데, 뭔가 신경쓰이는 점이라도 있어?"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구?"
"제가 어째서 그를 이렇게 신경쓰는지 모르겠어요.."
"사랑하고 있는 거 아냐?"
"절대 아니거든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 착각에, 잇키는 침을 튀길 기세로 부정했다.
"그런 게 아니고, 뭐라 해야 할까... 말로 표현 못할 불길함을 느끼고 있어요."
"불길함, 이라.."
감정으로서 혐오감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잇키 자신은 어째서 아마네를 이렇게 싫어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군 학원을 습격한 아카츠키의 멤버이니까, 라는 이유라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하지만, 잇키가 아마네를 향해 악감정을 갖고 있던 건 그가 아카츠키 멤버로서 나타나기 이전부터 있던 일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만난 순간부터 혐오감이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모르겠다. 그것이, 너무도 불길하게 느껴졌다.
"뭐, 타인의 본질을 '읽어 내는' 달인인 '워스트 원'이 그런 걸 느꼈다는 건... 시노미야 군에겐 우리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지도 모르겠네. 그 점은 잘 기억해 둘게."
"네. 부디 조심..."
그렇게, 잇키가 키리코에게 응원을 보낼 때
"아하하핫! 드디어 만났네! 잇키 군!"
".......윽!?"
마치 소녀 같은 높은 톤, 그리고 가벼운 목소리.
그 누군가가 잇키의 등을 껴안아 왔다. 그건, 통, 하는.. 거의 체중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잇키는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채도가 엷은 금발에 온화한 동안의 얼굴. 그리고 붙임성 가득한 표정.
잇키를 껴안아 온 건, 지금 막 화제에 올랐던 소년, 시노미야 아마네였다.
주심이 '폭룡의 포효'에 의해 넉다운 되어 승자 선언이 나오진 않았지만, 스텔라의 승리라는 결말이 회장의 전광 게시판이나, 실황 안내로 통달되었다. 물론 TV로 방송을 내보내고 있는 방송국에도 운영의원회의 정식적인 시합 결말로서 통달되어, 스텔라의 첫 승리는 일본 전국에 알려지게 됐다.
먼 도쿄에서 그녀의 시합을 보고 있던 토카의 병실에도, TV를 통해 통지되고 있었다. 그 보도를 본 토카와 그녀의 옆에서 스텔라의 대결을 관전하고 있던 카나타는 어딘가 질렸다는 듯한 엷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거 원,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네요.... '내몰았다'니.. 제멋대로 생각해버렸군요."
"끝날 때쯤엔 완전 일방적이었지? 거기다 아직도 여력을 남긴 채라니, 정말 대단해."
"이대로 우승까지 갈 수 있을까요?"
그 카나타의 말에, 토카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 것 같아. 지금 '폭룡의 포효'는 '바람의 검제'의 손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었으니까. 우승 후보 중 한 명이라는 것엔 틀림없겠지만, 확정적이라고 말할 순 없는 느낌이라 해야 할 것 같아."
"즉, 이번 대회는 A급 기사들의 대결이 되겠다, 란 말씀이신지?"
"가장 기대가 되는 건 그 둘임이 틀림없지만, 그 둘의 대결이 이번 대회의 모든 것이라고 할 정도로 특출난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 둘 외에도 '백의의 기사'나 '심해의 마녀', '강철의 사나운 곰'에 '워스트 원'...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선수는 잔뜩 있으니까.
"정말 볼 만한 대회가 되겠군요."
"응... 가능하다면 선수로서 참가하고 싶었지만 말야."
그리 말하며, 토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 있어 잇키와의 시합에서 패배한 건 납득이 갈 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와서 그런 미련이 느껴지는 말을 하다니.
'난 정말.. 지기 싫어하는 애구나.'
"대회가 끝난 뒤에 결투 신청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후후, 그것도 좋을 것 같네."
그런, 둘의 아무것도 아닌 잡담을 할 때였다.
"우으....."
그런 신음소리와 함께,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토카와 카나타는 깜짝 놀라 침대를 바라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침대에 잠들어있던 인물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토카와 같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몸집 작은 소년. 하군 학원의 부회장, 미소기 우타카타였다.
"우타 군!?"
"토...카...?"
"정신이 든당가!? 다행이다...! 어딘가 아픈 데는 없어!?"
"에... 응... 괜찮은..데.."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온 토카의 말에 긍정의 뜻을 내비치는 우타카타. 하지만, 그 표정은 왠지 멍한 듯했고, 자신이 처해진 상황을 인식하고 있진 못한 듯했다.
"여긴.... 병실... 이야? 왜 이런 데에.."
"우타 군, 기억 안 나능가...?"
그리 묻는 토카를 향해, 우타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상 형태'라곤 해도, 1주일 이상을 잠들어 있을 정도의 체력적 데미지를 입은 탓에, 쇼크를 받아 기억에 혼탁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군요."
"응.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환상 형태'는 육체적 손상을 일으키진 않는다. 즉, 뇌가 손상되어 기억에 장애가 일어날 리는 없으니, 기억은 틀림없이 뇌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명을 하여 떠올리게 만들면 그만일 뿐.
"우리들은 학원을 습격해 온 아카츠키 학원의 학생들과의 교전에 패배했어. 기억 안 나?"
어흠, 하고 기침을 한 뒤 토카는 아이에게 말해 주는 듯한 부드러운 말투로 우타카타의 기억을 되짚어 주었다.
"아카츠키... 학원....."
하고 복창한 뒤
"~~~~~~으윽!"
그 순간, 눈을 부릅뜨며 표정을 경직시켰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설 기세로 카나타에게 질문했다.
"카나타! 지금 내가 1주일 이상을 잠들어 있다고 했지, 그게 사실이야!?"
"네, 네.. 그렇습니다."
"그 반응은.. 기억을 떠올린 거구나. 다행이야."
"아, 응.. 그건 그렇지만.. 그것보다 칠성검무제는..."
"마침 오늘 딱 시작한 참이야. 방금 쿠로가네 군과 스텔라 양이 무사히 1회전을 돌파했어. 거기에, 지금부터 카나와 다른 아이들 대신 참가하게 된 시즈쿠 양이 소속된 D조의 시합이 시작하려는 참이고."
그렇게 우타카타에게 지금까지의 경과를 말해 주는 토카는, 잇키와 스텔라의 승리를 듣고 기뻐하는 우타카타의 표정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카의 말을 들은 우타카타는, 예상 외의 반응을 보였다.
"큰일 났.....크윽!!"
갑자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덮고 있던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상처가 없다곤 해도 1주일동안 누워 있던 몸이다. 당연히 다리가 말을 들을 리는 없었다.
"아윽.."
우타카타는 항균 리놀륨으로 만들어진 바닥에 얼굴을 찧으며 넘어졌다.
"우, 우타 군!?"
"무리하지 마십시오. 1주일동안 누워 있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리가 제대로 움직일 리가 없어요."
"하지만 빨리.. 말해 줘야 해! 그래! 학생 수첩! 내 학생 수첩은 어디에!?"
코피를 흘리며, 게다가 그걸 닦으려 하지도 않은 채 환자복 주머니를 뒤지는 우타카타.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던 우타카타가 이렇게까지 초조해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우타 군. 왜 그렇게 허둥대는 거야? 전하다니? 누구에게, 무엇을?"
그러니, 토카는 질문했다.
그가 무엇에 그렇게 허둥대고 있는 것인가.
그 말에, 우타카타는
"....싸우면... 안 돼......"
메마른 목소리로, 괴롭게 말을 꺼냈다.
"에?"
"아카츠키의... 시노미야 아마네...! 그 녀석과는 절대로 싸우면 안 돼...! 만약 싸웠다간..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 거야...!"
시노미야 아마네.
그 이름은 물론, 토카도, 카나타도 알고 있었다.
하군을 습격한 아카츠키의 대표. 그 중 한 명.
'그러고 보니 그 때, 그와 맞서 싸운 건 우타 군이었어...!'
토카도 오우마를 필사적으로 쓰려뜨리려 싸운 탓에, 그 자세한 전말까진 보지 못했지만..
"그 애, 그렇게 강해!?"
하지만, 그 물음에 우타카타는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했다.
"강하다던가, 약하다던가...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런 차원의 녀석이 아니라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그 때 우리들은 그의 능력을 '미래 예지'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잘못 생각했다고. 그의 능력은.... '미래 예지' 같은 게 아냐! 더욱 악질적이고, 흉폭하고, 절대적인 힘이야! 싸우면 안 돼...! 얽히는 것조차 안 돼...!!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오랜만이야, 잇키 군~ 1회전 돌파 축하해~"
“아, 아마네 군..”
갑작스런 아마네의 등장에 잇키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평소에 갖고 있던 나쁜 인상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 막 그의... 간단히 말하자면 뒷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겸연쩍은 탓도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알 리가 없는 아마네는 꼬리를 흔드는 작은 강아지처럼 잇키에게 달라붙었다.
"방금 시합 나도 봤어! 진~~~~짜 멋있었어! 그러니 축하한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거든~♪"
"아아.. 고마워."
"고맙다고 해야 할 건 내 쪽이라구! 내가 동경하던 잇키 군의 싸움을 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으니까 팬으로서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을 거야! 그건 그렇고 진짜 굉장했어! 설마 그 '비익'의 검기를 훔쳤을 줄이야! '사냥꾼'과의 시합도 엄청 멋있어서 난 '모방검기'란 게 '완전장악'의 덤으로 온 게 아닌가, 하는 인상도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 거기에 그 '신기루' 라고 했었나? 동영상 사이트에서 한 번 정도 보긴 했는데, 상대를 착란시키는 기술이었지! 그래도 그런 기술을 능력도 없이 쓸 수 있다니, 잇키 군은 정말 대단해! 나 감동 먹었어!"
"아, 알았으니까 일단 좀 진정하고.."
콧김을 내뿜고 뺨을 아이처럼 고양시키며, 방금 잇키의 시합의 감상과 감동을 줄줄 늘어놓는 아마네를 보며 쩔쩔매는 잇키.
역시, 이 아이는 거북하다.
이렇게까지 호의를 가져 주는 상대에게, 조금의 호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비상식적인 감정은.. 너무나도, 기분나쁘게 느껴졌다.
가능하면 떨어져 줬으면 좋겠다.
거절하고 싶다.
하지만, 잇키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약해서, 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조차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혐오감을 타인에게 향하는 것에 대해 저항감이 일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좋아해준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실례."
"아읏.."
옆에 서 있던 그의 동생, 쿠로가네 시즈쿠는 그런 배려와는 전혀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무 주저 없이 잇키에게 달라붙어 있던 아마네의 옆구리에 앞차기를 찔러넣어, 그를 잇키로부터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빠를 지키려는 듯, 아마네와 잇키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아야야.. 뭐 하는 거야..."
옆구리를 문지르며, 눈물 맺힌 눈으로 항의하는 아마네.
그에 대해, 시즈쿠는 역시 어디까지나 용서 없는 말을.
"오라버니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오라버니는 당신이 싫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기분나쁘다고 생각하고 계세요. 그러니 친한 척 하면서 다가오시면 이쪽에게 폐가 되거든요."
그녀는 하필, 잇키가 말할 수 없었던 이유 없는 혐오감의 모든 것들을,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유감 없이 늘어놓았다.
"에... 그, 그랬어.. 잇키 군?"
"시, 시즈쿠.."
이 동생의 행동에, 잇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리려 했지만
"오라버니. 이유도 없이 남을 싫어하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전 그런 오라버니의 상냥한 부분을 좋아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오라버니의 상냥함은 제게 향해주시기만 하면 되고, 이런 녀석들에게 쓸데없이 향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애초에, 우리 학원에 '그런 짓거리'를 해 놓고서 아직도 팬이라고 지껄이는 무신경한 남자에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어요. 이런 녀석들은 태도를 보여 거절하지 않으면 끝없이 기어오르기 마련이거든요."
"윽.."
정면으로 날아오는 그 정론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돼버렸다. 애초에 시즈쿠의 입장에서 보면, 아마네에 대한 혐오감은, 하군 습격 사건 하나면 충분했다.
잇키는 그 이전부터 혐오감을 느낀 것에 대해 질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 이상 지금 와서 순서 따윈 어찌됐든 상관없었다.
이 눈 앞에 있는 여자같이 생긴 남자는,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한 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는 한 편, 이 잇키라는 소년은 매사에 너무 진지하다.
그러니, 그런 진지한 오빠 대신에, 시즈쿠는 강한 어조로 아마네에게 일침을 가했다.
"뭐, 그러니까 오라버니 앞에서 당장 사라져 주세요. 마침 D조 소집도 내려진 상태이니 당신도 준비를 해야 하잖아요? ....뭣하다면 제가 방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시합 전부터 오체 불만족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지만요."
눈동자에서 비취색 불꽃과도 같은 마력을 내뿜으며, 아마네를 위협하는 시즈쿠. 아마네는 그 시즈쿠의 박력에 진 듯, 일어난 뒤에도 잇키에게 달라붙으려 하지 않았고
"우우.. 그렇네. 난 잇키 군을 속였어. 미움받는 게 당연하겠지.. 정말 미안.."
꾸벅, 하고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용서 못해요."
시즈쿠는 완고한 태도로 아마네의 사죄를 뿌리쳤다.
"저어.. 난 잇키 군에게 사과하고 있는 건데.."
"오라버니에게 사과하는 것도 용납 못해요. 아니, 말을 거는 것도 용납 못해요."
"회, 횡포잖아!! 것보다, 아까부터 시즈쿠의 말이 엄청나게 신랄하게 들리는데.. 나 그렇게 시즈쿠가 싫어할만한 짓을 했었나? 그다지 관련이 된 적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여자 같은 얼굴이 오라버니를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요. 그 여자 같은 목소리가 오라버니에게 아양을 떨고 있는 것 같아서 열받아요."
