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77)

일러스트 벽신문 1

제 9장

전사들의 약간 소란스러운 휴식

그 뒤, 잇키와 스텔라 둘은 스텔라의 방으로 옷을 가지러 갔다. 그리고 다시금 만안 돔 쪽으로 돌아온 뒤, 스텔라는 사라가 기다리고 있는 의무실 쪽으로, 그리고 잇키는 스텔라의 방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연락을 취해 둔 아리스인과 만나기로 한 곳으로 향했다.

장소는 만안 돔 3번 출구.

잇키가 거기에 도착하자, 분수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던 아리스인이 손을 흔들었다.

"잇키~ 여기야, 여기"

그 목소리를 따라, 잇키는 그를 향해 살짝 달려 다가갔다. 아리스인의 옆엔 다소곳이, 고풍스러운 인형 같은 분위기의 시즈쿠가 앉아있었다.

"미안, 아리스. 갑자기 불러내서. 시즈쿠도 왔었구나."

"오라버니가 가는 곳이라면, 설령 불 속이건 목욕탕 안이건, 시즈쿠는 어디라도 같이 갈 수 있어요."

"그러지 말아 주세요.."

"후후후. 농담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불 속은 좀 곤란하죠?"

"내가 곤란한 건 그 쪽이 아닌데 말이지... 그건 그렇고 괜찮아? 시즈쿠는 오늘 시합이 있잖아. 체력은 온존해 두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밤부터 3회전이 열린다.

D조의 결승에서 시즈쿠와 맞붙게 된 건, 지금까지의 2연속 대결을 부전승으로 이긴 아카츠키 학원 중 한 명, '흉운' 시노미야 아마네였다.

'과잉한 여신의 총애'라는, 모든 인과가 그가 바라는대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한계를 모르는 인과 간섭계 능력을 가진, 꺼림칙한 상대.

오빠 되는 몸으로서, 불안해지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걱정에 시즈쿠는 쿡쿡, 하고 품위있는 웃음으로 답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시즈쿠에겐 숨겨둔 비책이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지. 구체적으론 듣지 못했지만."

"네. 이건 승부에 대한 거니까 구체적인 건 아무리 오라버니라 해도 알려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답니다. ....그것보다 애초에 시합이 있는 건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잖아요? 거기다 그 대전상대인 저 아카츠키의 노출마와 같이 백화점에 갈 테니 같이 와 줬으면 좋겠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죠?"

"아아, 그건 말이지.."

잇키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시즈쿠에게 지금까지의 경위를 설명했다.

스텔라가 그녀의 앞치마를 손상시킨 일.

그리고 그 손상된 앞치마를 입은 채 시합에 나가려 하는 사라에 대해서.

그걸 보다 못한 스텔라가 반 정도 협박하는 형태로 그녀를 백화점에 데려가기로 결정한 것을.

"확실히..... 스텔라 양 치곤 아주 영리한 생각이군요."

상황을 파악한 시즈쿠는, 처음 입을 열자마자 그렇게 감탄한 듯한 말을 했다. '~~치곤' 이라는 부분이 쓸데없는 사족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거기에 대해선 잇키도 일부러 언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도 살았어. 그런 옷차림을 하고 싸운다면... 이 쪽이 싸우기가 어려워질 테니까."

집중을 흐트릴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도 없었다.

잇키도 젊은 남자이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인 것이다.

"그렇구나~ 그래서, 내가 호출됐다는 거구나?"

"응. 아리스는 그런 쪽이 특기잖아? 그러니 사라 씨에게 자신을 꾸미는 즐거움을 가르쳐 줬으면 한다고 해야 할까.. 최저한이라도 제대로 된 옷을 입을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어."

그의 메이크업이나 코디네이트 실력은, 시즈쿠를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가 마음먹고 코디네이트를 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 사라도 자신을 꾸미는 데에 의욕을 가지지 않을까.

그리고, 한 번 마음을 먹었으니, 남들 앞에서 상반신 누드로 나다니는 일도 없어지지 않을까.

그것이, 스텔라의 생각이었다.

거기에 대해선 잇키도 대부분 동의했다. 사라에겐 근본적인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물감이 묻는 걸 피하기 위해 앞치마를 입고 있어 가까스로 최저한의 천 면적이 확보되어 있긴 하지만, 아마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앞치마조차도 입지 않고 밖을 나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 정도의 천재이니, 머릿속 배선 하나나 둘 쯤은 일반인과는 다른 곳에 연결되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에겐 부끄러우니 옷을 입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흥미를 가지게 만들 수밖에 없다.

자신을 꾸미는 행위 그 자체를 좋아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원래 아카츠키에 있던 아리스의 입장에서 보면 좀 복잡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부탁해도 될까?"

아리스인의 마음을 헤아린 것인지, 살짝 미안해하는 듯 부탁을 하는 잇키.

여기에 대해 아리스인은 산뜻한 미소와 함께 승낙의 뜻으로 답했다.

"알았어. 확실히 난 이전에 아카츠키 학원에 소속된 그녀들의 동료였지만, 직접적인 면식이 있는 상대는 아니니까."

아리스인이 직접적인 면식을 갖고 있던 건 '어릿광대' 히라가 레이센과, 원래 아카츠키 학원의 교사로서 여기에 왔어야 할 터인 '외팔의 검성' 발렌슈타인 정도였다.

그러니, 어색한 감정 따윈 없다고 그는 말했다.

"거기에.. 그 애, 영양이 건강치 못한 얼굴과 건실치 못한 분위기 때문에 지금은 못 볼 꼴이 되어 있지만, 갈고 닦으면 닦을수록 빛이 날 것 같은 소재거든. 나로서도 보람이 있을 것 같아."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

"....그건 그렇고 정말 어이가 없네요. 그 노출마. 아직도 오라버니를 노리고 있었다니. 여기로 오면 또 한 방 드롭킥을 먹여 주겠어요."

"아, 아무리 그래도 오늘 시합이 있는 사람한테 그런 행동은 위험하니까...!"

불온한 말을 하는 자신의 동생을 보고 식은땀을 흘리며, 셋은 잡담을 하며 스텔라와 사라의 도착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둘은 오지 않았다.

잇키는 학생수첩의 시계를 바라봤다.

시각은 집합 시간을 5분 정도 넘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꽤 늦네.."

여성의 준비가 늦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라의 경우는 그냥 옷을 입히는 정도였을 것이다. 일단 그녀에게도 취향이 있을지 모르니, 네 벌 정도 가져다주긴 했는데..

"혹시 곧바로 패션에 눈을 뜨고 옷을 고르는 데에 시간을 들이고 있다거나..?'

그렇다면 이야기가 빨리 끝날 것 같아 다행이지만...

문득, 잇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때에

"아. 스텔라랑 사라가 오고 있네."

아르시인이 돔 3번 출구에서 나온 둘을 알아보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잇키와 시즈쿠도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뒤, 둘을 맞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잇키는 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쩐지.. 스텔라가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마, 많이 기다렸지.."

목소리에도 패기가 없었다.

"....스, 스텔라.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그, 그게 있지....."

스텔라는 자신이 데려온 사라 쪽을 살짝 흘겨봤다. 사라의 옷차림은 얇은 저지. 그것만 들으면 색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게 들린다. 하지만, 가슴께까지 열린 지퍼에서 보이는 계곡이, 그 인상을 배신하고 있었다. 원래 색기와는 연이 없었을 터인 복장이기에, 더욱 선정적으로 보였다. 주변을 보니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슬쩍슬쩍 사라의 계곡을 엿보고 있었다.

"그럼 안 되지. 여자애가 그런 파렴치한 복장을 하면 어떡해? 후○코도 아니니 저지 지퍼는 끝까지 다 잠가야지."

일러스트

그 너무나도 칠칠맞은 옷차림을 아리스인이 쓴소리로 지적하고, '지이이이익' 하고 지퍼를 목가까지 올렸다.

하지만, 그가 손을 놓은 순간

지지지지지....

하고, 자크가 노이즈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 원래 위치까지 열려버렸다.

"어, 어머나. 이거..."

"가슴 부분이 너무 꽉 껴서 닫히질 않아. 다른 옷도 단추가 떨어져나간 탓에 전부 못 입게 됐어."

"으윽!!"

사라의 그 한 마디에, 스텔라가 마치 권투글러브로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소리를 흘렸다. 그 모습에, 잇키도 그녀가 풀죽어 있는 원인을 알게 되었다.

"어, 어쩐지 스텔라의 기분이 그렇게 된 이유를 알게 됐어.."

"....겨, 경험해 본 적 없는 종류의 굴욕을 맛봐 버렸어...."

그야 그럴 것이다.

스텔라 정도로 가슴이 큰 여자는 흔치 않다.

하군 학원에서도.... 토토쿠바라 카나타 정도일 것이다.

"그것 참 안 됐네요."

"솔직히 말해서 얼마 정도 재기는 불가능할지도.."

미증유의 정신적 타격에 완전히 그로기 상태에 빠져 버린 스테라는, 마치 허리가 굽은 노파처럼 벌벌 떨며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문득 그 움직임이 멈췄다.

스텔라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와 있던 시즈쿠를 똑바로 직시하며.....