"이 무슨 엄청난 트집이래!?"
"애초에 그런 사사로운 이유가 없다 하더라도, 오라버니가 당신을 싫어하고 있는 것 하나만으로 저에게 있어 당신을 싫어할 이유는 충분하다고요."
"우와.. 그건 정말 어쩔 수가 없어.."
"가슴이 없다고요....!?"
"억지로 호감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완전히 적대 모드로 들어간 시즈쿠와의 교섭은 불가능했다. 아마네는 그걸 이해하고, 일단 시즈쿠 너머에 서 있는 잇키에게 기대는 듯한 시선을 보내며 말을 꺼냈다.
"시즈쿠는 용서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난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구? 그러니 방금 축하해주고 싶다고 말한 것도 사실이지만, 오늘은 어느 쪽이냐고 하자면 그에 대한 '사과'를 하기 위해서 온 거야."
"사과?"
"응. 잇키 군과 화해하고 싶어서... 틀림없이 기뻐해 줄 거라고 생각해."
'내가.. 기뻐할 일?'
"그 사과라는 게.."
뭘까, 하고 약간 흥미를 갖게 된 잇키가 물어 보려 할 때
'D조에 소속된 선수에게 연락드립니다. 시합 개시까지 10분 남았습니다. 바로 대기실로 집합하여 주십시오.'
다시금 방송이 잇키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 틈엔가 링 재설치가 끝나 있었다.
조금 있으면 D조 시합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아마네가 오고 난 뒤 계속해서 말 없이 있던 키리코가 아마네를 향해 말했다.
"시노미야 군. 부외자인 나로선 전혀 지금 대화에 대한 이해는 가지 않지만..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아. 대기실에서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선생님들한테 혼날 거야. 이야기는 일단 뒤로 하고 이동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
하지만, 그런 키리코의 충고에, 아마네는 "어라?"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엄청난 말을 꺼냈다.
"에에... 당신은 누구시죠..?"
이건, 아무리 그 키리코라 할지라도 눈을 크게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 지금부터 대결을 할 상대의 얼굴조차 모른다니, 보통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름 얼굴은 알려져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안녕. 렌테이 3학년인 야쿠시 키리코라고 해. 의사이기도 하지."
"아아. 미안해요. 전 잇키 군 이외의 기사는 잘 몰라서.."
"이름 정도는 들은 적 없어? 일단, 이 뒤에 있을 D조 제 4시합에서 너와 싸우게 될 상대인데 말이지."
".....아, 그렇구나. 별로 흥미가 없어서요."
얼버무리려는 듯한 웃음을 짓는 아마네.
아무래도, 모른다고 한 건 정말인 듯했다.
당연히 그 사실은, 키리코에게 있어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꽤나 여유로운데 그래?"
온도를 잃은 목소리로 꺼낸 말.
"이사장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참전하긴 했는데, 살짝 즐거워졌어. 그 여유로운 모습에 어울리는 실력이 있을지 어떨지.. 한번 볼까?"
누가 보더라도 키리코 안에서 고요한 분노가 일렁이는 것은 명백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시합 개시 신호가 떨어진 순간 온 힘을 다해 아마네를 공격할 것이다.
거기엔, 아무런 자애도, 힘조절 따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꽃이 튀는 듯한 노기를 받으면서..
"아..... 그건 무리...가 아닐까 싶은데요.."
아마네의 입가에 얼버무리는 듯한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말이지?"
"왜냐면 저랑, 그.. 키리코 씨라고 하셨나요? 키리코 씨가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서둘러 대기실로 갈 필요도 없구요."
이 아마네의 말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이미 토너먼트 표 상으로 대전이 결정되어 있음에도, 그리고 그 대전이 조금 후에 개시될 텐데, 지금 와서 싸울 일이 없을 거라니..
".....무슨 말을.."
키리코가, 그리 질문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백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학생 수첩에서 착신음이 들려왔다. 키리코는 지금 아마네의 말이 신경쓰여 그냥 무시하고 싶은 참이었지만, 들려오는 착신음은 구급차 사이렌과 비슷한 소리였다.
그건.. 친구나 지인에게 온 연락이 아닌, 그녀가 병원장을 맡고 있는 야쿠시 종합병원에서 온 착신음이었다.
무시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잠깐 실례. ....여보세요? 대체 뭐야? 조금 있으면 시합이 시작되는데.."
키리코는 아마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선생님!! 크, 큰일이에요! 큰일 났다구요!'
갑자기,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귀에 들릴 정도의 큰 비명이, 스피커 너머로 날아왔다. 귀청이 먹먹할 정도로 큰 그 소리는, 야쿠시 종합병원 부원장인 카지와라 미오의 목소리였다.
그런 인물에게서 온 비명에 가까운 전화. 그리고 스피커의 더욱 너머에서 들려오는.. 병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란스러운 소리.
키리코는, 거기에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잠깐, 대체 무슨 일이야?"
'그, 그게.. 입원해 있는 환자 분들의 용태가 급변하여, 위독 상태로....!'
"뭐라고...!"
카지와라의 말에, 키리코는 숨을 삼켰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이 칠성검무제에 참가할 때, 입원 중인 환자들의 용태가, 최저한 자신이 병원에 없을 때 급변하지 않을 정도까지 진정되어 있을 것을 조건으로 삼았다.
의사로서 내일 당장 위험한 환자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녀가 여기에 있다는 건, 그 조건은 충족되었다, 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제일 가는 명의인 '백의의 기사'가, 적어도 칠성검무제 기간 중엔 용태가 급변할 걱정은 없다고 진단을 내렸던 것이다.
'내 진단이 잘못됐다고...!?'
그 불안함이, 키리코의 가슴을 옥죄었다.
지금은 자신의 무력함을 저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상황 확인이 가장 급했다.
그리 생각한 키리코는, 카지와라에게 물었다.
"그래서, 대체 누가 위독하다는 거지?"
그에 대해, 떨리는 목소리로, 카지와라가 답한 말은..
키리코의 얼굴에서 핏기를 가시게 하는 말이었다.
'그게... 우리 병원에 입원한 환자 전원이에요!!'
"뭐...라고!?"
'모든 직원이 총줄동하여 대응하고 있습니다만, 인원도, 설비도, 모든 것이 다 부족해요! 거기에 무엇보다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 기술만으론 도저히 대응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
그 순간, 키리코는 확신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한, 두 명 정도는 그렇다 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입원 환자 모두의 전조를 놓친다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이유는 하나 밖에 없다.
".....알았어. 지금 당장 돌아갈게. 회장에 헬리콥터를 보내 줘."
'그건 이미 해 뒀어요! 10분도 안 돼서 회장에 도착할 거에요! 죄송... 흑.. 해요...! 소중한 시합을..'
"울지 마. 무슨 일이 있으면 당장 돌아갈 거라고 말해 둔 건 내 쪽이니까. 거기에 환자의 용태가 급변한 건 네 책임이 아니잖아? 일단 내가 돌아갈 때까지만 좀 버텨 줘. 할 수 있지?"
'아, 네! 해 보겠습니다!'
"좋은 대답이야. 부탁할게."
키리코는 전화를 끊고, 살기조차 느껴지는 시선으로 눈 앞에 있는 아마네를 노려봤다.
그리고, 딴 말은 용납치 않겠다는 어조로, 힐문했다.
"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이이지? 시노미야 군?"
자신의 오진이 아닌 이상, 이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하나 뿐.
그건.. 제 3자의 개입 외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신, 내 환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시, 싫다아~ 엄청난 트집이네에~ 여기에 있는 내가 히로시마에 있는 병원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입원 환자가 위독 상태에 빠진다면, 키리코는 시합 같은 걸 할 때가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범인은, 방금 그 의미심장한 말을 한 눈 앞의 이 남자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게, 키리코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마네는 당황한 듯 손을 흔들며, 자신의 알리바이를 주장했다.
확실히, 오사카에 있는 사람이 히로시마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짓을 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설령 협력자가 있다 하더라도 병원 관계자나 경비를 서는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입원 환자를 모두 위독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건 모두 그 범인이 '보통 사람'이라는 전제 하의 이야기.
"........"
이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쿠로가네 잇키는, 떠올렸다.
오사카로 출발하기 전... 같은 반 친구인 쿠사카베 카가미에게서 들은 그 말을.
'선배. 전에 이전 쿄몬 학원에 다녔던 시노미야 아마네가 신경이 쓰인다고 전화를 주셨잖아요? 저 그래서 쿄몬 학원에서 있었던 시노미야 선수의 모의전 전적을 조사해 봤는데요.... 그 사람, 6전 6부전승이란 전적을 갖고 있더라구요. 어쩐지.. 진짜 기분나쁘네요.'
그 순간, 모든 퍼즐의 조각이 이어졌다.
"아아,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그거라면 모든 것에 대해 납득이 가."
"오라버니?"
"즉, 그게... 네 '진짜 능력'이라는 거군."
"잇키 군? 진짜 능력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능력이 '미래 예지'라는 건 잇키 군도 알고 있잖아? 이번 일도 키리코 씨가 포기할 거란 걸 알고 있어서 한 말이고, 난 딱히 아무 것도..."
"아니, 그건 불가능해."
잇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한 둘이라면 몰라도, 병원에 있는 모든 환자의 증상을 그녀가 놓칠 리가 없어. 그리고, 그 불가능한 일을 예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그, 그런... 아하하~ 방금도 말했지만 엄청난 트집이라구, 잇키 군. 그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하잖아! 애초에 지금 보다시피 난 잇키 군이 보는 앞에서 몇 번이고 예지를 했었짢아?"
아마네는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벌어진 무차별 살인마 사건.
그리고 아리스인의 배신을 예지한 것.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아마네는 몇 번이고 자신의 힘이 예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야. 아마네 군은 예지 같은 건 하지 않았어. 모든 순서가 반대였으니까."
"........."
잇키가 그 말을 한 순간, 아마네의 변함 없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천히 그늘이 드리워지듯이.
"잠깐, 잇키. 순서가 반대라니, 무슨 말이야?"
".....우타카타 부회장님이 쓰러진 시점에서 알아챘어야 했어. 아리스. 그 사람의 노블 아츠 '절대적 불확정'은 이미 결정된 인과조차 뒤엎는 게 가능한 인과 간섭계 능력이야. 어디까지나 우타카타 부회장님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바뀐 인과의 범위 내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격력이 낮긴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방어로 돌리게 되면 솔직히 말해 이 능력을 돌파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그도 그럴 게, 목이 날아간다 하더라도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이니까. 하지만, 우타카타 부회장은 졌어. 아마네 군에게 졌다고. 무예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단지 '미래 예지'란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그건....."
"그럴 리는 없어. 가능할 리가 없지. 만약 가능하다고 한다면, '절대적 불확정'을 '확정'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더욱 강한 강제력을 가진 인과 간섭계 능력을 사용했을 때뿐이야. 그래, 예를 들면,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고 인과를 덮어써 버리는 능력' 같은 걸 말이지."
"윽......!"
"이거라면, 모든 일에 설명이 돼. 즉, 아마네 군의 예지란 예지 같은 게 아니야. 그 살인마의 정체를 밝혀낸 것도, 아리스의 배신을 알아챈 것도, 야쿠시 씨의 병원 환자가 쓰러진 것도, 모두.. 그렇게 되도록 미래를 만들어낸 것뿐이란 거야. 내 말이 틀려? 아마네 군?"
잇키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늘어놓은 뒤, 아마네를 노려봤다.
아마네는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잇키의 말을 전부 들은 뒤
"....................................하아."
갑자기 어깨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포기한 듯한 웃음과 함께 답했다.
"......역시나 잇키 군이야. 내가 설명할 부분이 거의 다 사라져 버렸어. 사실 지금 이 얘기는 아까 내가 말한 사과 겸 해서 내 입으로 말해 주려고 했는데.. 역시 굉장해. 조마경과도 같은 그 통찰력을 가진 '어나더 원'을 이런 미숙한 내가 속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건가."
그 대답은, 사실상 긍정이었다.
".....역시, 그럼 야쿠시 씨의 환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역시 아마네 군이란 건가."
"아.. 아니, 잠깐만! 기다려 봐! 그건 아니야!"
그 잇키의 적의가 드러난 응답에, 아마네는 그제야 웃음을 거두며 초조한 말투로 잇키의 능력 예측에 대한 보충을 덧붙였다.
"확실히 그렇다면 부정할 수야 없겠지만, 약간 수정을 해 줬으면 좋겠어. 확실히 내 능력은 '미래 예지'같은 게 아냐. 하지만, 잇키 군이 말한 것 같은, 마치 신이 할 법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야. 난 있지? 그저 바랄 뿐이야."
"바란다?"
"그래. 바라는 것뿐. 잇키 군이 생각한 것처럼, 운명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덧씌워 버리는 건 불가능해. 난 그저 '잇키 군과 드라마틱한 만남을 갖고 싶어~' 라고 바란다거나, '하군 습격이 문제 없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고, '싸우는 건 귀찮아~' 하고 생각하는 것뿐이지. 그렇게 하면 말이지? 모든 사상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 좋은 쪽으로 움직이고, 흘러가서, 결국엔 최종적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거야. 내가 바라는대로 말이지."
그게 내 '흉운'의 진정한 능력. '과잉한 여신의 총애'야.
아마네가 고한, 지금까지 숨겨 온 자신의 능력의 상세한 정보.
그걸 들은 잇키 일행의 표정은, 경직됨을 넘어서 얼어붙었다.
"뭐, 뭐야 그게...! 완전 억지잖아.....!"
"그럼 뭐야? 당신이 바라기만 한다면 지구에 달을 떨구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거야?"
시즈쿠의 말에 아마네는 살짝 욱한 듯한, 그건 아니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서운 말을 하네~ 그런 일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을 거라구. 그도 그럴 게, 그런 게 진짜로 이루어지면, 곤란하잖아? 내가 바라고 나서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지금까지 단 하나도 없으니까."
"........윽!"
극히 당연하다는 듯 답한 아마네의 태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전율에 등골이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확신한 것이다. 정말로, 이 소년에겐 그 일이 가능하다, 고.
한참 상궤를 벗어난 아마네의 능력에, 모두들 할 말을 잃고, 그저 눈 앞의 소년에 대한 경계를 강하게 만들었다.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러던 도중, 아마네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가며 입을 연 건, 키리코였다.
".....즉, 시노미야 군의 능력은 '뭐든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능력'.... 간단히 말하자면 상식을 초월한 행운을 갖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네."
"그런 인식이라면 틀린 건 아닐 거야. 인과가 돌고 돌다가 내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지는 것뿐이지. 그게 어떤 수단으로 이루어지는가는 나도 모르지만 말야. 그러니 설령 병원에 입원한 환자 모두의 생명이 위험해진다는 건, 나도 예측하지 못했어. 미안해~"
손을 맞대며 사과해 오는 아마네의 말투는, 마치 자신의 친구가 벌인 나쁜 짓에 대해 사과하는 듯한.. 의무감만이 느껴지고 마음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였다.
정말로 아마네 자신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키리코와 싸우고 싶지 않다고 바랬을 뿐.
딱히 입원해 있는 환자의 목숨을 빼앗으려 든 게 아니니까, 난 잘못이 없다, 고.
그 어디까지나 책임감 없는 태도는, 당연히 키리코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죽인다면, 이 질 나쁜 인과는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겠지?"
그 순간, 키리코의 양 손에 메스가 세 자루씩 들려 있었다.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녀의 양 눈엔 지금 당장에라도 그를 공격할 법한 노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네는 그런 키리코를 보고도 꿈쩍 않고,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떨궜다.
"물론 내가 죽으면 내 능력은 사라지겠지만, 그건 추천하는 바가 아니야. 그렇게 되면 난 당연히 '죽고 싶지 않다'고 바랄 테니까. 내 경험 상, 그런 경우엔 어떠한 형태로 키리코 씨가 싸울 수 없게 돼 버리는 경우가 많았거든. 예를 들면.. 지금 이 회장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 여기서 대지진이 발생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면, 이런 날 상대할 상황이 아니게 되어 버리잖아?"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거야?"
"물론 그렇게 됐으면 하고 바라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지? 하지만, 그렇게 되어 버렸을 경우엔 나도 책임질 수 없으니, 그런 태도는 취하지 말아달라~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야."
"......칫!"
그 대화 후, 키리코는 작게 혀를 찬 뒤 자신의 디바이스인 메스를 거두었다.
이 남자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른다.
바라는 것뿐. 그게 정말인지 증거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틀림없는 것은... 지금 자신이 한 발짝이라도 아마네를 향해 살의를 갖고 나선다면, 아마네의 말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의사'를 자인하고 있는 키리코에게 있어, 짊어질 수 조차 없는 리스크.
그리고, 키리코의 전의가 엷어진 것을 알아챈 아마네는
"자, 그럼 이렇게 내가 대기실로 서둘러 가지 않아도 될 이유를 알게 됐으니, 계속해서 이전의 일에 대한 걸로 잇키 군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
키리코에게서 시선을 떼고, 미소를 지은 채 잇키를 향해 돌아섰다.
그 순간, 잇키는 직시하는 것조차 거리낄 정도의 혐오감을 느끼고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요건을 말했다.
"방금도 말했지만, 원래라면 내 능력에 대해서도 내 입으로 잇키 군에게 말해 주고 싶었어. 지금까지 속여 온 사과로서 말이지. .....뭐, 그 쪽은 잇키 군이 먼저 정답을 말했다는 쑥스러운 결과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난 이 정도로 지금까지 쭉 잇키 군을 속여 온 것에 대한 사과가 될 거란 생각은 안 하고 있어. 그러니 있지? 난 생가해 왔어. 어떡하면 잇키 군이 기뻐해줄 지를 말야. 어떡하면 잇키 군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하고 말야."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잇키를 향해 사죄의 말을 꺼내는 아마네.
그 말을 들으며... 잇키는 피부가 찌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너무도,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 남자의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들어선 안 된다.
그런 예감이.
하지만, 아마네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있지? 난 그걸 떠올렸어. 잇키 군이 이 칠성검무제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그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다는 걸 말야! 정말 너무하지? 믿을 수 없지? 이렇게 강한 잇키 군을 기사로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니 말야. 잇키 군의 완전한 팬인 내게 있어서도 듣고 그냥 넘길 수 없는 사태야. 정말 용서 못해. 그러니까.
난 잇키 군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어. 이 칠성검무제에서 우승하는 걸로 말이야!!"
그리고,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말을 해 왔다.
"뭐...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아마네와 시즈쿠의 말은 동요로 떨리고 있었지만, 아마네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지진을 일으키거나 달을 떨구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간단한 일이잖아?"
그리고 히죽, 하고 뺨이 찢어지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환희에 젖은 눈빛을 잇키에게 보냈다.
"기뻐해 줘, 잇키 군! 내 능력으로 그 결과를 바래 줄게! 잇키 군의 승리를! 그러면 아무런 노력 없이도 확실히 칠성검왕이 될 수 있어! 기쁘지!? 잇키 군이 지금까지 해 온 노력이 드디어 보답받을 수 있는 순간이 온 거야! 괜찮아, '홍련의 황녀'도, '바람의 검제'도 내 '과잉한 여신의 총애' 앞에선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잇키 군 이외의 모두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려서... 반드시 잇키 군을 내 손으로 칠성검왕으로 만들어 주겠어! 뭐, 난 '해방군'에게 혼이 나게 되겠지만.. 그건 신경쓰지 마. 잇키 군을 위해서라면 난 무슨 짓이든..."
그 순간.
쿵.
하고 무거운 소리가 선수용 관객석에 울려퍼졌다.
그건, 잇키가 아마네의 몸을 힘껏 밀어버린 탓에 난 소리였다.
"오, 오라버니!?"
"잇키, 군..."
잇키의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그리고 밀려나가 엉덩방아를 찧은 아마네 자신도, 온후한 성격의 잇키가 저지른 난폭한 행동에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행동을 취한 잇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건 극히 이성적인 행동이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이성으론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던 아마네에 대한 감정에, 드디어 한 가지 매듭을 만들어낸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말하지 못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걸맞는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으니까."
잇키는 엉덩방아를 찧은 아마네를 노려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난 네가 정말 싫어."
"........."
그 말에, 아마네는 눈을 부릅뜨고, 살짝 떨었다.
어째서 자신이 잇키에게 미움을 산 건지, 그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네는 잇키를 위해서, 잇키를 칠성검왕으로 만들어 주려 한 것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잇키가 아마네에 대해 마지막 정을 버리게 된 이유가 되었다.
당연하다. 그는 잇키로부터,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겨 왔던 것을 빼앗으려 한 거니까. 지금까지 잇키가 쌓아 온 노력. 그 의미의 모든 것들을. 그리고 몇 번이고 그를 지탱해 주었던,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연인과 나누었던 약속을.
그 말을 꺼낸 순간, 잇키의 안에서 애매한 상태였던 아마네에 대한 태도는, 이젠 더 이상 어째서 처음에 혐오감을 느꼈는가, 하는 이유 따윈 상관 없을 정도의 명확한 혐오감으로 바뀌었다.
그러니, 잇키는 분노와 증오를 숨기려 하지 않는 눈빛으로 아마네를 노려보며 내뱉듯 말했다.
"내 싸움에 손대기만 해봐. 그랬다간 밀치는 것만으론 끝나진 않을 테니까."
"........."
그에 대해, 아마네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났다. 내리깔린 앞머리에 얼굴이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울먹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네는 그대로 발을 돌려 잇키 일행에게 등을 돌린 뒤...
"응. 알았어."
다시금 빙글, 돌고 난 뒤..
방긋.
지금까지 보였던 미소 중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보였다.
"......!"
그 반응은 아무래도 예측할 수 없었는지, 잇키는 당황했다. 그런 심한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태도를 바꾸지 않다니.
하지만....
"잇키 군이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원하지 않을게. 약속할게!"
잇키는 바로 심장에 지네가 기어다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위화감..
확실히 표정이나 말투는 지금까지와는 별 다를 바 없이 호의적으로 보였지만...
"자기 힘으로 손에 넣지 않은 승리 따위엔 납득할 수 없다, 라... 역시 잇키는 멋져~ 나... 잇키에게 더 빠져 버린 것 같아~♪"
눈이, 달랐다.
아니, 다르다기보다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라는 쪽이 정답일 것이다. 지금까지 아마네에 대해 정체 모를 악감정을 지니고 있던 잇키는, 그로 인한 어색한 느낌 때문에 무의식 중에 아마네를 똑바로 직시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에야 아마네를 어떻게 대해야 될지, 그를 똑바로 직시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잇키를 칭찬하는 반짝거리는 하늘색 눈, 그 깊은 곳에는...
빨려들어가 버릴 정도로 깊은, 진흙 같은 어둠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압도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적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고, 깎아내고, 어떤 불리한 싸움이라도 싸워 이겨내는 잇키. 멋있어~~ 동경할 만해~ 그 굳센 모습! 다른 어떤 사람보다 열등하면서, 누구보다도 승리를 거머쥐려 하고 있지. 그걸 위해서 자신의 혼을 흩뿌려 가면서까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어. 그 결과, 아무리 자기 몸이 엉망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지! 그게 바로 '워스트 원'이야! 잇키 군. 난 있지? 난 있지??? 그런 잇키 군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어!!"
그 어둠은... 부(負)의 '혼돈'.
증오, 혐오, 적의, 악의, 살의.....
이 세상 모든 '부'의 감정이 뒤얽혀.. 이젠 원래 감정의 판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버린 혼돈이다.
아마네는 그야말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는 듯한 악의와 절망에 가득한 눈으로, 잇키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비틀어 올려 히죽 하고 웃고 있었다. 뺨이 찢어진 듯 웃고 있는 그 입은, 마치 흉조를 고하는 붉은 초승달 같았다.
"그러니까 말야... 응? 난 그런 잇키 군을 목이 쉴 때까지 응원해 주겠어. 좀 더... 좀 더 피를 흘려 줘. 난 쭉... 계속... 영원히!! 운명에 저항하다 부서져가는 잇키 군을 보고 있을 테니까...!"
"윽.......!"
잇키는 처음으로 아마네에게 '공포'를 느꼈다.
혐오하는 것도, 기피하는 것도 아니었다.
몸이 떨릴 정도로, 눈 앞의 소년이 무섭다고 느껴졌다.
소년의.. 이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는 듯한, 눈동자 너머에 숨겨진 그 감정이.
무엇보다도, 그 감정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이 현실이.
"그러니.. 힘 내!"
그리고, 전혀 마음에 전해지지 않는 응원을 마지막으로, 아마네는 잇키 일행을 뒤로 했다. 그들을 찾아왔을 때와 아무 다를 게 없는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하지만, 그 미소 깊은 곳에 소용돌이치는 끝모를 악의를 보게 된 잇키의 손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칠성검무제 D조의 시합은, '백의의 기사'의 갑작스런 결석이란 해프닝이 벌어졌지만 F급 기사가 '칠성검왕'을 무찌른 C조나, 사대 일이라는 전대미문의 변칙 시합이 벌어진 B조 경기 같은 파란이 벌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진행되어 끝났다.
D조 제 3시합에 나온 '심해의 마녀' 쿠로가네 시즈쿠도, D조의 유일한 B급 기사로서 그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 1회전 대전 상대를 아무 데미지 없이 이기고, 2회전으로 진출했다.
이에 따라, 하군 학원은 대표 모두가 2회전에 진출하게 되었으니, 하군 학원으로선 백점 만점의 시작을 끊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잇키의 표정은 영 시원찮았다.
"부글부글...."
밤.
선수가 숙박하고 있는 호텔의 대욕탕에서, 입가까지 몸을 담근 잇키는 우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의 표정을 어둡게 만드는 그 생각이란 물론, '흉운' 시노미야 아마네에 대한 것이었다.
그 뒤, 토토쿠바라 카나타에게서 토도 토카와 미소기 우타카타 두 사람이 눈을 떴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 때 아마네의 능력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 때 아마네가 말한 자신의 능력, 그 자세한 부분이 지금에야말로 거짓말이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삼라만상의 만사를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 정말 말도 안 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잇키를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건 그의 능력만이 아니었다.
'신경이 쓰이는 건... 그눈.'
아마네가 떠나갈 때 눈동자 안에 보였던, 부의 혼돈.]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증오하고 있는 듯한, 어두운 감정.
그걸 본 순간, 잇키는 느낀 것이다.
'난 그 눈을... 알고 있어. 아주 옛날에,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잇키는 눈을 감고, 자신의 기억에 의식을 향했다. 그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우물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했다.
그는 밑으로, 밑으로... 과거로, 더욱 먼 과거로 향했다.
그러자... 기억의 우물 바닥 끝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 어두운 심연 속에서도 윤곽이 느껴질 정도로 짙은 어둠을 가진 사람이, 잇키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것에 절망한 듯한, 부의 혼돈이 깃든 눈동자.
그와 동시에 내장 안쪽이 쥐어뜯기는 것 같은 혐오감과, 그보다 더한 공포심이 생겨났다.