"....자아~ 그럼 모두 모였으니 바로 백화점으로 출발해 볼까~!"

갑자기 등을 곧게 편 뒤, 발랄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스텔라 양. 지금 누구의 어딜 보고 재기하신 건가요?"

"자, 밤부터는 시합이 있으니까 시간이 없잖아! 서두르자구!"

"스텔라 양.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죽여드릴 테니까요."

만안 돔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이동하자, 커다란 번화가가 나왔다. 누구나 그 이름을 알고 있는 대형 백화점 3개가 서로를 노려보는 듯 서 있는, 상업도시 오사카 중에서도 특히 한 층 더 격전구인 지역이었다.

잇키 일행은 그 백화점 세 개가 한 번에 보이는 JR역 로터리에서 내렸다.

" " "................" " "

버스에서 내린 다섯 명의 표정엔,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걸어온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쿠로가네 씨! 저, 반드시 내년에 하군 학원에 입학할 거니까요! 기억해 주셔야 해요?'

'사인 감사합니다, 스텔라 언니! 평생 보물로 간직할게요!'

'시즈쿠~! 한 번만 더 이 쪽을 봐 줘~ 그 사람을 깔보는 듯한 눈으로!!'

'모두들 응원하고 있으니 힘 내!'

버스 창문을 열고 몸을 있는 힘껏 내뻗으며 손을 흔드는 중학생 집단 때문이었다.

'손님! 버스 창문을 통해 고개를 내밀면 안 됩니다!'

운전수의 비명소리에도 괘념치 않고, 소녀들은 동경심에 눈을 반짝이며 잇키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렇다. 그들 5명은 동아리 활동 같은 것으로 인해 단체 이동을 하고 있는 중학생들과 버스에서 딱 마주쳤고, 사인을 요청해 오거나, 악수를 요청해 오거나 하는 등, 일방적으로 동경심을 표출해 와 그녀들에게 곤죽이 되도록 눌려 왔던 것이다.

역시나 떠나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짓는 미소에도 경직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좀 가볍게 생각한 것 같네."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리는 잇키를 향해, 스텔라도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며 수긍했다.

"펴,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달려들진 않는데.. 오늘은 진짜 엄청났네."

"인파에 취했어.... 기분 나빠...."

"괜찮아?"

그리고 안색이 나쁜 시즈쿠의 등을 문질러주고 있었다.

평소의 시즈쿠라면, 잇키와 아리스인 이외의 사람이 해 주었다면 당장에 강한 척을 하며 나왔겠지만

"우우.. 감사합니다... 우으..."

애초에 사람 자체를 싫어했던 시즈쿠는, 무차별적으로 날아들어 오는 칭찬과 동경의 말에 기운이 다해, 그 여유도 없어진 듯했다.

"뭐, 평소라면 개인사라고 알아봐 줘서 이렇게까지 나서진 않지만, 방금은 모두 다 축제 모드가 돼 버렸겠지.. 그도 그럴 게 칠성검무제 베스트 8중 4명이나 모여 있었으니까. 이 전개는 예상해둬야 했어."

아리스인의 말에 일동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후회는 이미 늦은 듯했다.

두두두두!!

하는 지진 같은 소리가, 5명의 귀에 스며들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들자

" " "에?" " "

'야! 여기야! 여기! 버스 정류장 앞에 있어!

'꺄아~! 진짜배기로 잇키 군이 조기에 있네! 트위터에 올라온 정보대로였다!'

'바로 다른 애들한테 확산해야제!'

'스텔라 님~! 악수해 줘요~!'

그야말로 말 그대로 '인파'가, 잇키 일행이 이제 막 들어가려 하던 백화점 쪽에서, 버스 정류장에 내린 5명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버스에 같이 탔던 누군가가, 혹은 전원이.. 여기에 잇키 일행이 있다는 걸 인터넷 상에 올린 모양이었다.

"정보 사회란 무섭구나~"

"먼 산 바라보는 눈으로 현실도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리스! 이거 혹시 잘못했다간 다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화, 확실히 이런 정도의 사람 수가 모여 있으니 한 명 넘어지는 것만으로도 대참사가 벌어지겠어.."

"하지만 오라버니, 어떻게 이들을 진정시켜야.."

'가슴! 황녀님의 가슴!! 이만큼 사람이 모여있으믄 할 수 있다!'

'인파에 휩쓸려서 실수인 척 만져 봐야제!'

'목표를 중앙에 놓고 스, 스.. 스위치! 센터 스위치!!'

'시즈쿠 님! 그 쪼그맣고 귀여운 발로 날 밟아 줘~~'

" "일단 죽여버자." "

"두, 둘 다 좀 진정해 봐! 기분은 알겠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단방에 퇴학이라고!"

천천히 살기가 피어오르는 둘을 달래며, 잇키는 일동에게 제안을 했다.

"일단 지금은 도망치도록 하자! 저 정도 인원에게 잡혔다간 쇼핑은 커녕 시합 개시 시간까지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거, 좀 늦었을지도."

사라의 말에 뒤를 돌아보자, 배후의 역 구내에서 전국 베스트 8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려는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고 줄줄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즉, 앞뒤로 포위된 사면초가 상태.

"뭐, 이 꼴을 보아 하니 좀 도망치는 것 정도론 정리가 되지 않을 것 같네요."

"어쩔 수 없네."

"네. 사실은 거친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죠."

"너희 둘, 그렇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은 하고 있는데 표정은 완전 저질러버릴 의욕으로 가득 차 있거든!?"

'어떡하지.. 이대로라면 진짜로 유혈사태가...'

하지만, 잇키에게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대 측의 텐션을 보는 한,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상태도 아닐 것 같았다.

어떡하면 좋을 것인가.

그렇게 진퇴양난의 사태에 빠져 있었을 때

"....그러니까, 저 사람들의 눈에 들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사라는 그리 고한 뒤, 자신의 디바이스인 '데미우르고스의 붓'과 파레트를 꺼내들었다.

"뭘..."

하려는 거야? 하고 잇키가 묻기도 전에, 사라는 신이 내린 듯한 속도로 팔을 움직여 일을 끝냈다. 그녀는 파레트 위에 놓여진 물감을 섞어 회색 물감을 만든 뒤

"'색채마술'.... 길가의 스톤 그레이"

그 물감을, 자신의 손등에 발랐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잇키 일행은 사라에게 초점이 맞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느꼈다. 색에 관한 개념을 다루는 노블 아츠 '색채마술'.

그 중 하나가 이 스톤 그레이다.

이 색을 바른 자는, 길가의 돌처럼 의식하기가 어려워진다. 잇키나 다른 사람 같은, 평소에 집중력을 단련하고 있는 기사가 아니고서야, 존재 자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 기술에 대한 설명을 사라에게서 들은 건 아니지만, 일동은 자신이 느낀 감각에서, 그녀가 사용한 노블 아츠의 효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 상황에 대한 대처법도.

"그렇구나. 마술로 보이지 않게 만들면 되는 거였어. 그런 사용법으로 써본 적이 없으니 떠오르지도 않았네."

".....달리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군요."

어쩐지 유감스레 그리 중얼거리며, 스텔라와 시즈쿠, 둘은 눈을 감고

"'양염(陽炎)의 암막'."

"'청색환몽'."

언령과 함께, 스텔라는 열을, 시즈쿠는 수분을 이용해 빛을 굴절시키는 막을 전개했다. 군중에 한해서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둘 다 마력 제어 능력이 우수하기에 쓸 수 있는 응용법이었다.

"이 셋은 역시 재주가 좋네. 그럼 잇키는 내 능력으로 모습을 감춰 줄게."

그리 말하고 자신의 디바이스인 '검은 은둔자'를 현현시키는 아리스인.

그의 능력은 그림자라는 개념을 다룬다.

그 힘을 이용한다면, 말 그대로 존재감을 옅게 만들어 사람들의 보는 눈에서 일시적으로 스텔스 기능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원래 공공장소에서 능력 사용은 규칙에 저촉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큰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걸 알고 있으니, 잇키도 아무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아니, 됐어."

아리스인의 도움을 거절하는 잇키.

"어머나? 하지만 잇키의 마술로는 이런 건 불가능하잖아?"

"뭐, 마술은 그렇긴 하지만, 평범한 일반 시민 상대라면 체술만으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

그리 답한 뒤, 잇키는 날아들어 오는 인파의 시선 쪽에 의식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의식의 틈, 실처럼 가느다랗게 나 있는 그 틈을 찾아낸 뒤, 그곳을 걸어나갔다. 고류 보법 '누벼 걷기'... 그걸 시야만으로도 이 자리를 꽉 채울 군중을 상대로 쓴 것이다.

인파에 역류하는 형태로 말끔히 빠져나가는 잇키, 그러나 그를 알아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정도로 모인 인파의 의식의 사각을 저렇게 손쉽게 찾아내는 안력, 그리고 그걸 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걸어나가는 체술.

아리스인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정말. 암살자도 한 수 거둘 은신술이네. 정말, 네겐 놀라기만 할 뿐이야. 잇키."

바닥을 보일 기세가 없는 쿠로가네 잇키의 기술에, 감탄의 소리를 내며 아리스인도 또한 넷을 따라 걸어갔다.