....역시 틀림 없다.
난 만났던 적이 있다. 그 소년과.
머나먼 과거 어디에선가.
그리고, 잇키는 직감했다.
그 만남이, 지금까지 윤곽조차 잡을 수 없었던 아마네에 대한 이성을 넘어선 거절반응에 대한 이유라는 것을. 아마네라는 소년에 대한 모든 질문의 '뿌리', 그리고 '해답'일 것이라고.
그렇기에, 알아야 한다.
대체 언제 만난 거지?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이 있어서, 난 그에게 그렇게까지 증오를 느낀 거지?
잇키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좀 더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심연 속에서, 한 쌍의 혼탓한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뿐.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것도...
"'칠성검왕'을 상대로 멋지게 승리한 오늘의 영웅님께서, 꽤나 어두운 표정을 짓고 계시네~?"
욕탕에 잠긴 채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는 잇키를 향해 말을 걸어 온 것은, 욕조에 걸터앉아 허리 아래쪽만을 욕탕에 담근 아리스인이었다.
"뭐, 확실히 꺼림칙한 남자이긴 했지만,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녀석 따위 생각해 봤자 머리만 이상해질 뿐이라구? 아니며언~ 내가 아무 생각도 못 하도록 만들어 줄까~?"
고간 사이에 요염한 시선을 보내는 아리스인을 보며, 잇키는 새파랗게 질린 채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사, 사양하겠습니다.."
"쿡쿡.. 농담이야. 나도 스텔라나 시즈쿠한테 살해당하고 싶진 않거든."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안 해 줬으면 좋겠다.
그 덕에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의 물에 잠겨 있음에도 몸 속 깊은 곳까지 오싹해져, 잇키는 이제 명상 같은 걸 할 기분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잇키를 우습다는 듯 바라보며, 아리스인은 말을 이었다.
"거기에 잇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할 필욘 없잖아? 토너먼트 진행 상 너와 아마네의 시합은 둘 다 계속해서 이긴다고 가정한다면, 준결승 때가 될 거야. 그리고 아마네는 D조. 준결승에서 너와 만나기 위해선 조 결승전에서 시즈쿠와 만나게 될 테니까."
"시즈쿠가 이긴다면 내가 아마네 군과 싸우게 될 리는 없다, 라는 말이야?"
"바로 그거지. 후후. 확실히 '흉운'의 능력은 강력하다고 보지만, 분위기에 휩슬려 자기 능력을 술술 불은 건 실책이었던 듯해. 시즈쿠는... '과잉한 여신의 총애'의 공략법을 알아냈다고 했어."
"뭐... 정말로? 그걸 어떻게.."
"유감스럽게도 나한테도 알려 주진 않았어. 뭐, 설령 가르쳐 줬다 하더라도 같은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잇키에게 그걸 말해 주는 건 공정하지 않잖아? ....하지만 시즈쿠가 아무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할 거란 생각은 안 들어. 그 아이에겐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는 거야. 틀림없어."
"확실히.."
아리스인이 말한 대로, 시즈쿠는 강한 척이나 허세를 부리는 성격이 아니다. 그건, 그녀의 오빠인 잇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시즈쿠에겐 정말로 무슨 생각이 있는 거라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 아마네보다도 시즈쿠와 대결할 때의 시뮬레이션을 해 두는 편이 건설적이라고 생각한다구?"
"....그럴지도 모르겠네."
잇키에게 있어서도 아마네보다 시즈쿠를 웅원하고 싶은 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무슨 생각이 있을 거란 바램을 가지고 그는 수긍했다.
그리고, 그 때.
"벌써 준결승 걱정을 하시는 건가요. '어나더 원'"
둘 사이에 익숙치 않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말이 들려온 쪽을 바라보자... 대욕탕 입구에 째진 눈을 가진, 지적인 이미지의 남성이 서 있었다.
"아직 첫 대결이 끝난 참인데.. 성급하시군요."
그리 말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잇키는 알고 있었다.
"뱌, 뱌쿠야 씨!"
"안녕하세요. 파티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쿠로가네 군."
그렇다. 그는 저번 파티에서 모로보시와 같이 있던 사람 중 한 명.
부쿄쿠 학원 3학년, 죠가사키 뱌쿠야.
작년도 칠성검무제의 준결승자이면서... 잇키의 2회전 대전 상대이다.
"오늘 승리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설마 유우가 첫 대결에서 패배하다니.. 완전히 상정치 못한 결과는 아니었습니다만, 깜짝 놀랐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뱌쿠야 씨는 별로 고전도 하지 않고 이기셨죠. 대단하세요."
"저는 대전 상대에도 운이 좋았던 것 뿐이니까요. 그런데.. 저기 있는 분은 하군 학원의 '검은 가시꽃' 아리스인 나기 군이군요."
"어머나, 날 알고 있어?"
"당신은 당초에 하군 학원의 대표로서 출전하셨으니, 그 때 살짝 조사를 해 두었지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으니까요. 그게 제 모토입니다. ......뭐, 결과적으로 그건 헛수고로 돌아가 버렸지만 말이죠."
"미안하게 됐네. 나도 내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그 부분은 다소 알고는 있습니다만, 결국은 당신의 마음의 문제이지요. 제 입으로 의견을 표하는 건 피하도록 하지요. .....그건 그렇고."
그리 말하고, 뱌쿠야는 다시금 잇키를 바라봤다.
길게 째진 눈에서 나오는 시선엔, 살짝 험악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일 대전할 상대를 완전 무시하고 준결승 시뮬레이션을 시작하다니. 아주 여유가 넘치고 있군요. 쿠로가네 군."
"윽...!"
이 뱌쿠야의 말에 잇키는 낭패한 표정을 짓고, 허리에 타올을 감은 뒤 서둘러 욕조에서 뛰쳐나와, 허둥대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 그게 아니구요! 전 딱히 뱌쿠야 씨를 경시한 게 아니라구요!? 그저... 아무래도 잘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껄끄러운 상대가 있는데... 저도 좀 과잉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특별하게 의식해버리는 것 뿐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그 말대로, 잇키는 결코 뱌쿠야를 얕본 적은 없었지만, 이 상황을 본인이 다 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겸연쩍음은 실로 엄청났다.
하지만, 그렇게 허둥대며 변명하는 잇키를 보며, 뱌쿠야는 살짝 웃음을 흘렸다.
"하하, 농담이에요. 쿠로가네 군이 자신을 상대할 적을 깔본다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답니다. 살짝 짓궂은 말투로 말해 버렸군요. 면목 없습니다."
"아, 아니요.. 알아 주셨으니 다행이에요."
아무래도 정말로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게 아니고, 단순한 농담에 그쳤다는 걸 알게 된 잇키는, 살짝 안도했다.
"하지만 이전에 파티 회장에서도 봤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다시금 보니 정말 대단한 몸을 갖고 계시는군요. 오늘 시합에서 초인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 몸이라면 납득이 갑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단련해 왔다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지요. 솔직하게 존경심이 느껴집니다."
"조, 존경이라뇨... 제겐 검 외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런 걸 하는 것 외엔 할 게 없었던 것 뿐이에요."
"겸손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테니까요."
"에....?"
그 순간, 잇키의 입에서 놀람과 경악과 비명과도 같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왜냐면, 갑자기 뱌쿠야가 자신의 가슴팍에 손가락을 얹어 왔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직접 만져 보면 잘 알 수 있어요. 근섬유 하나하나에 심지가 있음에도, 유연성을 잃지 않고 있지요. 가볍고 부드럽지만 강한, 정말 멋진 근육이에요. 또한 군살은 물론 겉으로 부풀기만 한 근육 따윈 조금도 존재하지 않아요. 이게 바로 검을 휘둘러 싸우는 데에만 특화된 순수한 검사의 육체란 거군요. 당신의 순수함을 그대로 체현해낸 듯한 기능미 넘치는 몸이에요. .....실로 아름다워.. 계속 만지고 있어도 질리질 않아..."
"으윽~~~~~~~!?!?"
근섬유 마디를 쓰다듬는 듯한 뱌쿠야의 그 손길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긴 속눈썹이 덮인 그 눈동자에, 잇키의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혹시 자신은, 지금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게 아닐까.
잇키는 그런 정체 모를 위기감을 느끼고, 옆에 있던 친구를 향해 욕탕을 나가자고 말을 걸...
"아, 아리스.. 슬슬...!"
"응? 뭐라구? 슬슬 나도 껴 주는 거야?"
"협공당하고 있어!?"
하지만, 이 자리엔 운 나쁘게도 자신과 아리스인, 그리고 뱌쿠야 세 명밖에 없었다.
앞문엔 호랑이, 뒷문엔 늑대.
이 무슨 기분나쁜 절체절명의 위기란 말인가.
잇키의 온몸에 불쾌한 땀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
"이.. 변태 자식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위세가 담긴 굵은 외침소리와 함께 대욕탕 입구에서 한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그 기세 그대로 잇키에게 달라붙어 있던 뱌쿠야를 힘껏 발로 차 욕조 구석으로 날려버렸다.
뱌쿠야를 발로 차 날려버린 건, 같은 부쿄쿠 학원의 학생이자, 그의 친구이기도 한 남자.
모로보시 유다이였다.
"모로보시 씨.."
"여어, 쿠로가네. 어쩐지 어제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오늘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 준 상대를 향해서도 한 풀 꺾임 없는 미소를 보내며 인사를 건네는 모로보시.
한 편, 그런 그에게 발차기를 받은 뱌쿠야는 모로보시를 향해 힐난하는 시선을 보냈다.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유우. 욕탕에서 날뛰면 위험하다구요."
"위험한 건 니 녀석의 언동이다, 임마! 모두가 쓰는 공용 욕탕에서 호모같은 짓거리나 하고 앉아쌌고 말야!"
"실례군요. 제게는 모미지라는 사랑스러운 여성이 있습니다. 쿠로가네 군을 만지고 있던 건 싸움을 위해 살아가는 자에 대한 순수한 흥미와 존경심 때문이에요."
"그건 알고 있다 카지만 좀 더 분위기를 생각하라고! 쿠로가네 얼굴 좀 보라! 완전 쌔파래져있지 않나!"
"어이쿠, 이거 실례했군요. 겁먹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죠. 단순히 당신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습니다."
"엑..."
"그니까 좀 말을 골라서 하라 안카나!!"
팡!! 하고 뱌쿠야의 머리를 때린 뒤, 모로보시는 일단 뱌쿠야에 대한 커버를 시작했다.
"미안하다, 쿠로가네. 머, 보다시피 언동은 쪼매 위험한 녀석이긴 하지마는 성벽은 완전 평범한 녀석이니까 안심해도 좋다~ 지인~짜 언동은 위험한 녀석이긴 하지만."
"아, 아하하.. 아니요, 오해라면.. 다행이네요. 정말로.... 다행이에요."
잇키의 목소리는 은근히 절실했다.
"........"
하지만, 오해가 풀리고 난 뒤, 이번엔 잇키의 가슴 속에 다시금 어색함이 들어찼다.
이유는, 당연히 모로보시였다.
정정당당한 승부의 결과라곤 해도, 잇키는 모로보시를 탈락시키고 1회전을 돌파해낸 몸.
미안함까지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늘 딱 얼굴을 마주치니 어색함이 느껴졌다. 모로보시도 태도론 보이지 않고 있지만, 분하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런 잇키의 마음을 헤아린 건지
"그럼 슬슬 나가 볼까, 잇키?"
이번엔 농담 없이 아리스인이 그런 말을 꺼내 주었다.
"그렇네. 돌아갈 때 매정에서 뭔가 음료수라도 사 갈까?"
잇키는 당연히 그 구조를 받고, 대욕탕에서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런 둘을 향해 뱌쿠야가 말했다.
"어라, 벌써 나가시는 겁니까?"
잇키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여기 안에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어서요. 이 이상 안에 있다간 열이 오를 것 같아요."
"그거 유감이군요. 이상한 오해를 사게 만들어버린 사과로 등을 밀어 드릴까 했는데 말이죠."
"아, 아뇨... 신경쓰지 마세요."
"그럼..."
뱌쿠야는 그리 말한 뒤 손가락을 한 번, '딱' 하고 울렸다.
그 순간, 놀랄 일이 벌어졌다.
빈 손이었을 터인 잇키의 오른손에 어느 틈엔가 페트병 녹차 음료수가, 아리스인의 손엔 블랙커피 캔이 쥐여져 있었다.
"어머나?"
"이건.....!"
"적어도 이것만은 받아주시길."
그리 말한 뱌쿠야는 "그럼 이만"이라 말한 뒤 잇키와 아리스인에게 등을 돌리고 모로보시와 함께 몸을 씻기 위해 샤워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도중, "시로. 너 저 음료수 살 때 확실하게 돈 지불한 거 맞제? 우리 집도 장사 일 하고 있으니까 도둑질은 용납 못한데이?" "실례군요. 확실히 판매기에 동전을 넣고 구입했습니다." 이런 대화가 들려왔다.
잇키와 아리스인은 욕실을 나온 뒤, 김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거기서 아리스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갑자기 나타난 자신의 커피 캔을 가리켰다.
"잇키. 이건... 역시 능력으로?"
잇키는 수긍했다.
"응... 작년 칠성검무제 준결승자인 '천안(天眼)' 죠가사키 뱌쿠야의 노블 아츠 '하얀 손'이야."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 50m의 사정거리 내에 있는 물질의 '위치 좌표'를 자유자재로 텔레포트시키는, 화려하진 않지만 극히 강력한 능력이다.
특히, 장외 10 카운트 아웃 룰이 채용된 이 시합에선, 그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뱌쿠야는 이 능력을 이용해, 상대를 '회장 밖'으로 전이시켜 버려 1회전을 제압했다.