'검은 은둔자' 한 자루를 자신의 그림자에 녹인 뒤... 그 그림자를, 옅게 만들었다.

이 순간, 잇키 일행을 보러 모이던 모든 사람의 의식에서, 다섯 명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 어라!? 없네!? 사라졌어!?'

'잠깐만! 이게 먼 일이고!? 잇키 군, 대체 어디로 갔노!?'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요기에 있었는데... 어라!?'

술렁술렁.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진 잇키 일행에 대해  혼란에 빠진 군중.

목표를 잃은 열기는 갈 곳을 잃고, 그 자리에서 뭉게뭉게 정체해 있다가, 바로 흩어져버렸다.

이제 다치는 사람이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걸 확인한 뒤, 잇키 일행은 수백 명이나 되는 군중 한 가운데를 빠져나간 뒤,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5명은 가까이 있던 백화점에 들어간 뒤, 에스컬레이터에서 숙녀복 판매 층인 6층으로 향했다. 거기엔 마침 딱 알맞게, 층 전체 파티션을 일시적으로 거둬들인 채로 '여름의 부인 복장 전시회'가 열려 있었다.

"헤에~ 꽤 여러 가게가 있네."

"전시회 기간 한정으로 해외 브랜드도 가게가 열려 있는 듯하네요."

6층 입구에서 받은 전단지를 바라보며, 시즈쿠가 스텔라의 감상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칠성검무제 시기는 평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사람의 왕래가 늘어난다. 여기서 승부를 걸지 않고서야 대체 언제 걸 수 있단 말인가.

층 전체를 이용해 열은 이벤트라는, 가게의 온 정성을 쏟아부은 이 모습도 어느 의미로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옷이 있으니 네 취향에 맞는 옷도 찾을 수 있겠지! 자, 바로 한 번 돌아 보자!"

하지만 그 스텔라의 지시에, 사라는 별로 의욕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대충 자신의 주변에 있던 천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럼 이걸로 충분."

"에? 벌써 정해졌어? 아, 그거 네글리제잖아! 잠 잘때 입는 거라구!"

"입을 수 있으면 문제 없어."

"엄청 있거든!? 이거 완전 다 비쳐 보이잖아! 네 체형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못 볼꼴이 되어 버리고 마니까! 적당히 고르지 말고 제대로 생각하고 골라!"

"......으음.. 그럼 이거."

"뭔데? 이번엔 옷조차 아니잖아! 이건 벨트야! 그냥 벨트라구!"

"가슴에 감으면 감출 수 있어."

"그거 완전 특수한 성벽을 가진 사람처럼 되어 버리잖아! 제대로 옷을 골라! 옷을!"

"알았어. 확실히 보고 고를게. ........골랐어."

"결국은 앞치마야!? 무슨 알몸에 앞치마를 둘러야만 하는 저주에라도 걸렸어!?"

"바로 입을 수 있고, 바로 벗을 수 있고, 시원하기도 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게 가장 좋은 옷이야."

"......먹을 것에 흥미가 없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란 이런 걸까..."

머리를 싸매고 있던 스텔라의 옆에서, 아리스인은 "으음..." 하고 턱에 손을 갖다 대며 신음했다.

"이건 의외로.. 상당히 중증이네."

옷을 입는다는 것에, 무의식 중의 의무감 정도의 이유밖에 가지고 있질 않았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꾸미는 것에 흥미를 가지게 만드는 건, 상당한 난제였다.

하지만.....

"어떻게 가능할 것 같아?"

"뭐, 일단 맡겨 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고 아리스인은 생각했다. 이유가 없다면, 이유를 만들어주면 된다.

"저기, 릴리. 당신은 왜 그렇게 자신을 꾸미는 데에 흥미가 없는 거야?"

".....예쁜 옷을 입을 이유가 없어. 딱히 누군가의 호감을 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당신은 잇키를 누드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러면, 그게 이유가 되잖아."

"?"

고개를 의아한 듯 갸웃하는 사라를 보고, 아리스인은 악동 같은 표정으로 귓속말을 했다.

"예쁘게 차려 입고, 귀엽게 꾸민 뒤... 잇키를 반하게 만들면 되는 거야."

"뭣.. 아, 아리스!?"

"무, 무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들려 온 그 불온한 말에, 잇키와 스텔라의 안색이 바뀌었다. 자신들이 사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터인 친구가, 자신들 사이에 불화를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그 관계를 알고 있는 건 사라도 같았다.

".....그건 무리야. '어나더 원'에겐 이미 '홍련의 황녀'라는 애인이 있어. 내게 반하다니,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그녀는 아리스인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우후후. 꼭 그런 건 아니라구? 남자란 생물은 입으로는 '평생 너만을 사랑하겠어'라는 말을 하면서 손쉽게 바람을 피는 법이라구. 릴리도 유명한 그림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신도 그 정도인데, 그저 인간에 불과한 잇키가 절대로 바람을 피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지. 오죽하면 이 나라에 '바람은 유부남의 능력'이라는 어이없는 말도 있을 정도니까."

"........정말로?"

"응. 당신이 열심히 자신을 가꿔 예뻐진다면, 그리고 잇키를 색기로 반하게 만들어 빼앗는다면... 생각해 봐. 그림도 마음껏 그릴 수 있잖아?"

".............."

마치 이브를 꼬드기는 뱀처럼, 금기로 그녀를 이끌려 하는 아리스인. 여기서 스텔라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둘 사이에 껴들었다.

"아, 아리스! 이상한 말 불어넣지 마! 그리고 사라도 뭘 '좀 노력해 볼까'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잇키는 내 남자친구라구!? 그런 새, 색기로 빼앗는다니, 그런 부도덕한 짓은 절대로 용납 못해!"

하지만 그리 난입해 온 스텔라를 향해, 아리스인은 살짝 도발적인 미소를 보냈다.

"어머어머어머~? 이것 참 스텔라답지 않은 의견인걸?"

"무, 무슨 의미야?"

"애인이 됐다고 해서 벌써 승자가 된 기분이 든 거야? 스텔라라면 나의 매력으로 잇키의 마음은 이미 다 사로잡아 놨으니 빼앗을 테면 빼앗아 봐! 이 정도는 말할 줄 알았는데 말야."

"윽....!"

아리스인의 도발 섞인 그 말에, 스텔라는 살짝 주저했다.

그런 그녀를 지금까지 바라보고 있던 시즈쿠가, 마치 덩굴을 감는 듯한 동작으로 잇키의 팔을 끌어안고, 이 상황을 살린 추가타를 가했다.

"이거야 원, 수비 굳히기에 들어간 여자를 보는 것만큼 안쓰러운 것도 없지요. 수컷은 더욱 매력적인 암컷을. 암컷인 더욱 매력적인 수컷을. 이건 약육강식과도 같은 대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도덕이라는, 인간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개념에 기대다니, 당신도 참 한심한 여자였군요. ........이렇게 여자는 타락해 가는 거에요, 오라버니. 이 틈에 내쳐 버리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자, 머지 않아 남편이 일하고 있는 시간에 가사는 전부 내팽개치고 벌렁 드러누워 낮 드라마를 보거나, 선물 주식거래로 저금을 전부 날려버리게 될 거라구요. 물론 시즈쿠는 그렇게 되지 않겠지만요."

"으그극....!!"

"에, 에이. 정말.. 아리스도 시즈쿠도, 너무 그렇게 스텔라를 놀리지 마."

상황을 보다 못한 잇키가 중재에 들어섰다.

바람 같은 건, 애초에 잇키가 그 마음을 먹지 않고서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잇키에겐 확실한 자신감이 있었다.

당연하다. 이런, 자신에게 아까울 정도로 멋진 소녀에게 어디에 불만이 있다는 것인가. 그러니, 잇키는 그걸 말하려 입을 열었고...

"스텔라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마. 내 마음은 절대...."

"잠깐, 잇키."

"우브븝!?"

하지만 그 말은, 스텔라의 손에 의해 물리적으로 가로막혔다.

잇키의 말을 막고,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이 둘이 말한대로야. 내가 잘못 생각했었어."

"스, 스텔라..?"

"지금 잇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지만, 잇키가 그리 말해 주는 것과, 내가 그걸 강제로 말하게 만드는 것과는 의미가 전혀 달라지지."

스텔라는 속으로 자신을 채찍질했다.

애인이 됐다고 해서 벌써 다 이긴 줄 알았어?

완전히 맞는 말이었다.

.....요즘 들어 자신은, 잇키와의 명확해진 관계에 너무 기대어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내게 잇키를 향해 다가오는 여자애들을 물릴 자격 따윈 없어.'

당연하다.

쿠로가네 잇키는 다른 누구도 아닌 스텔라 버밀리온이 사랑하고 있는 남자이다.

그만큼 매력적인 남성이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 그의 상냥함을 받은 사람이 호의를 보내는 건, 어느 의미로 보면 당연하다.

.....거기에 일일이 눈총을 쏘며 '애인은 나야!' 하고 시끄럽게 떠들다니, 보기에 흉하다. 매력적이지 못하다.