"....그것 참, 꽤나 성가신 능력이네."
"응. 하지만 강력한 능력이긴 해도 사용하는 게 그리 쉽진 않다나 봐. 움직이지 않는 표적을 상대로는 방금처럼 자유자재로 위치를 변경시킬 수 있는 것 같지만, 움직이는 사람을 상대로 했을 때엔 전이시키기 전, 그는 반드시 자신의 디바이스로 상대를 베고 있었어. 아마 상대에게 디바이스가 닿아야만 전이의 조준이 닿는 거라고 생각해."
"닿지만 않으면 괜찮다, 라는 거구나. 그렇다면 싸울 방법은 있을 것 같네."
"응. 그러니까.. 뱌쿠야 씨와 싸울 때, 경계해야 할 건 그의 별명의 유래가 된 또 다른 능력 쪽일 거야."
"또 다른 능력?"
"아리스는 방금 뭘 받았지?"
그리 말하고, 잇키는 자신이 받은 녹차 음료수를 내어보였다.
"난 커피를 받았지. 마침 욕탕을 나갈 때 마시려고 생각했으니 완전 잘 됐지 뭐야?"
"나도.. 욕탕을 나간 뒤에 녹차를 마시려고 했어."
"......."
"둘 다 같은 걸 사려고 할 때 그 물건을 맞추는 거라면 몰라도, 각각 다른 물건을 받고, 그 물건들이 서로 마침 사고 싶다고 생각한 것과 일치한다니, 흔히 벌어지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지 않아?"
"....뭐, 좀 어려울 것 같긴 하네..... 즉, 이게..?"
"응. 뱌쿠야 씨는 대전 상대의 정보를 과잉할 정도로 수집하기로 유명한 선수이기도 해. 거기다 그건 전투 시의 정보만이 아니야. 사생활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캐내고 있지."
"그러고보니 방금 말했었지, 날 조사했었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였어?"
"우리들에게 있어선 아무 의미도 없는 정보일지도 모르지만, 뱌쿠야 씨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그게 아닌가 봐. ......그는 전투 중의 동작이나 시선의 움직임은 물론, 이런 사소한 정보에서 그 인물의 성격이나 경향을 대조하여, .......그 사람의 사고의 '뿌리' ......'행동원리'를 밝혀내는 걸 특기로 갖고 있어."
행동원리를 밝혀낸다.
그 말에, 아리스인은 설마.. 하고 되물었다.
"그건 혹시, 네 '완전장악'과 같은 일이 가능하다는 말이야?"
"응.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계통의 능력이라 봐도 틀린 건 아닐 거야. 아니.... 성능으로선 뱌쿠야 씨 쪽이 압도적으로 위일 거야. 왜냐면 내 '완전장악'은 실제로 싸우면서 수집하는 정보에 대부분 의지하고 있어. 하지만 그는 열심히 캐낸 사전 정보로 '시합 전에 이미 적의 '행동원리'를 밝혀낸' 상태인 거야. 그리고 시합 개시 순간부터 시합을 지배하는 거지. 그 괴물 같은 통찰력을,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눈을 마치 신의 눈과도 같이 여겨서 '천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신이 가질 법한 통찰력으로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하여 '강제 전이'의 방아쇠가 되는 노블 아츠를 접촉시킨다. 그것이 뱌쿠야의 스타일이었다.
방금 잇키의 몸을 만진 것도, 잇키의 신체능력을 정확하게 계산해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미 적은 내일 싸움을 바라보고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확실히 준결승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눈앞에서 뱌쿠야의 능력을 보고, 잇키는 그걸 통감했다.
지금, 잇키가 싸우고 있는 대회는 칠성검무제.
일본 굴지의 학생기사들이 모인, 이 나라에서 가장 혹독한 싸움이라는 것을.
자신 따위가 적당한 마음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 따윈, 이 자리엔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먼저 2회전부터... 뱌쿠야 씨를 쓰러뜨리는 데에 전력을 다하자.'
아마네에 대한 걸 이리저리 생각하는 건 나중 일이다.
잇키는, 그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지하 1층의 대욕탕에서 나온 잇키는, 일반 손님으로서 방을 잡고 있는 아리스인과 헤어진 뒤, 혼자서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이 있는 10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이용한 건, 아리스인의 방이 2층에 있다는 것과, 낮에 있던 시합에서 찔린 대퇴부의 재활을 겸한 것이었다.
목욕을 한 뒤 피로가 풀렸고, 뱌쿠야와 아리스인 덕에 고민하던 것에도 기분상 한 매듭이 지어져서 그런지, 잇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늘 밤은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방에 돌아가 자는 것만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
잇키의 방은 10층에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7층에서 한 번 멈췄다.
거기엔.... 스텔라의 방이 있었다.
'.....내 시합이 끝난 뒤에 대화는 약간 나누긴 했지만..'
사실, 스텔라와는 그 뒤로 만나지 못했다. 스텔라는 시합 뒤에 치료를 위해 '캡슐'에 들어간 탓도 있었고, 잇키 자신도 '칠성검왕'을 이겼다는 쾌거 때문에 보도진에 둘러싸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 정도 대화로는 좀 부족해...'
좀 더 스텔라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좀 더 스텔라와 같이 있고 싶었다.
한 가지 고민을 매듭지은 탓인지, 그 욕구가 한 층 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대회 첫날이다. 내일 시합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런 때에 밀회를 갖자고 제안하다는 건, 성실치 못하다고 생각되진 않을까? 경멸받진 않을까?
그런 불안감이, 잇키의 가슴에 남았지만
'......아니, 그런 생각은 접자.'
잇키는 언젠가 했던 수영장에서의 다툼을 떠올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는 서로 경멸을 받는 걸 두려워한 탓에, 부자연스레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 때의 건 이후, 잇키는 마음 속으로 정했다. 스텔라에 대한 감정만큼은, 숨김 없이 발산하자고.
오랜만에 재회한 애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런 건 당연한 것이다. 무슨 주저할 필요가 있겠는가.
"좋았어."
그리 결심하고, 잇키는 7층에 있는 스텔라의 방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방 앞에 선 뒤, 벨을 눌렀다.
하지만...
두 번 벨을 눌러 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없는...건가.."
유감스러운 듯 잇키는 어깨를 떨궜다.
시간으로 봐선 방금 자신처럼 대욕탕에 들어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대로 방 앞에서 기다리는 건... 역시 그건 좀 아닌 것 같네.'
여자친구 방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
자신과 스텔라의 관계를 알고 있는 타인에게 보여지기라도 한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 될 것이다. 아쉽지만, 오늘은 포기하도록 하자고 생각한 뒤 잇키는 발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어, 어떡해애... 나도 모르게 와 버렸는데... 아직 대회 중인데 이런 짓을 하다니, 경박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오늘 거의 대화도 못 나눠 봤고... 우으으.."
잇키의 방 앞에서, 벨을 누를까 말까, 우물쭈물 갈등하며 중얼거리는 유카타 차림의 스텔라가 서 있었다.
'우와.. 방금 막 보고 온 광경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광경이..'
자연스레, 그 광경을 본 잇키의 뺨이 느슨해졌다.
애인도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방까지 와 주었다.
그게 어쩐지 묘하게 기뻤고,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 감정에 이끌리듯, 잇키는 스텔라에게 말을 걸려 다가가다가, 뚝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
스텔라는 이쪽에 등을 향한 채였고, 아직 자신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 사실에, 잇키의 미소에 약간 짓궂은 느낌이 섞였다.
...놀래켜 주자.
뒤에서 어깨를 톡 쳐서, 깜짝 놀래켜 주자.
그런, 아이들이 할 법한 장난이 떠오른 것이다.
잇키 자신도 이 나이에 뭐하는 거람, 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의 기분은 완전히 장난을 쳐 줄 마음이 되어 있었다.
왜냐면, 이대로 말을 걸어 봤자 미소를 지으며 재회할 뿐.
하지만, 깜짝 놀래켜 주면 미소 이외에도 놀란 표정이나 화내는 표정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화난 얼굴도 귀엽다. 그럼 단연 후자 쪽이 더 이득일 것이다.
나도 참 똑똑하다니까.
그리 생각한 뒤 잇키는 발소리를 죽인 채 스텔라에게 다가가
"와....!"
그녀의 어깨를 치는 것과 동시에 놀래킬 때에 내는 소리로 말을 걸려 했다.
그 순간.
"내 뒤에 서 있지 말라고오오오오오!!!!!!!!"
"아아아아아악!?"
깜짝 놀래키려 낸 소리가 그대로 비명으로 바뀌었다.
잇키의 손이 스텔라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스텔라가 몸을 회전시켜 자신의 뒷쪽으로 돌려차기를 쏘아낸 것이다.
보지도 않고 정확하게 잇키의 목을 노려 쇄도해 들어오는 하이킥.
공간을 통째로 베어낼 기세가 담긴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그 발차기의 위험한 위력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 발차기를 순식간에 몸을 굽혀 피해 피할 수 있었던 건, 잇키의 뛰어난 운동능력 덕택이었다.
"망했다! 수행 탓에 나도 모르게.. 저기, 괜찮아요? 잠깐.. 잇키 아냐!?"
"하, 하하하.. 안녕. 스텔라.."
지금에야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잇키라는 걸 알아채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스텔라. 그런 스텔라에게 인사를 건네는 잇키의 표정은, 확실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 이런 사소한 장난을 하는 데에 목숨을 걸게 될 줄이야...'
역시 나쁜 짓은 하면 안 되나 보다.
"날 놀래키려고 그랬다니.. 후훗, 잇키도 의외로 애들 같은 구석이 있구나?"
그 뒤, 잇키의 방에 들어온 스텔라는 방에 있는 침대에 잇키와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방금 잇키의 행동의 진의를 듣고, 어이없어 하는 듯이, 하지만 유쾌함이 섞인 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심코 날아온 반격에 간담이 서늘해진 탓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려 했던 잇키였지만 그 모성적인 미소를 보고, 역시 뭔가 이득을 본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 걸 보면, 그는 역시 스텔라를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는 듯했다.
"온 힘을 다해 찼는데, 괜찮아?"
"괜찮아.. 맞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뒤에 있던 게 잇키라서 정말 다행이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맞아서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하하.."
머리 위를 한끗 차이로 지나간 날카로운 풍절음을 떠올리자, 어찌 해도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렇고 엄청난 반응이었어. 난 기척도 발소리도 전부 죽이고 접근했는데 말이지."
그야말로 척수반사 급이었다.
거기다 시선도 향하지 않은 채 적의 급소를 노리는 정확성까지 갖고 있었다.
이건, 이전의 스텔라에겐 없는 능력이었다.
"방금 건 사이쿄 선생님의 교육의 결과야?"
그 질문에,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도 그럴게 정신이 들고 보면 사각에 선생님이 서 있는 수행을 하다 보니, 민감해져 있는 거야. 아..."
"왜 그래?"
"지금 아래층에서 누가 10엔 동전 떨어뜨렸어."
'뭐지..? 대단하긴 한데 전혀 대단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 미묘한 기분은..?'
"하지만 대단하다고 하면 잇키 쪽이 더 대단하지. 뭐, 닌 애초에 잇키가 진다는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 엄청난 방법으로 승리할 줄은 예상 못했어. 그 검술은 아리스와 겪었던 사건 때에 훔친 거지? 그냥 져 주진 않은 걸로 봐선 역시 잇키다워."
그리 말하고,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미소를 짓는 스텔라. 하지만, 그 스텔라의 표정을 보고 잇키는 약간 겸연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제대로 썼다고 말하긴 어려운 거였어."
"그래?"
잇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도 그럴게, '소리'가 너무 많이 났어. 진짜 '비익'의 검은 소리조차 나지 않았거든. 힘의 낭비가 전혀 없으니 바람소리조차 나질 않는 검술이야. 하지만 지금 내 기술로는 거기까지 재현해내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
그렇다. 본가본원의 에델바이스의 검과, 잇키가 모로보시 전에서 보여준 '모방검기'엔, 거기서 큰 차이가 있었다. 거기다, 그 원인은 잇키가 에델바이스의 검을 완벽하게 훔쳐내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거의 완벽하게 그녀의 검을 훔쳐냈다. 그 이론을 전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재현해낼 수 없었다.
순간완전가속 중에, 몸에서 발생하는 힘의 흐름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실력이 잇키에게 없었으니까.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데엔 자신이 있는 편이었지만.. 아직 멀었어. 그 사람의 검을 흉내낼 때마다 자신의 미숙함이 느껴져."
그리 말하고, 잇키는 분한 듯 무릎 앞에서 마주댄 손을 강하게 쥐었다. 훔쳐냈음에도 불구하고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은, 오래전에 겪었던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잇키를 바라보던 스텔라는
"후훗. 왠지 잇키다워."
눈을 가늘게 뜨며 기쁜 듯이 웃었다.
"무슨 의미야?"
"지기 싫어한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야. 생각해 봐. 상대는 그 세계 제일의 검사라구?"
수많은 블레이저에게 있어, '비익'은 선망을 넘어서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다.
말하자면, '신'과 비슷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누구나가 그녀를 같은 차원에, 그리고 같은 땅에 서 있는 존재라고 여기질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 여기고 있으니, 애초에 이기려는 생각조차 하질 않는다.
"하지만 잇키는 에델바이스의 수준에 닿지 못하는 걸 진심으로 분해 하고 있어."
그건, 에델바이스를 경쟁 상대로서 보고 있다는 것.
고작 일본의 1학년 고등학생이면서, 얼마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것일까.
자기 분수를 모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난 그런 잇키가 좋아."
그리 말하고, 스텔라는 보조개가 들어간 활짝 피어나는 미소를 잇키에게 향했다. 스텔라에게 보조개가 있다는 걸 잇키가 알게 된 건, 그녀와 연인 사이게 되고 난 뒤였다. 왜냐면, 스텔라는 타인에게 보조개를 보이는 걸 싫어했으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 앞에선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보조개가 생길 정도로 미소짓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잇키 앞에서만은 스텔라는 만면의 미소를 지어 보내 왔다.
즉, 이 사랑스러운 미소는, 잇키만이 볼 수 있는 특별한 미소..
"스텔라......"
그걸 알고 있기에, 그 미소를 본 잇키의 가슴이 두근, 하고 뜨거워졌다.
생각해 보니, 이 사랑스러운 미소를 가까이서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잇키는 천천히, 부드러운 손길로 스텔라의 뺨을 어루만졌다.
스텔라는 그걸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만지고 있다는 것이,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처럼.
뺨에 닿은 손바닥을 통해 스텔라의 높은 체온이 은은히 전해져 왔다.
이어져 있다.
터놓고 말하자면 피가 이어지지 않은 새빨간 타인에게, 그럴 터인 스텔라에게, 그 정도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실감에, 잇키는 감정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불타오르는 듯한 빨간 머리카락. 반짝이는 비색의 눈동자. 높은 체온의 피부. 물기를 머금은 듯 반짝이는 부드러울 듯한 입술...
눈 앞의 소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으응..."
정신이 들고 보니 거의 무의식적으로, 마치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잇키는 자신의 입술을 스텔라의 입술에 겹치고 있었다.
서로를 갈구하는 게 아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부드러운 입맞춤.
하지만, 부족함을 느끼진 않았다.
이 정도로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상대가 곁에 있어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상대도 자신을 사랑해주고 있다는 그 실감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뻤다.
먼저 잇키부터.
살짝 닿은 입술이 떨어지자, 다음은 스텔라가.
닿고, 떨어지고. 닿고, 떨어지고..
그리 반복하며, 둘은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을 메우듯 입을 맞추었다.
그런 행복한 시간이 몇 분 이어졌을까.
잠시 후, 입술을 뗀 스텔라가 뺨을 살짝 붉히며, 잇키를 살짝 바라보며 물어 왔다.
"저기, 잇키.. 내가 없는 동안.. 쓸쓸했어?"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한 층 톤이 낮아진 목소리로.
그건 마치, 부모님에게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고백하는 아이의 모습과 같았다. 아무래도 스텔라는, 멋대로 수행을 하기 위해 잇키의 곁에서 떠나 버린 탓에 그가 외로워하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질문엔, 스텔라가 미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부정을 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잇키는..
"응. 외로웠어."
즉답했다.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사실은 있지. 방에 돌아오기 전에, 나 스텔라의 방에 갔었어."
"그래?"
"응. 스텔라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말야. 대회 중인데 성실치 못한 짓이 아닐까, 했지만 마음을 먹고 벨을 눌렀어. 뭐.. 그 때 스텔라는 여기에 있었으니 안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지만 말야."
남자가 여자친구 좀 못 만난다고 쓸쓸해하다니 속 좁게 보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왜냐면, 이 쓸쓸함은 그만큼 강하게 스텔라를 생각하고 있다는 거짓 없는 감정일 테니까.
"그러니까.. 난 지금 너무도 행복해."
그리 말하고, 잇키는 옆에 앉아 있는 스텔라의 등 뒤로 손을 두른 뒤 살짝 힘을 줘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스텔라는 "그랬구나.." 하고 낯간지러운 듯 미소지으며, 몸을 맡겨 왔다.
행복했다. 요즘들어 떨어져 지내 왔던 탓에, 아주 사소한 이런 만남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리 생각하면, 만나지 못한 시간마저도 사랑스레 느껴졌다. 잇키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럼.. 난 잇키이게 '벌'을 받아야만 하겠네?"
"......하?"
갑자기 나온 의미모를 그 말에,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에? 뭐..? 미안.. 잘 안 들렸는데.. 방금 혹시 '벌'이라고 한 거야?"
포옹을 풀고 되묻자, 스텔라는 뺨을 붉힌 채 끄덕, 하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그 모습에 잇키는 더욱 혼란했다.
"에에.. 그... 벌이라는 건.. 그거지? '꾸짖는' 거..?"
"그 이외엔 없잖아?"
"뭐, 그렇긴 한데.. 왜 내가 스텔라한테 그런 걸 해야 한다는 거야?"
"그, 그치만 잇키는.. 그.. 나중에 내 남편이 될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을 자기 사정 탓에 쓸쓸하게 만들다니.. 아내로서 그릇된 행위잖아! 그러니까.. 잇키는 나한테 벌을 줘야만 해!"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쥐며 역설하는 스텔라.
그 눈빛은 진지함 그 자체여서, 농담으로 말하는 것처럼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아, 아니.. 됐어! 별로 그런 건...!"
이런 건 당연히 잇키로선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대체 뭐가 슬퍼서 자신의 마음을을 이렇게 채워 주는 애인에게 심한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요 일주일은 스텔라에게 필요한 시간이었잖아. 그건 나도 알고 있고, 그런 것도 이해할 줄 모르는 도량 좁은 가정폭력남이 되고 싶진 않다구!?"
그러니, 잇키는 그렇게 거절하려 했지만
"잇키가 좋다고 해도 내가 안 돼!"
"에엑~~......"
여기서 잇키는 그 사실을 떠올렸다.
꽤 지난 이야기이지만, 스텔라는 '모의전에서 진 쪽이 노예'가 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영복 차림으로 목욕탕에 난입해 온 적이 있었다.
그 때와 같은 것이다.
자존심이 높기 때문인지, 매사에 성실한 성격인 건지, 스텔라는 꽤 자신에게 엄했다. 그러니 약속은 절대로 지키려 하고, 자신의 과실을 반드시 씻어내려 한다.
거기다, 그 과실을 씻거나 약속을 지키려 하는 대상의 입장이나 의견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 곤란하게도 말이다.
'이런 경우, 스텔라에게 주도권을 주는 건 NG겠지.'
경험 상 잇키는 그리 판단했다.
스텔라는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인 주제에, 자신이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면 대담해진다. 여기서 자유롭게 냅뒀다간 무슨 무리한 요구가 날아올지 모른다.
'엉덩이를 때려! 란 말을 들으면 진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러니 잇키는 선수를 취했다.
".....알았어. 그럼 지금부터 벌을 줄 테니 저항하지 말도록."
그리 말하고 스텔라의 양 어깨를 잡은 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스텔라가 어떠한 구체적인 일을 말하기 전에, 자신 쪽에서 뺨에 입을 맞춘 뒤 '이게 벌이야' 라고 말할 계산이었다.
하지만...
"으, 응.. 하지만 키스는 안 돼. 그런 상냥한 게.. 벌이 될 순 없잖아."
실행으로 옮기기 전에 못이 박혀 버렸다.
상대도 이 쪽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잇키는 한 순간 생각을 읽혀 퇴로를 막힌 사실에 망설였지만
"아, 알고 있어."
여기서 몸을 뺐다간 상대가 어떻게 나설지 모른다.
그러니 바로 또 다른 계획으로 바꿔 스텔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역시 키스인가?
아니, 아니다.
키스는 하지 않는다.
잇키는 스텔라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등에 두른 뒤 끌어안고, 그녀의 얼굴 옆을 지나간 뒤
"이건 벌이니까. ......살짝, 아프게 갈게."
"에.....?"
귓가에서 속삭인 뒤, 바로 옆에 있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물컹, 하는 감촉은 너무나 부드러웠고, 사람의 몸 부위 중에서도 독특한 차가움을 갖고 있는 그 귓불은, 키스로 열이 오른 입술에 아주 느낌이 좋게 닿고 있었다.
깨무는 힘은 힘껏 물었다고 볼 정도로 넣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달콤하게 깨문 것도 아니었다. 스텔라의 벌에 대한 요구도 최저한의 태도로 응하는 형태의, 이의 형태가 살짝 남을 정도의 힘이었다.
"힛! 아, 아아아...앗~~~~!?!?"
"우왓!"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스텔라의 몸이 잇키의 팔 안에서 격하게 튀어올랐다.
마치, 몸 안에 전류가 흐른 것처럼 크게.
"그, 그렇게 아팠어?"
너무나도 격한 그 반응에 깜짝 놀란 잇키가 물었지만, 스텔라는 잇키에게 안긴 채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아픈 게 아니다.. 그렇다면..'
귀까지 새빨개져 살짝씩 떨고 있는 스텔라를 본 뒤 잇키는 설마하고, 이번엔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그러자..
"히으으으응..!?"
꾸욱, 하고 잇키에게 안긴 채, 스텔라는 교성이라고 해도 좋을 소리를 질렀다.
그걸로, 잇키는 알아챘다.
'어쩌면 스텔라는.. 살짝 아픈 정도를 기분좋게 느끼는 건가?'
애인의 의외로운 성벽을 발견한 일에, 어쩐지 자기 일처럼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걸로 스텔라를 벌주려는 건, 잇키에게 있어 본의가 아니었다. 소중히 여기는 여자아이에게 아픈 짓을 하다니,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기분좋게 느껴준다면 그보다 더한 건 없었다.
라고,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하아... 아하.... 기뻐..."
"스텔라?"
귀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잇키는 무심코 목덜미에서 고개를 빼 스텔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온몸이 굳었다.
스텔라의 표정은 황홀감에 젖어 풀려 있었고, 마치 피가 오른 듯 피부는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비색의 눈동자에 깃든 이성은 마치 딸기잼처럼 달콤하고 끈적한, 촉촉하고 요염한 빛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스텔라는 그의 등 뒤에 두른 손을 움직여, 목덜미에 살짝 난 이빨자국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은 뒤
"......나, 잇키한테 먹혀 버렸어....."
정말로 기쁜 듯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 열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그리고 방금 목욕을 끝마치고 나와 상기된 몸으로부터 느껴지는 색향에, 잇키는 세상이 기울어질 정도로 어지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이거... 위험..해....'
명백히, 지금 스텔라는 이상한 스위치가 눌러져 있다. 적당한 힘으로 깨물면 이대로 끝나겠거니 싶었지만, 아무래도 엄청나게 큰 지뢰를 밟아 버린 모양이었다.
이건 위험하다.
스텔라도.
그리고 나 자신도...
이 이상 기분이 고양되면, 그녀의 부모님에게 이 관계를 인정받을 때까지 선을 넘지 않겠다는 결의가 흔들려버린다.
한심한 이야기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잇키는 스텔라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몸을 억지로 떼어 냈다.
"오, 오케이! 난 만족했어! 만족했으니 벌은 이걸로 끝!"
"아......."
그건, 남은 한 줄기까지의 이성을 짜내어 해 낸 행동이었다. 하지만, 허둥댄 탓에 약간 힘을 더 줘 버린 듯했다. 밀어낼 때,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미끄러져 스텔라의 유카타를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그녀의 한 쪽 가슴팍이 크게 드러나 버렸다.
그 스텔라의 풍만한 가슴이, 반이나 보여 버릴 정도로...
당연히 가슴이 반 이상 모습을 드러낸 결과, 그 꼭대기에 있는.. 살짝 피부의 색소와는 다른 부위도 보여 버렸고..
"읏, 아아....."
잇키는 이 사태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고막이 아파질 정도로 소리를 내며 심장이 뛰고 있었고, 목이 바싹 타들어가는 느낌. 빨리 눈을 돌린 뒤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눈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애인의 그 남에겐 보이지 못할 모습을 보고, 잇키의 이성은 쇼트가 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더욱 나쁘게..
"괜찮아.."
스텔라는 이미 쇼트가 나 있는지, 이 상황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잇키가 하고 싶다면.. 깨물어 봐도, 좋아.."
흐트러진 가슴팍의 옷매무새를 정돈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삶은 듯 빨개진 얼굴로 잇키를 바라보며, 사랑스러운 듯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잇키의 타액으로 젖은 입술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촉촉히 녹아내린 눈망울은 그저 잇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치직.
잇키는, 자신의 후두부 부분에서 무언가가 타들어간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제부터 무슨 행동을 취할 것인지, 잇키 자신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그저, 빨려들어가듯, 스텔라의 가슴팍으로 얼굴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런 잇키를, 스텔라는 사랑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뺨에 얹은 손을 후두부로 가져간 뒤, 그를 받아들이려는 듯 가볍게 힘을 줘.....
딩동~
" "~~~~~~~~~~으윽!!" "
갑작스런 벨소리에 둘은 숨을 삼키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예기치 못한 제 3자의 방문에 의해 찬물이 끼얹어진 둘은, 얽힌 몸과 의식을 반사적으로 떨어뜨린 뒤, 제각각 침대 구석의 다른 곳으로 튀어올랐다. 한 번 흥분이 식자, 찾아온 건 불이 뿜어나올 정도의 부끄러움이었다.
자신들은 지금.. 무엇을 한 것인가
무엇을 하려 한 것인가.
혹시 저 벨소리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곰곰히 생각할수록 머릿속의 혈관이 파열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하..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저, 정말로 그렇기도 하네요... 오호, 오호호..."
잇키에게서 떨어진 스텔라는 구속복처럼 흐트러진 유카타의 옷매무새를 고친 뒤, 삶은 것처럼 빨개진 얼굴을 돌리며 부자연스런 말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흐트러진 자신의 실점을 고풍스런 말투로 돌리려 했나 보다.
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노력 때문에 대응하기가 더 곤란해졌다. 그래도, 잇키도 마찬가지로 상당히 분위기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쓴소리를 할 수도 없어서
"이, 일단 마침 누가 온 것 같으니, 서로 머리 좀 식히자.."