'한 번 약속을 나눴다고 거기서 노력을 게을리 하면 여자는 끝이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잡아둘 수 있는 건, 약속이 아닌 마음.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사랑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 잇키의 그 말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좋아! 사라 블러드릴리! 네게 그럴 마음이 있다면, 마음껏 해 봐! 난 말리지 않겠어! 하지만 빼앗기지도 않겠어! 잇키의 마음은 이 스텔라 버밀리온만의 것이니까!"

척! 하고 손가락을 세워 우렁찬 선전포고를 한 뒤, 스텔라는 일 초도 아까운 듯 집단에서 빠져나와 혼자서 전시회로 향했다.

자신도 아리스인의 코디를 받는 사라에게 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꾸미려 나선 것이다.

"그럼 모처럼 이런 기회이니 저도 가 볼게요. 오라버니, 나중에 뵈어요."

스텔라의 뒤를 따르듯, 시즈쿠도 혼자서 걸어나갔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이 일의 원흉인 아리스인은 새가 지저귀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우후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네, 잇키는."

그리 말하고 곁을 보자, 거기엔 화가 나 눈썹을 곤두세운 잇키가 있었다.

"......아~리~!스~~~~!"

"에이,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마~ 귀여운 얼굴이 다 망가지잖아."

"당연히 이런 표정이 나오지. 스텔라는 어지간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니까 너무 그렇게 부채질하지 말라구."

"어쩔 수 없잖아? 릴리에게 이유를 주기 위해선 이런 거밖에 떠오르지 않았는걸. 거기에 내가 말한 건 모두 진심이었어. 잇키도 그저 약속 하나만으로 스텔라를 묶어두고 싶진 않잖아?"

".......뭐,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잇키로서도 쓴소리가 가로막혔다. 그 자신도 또한, 스텔라를 약속 하나로 얽매 둘 생각은 없었으니까.

"자, 그럼 난 릴리와 같이 돌아볼 건데, 너도 따라올래?"

"....아냐. 어느 틈엔가 시즈쿠도 사라졌고, 나도 좀 사고 싶은 게 있었으니 그 쪽을 좀 돌아보고 올게."

"그래., 그럼 2시간 뒤에 여기서 만나기로 하자. 다른 애들한테도 문자 남겨 둘게."

가게 측이 승부를 걸고 있는 때라 그런지, 전시회의 내용물은 실로 충실했다. 캐주얼한 복장에서 포멀 드레스, 더 나아가서 민족 의상 같은 것도 있었다. 백화점 3개 층을 통째로 이용해 고금동서의 숙녀복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도 한 층 더 눈을 이끈 건, 마네킹을 이용해 진열되어 있는, 이번 여름 트렌드와 브랜드 측이 밀고 있는 주력 상품들이었다.

짙은 우윳빛 원피스.

산뜻한 줄무늬의 플레어 스커트.

그 모든 것들이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졌다.

하지만.

"....예쁘긴, 하지만.."

이런 게 아니다.

이런 걸로는 약하다, 고 스텔라는 생각했다.

그 이유, 상대 측엔 아리스인이 붙어 있다. 그가 마음을 먹고 코디를 한 시즈쿠는, 세 배정도는 더 귀엽게 보였었다. 코디 따위와는 연이 없는 사라의 잠재력이 더해진다면, 그걸 훨씬 상회할 것이다.

이런 쪽의 왕도.... 나쁘게 말하자면 흔해빠진 선택으로는, 살짝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사도 쪽으로 달려나갔다간 오히려 위험해질 것 같은 느낌이.....

"어라?"

그 때, 고민하던 스텔라의 눈이 전시회 한 곳에 빨려들어갔다. 그녀가 보고 있던 건, '납량! 여름의 유카타 전시회! (시착 가능합니다)' 라고 쓰인 팻말이 서 있는 구획.

일본 전통 옷을 전문으로 파는 코너였다.

"이거 괜찮을지도!"

왕도이지만, 높은 의외성을 지닌 선택.

계절적으로도 마침 알맞고, 사라는 이 뒤에 시합에 입고 나갈 활동성이 좋은 옷을 입을 테니, 그녀와 겹칠 염려도 없다.

거기다, 자신은 일본 옷이 하나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하나 사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스텔라는 마음을 굳히고, 코너에 들어섰다. 그리고 예쁜 무늬가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상품들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고, 이윽고 그 중 하나를 선택했다.

자신의 머리 색과 맞춘, 흰 색과 빨간 색을 기조로 한 유카타였다.

그녀는 그걸 손에 들고 '양염(陽炎)의 암막'을 해제.

점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기요~ 이거 한 번 입어보고 싶은데요."

"어서 오세요. 시착 말씀이시죠? 그럼 이 쪽으로......!?"

그 순간, 응접을 하던 중년 여성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 온 인물이 누구인지, 얼굴을 보고 알아챘기 때문이다.

"다, 다다다.. 당신은.. 혹시... 아니, 혹시가 아니고! 버밀리온 황국의 스텔라 공주님!? 어, 어째서 이런 곳에!?"

"그러니까, 그.. 이걸 입어보고... 싶은데요......"

"아, 아아! 그랬죠! 맞아요! 그런 가게였죠, 우리 가게는! 너무 깜짝 놀라서 완전 다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바로 차와 과자를 내어 올 테니까요! 사이토 씨~! 지금 당장 1층으로 달려가서 다과랑 차좀 사와! 가장 비싼 걸로!!"

"아뇨, 됐어요! 그런 건 됐으니 그냥 이것만 입어보게 해 주세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고 근처에 있던 점원에게 차와 다과를 사 올 심부름을 시키고 있던 중년 여성을, 스텔라는 서둘러 제지했다.

"오늘은 친구와 같이 왔으니, 오래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 마음만 받아 둘게요."

"이, 이거 실례했군요. 국빈 분의 접객 같은 걸 해 본적이 없는지라.. 저, 저도 모르게 흥분해 버려서.... 아하하~"

"지금은 그냥 학생일 뿐이니까, 그다지 신경쓰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 쪽에 있는 탈의실에 들어가신 뒤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옷을 가져다 입혀 드리겠습니다."

안내를 받은 곳은, 일본 전통 옷 코너 중심에 설치된, 파티션으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외관으로 보면 6평 정도의 공간.

스텔라는 커튼에 가려진 입구를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눈에 잇은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시즈쿠 아냐? 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스텔라가 들어선 탈의실엔, 한 발 빠르게 시즈쿠가 들어와 있었다.

"왜고 뭐고, 시착 이외의 이유가 있나요? .....오라버니를 마음껏 유혹해도 좋다는 말을 스텔라 양이 자기 입으로 모처럼 해 주셨으니, 저도 오랜만에 오라버니에게 유카타를 입은 모습을 선보여 드릴까 해서요."

"으윽.."

예상대로의 그 대답에, 스텔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힘들게 사라와 겹치지 않는 선택을 했는데, 다른 방향에서 겹쳐 버린 것이다. 하지만 스텔라도 이미 일본풍 옷을 입자고 정한 뒤라, 물러날 수는 없었다.

"네가 사정을 봐 주는 모습 같은 건 내 기억 속엔 없는데.. 흥. 뭐, 맘대로 해. 내가 잇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 스텔라의 힘찬 말에, 시즈쿠는 의미심장한 듯한 웃음을 띠었다.

"쿡쿡.. 이거 행운이군요."

"응? 무슨 말이야?"

"제가 유카타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따라 같은 걸 선택하시다니. 괜찮으신 건가요? 승산이 없을 텐데요?"

"그, 그런 건 입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쿡쿡. 뭐, 그렇네요. 입어 보시면 알게 될 거에요."

'무, 뭐야.. 이 시즈쿠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시즈쿠가 지기 싫어한다는 건 스텔라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닌, 어딘가 확신에 차 있는 듯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하지만, 나도 지지 않겠어!'

그 시즈쿠의 태도에 한 가닥 불안을 느끼면서도, 스텔라는 방금 여성 점원의 도움을 받아 유카타를 입었다. 역시, 이 승부 시기를 맡고 있는 점원인 만큼, 유카타를 입히는 데에 걸리는 시간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 끝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스텔라 님?"

"와아~!"

유카타 차림의 자신의 모습을 전신 거울을 통해 확인하고, 스텔라는 감동의 소리를 냈다. 스텔라가 고른 유카타는 하얀 바탕에 살짝 노란색이 섞인, 그 위에 밝은 적색으로 엉겅퀴 무늬가 들어간 옷이었다. 신발은 굽이 낮은 게다로 바꿔 신었고, 손에는 작은 동전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띠는 옷에 그려진 엉겅퀴보다 더 짙은 적색이었고, 크게 리본 형태로 묶여 있었다.

"어쩐지 금붕어 같아서 귀여워..."

빙글,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자, 크게 묶인 리본이 그녀의 말처럼 금붕어의 지느러미처럼 허공에 춤췄다.

스텔라는 그 옷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 옷을 입고 축제 거리를 활보한다면, 그야말로 그림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헤에, 꽤 어울리시네요. 스텔라 양."

거의 동시에 옷을 다 입은 시즈쿠가 스텔라에게 칭찬을 보냈다. 그런 시즈쿠의 옷은, 스텔라와 같은 유카타 차림. 쪽색 바탕에 하얀 꽃창포와 수면의 파문이 무늬로 새겨져 있었다. 산뜻한 스텔라의 색조와는 대극적인, 차분한 색조였다. 그건 색소가 옅은 시즈쿠의 피부와 머리카락에 상승효과를 가져다주어, 한 층 더 산뜻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

'어, 어라? 어쩐지......'

시즈쿠의 모습을 보고, 스텔라는 가슴 속의 불안감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재빨리 다시 한 번 전신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른 채 막연히 서 있었지만, 확실히 느껴졌다.

'......시즈쿠와 비교해 보면......별로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쿡쿡. 당신도 눈치챘나 보네요. 스텔라 양."

"뭣! 무슨 말...이야?"

정곡을 찔리고, 서둘러 당황해하는 모습을 얼버무리려는 듯한 스텔라였지만, 시즈쿠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시치미 떼지 않으셔도 돼요. 저와 비교해 보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느끼고 계셨죠?"

"아, 아니야! 오히려 내 쪽이 틀림없이 귀여울 거라구!"

"그러세요. 그럼 둘이 함께 오라버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볼까요?"

"우으...."

그건 곤란했다. 이런 불안을 떠안은 채 잇키 앞에 나서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어째서 시즈쿠보다 이 옷차림이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것일까. 전신 거울 앞에 선 채로 포즈를 바꿔 가며 여러 시점을 통해 살펴 봐도,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니 스텔라는 자신에게 옷을 입혀 준 여성 점원에게 물어봤다.

"저, 저기.. 점원 아주머니. 저랑 시즈쿠, 어느 쪽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에, 그게..."

그런 질문을 받는다 하더라도 입장상 곤란할 것이다. 여성 점원은 어물쩍 넘기려는 듯, 애매한 미소를 띠며

"두 분 다 자신만의 개성이 배어나온 멋진 옷차림을 하고 계셔서,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 답은 자신의 본심이 담긴 말이었다. 애초에 스텔라는 바탕이 되는 소재가 발군인 소녀이다. 대부분의 옷은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 점원이 알아챈 것이 있었다.

"단지... 저 쪽 분은 일본풍 옷을 입는 것이 익숙하신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익숙하다.."

"바로 그거에요."

점원의 말에, 시즈쿠가 긍정했다.

"전 이래봬도 유서 깊은 무가의 손녀에요. 개인적으론 서양풍 드레스 쪽이 취향인지라 평소엔 그 쪽 옷차림을 하고 생활하고 있지만, 집의 행사 따위로 기모노를 입을 기회가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 말은, 기모노를 입을 때의 작법도 훈련되어 있다는 것이죠. 걸음걸이 하나에 있어서도 스텔라 양이 걸어가는 것처럼 옷소매를 전부 흐트러뜨리며 걷지도 않고, 자신의 시선을 상대에게 똑바로 던지는 짓도 삼가고 있죠."

".........!"

척, 하고 시즈쿠가 손가락으로 지적한 곳.

유카타의 옷소매를 보자, 전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인 탓에 확실히 흐트러진 부분이 있었다.

"이야기를 할 때엔 등을 곧게 펴고 있지만, 시선은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는 게 아닌, 살짝 시선을 피하는 듯 마는 듯이 쳐다보지요. 손의 위치는 어깨 라인보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앞에 모아둡니다. 하나하나로 치자면 작은 변화이지만, 그게 모이고 모여 전체의 인상이 바뀌게 돼요. 일본 전통복은 드레스와는 다르다구요. 그저 예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 거기에 깃든 고상한 전통이 갖춰져야 비로소 일본 풍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겁니다. ......즉! 당신에겐 몸에도, 동작에도 조신성이 없다는 말이에요!"

"하읏!"

그렇다. 애초에 일본 전통 복장은 일본인의 문화와 체형에 맞춰 성장해 온 문화이다.

즉, 시즈쿠에겐 홈, 스텔라에겐 어웨이인 영역.

차가 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차이가 여실히 드러날 거란 건 손쉽게 상상할 수 있다. 자세나 미묘한 각도, 그리고 반사적인 동작은, 오랫동안 쌓아 온 훈련이 그 결과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하루 아침만에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텔라도 드레스를 입는 법이나 식사 매너 등은 훈련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은 아주 잘 알고 있다.

"......확실히 이걸론 안 되겠어."

"그렇지 않아요. 스텔라 님도 충분히 아름다웠다구요!"

"......고마워요. 하지만..."

충분,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이겨야 한다.

이건 여자의, 잇키의 여자친구로서의 프라이드를 건 싸움이니까. 거기다 아리스인의 코디를 받는 사라도 있다. 여기서 시즈쿠에게 패배해 버려서야 말도 안 될 일인 것이다.

전통복은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외에 무엇이 있는가.

고민하는 스텔라. 그런 그녀에게

"괜찮으시다면.. 제가 코디를 봐 드릴까요?"

스지쿠가 하늘거리는, 실로 모범적인 기품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스텔라에게 다가가, 그렇게 귓속말을 했다.

"네가?"

"상대 쪽엔 아리스가 있잖아요. 제가 조언을 해도 문제는 없겠죠?"

하지만 이 제안에 스텔라는 수상쩍어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 왔다.

"......거짓말 하기는. 네가 날 도와 준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차피 또 어떤 악질적인 장난을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난 거기에 절대 안 속아!"

거의 며느리와 시어머니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두 사람의 관계를 따져 생각해 보면, 그 반응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말에 시즈쿠는 슬퍼하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저도 참 엄청나게 신용이 없군요. 뭐, 스텔라 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저같은 시누이는 거슬리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정말 슬프네요. ......전 이래봬도 스텔라 양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구요?"

".......정말로?"

"그래요. 그렇지 않고서야 오라버니와 교제를 한다는 일을 용납할 리가 없죠. 그런 여자 따윈, 설령 어떠한 비합법적은 수단을 써서라도, 땅 끝까지 몰아내 반드시 파멸시켜 버릴 겁니다. 제가 그런 여자인 건 스텔라 양도 잘 알고 있죠? 하지만, 당신이라면... 하고 처음으로 생각했어요. 그렇기에, 그런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거기다 오라버니의 몸을 목적으로 찾아온 여자가 오라버니 주변을 싸돌아다니는 건 실로 불쾌해요. 그런 여자에게 제가 인정한 사람이 지는 것도요."

"시즈쿠..... 너......"

"제가 도울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언니?"

시즈쿠는 스윽, 하고 겹쳐 오듯, 스텔라의 손을 잡으며 부탁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던 그 호칭을 부르며. 그 한마디에, 스텔라의 눈은 환희로 흔들렸다. 설마 자신이 이런 소녀에게 이렇게까지 인정을 받고 있었다니,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러니 스텔라는 시즈쿠의 손을 강하게 쥐며, 만개하는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심해서 미안했어! 같이 그 여자를 타파해 버리자!"

"네...!"

"그럼 바로 시즈쿠의 의견을 들려 줘! 난 어떤 옷을 입어야 가장 좋을 거라 생각해?"

"간단해요, 스텔라 양... 당신은 그 불타는 듯한 빨간 머리카락. 기모노로도 숨길 수 없는 여성스러운 체형. 일부러 꾸며 입을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니까요."

"그, 그럴려나... 에헤헤~ 어쩐지.. 시즈쿠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쁘네."

"즉, 스텔라 양은 그 천성의 무기를 활용하면 되는 거에요. 그리고, 그걸 위한 가장 좋은 선택지는.. 이것입니다!"

"이, 이 옷은...!?"

"축제 기간인 만큼 여러 옷이 있으니, 스텔라 양을 위해 조달해 온 거에요. 스텔라 양 정도로 스타일이 좋은 여성이라면 완벽히 이 옷을 소화해낼 수 있을거에요. 거기에 더해서, 한 포인 트 더, 야성미를 가미한다면... 오라버니의 마음 따윈 한 방에 잡아낼 수 있을 거에요!"

"날 위해서...! 고마워, 시즈쿠! 확실히 이거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어! 바로 갈아입어야지!"

한 편, 스텔라와 시즈쿠가 결탁을 했을 때쯤.

사라와 아리스인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숙녀복 매장에서 한 층 내려가고 있었다. 가던 도중, 아리스인은 만약을 위해 사라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다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처음부터 물어 두는 건데, '이런 디자인의 옷이 좋아' 라던가, '이 쪽 메이커가 좋아' 같은, 혹시 그런 요청은 있어? 아니면 전부 나한테 맡길래?"

이 말에 사라는 고개를 가로저어 답했다.

".....잘 모르니까, 부탁할게."

"오케이~"

'.....뭐, 오늘은 시합도 있을 테니 움직이기 어려운 옷은 NG겠네.'

거기다 아카츠키 학원은 교복제가 아닌 사복제 학교다. 여기서 선택한 옷이 그대로 전투복이 된다. 너무 팽팽한 옷은 기동력을 깎아먹을 것이다.

그건 좋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라고 해도 딱히 아카츠키에게 은혜를 입었던 적은 없었기에 아리스인은 거기에 대해 별로 신경이 쓰이진 않았지만, 그걸 잇키는.. 그 모든 매사에 진지한 소년은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옷을 고른다 하더라도.