"그, 그렇네. 그게 좋겠어."
스텔라의 동의를 듣고 난 잇키는, 침대에서 내려온 뒤 방 입구로 향했다.
그 도중,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 위험했어......'
혹시 그대로 상황이 나아갔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것이다. 스텔라의 부모님에게 찔리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자신이 이렇게까지 상황에 휩쓸리기 쉬운 성격을 한 녀석이었다니... 아니, 그래도 스텔라처럼 아름다운 소녀의 그런 선정적인 모습을 보고 갈등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도 좀 어떤가 싶긴 하지만..
어찌 됐건, 이 방문자 덕분에 살았다.
바로 문을 열어 환영해 주자.
지금 나와 스텔라는, 둘만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다.
솔직히 엄청나게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간에 내 방을 방문할 사람이 있나?'
의아하게 여기며, 잇키는 문을 열고...
"네. 누구세요?"
"안녕. 약속대로 네 누드화를 그리러 왔어."
쾅!! 하고 문을 내던지듯 닫은 뒤, 엄청난 속도로 문을 잠갔다.
"무, 무슨 일이야? 잇키!?"
"아, 악질적인 방문판매원이었어."
"여긴 호텔인데!?"
아무래도 그녀의 위치에선 잇키의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은 듯했지만, 문 너머에 있던 건 양복을 입은 세일즈맨이 아니고, 부시시한 금발에 상반신 누드 + 앞치마라는 어이없는 옷차림을 한 여성, 아카츠키 학원의 사라 블러드릴리였다.
그녀는 하군 학원 습격 사건 때 잇키를 보고 마음에 든 듯했다. 그녀는 칠성검무제 개회 전에 열린 선수끼리의 친교 파티에서, 그에게 자신의 누드화 작품 모델이 되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건 농담도 뭣도 아니었던 듯했다.
아무리 방금 같은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저 방문객은 환영할 수 없다. 잇키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손잡이를 잡은 채 필사적으로 고뇌했다.
"실례합니다."
철컥, 하고 잇키의 옆에 있던 '벽'이 열리고, 사라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엥? 에에에엑!? 어, 어디로 들어온 거야!?"
"벽."
"아니, 그건 보면 알겠는데.. 왜 벽이 열리는 건데!?"
"손잡이를 달았으니까."
자세히 보니, 확실히 안으로 열린 벽엔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전혀 몰랐다. 벽이란 그런 것이었구나.
"그럴 리가 없잖아!!!!!!"
틀림없이 어떤 능력을 쓴 것이다.
"무슨 능력을 쓴 건지는 몰라도, 왜 이렇게 나한테 들러붙어 오는 거야!?"
"방금 말했잖아. 약속대로 네 누드화를 그리러 왔다고."
툭 터놓고,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답하는 사라.
그 눈은 잇키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지금 하는 말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잇키의 거절도 진심이었다.
"모델이 되어 준다고 약속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난 그린다고 약속했어."
"그건 약속이 아니잖아! 누구랑 나누는 형식도 아니고! 완전 일방통행이잖아!"
"의외로 완고하네. 어쩔 수 없지. 그렇게까지 말하니.."
"포기해 주는 거야?"
"나도 벗는 걸로 양보할게."
"그게 아니지! 그런 양보를 받아내고 싶은 게 아냐! 이렇게 싫다고 말하는데 그냥 돌아가 달라구!"
잇키는 죽을 힘을 다하는 표정으로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그건 무리."
평행선이었다. 사라는 전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커녕, 잇키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간 뒤
".....난 이제 너 이외의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어. 그 날 네 몸을 만진 뒤 계속 네 생각만 해 왔어. 너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어. 이제 너가 아니면 난 만족할 수 없어. 그러니까 책임져 줘."
반라에 가까운 옷차림을 한 채 잇키의 가슴팍에 기대어오며, 그런 위험한 말을 꺼내 왔다.
"잠까..... 사라 씨! 그 말투는 위험..."
그리고, 잇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과, 스텔라의 손이 잇키의 어깨에 툭, 하고 놓인 건 거의 동시였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엔 미소를 지은 반야 같은 얼굴을 한 스텔라가 관자놀이에 분노의 핏대를 세운 채로 서 있었다.
"저기, 잇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째서 아카츠키 학원의 치녀가 잇키의 방을 찾아 온 거야? 거기에 아까부터 벗는다 뭐다... 뭔가 내가 없는 사이에 꽤 많이 친해졌네? 응?"
"아, 아니.. 스텔라...! 좀 진정해 줘! 넌 지금 한층 더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어!"
"후후후..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잇키? 여긴 10층이거든?"
'이런... 엄청나게 흥분해 있어...!'
머리에 피가 너무 많이 오른 탓에 말이 통하지 않고 있다.
뭐, 사라의 저 옷차림도 옷차림이고, 무엇보다 친여동생인 시즈쿠에게까지 경계를 표하는 스텔라이다. 알지도 못할 여자가 야간에 자신의 애인의 방에 찾아온다니,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닌 것이다.
여기선 솔직하게 다 말해야 좋을 것 같았다. 뭣보다 자신에겐 죄가 없으니까.
"정말로 우리 둘은 친한 사이가 아니야. 그저.. 스텔라가 결석했을 때에 선수끼리의 친목을 다지는 파티가 열렸는데, 그 회장에서 그.... 누, 누드 모델이 되어 달라는 말을 들은 것 뿐이야."
"에, 누... 누누누누.... 누드 모데에에엘!? 아, 안 돼! 그런 건! 절대로 안 돼! 그런.. 누드라니.. 나도 아직 다 못 봤는데!"
"그런 문제야?"
"그런 문제지! 어쨌든 그런 건 절대 용납 못해! 절대로 안 돼! 것보다 이 치녀, 대체 언제까지 잇키한테 달라붙어 있을 생각인 거야! 얼른 떨어져!"
으르렁! 하고 짖듯 말한 스텔라는, 잇키에게서 사라를 뗴어놓은 뒤 밀쳤다.
사라는 균형을 잃고 침대 위에 엉덩방아를 찧은 뒤, 힐난하는 시선을 스텔라에게 던졌다.
".....어째서 '홍련의 황녀'가 이 일은 안 된다고 판단하는 거지?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일 텐데."
"당연히 상관 있지! 난 잇키의 애인이니까!"
"그럼 괜찮아. 난 딱히 그의 연인이 될 생각 같은 건 없으니까. 그의 마음은 당신의 것이면 돼. 난 몸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니까."
"몸도 내 거야!"
"에?"
"애, 애초에 누드 모델이나 그림 같은 걸 그린다고 말하는데, 그게 진짜라는 보장도 없잖아! 당신, 사실 잇키의 알몸을 보고 싶은 것 뿐인 변태 아니야!?"
"욱.."
그 스텔라의 말에, 사라의 표정에 명백한 험악함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그 점을 의심받는 게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듯했다.
"....내 정체가 의심된다면 솔직하게 자기소개를 할게. 아마 버밀리온 황족인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거야."
그리 말한 뒤 사라는 데님 바지 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내 볼펜으로 무언가를 그리듯 적은 뒤 그걸 스텔라에게 건넸다.
"이게 내 널리 알려진 이름이야."
"널리 알려진? .......엣!? 에에에엣!?!?"
그 순간, 스텔라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메모장에 적혀 있던 건, 대충 보면 뭐라 쓰여있는지 모를 사인이었다. 하지만, 스텔라는 그 사인을 알고 있었다.
"마리오 로소라니, 이건...!"
"에, 뭐야? 그 1P 캐릭터 같은 이름은..?"
"....요즘 세상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화가야. 확실히 최고로 거래된 그림 가격이 14억 정도였을 걸."
"1.. 14억 엔!?"
"미국 달러로.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익명의 화가로, 나도 지금까지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어."
"하지만,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건 가짜일 가능성도 있잖아?"
그 잇키의 질문에, 스텔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야. 이 사인, 어딜 봐도 틀림없는 진짜니까. 사실 버밀리온 궁전 식당에도 마리오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어. 거기에 완전히 같은 느낌의 사인이 그려져 있거든. 눈을 끄는 멋진 그림이라서 확실하게 기억이 나. 그건 그렇고 설마 그 마리오가 뒷쪽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니... 지금까지 그 정체를 밝히려고 한 몇 명의 저널리스트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이거라면 납득이 가네."
"알아줬으니 다행이야."
스텔라가 자신의 진짜 정체에 대해 납득한 것을 보고, 사라가 입을 열었다.
"난 변태가 아냐. 그저 내 이상의 남성상인 '어나더 원'의 늠름한 모습을 내 붓으로 그려내고 싶은 것 뿐."
그러니 방해하지 마, 하고 나서 오는 사라.
하지만, 스텔라는 다시금 잇키를 지키려는 듯 둘 사이에 선 뒤 그녀를 물렸다.
".....확실히 당신이 일류 화가라는 걸 알았고, 그 마리오 로소가 그린 잇키 그림에도 흥미가 가긴 하지만, 그런 건 상관 없어! 뭣보다 잇키가 싫어하는 짓을 하는 건, 절대로 안 돼!"
"스텔라..."
이 얼마나 듬직한 연인이란 말인가.
오해를 샀을 땐 정말 어떻게 되나 싶었지만, 그녀가 냉정한 성격이라 정말 다행이다.
둘이서 한꺼번에 반대를 한다면, 아무리 이 사라라고 해도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잇키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자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당신들의 영원한 행복을 기원하는 둘의 초상화를 버밀리온 황궁에 벽화로 그려줄 것을 약속하겠어. 신부 모습을 한 당신과, 신랑 모습을 한 그의 그림을."
".........잇키. 모처럼 이렇게 칠성검무제에까지 참가했으니, 기념으로 한 장 그려달라고 해 볼까?"
"엄청나게 손쉽게 매수당했어어어어어!?!?"
"괜찮아. 예술이니까 부끄럽지 않은걸...!"
"농담하지 말라구!!!"
이대 일이 된 탓에, 상황이 엄청나게 나빠졌다.
잇키는 재빨리 방을 뛰쳐나간 뒤
"앗, 잠깐! 잇키!"
"드디어 만난 이상의 피사체... 절대로 놓치지 않겠어...!"
자신을 쫓아오는 둘로부터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스텔라와 사라에게서 도망친 잇키, 하지만 호텔은 구조가 단순한 탓에 숨을 수 있는 곳이 적었다. 언제까지나 도망다닐수 있을 곳이 아니었다.
거기에, 잠잘 곳도 필요했다.
아무리 이런 상황이라도 중요한 칠성검무제가 있는데 노숙은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자신의 방으론 돌아갈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누군가의 방에 찾아가 부탁을 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먼저 후보로 떠오른 건 아리스인의 방이었지만... 그 방은 그 둘도 확실하게 후보로 잡고 있을 것이다. 위험이 크다.
시즈쿠의 방은 더욱 안 된다. 더욱 상황이 커져 버릴 것이 눈에 훤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밤 늦게, 연락도 없이 방에 찾아갈 만한 친구는 더 이상 없었고...
"....그래서, 내 방으로 온 거냐?"
"응. 여기서 폐를 끼쳐도 될 것 같은 사람은 가족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말이지."
고민 끝에 잇키가 도망칠 곳으로 선택한 곳은, 그의 형인 오우마의 방이었다.
"거기에 스텔라와 사라도 설마 내가 오우마 형이 있는 곳으로 도망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하룻밤만 묵게 해 줄 수 없을까?"
"가라."
"그냥 갈 거면 애초에 '이런 곳'에 오지도 않을 텐데 말이지."
"남의 방을 가지고 이런 곳이라니, 잘도 말하는군."
가족인 데다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형이다 보니, 잇키도 말이 술술 나오게 되는 듯했다. 거기다, 상대가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테러리스트와 협력하고 있다는 점과, 몇 번이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점에서, 태도에 가시가 돋혀 있는 건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 다른 누군가의 방으로 가면 될 게 아닌가. 그게 아니면, 네 녀석. 친구가 없는 건가?"
"그 말, 형한테 들으니까 굉장히 열받는데?"
"......손윗사람에겐 좀 더 존경심을 표하도록."
"하하. 형이라도 농담을 할 때가 있구나. 오랜만에 봤더니 테러리스트의 똘마니 노릇을 하고 있는 바보 멍청이가 뭐? 손윗사람?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인데? 아니면, 나보고 물구나무라도 서서 입장을 바꾸라는 거야?"
"....차라리 시원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미움받고 있나 보군, 지금의 나는."
마치 시즈쿠가 빙의된 것 같은 잇키의 독설에, 오우마는 눈썹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오우마도 미움을 받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 듯, 그 이상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오늘 밤만이다."
그는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짓고 그리 말하며, 잇키의 입실을 허가했다. 호텔 방은 넓은 편이었고, 애초에 오우마는 침대에서 자는 습관이 없었다.
그러니, 지장이 없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고마워."
감사의 인사를 한 뒤, 잇키는 오우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혹시 자고 있었던 걸까?
방 안을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잇키에게, 오우마는 방 안에 설치되어 있던 냉장고에 들어 있던 미네랄 워터를 꺼내들며 물었다.
"뭔가 마시고 싶나?"
"아니, 조금 있으면 잘 거니까 됐어."
"그래. 잘 거면 침대에서 자도록. 난 침대를 쓰지 않으니."
"....그럼 사양 않고."
권유에 따라 잇키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오우마는 침대가 아닌, 방의 벽에 등을 기댄 뒤 매트가 깔린 바닥에 그대로 앉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예리하게 빛나는 날카로운 시선을, 잇키에게 던지며 물었다.
"그래서, 네 녀석은 진짜로 뭘 하러 여기에 온 거지? 그저 도망만을 위해서 여기로 온 건 아닐 테지."