그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일단 먼저 얼굴부터 매만져야겠네."

"성형수술?"

"거기까지 나아가진 않을 거야. 하지만 바탕이 좋으니 그렇게 생으로 나다니는 건 아깝잖아? 그러니까.. 먼저 여기부터 가자."

그리 대화를 나누며 도착한 곳은, 3층의 화장품 코너였다.

밀크색 대리석.

흑색 기둥 여기저기를 내달리고 있는 금색 라인.

청초감과 시크함이 묻어나는 색조를 지닌 층엔, 여성용 화장품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단 물어 보겠는데, 메이크업 경험은 있어?"

흔들흔들.

사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그렇겠지.. 꾸미려고 해본 적이 없을 테니.."

머리카락은 물감이 묻어 있는 데다 잠을 자고 나서 만지지도 않아 여기저기 뻗쳐 있었고, 입술도 메말라 있었다. 화장 같은 걸 해 본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것 치고 피부에 잡티 하나 없는 건 정말 이해가 안 가는데 말이지..'

뭐, 그런 체질일 것이다.

스텔라의 체중 정도의 신비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메이크업 지식은 물론 스킨 케어 지식도 아예 없는 거지?"

"해 본적은 없지만, 피부색 가루를 얼굴에 펑펑 쳐서 묻히면 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파운데이션' 말하는 거구나. 하지만 말해 두자면, 화장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냐."

"그래?"

"응. 모처럼의 기회이기도 하니까 기본부터 전부 다 가르쳐 줄게. 제대로 듣도록 해."

"알았어."

"먼저 화장을 하기 전에 중요한 단계가 '스킨 케어'야. 이 '세안 폼'을 이용해 피부에 있는 이물질이나 피지를 씻어 내는 거야. 불순물이 있으면 화장이 잘 들어가질 않으니까 필수적인 공정이지."

"그렇구나.."

"다음으로 이 '토너' 차례야. 이건 여러 유효성분이 담겨 있어 피부의 수분을 유지하게 해 주지."

"흐음.."

"이게 끝난 뒤엔 다음은 '로션'이야. '로션'엔 피부의 탄력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성분이 포함돼 있어. 사용하는 방법은 '토너'와 대체로 같아. 마지막으로 '토너'와 '로션'의 유효성분을 피부에 담아 날아가지 못하게 해 주는 '데이 크림'을 발라 막을 치는 걸 잊으면 안 돼."

"............."

"'데이 크림'을 바른 뒤, 다음엔 화장이 잘 들어가게 만들기 위한 '화장 베이스'를 발라. 여기엔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효과도 있으니 아주 중요해. 이 단계에서 그 날 피부의 상태에 따라서 색감을 갖추게 해 주는 '컨트롤 컬러'를 이용하게 되지. 피부에 붉은 기운이 도는 게 신경이 쓰이면 보라색 쪽을, 좀 더 빛나게 보이고 싶으면 은색 계통을 이용해 피부의 색조를 컨트롤하는 화장품이야. 여기까지 오면 방금 릴리가 말한 '파운데이션'을 바를 차례야. 하지만 릴리는 이 '파운데이션'을 가루를 묻힌다, 이런 정도로만 말했는데, 여기에도 종류가 있어. '파우더' 외에도 '크림' 이나 '액체' 형태가 있는데, 사람의 피부 타입에 따라 구분해서 사용하는 게 중요해. 여기까지 와도 감추지 못한 잡티나 뾰루지 자국은 '컨실러'로 부분부분 메이크업을 보강하고 마지막으로 '파우더'를 이용해 '파운데이션'이 달라붙는 걸 억제하고 마무리를 짓는 거야. '하이라이트'와 '치크'는 크림, 액체, 혹은 파우더냐에 따라 순서가 바뀌기도 하니 케이스에 따라 구별해서 쓸 것. 자, 여기까지 오면 피부 메이크업은 끝이야. 다음은 눈에 대한 메이크업인데, 여기까지 이해는 됐어?"

시선을 향하니, 사라는 머리에서 하얀 김이 푸슈우우우.. 하고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리스인의 물음에 사라는 죽은 동태 같은 눈으로 답했다.

"...............여자로서 살아가는 게 엄청나게 힘들다는 것만은 이해했어."

"어머나. 의외로 이해력이 좋네. 그래. 여자는 매일매일 예뻐 보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남자는 그걸 '진짜 자신을 감춘다' 라는 말을 하면서 별로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같지만."

".....너도 남자..."

"마음은 꽃다운 소녀야."

".....이상한 사람."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실로 유감이었다.

"......어쩐지 벌써..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안 들어.."

"뭐, 지금 건 일부러 세부공정을 설명한 거긴 한데, 한 가지 제품으로 '로션'과 '데이 크림'과 '파운데이션'을 전부 끝낼 수 있는 상품 같은 것도 이것저것 있으니, 의외로 쉬운 거라구. 일단 배우는 것보다 익숙해 지는 게 중요하다는 말도 있으니, 한 번 쭉 둘러 보고 실천해 보도록 하자구."

그리 말한 아리스인은 딱, 하고 손가락을 울렸다.

그러자, 옅어졌던 그의 존재감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검은 은둔자'에 의한 기척 차단을 푼 것이다.

그 순간

"거기 잘 생긴 오빠. 여자친구한테 선물 하러 오신 건가요~?"

3초도 안 돼, 젊은 여성 점원이 아리스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런 곳은 판매 실적이 그대로 개인의 평가로 이어지는 법이다. 따라서 한 발짝이라도 자신의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아마존의 피라니아처럼 무리를 지어 오는 게 일상인 것이다.

마음 약한 사람은 점원의 기백에 눌린 채 그대로 분위기라는 급류에 휩쓸려, 순식간에 뼈까지 씹어먹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대인 아리스인도 이 상황에 익숙한 남자였다.

"아뇨. 여기 이 애랑 같이 따라와서 화장품을 고르고 있는 거에요. 하지만 이 애, 지금까지 화장을 아예 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지금까지 한 번도요!? 그런 것치곤 굉장이 예쁘시네요!"

지칭되고 난 뒤 처음으로 사라의 존재를 알아챈 여성 점원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솔직한 감상을 늘어놨다.

"하지만 이렇게 예쁘신데 화장을 안 하시는 건 되게 아깝네요."

"그렇죠? 하지만 지금까지 화장을 해 본적이 없으니, 어떤 게 피부에 맞는지조차 모르는 상태거든요."

"아하, 그렇군요. 그러시다면 우리 카운터 쪽으로 잠깐만 와 주시겠어요? 점포에서 상품 샘플이 나와 있으니 몇 개 공짜로 드릴게요."

"고마워요."

이 여성 점원은 '칠성검무제'에 흥미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사라의 모습을 보고도 선수라고 알아채는 일 없이, 이야기는 실로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아리스인은 비닐봉투에 담긴 샘플을 받아들고, 사라를 데리고 가게를 나섰다. 받아든 건, 오가닉 코스메를 만들고 있는 메이커의 샘플 셋트였다.

"그거.. 전부 무료로 받은 거야?"

사라는 가게에서 팔던 것과 손색이 없는, 예쁘고 작은 병에 담긴 샘플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응. 화장품은 사람에 따라 맞고 맞지 않는 게 있으니, 큰 메이커 같은 경우는 대체로 샘플을 준비해 나눠주고 있어. 메이커에 따라선 환불 서비스를 하는 곳도 있고."

"......통이 크네."

"상품에 따라선 이 조그만 병에 담긴 정도의 양에 1만엔을 호가하는 상품도 있어. 오가닉 코스메라 하더라도 리스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까지 해 주지 않으면 손님들은 모험을 하지 않으니까."

화장품 샘플 셋트는 여성을 상대로 파는 물건인 탓도 있어서, 겉보기에도 통일감이 있는 예쁜 물건들이 많았다. 이 조그만 물건에 매력을 느껴 '샘플 매니아'같은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니까.

.........그건 이미 샘플이라는 의미가 없어지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긴 하지만.

하지만 어떠한 세계라도 매니아는 있는 법이다. 신경써봤자 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흠.. 여기라면 카메라의 사각일 테니 괜찮을 것 같네."

아리스인은 흉수로 활동하던 시절의 관찰력으로 감시 카메라의 위치와, 그 기종이 파악 가능한 시야를 계산했다. 그리고 손쉽게 사각을 찾아내고, 사라를 그 곳으로 끌고 가 층 끄트머리에 있는 그 사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은둔자의 집'"

'검은 은둔자'의 칼날을 백화점 벽에 갖다댄 뒤, 그대로 아래로 그었다. 그러자 지퍼가 열린 듯 하얀 동굴 입구가 열렸다.

"자, 이 안으로 들어가"

아리스인의 말에 따라, 사라는 그 새카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장막을 지나친 그 끝에는, 단조로운 톤으로 통일된 3평 정도의 방이 있었다.

"......여기는?"

"내가 그림자 능력으로 만든 세상의 뒷쪽.... 즉, 그림자의 동굴 속에 만들어 놓은 은신처야. 남들이 보는 앞에서 화장을 할 수는 없잖아?"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 있지만, 수도와 카스도 쓸 수 있고 식량도 비축해 두었다. 마음만 먹으면 몇 일간 숨어 있을 수도 있는, 편리한 공간이다.

언젠가 카가미를 습격한 뒤 일시적으로 감금해 둔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여기에 세면대가 있으니 와 봐."

화장을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바로 세안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스킨케어를 해본 적이 없는 사라의 경우, 그저 세안을 하는 것만이 아닌, '필링'..... 즉 오래 묵은 각질을 벗겨내는 공정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아리스인은 사라를 '검은 은둔자'의 안쪽에 있는 욕실로 안내했다.

그 도중, 사라가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어째서 내게 협력하는 거야?"

"어머나. 갈고 닦으면 가치를 가질 듯한 보석을 발견하면 그걸 연마하고 싶은 게 보통 사람들 마음이 아닐까 싶은데?"

"당신은 우리들을 배신했잖아."

"확실히 난 '해방군'을 배신했어. 그리고 두번 다시 그들을 위해 일할 마음도 없고. ......하지만 그거랑, 당신 개인에게 손을 빌려 주는 건 다른 거야. 물론 잇키나 스텔라한테 부탁을 받은 점도 있긴 하지만, 릴리한테는 불쾌한 냄새가 나질 않거든."

"어제는 샤워를 했으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 잠깐, 어제'는'이라니, 무슨 말이야!? 여자애니까 제대로 매일매일 샤워를 해야지!"

어이없어하는 한숨을 쉬며, 아리스인은 이어 말했다.

"....냄새라고 한 건 비유일 뿐이야. 난 인생의 대부분을 거친 생활을 보내며 살아왔으니 알 수 있어. 자신과 같은, 제 의지로 나쁜 길로 빠진 쓰레기의.. 마치 하수구가 썩은 듯한 냄새를 말이지."

한꺼번에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고 있긴 하지만, '해방군'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의 배경은 제각각 다르다. 예를 들면, '어릿광대' 같은 자신의 의지로 '악'을 행하는 자와, 타타라처럼 '악' 이외엔 아무 것도 모르는 환경에서 태어난 자.

......그 둘을 같은 악이라고, 아리스인은 생각치 않았다. 전자는 구원할 길이 없지만, 후자는... 운이 없었을 뿐이다.

태어난 배경이란 건 결코 평등하지 않으니까.

눈 내리는 마을에서 땅바닥을 기어오듯이 살아 온 아리스인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소속되어 있는 조직에서 사람을 구별하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건 십수 년의 인생으로 익힌, 자신의 후각 뿐이었다.

"그 후각이, 당신을 거절하지 않는 이상, 내가 릴리를 싫어할 이유는 없어."

"............그래."

"그러고 보니 협력이라는 말을 듣고 나도 궁금해진 게 있는데. '마리오 로소'라는, 나란 녀석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가 어째서 '해방군'의 심부름꾼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물음에 사라는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을 표시했다.

"난 '해방군'에 가담할 생각은 없어. 난 그저..... 빚을 갚고 있는것 뿐."

"빚?"

끄덕.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어떻게 해서든 완성해내고 싶은 그림이 있어. 하지만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전 세계를 돌아다녀 견식을 넓혀야만 했어. 이상의 모델을 찾아야만 했지. .....그걸 위해서 난 '대교수'에게 앓고 있던 지병의 수술을 받았어. 그 치료비를 그림을 팔아 지불하고 있지. 모델을 찾기 위해 분쟁 지대를 출입할 때, 그들이 가진 루트를 빌리고 있긴 하지만, 관계로 치자면 그 정도 뿐이야."

이 작전에 참가하고 있는 것도, 모델 찾기의 일환일 뿐이다.

'해방군'의 사상에도 흥미 따윈 없다.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해방군'을 이용하고, '해방군'도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녀를 이용하고 있다.

그런 관계야, 라고 사라는 말했다.

"그렇구나... 하지만 그렇다면 당신, 꽤 바가지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당신의 그림의 가격을 생각해 보면, 나라 하나를 통째로 사들일 정도의 금액을 지불하고 있을 텐데 말야."

"그런 건 아무 관심 없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몸을 손에 넣었으니, 돈 따위는 필요 없어.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어."

담담하고, 감정의 기복이 적은 사라의 목소리.

하지만, 그 심지는 아주 묵직했다.

그것이, 그녀의 결의의 무게라고 아리스인은 알게 되었다.

그만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일 거라고.

예상한 것보다 묵직하고 강한... 어떤 비장함조차 느껴질 정도의 사라의 각오를 듣고, 그 감정을 이용한 자신의 방식에 아리스인은 살짝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완성되면 좋겠네."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야 모델을 찾아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완성시킬 거야."

"그게 잇키라는 거구나?"

"그래. 그림 여기저기서 기어나오는 악마. 그 악마들의 모습에도 겁먹지 않고 용감히 맞서 싸우는 메시아의 모델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용감함과, 소녀와도 같은 순박함과 부드러움, 상반된 두 인상을 같이 갖고 있는 존재여야만 해. 남성으로서의 이상상(理想象)인 자가 말야."

......그걸 찾아내기 위해, 사라는 온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어나더 원'을 본 순간, 내 감성이 소리쳤어. 그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존재라고."

그리 말하는 사라의 표정은, 어딘가 열이 띠어 있는 듯이 느껴졌다.

마치.. 그렇다. 마치... 애인에 대한 자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후후. 즉 첫눈에 반했다는 거구나."

".....? 그런 거야?"

"그렇잖아? 즉, 잇키는 릴리에게 있어 이상의 남성이라는 거지? 그건 여자로서 첫눈에 반했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아리스인의 지적에 사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어.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자신은 잇키에게 반해 있는 건가.

자신의 가슴을 향해 질문을 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처음 듣는 외국어를 듣고, 그 의미가 이해가 가지 않는 느낌과 같았다. 그건 사랑도, 연심도 모르는, 아직 꽃봉오리 같은 소녀의 마음으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가장 빨리 약속장소에 도착한 건 잇키였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여성(?)들이니, 역시 많은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그러니 잇키는 가까이 있던 휴식용 벤치에 앉아 서점에서 사 온 책을 읽으며 여성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으로부터 5분이 지났을 즘일까.

"미안. 많이 기다렸어?"

아리스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잇키는 책을 닫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 딱히 그렇게 기다리지는...."

그리고

'어, 어라..?'

의아함에 경직되었다.

아리스인의 옆에 서 있는 사라.

아리스인이 코디를 해 준 듯했다. 그 복장은, 저지 차림도 아니었고, 물론 상반신 누드에 앞치마 차림도 아니었다. 확실히 브래지어도 착용하고 있었다. 아니, 브래지어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거기다 하반신은 청바지에서 데님 핫팬츠로 바뀌어, 오히려 노출도가 올라가 있었다.

일러스트

"저, 저기.. 아리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하고 시선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잇키의 곤혹한 시선에, 아리스인은 한숨으로 답했다.

"말하고 싶은 건 알고 있어.... 나도 노력은 했다구? 하지만....."

그는 설명했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돼 버렸는가.

어째서라고 할 것도 없다. 극히 단순한 이유였다.

화장을 끝내고, 옷을 고르는 단계가 되어 청바지를 주축으로 삼아 일반적인 여름 여성복을 가볍게 입어 봤더니, 놀랍게도, 갑자기 사라가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한 마디 하기를..

'무, 무거워....'

"즉, 중량이 초과한 모양이야. 물어 봤더니 저지를 입은 것도 스텔라가 무서워서, 상당히 무리해가면서 입고 있었다나 봐. 하지만 그 때 결국 힘이 다 했다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빈약한 거 아냐!?"

"나도 놀랐어.."

"......나, 붓보다 무거운 걸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사라 씨, 지금까지 잘도 살아 왔네..."

"하지만 그저 노출광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가슴 노출이 허용되는 범위로 궁리를 해 봤어. 브라를 찼으니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해도 주르륵 흘러내리진 않을 거고."

그리 말하고 아리스인은 사라의 뒤로 돌아가 그녀의 양쪽 어깨를 살짝 밀었다.

한 번 봐봐, 하고 말하는 것처럼.

뭐, 확실히 처음 본 순간은 늘어난 노출도에만 신경이 쓰여 잘 보지 못했지만, 사라의 복장엔 아리스인의 노력이 잘 담겨 있었다.

상반신은 노출된 브래지어와 긴소매 여름 가디건.

하반신은 핫팬츠에 부츠.

가디건은 앞을 열어 둬 가슴팍에서부터 배꼽으로 들어가는 라인을 어필. 소매도 손가락 제 2관절까지 덮을 정도로 긴 옷을 선택하였고, 잠결에 뻗친 머리도 일부러 그대로 두어 사라의 외모에서 배어나오는 섹시함과 축 처져 있는 듯한 분위기를, 그런 계통의 스타일로 승화해냈다. 이런 쪽엔 역시나 아리스인이었다.

그리고 메이크업도 완벽했다.