"......뭐, 그건 그렇지."
오우마의 말은 옳았다.
확실히 사라와 스텔라에게서 몸을 숨기기 위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것만으로 오우마의 방에 올 리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 밤 자신을 습격한 상대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잇키는 이 장소를 선택했다.
그 판단엔,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다.
"요즘들어 맨날 살벌한 분위기로만 만난 탓에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잖아? 그러니 형이랑 좀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잇키의 말에, 오우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잇키는 그 침묵을 오우마의 승낙으로 받아들이고, 다시금 이야기를 꺼냈다.
"난 있지. 솔직히 형을 존경하고 있었어. 언제나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한 태도로 살아 왔고, 집안 모두의 기대를 한 몸으로 받고, 그 모든 것에 응해 온 형을 말이지. 동경했었다고 해도 좋을 거야. 쿠로가네 집안에서 유일하게 보고 배워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러니 형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행방이 묘연해졌어도 난 걱정하지 않았어. 저 오우마 형이니까, 분명히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무사 수행을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때의 일본은 이미 형에겐 좁은 곳이었으니까."
실제로, 모습을 감춘 중학교 1학년 때, 오우마는 국내에도, 그리고 외국에도 당해낼 적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에 연맹 주최 대회를 제패하고, U-12 세계 주자가 된 오우마의 힘 앞에는, 동년대는 물론 중학생들조차 손발도 꼼짝 못하고 당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우마의 힘은 중학생 1학년 나이의 시점에서 당시의 '칠성검왕'보다도 강했을지도 몰랐으니,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강함을 추구해 온 오우마에게 있어, 그건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을 시작으로 기사연맹 가맹국이 정한 규칙.
기사 학교 미만의 중학생이나 초등학생은 '환상 형태' 이외의 전투를 벌여선 안 된다는 그 룰은, 틀림없이 오우마에게 있어 숨이 막힐 정도의 폐쇄감을 주었을 것이다.
생사를 걸지 않은 싸움 따위, 진짜 싸움이라고 하기 어려우니까.
어디까지나 애들 싸움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걸 수 백번 반복한다 하더라도, 진정한 강함은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곁에 있던 잇키가 느낄 정도이니, 오우마가 그리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니 잇키에게 있어서 오우마의 가출은 의외로운 일도 무엇도 아니었고, 오히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었다. 그 형이 이 왜소하기 짝이 없는 중학생 리그로 만족할 리가 없을 거라고.
그리고, 그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형의 뒷모습을 동경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형이 테러리스트가 되어 눈앞에 나타났을 땐 정말 충격이었어."
그리 말하고, 잇키는 어두운 방바닥에 앉은 오우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질문했다.
"....있잖아. 형은 어째서 '해방군'에 가담하고 있는 거야?"
그 질문을 하는 것이, 바로 오늘 잇키가 이 방에 찾아온 이유였다. 잇키의 기억 속의 형은, 이런 음모나 모략과는 연이 없는 남자다. 그저, 강고하게, 똑바로, 강함을 추구하는 기사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어두운 뒷쪽 일에 가담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 질문을 듣고, 오우마는 귀찮은 듯, 하지만 확실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먼저 하나 수정해 두겠다만, 난 '게스트'이고 '해방군'에 소속되지 않았어."
"무슨 말이야?"
"눈치가 없는 녀석이군. 애초에 이번 칠성검무제를 둘러싼 소동의 중심인물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츠키카게 총리인가."
"그래. 난 '해방군'이 아닌 '그 쪽' 진영에 몸을 두고 있지. 그리고 내가 츠키카게 총리의 모략에 가담하고 있는 이유 말이다만, '츠키카게 총리의 뜻에 협력해 줬으면 좋겠다'고, 이츠키에게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 아버지한테.....!?"
"놀랄 일인가? '기사 연맹'을 탈퇴하여 일본의 주권을 되찾으려 하는 츠키카게를 우두머리로 둔 여당과, 전에 갖고 있었던 국내 블레이저 전원에 대한 강한 권력을 빼앗긴 전 시국. 둘 다 '반 연맹'이지. 이해관계는 일치하고 있어. 우리들의 행동에 대한 정보 규제까지도 보면, 이어져 있는 건 당연한 게 아니겠나?"
그건 그 말 대로였다. 당연히 잇키도 생각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건실한 자신의 아버지가 이런 쿠데타 비슷한 모략에 가담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우마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이상, 거기에 어떠한 의도가 있건 사실관계는 정확할 것이다.
그 사실에, 잇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떠한 점이 놀랐냐면
"하지만 의외네. 형이 아버지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다니."
그 점에도 놀랐다.
설마 형이 이런 형태로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라고.
하지만, 이 잇키의 말에 오우마는 노골적으로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어이없는 말은 하지 말도록. 가족 따위는 이미 예전에 버렸다. 이츠키의 부탁에 협력한 건 일을 하는 김에 맡은 것 뿐이야. 네 녀석에게 얼간이같이 당한 '홍련의 황녀'의 눈을 뜨게 만들기 위해선, 내 입장에도 아카츠키에 몸을 담고 있는 편이 더 좋으니까 말야."
"부끄러운 거 숨기고 있는 거야?"
"맞고 싶나."
"츠키카게 총리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뭐 들은 거 없어?"
"모른다. 물으려 하지도 않았으니까."
진심으로 흥미따윈 없다는 듯한 말투로 내뱉는 오우마.
실제로 그는 츠키카게나 다른 사람들의 목적 따위엔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정말로,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과 그들의 행동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으니, 하는 김에 협력해주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구나.... 어쩐지 납득했어."
그걸 알게 되자, 잇키는 이유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약삭빠른 모략에 이리저리 지혜를 짜내는 오우마의 모습은, 역시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듯했다. 스텔라와 만족스러운 시합을 하기 위해 다소 억지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 더욱 오우마답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렇고
"그건 그렇고 오우마 형, 스텔라한테 참 관심이 많네. 어제 그 일로 날 습격하기도 했고."
잇키가 입에 담은 건, 어젯밤의 일이었다. 어젯밤, 오우마는 모로보시의 집에서 돌아가던 도중인 잇키를 습격했다. 잇키라는 존재가 스텔라를 약하게 만드니, 그걸 배제한다는 동기를 가지고.
"오늘도 여기 올때 한바탕 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됐어?"
".....이제 그럴 필요도 없어진 것 같으니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의 의미다. 오늘의 시합은 네 녀석도 봤겠지? 명백히 이전의 '홍련의 황녀'와는 달랐지. 확실히 실력이 늘었어. 요 단기간만에 급격히 실력이 늘은 건, 간단히 말해서 그녀 자신이 그걸 필요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날 쓰러뜨리기 위해서. 이미 스텔라는 네 녀석의 약삭빠른 속임수에서 정신을 차려 가고 있어. 자기 머리로 경쟁해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를 이해해가고 있지. .......기쁜 일이야. 위를 향하려 하지 않으면 아무리 큰 재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성장 따윈 불가능할 테니까."
"......."
그 오우마의 말에, 잇키는 살짝 욱한 표정을 지었다.
스텔라와 겨루기를 약속한 상대는 바로 자신이다.
그걸 내버려두고 '모든 건 날 쓰러뜨리기 위해' 라는 말을 들어서야,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하지만 스텔라가 오우마에게 패배한 것으로 성장의 계기를 잡은 것도 또한 사실이었기에, 그에 반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또한 얄궂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습격하지 않은 이유는 알겠지만, 어째서 그렇게까지 스텔라에게 집착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본엔 '투신' 이나 '야차 공주' 같은 현 시점에서 명백히 스텔라보다도 강한 기사가 몇 명이나 있어. 무사 수행 상대라면 그 쪽이 적임 아냐? 그런데 성장을 기다린다는 성가신 짓을 해 가면서까지 스텔라와 대결하는 걸 고집하고 있어. 그 이유는 대체 뭐야?"
그렇다. 그게 아직 확실해지지 않았다.
스텔라의 애인인 잇키로선, 가장 신경쓰이는 부분이었다.
그러니 그는 추궁했다.
그러자, 그런 잇키를 보며 오우마는
"훗... 실로 네녀석다운, 엇나간 질문이야."
조소하는 듯한 웃음을 띠며 차가운 시선을 보내 왔다.
"에...?"
"네 녀석은 '기사의 힘'이란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어긋난 이해를 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가벼이 속임수 따위나 쓰게 되는 거야."
잘 들어. 하고 오우마는 잇키에게 일깨움을 주려는 듯 말을 이었다.
"애초에 기사가 기사로서 있을 수 있는 요소는 마력의 유무다. 그리고 마력이란 건 섭리에서 이탈해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 '이 세상에 자신의 의사를 반영해내는 힘'이라고 알려져 있지. 총 마력량이 평생 바뀌지 않는 건, 태어난 순간부터 그 자가 세상에 가져다줄 영향력, 그리고 이 세상에 새길 역사의 크기가 정해져 있다고 봐도 다를 바 없어. 사람은 이것을 '운명' 이라고 부르지. 즉, '기사의 힘'이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내치고, 자신의 '운명'을 관철해내는 힘 말하는 거야. 그리고 '홍련의 황녀' 스텔라 버밀리온은 이 마력량이라는 한 분야에 대해서만은 세계 최고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 그렇다면, 강함을 추구하는 자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상대란 없겠지."
.....마력은 운명을 관철해내는 힘.
그건, 기사의 마력에 대한, 인류의 현 시점에서의 해석이다. 그 사실로서, 강한 마력을 지닌 A급 기사는 선악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 정도로 큰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렇기에, 기사의 세계에선 마력량이 가장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해석에 기반을 둔 오우마의 주장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재능력에 대한 이야기잖아? 지금 시점에선.."
"'야차 공주'들 쪽이 더 높다, 라는 말인가? 뭐, 확실히 그건 그럴 테지. 그렇다면, 억지로 일깨워 버리면 돼. 계기를 줘 눈을 뜨게 만들면 돼. 고작 그런 정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 그 과정이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지. 네 녀석도 봤겠지? 그 용의 모습을. 그것이야말로 '홍련의 황녀'의 핵이며, '투신'이나 '야차 공주'따윈 상대도 되지 않을 존재. 애초에 네 녀석은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한데 말이다. 난 딱히 그냥 불리한 싸움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야. 네 녀석이 말한 대로 '야차 공주'나 다른 녀석들에게 도전을 한다면 이루어질 부분이긴 하다만.. 고작 그런 정도의 사선 정도는, 요 오년 간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어 왔어."
".....윽!"
"내가 '홍련의 황녀'에게 바라는 건, 불리한 싸움 따위가 아니야. 사력을 다해도 손도 발도 내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힘에 의한, 그리고 혹시라는 여지 따윈 조금조차 없을 정도의 절대적인 '유린'이다. A급 기사인 날 상대로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절대적인 마력량을 자랑하는 스텔라 외엔 없어. 그리고..... 난 '이번에야말로' 그 사선을 넘고 말겠어..! 그렇게 한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이 손의 떨림을 멎게 만들 수 있겠지."
그리 말하고, 오우마는 자신의 오른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 쪽을 보니, 그의 오른손은 조그맣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잇키는 알 수 있었다. 그 떨림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의 공포로 인해 유발되고 있는 것이라고.
대체, 그가 무엇에 그 정도로 겁먹고 있는 것인가.
거기까진 잇키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어두운 방 안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오우마의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불꽃 같은 투기를 보고... 그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변하지 않았어..'
그런 식으로 재회를 한 탓에, 잇키는 오우마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우마는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동경하고 있던 때와 같았다. 그저 한결같이 똑바로 강함을 추구해 나아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다시봤어. 오우마 형."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를 말이지?"
"물구나무서기를 하지 않아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론 말이지."
"......말 하나는 잘 하는 녀석이군."
잇키의 말에 눈썹을 찡그리며, 오우마는 눈을 감았다.
"수다는 여기서 끝이다. 난 이제 자겠어. 네 녀석도 얼른 자도록."
"그렇게 할게."
이제 묻고 싶은 건 없었다.
방금 오우마가 느낀 공포의 이유가 살짝 신경쓰이긴 했지만, 거기까지 개인사에 얽힐 정도로 사이가 좋아진 기억은 없다. 그러니 잇키는 눈을 감고, 의식의 차단기를 내렸다.
오늘 시합의 피로와, 어젯밤 별로 잠을 못 잔 점도 있어서, 마치 밤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부드러운 잠기가 잇키 안으로 불어닥쳤다.
그리고, 잠이 들기 직전
".....네 녀석, 상당히 귀찮은 남자의 눈에 들은 모양이더군. 내일부터는 아마 좋은 꼴을 못 보게 될 거야. 나름 각오를 해 두는 게 좋아."
잇키는 그런 오우마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충고의 말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착신 문자 1건
발신자 제 62회 칠성검무제 운영위원회
제목 제 62회 칠성검무제 출장 선수 모두에게 연락합니다
본문
오늘 아침, 운영의원회에 B조에 등록되어 있는
아카츠키 학원 1학년, 타타라 유이 선수
아카츠키 학원 1학년, 카자마츠리 린나 선수
양 선수의 기권 신청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아카츠키 학원 1학년 히라가 레이센 선수는 악질적인 반칙에 의한 등록 말소가 끝난 상태이므로, 양 선수의 기권에 의해 하군 학원 · 스텔라 버밀리온 선수의 준결승 진출이 확정되었습니다. 또한, 거기에 따른 시합 수의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예정이 재편성되어, 오늘 중에 2회전과 3회전을 연속으로 소화해내야 하는 대진표가, 운영의원회 회의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선수 분들에겐 2번 연속으로 싸우게 되는 수고를 끼치게 되겠지만, 부디 협력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