하얀 피부에 스며든 토너와 로션 덕에 금방이라도 튕겨나올 듯한 탄력을 갖고 있었고, 눈썹엔 깔끔히 컬이 들어가 있었다. 절묘한 정도로 들어간 하이라이트와 섀도우는 예쁜 사라의 얼굴을 한층 더 강조시켰고, 방금까지 말라 있던 입술도 잘 익은 과실처럼 상큼하고 요염하게 빛나고 있었다.

덜 된 것도, 그렇다고 과한 것도 아닌, 딱 좋은 정도.

솔직히... 아름답다, 고 생각했다.

".....역시, 이상해?"

"아니. 틀림없이 전의 모습보다 지금이 훨씬 나아. 엄청 예뻐. 사라 씨."

"............그래.."

잇키는 자신이 느낀 느낌을 그대로 사라에게 전했다.

그에 대해 사라는 쌀쌀맞은 대답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살짝 떨리고 있었고, 뺨도 살짝 복숭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쑥스러운 듯했다.

그건, 사라가 처음으로 보인, 소녀스러운 모습이었다.

"역시 아리스야. 꽤 볼만 해졌는데요?"

사라를 향해 날아온 그 목소리는, 집합 시간에 살짝 늦게 돌아온 시즈쿠의 목소리였다. 시즈쿠는 또각또각 게다 소리를 내면서 옷소매를 흐트러트리지 않을 정도의 조그마한 보폭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 곳은 자신의 자리라고 주장하는 듯, 잇키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옷소매를 작은 손으로 잡았다.

"시즈쿠. 그 기모노, 산 거야?"

잇키가 방금과는 다른 복장에 대해 언급하자, 시즈쿠는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전에 백화점에서 테러리스트를 격퇴했을 때 보수로 받은 돈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한 벌 샀어요. 어때요, 오라버니?"

"창포 무늬라. 색 조합도 시원해서 좋네. 엄청 잘 어울려."

그리 답하며 잇키는 시즈쿠의 은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주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감사합니다."

시즈쿠는 기분좋은 듯 눈을 감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잇키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멈춘 것과 같은 타이밍에, 그 표정을... '히죽' 하고, 살짝 짓궂은 미소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건, 스텔라 양의 모습이죠?"

"에, 아.. 아니, 그렇지는.."

"괜찮아요. 얼버무리지 않으셔도. 좋아하는 사람의 예쁜 모습을 보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리 말한 뒤 시즈쿠는 자신이 걸어 온 길을 향해 빙 돌아본 뒤, 소리쳤다.

"자, 스텔라 양! 클라이맥스가 등장할 시간이에요! 새로운 옷차림으로 더욱 예뻐진 당신의 매력으로, 여기 있는 신참의 혼을 빼 놓아 주세요!"

"맡겨만 둬!"

대답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아니, '양염(陽炎)의 암막'에 의해 아무것도 안 보이게 된 것뿐이었다.

스텔라는 곧바로 빛을 굴절시키는 노블 아츠를 풀고, 잇키의 앞에 뛰어나왔다.

그리고

"귀여운 토끼가 되어서, 잇키의 마음에 뛰어들거다뿅♪'"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와 망사 타이즈를 두른, 바니걸 옷차림을 한 채 잇키에게 안겨 왔다.

" " "...................." " "

그 순간, 공기가 죽었다.

잇키는 물론, 아리스인도, 사라도.

그리고, 주변을 오가던 통행인조차도 스텔라의 그 엄청난 이상함에, 말과 표정을 잃어버렸다.

"후후후. 시즈쿠, 잇키 좀 봐. 내 말로 표현 못 할 귀여움에 완전히 할 말을 잃어버린 것 같아!"

눈치 채지 못한 건 분인 뿐이었다. 잇키는 그런 너무나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스텔라의 양쪽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뒤, 꾸욱, 하고 그녀를 떼어냈다.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보며

"일단, 옷을 입어 주세요. 스텔라 양."

"어라!? 어쩐지 호칭이 멀어졌는데!? 마음에 뛰어들지 못했어!?"

"쿡쿡...."

"윽!"

비웃는 듯한 웃음은, 스텔라의 옆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그 쪽을 돌아보자, 기학의 유열을 참는 눈으로 스텔라를 바라보며 조소하는 소녀가 한 명.

그 모습에, 스텔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시즈쿠, 너... 설마...... 날 속였어!?"

"속이다니요, 쿡쿡쿡....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조금만이라도 생각을 해 보세요. 애초에... 제가 당신의 아군이 되어 줄 리가 없잖아요?"

"그, 그럼 잇키는 토끼를 엄청나게 좋아하니 이 복장은 높은 점수가 될 거란 말도...!"

"그런 걸로 보너스를 얻다니, 그런 건 드래곤 퀘스트에나 있을 일이라구요."

"~~~~~~~~~~~~!!!!!!!!"

자신이 이런 조그만 악마에게 놀아난 걸 자각하게 된 스텔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치욕과 분노로 인해 달아오르게 됐다.

"이, 이게 정말!! 이, 잇키! 그게 아냐! 난 시즈쿠한테 속은 것 뿐이고...."

"응. 알고 있어. 알고 있으니 옷을 입어 주세요, 버밀리온 양."

"꺄아아앗!! 가속도적으로 마음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어!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멀어졌어어어어!!! 으그으으윽!! 시즈쿠! 너, 나중에 두고 보자! 각오해 두라구~~~~!!!!!!"

비명과도 같은 분노의 일갈을 내지르며, 스텔라는 자신의 몸을 양손으로 가린 채 어디론가 달려나갔다. 원래 입고 있던 교복으로 갈아입으려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스텔라의 뒷모습을 보고

"쿡쿡쿡... 아~ 재밌었다~"

시즈쿠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고 있었다.

"시즈쿠 너도 참. 너무 그렇게 시즈쿠한테 짓궂은 장난 치지 말아 줘."

"싫어요."

보다 못한 잇키가 주의를 주자, 이 말에 시즈쿠는 한 치의 틈도 두지 않고 거절했다. 기본적으로 잇키에게 순종적인 그녀 치고는 볼 수 없는 강한 거절에, 잇키는 살짝 놀랐다.

"그, 그렇게 확실하게 말할 정도로 그녀가 싫은 거야?"

"네. 이것만은 제 특권이니까요. 오라버니가 말린다 하더라도 그치지 않을 거에요."

시즈쿠는 잇키에게 그리 답한 뒤, 스텔라가 달려 나간 쪽을 다시 돌아봤다.

".....쿡쿡. 정말.. 귀여운 사람이야."

그리 중얼거리고 있는 시즈쿠의 옆모습이, 어째서일까.. 잇키의 가슴을, 푹, 하고 찔렀다.

'......어라, 이게... 뭐지?'

알 수 없는 감각에 당황했다.

자신은 지금, 그녀의 옆모습에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애정? ...........아니면, 슬픔?

모르겠다. 그리고,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럼 오라버니, 전 저 귀여운 토끼가 빨간 도깨비가 되어 돌아오기 전에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밤에 있을 3회전을 위해서도 슬슬 컨디션 조절을 해 두고 싶어서요."

시즈쿠는 그렇게 먼저 돌아간다는 뜻을 잇키에게 전했다.

.....막을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밤을 위한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지금의 자신들에게, 이 대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니 잇키는 한 순간 느낀 가슴의 고통을 의식 밖으로 내몰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스텔라는 내가 달래 둘게."

"부탁드릴게요. .......아리스, 당신이 좀 도와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같이 와 줄래?"

"응, 좋아. 내 역할도 이제 끝났으니까."

"고마워.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오라버니."

"그럼 먼저 가 볼게. 시합 시간까지는 확실하게 돌아와야 한다?"

함께 그룹을 떠나는 시즈쿠와 아리스인.

그 둘이 떠나갈 때, 잇키는 멀어져가는 시즈쿠의 뒤를 향해

"준결승전에서 싸우는 것, 기대하고 있을게."

응원을 담아 그리 말했다.

그 말에 시즈쿠는 한 번 뒤를 돌아보며, "네!" 하고 그녀 치고는 아주 큰 목소리로 대답한 뒤, 아리스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뒤로 몇 분 후, 교복으로 갈아입은 스텔라가 돌아왔다.

"어라? 시즈쿠랑 아리스는?"

그녀가 먼저 찾은 건, 당연히 복수의 대상인 시즈쿠. 하지만 시즈쿠는 이제 이 건물에 없을 것이다. 잇키는 그 사실을 전했다.

"3회전을 위해서 웜업을 할 테니 먼저 돌아가겠다고....했......?"

그러려고 했는데, 다시금 굳어버렸다.

어째서일까.

방금 그 바니걸 코스튬보다도 더욱 강렬한 충격이, 그의 뇌를 때렸기 때문이었다.

그 충격의 진원은, 분개하고 있던 스텔라의 팔에 있었다.

거기에 안겨 있던 건...... 눈을 감고 잠든 아기였다.

"그 새에 도망쳤네, 그 건방진 땅꼬맹이!!"

"스, 스텔라? 그... 아기는?"

"낳고 왔어?"

"가능할 것 같냐!!"

그건 스텔라가 여자 화장실에서 바니걸 코스튬을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뒤의 일이었다.

'진짜 미운 녀석!! 얄미워 죽겠어!! 그 X.. 오늘 일은 절대로 용서 못해! 숙소로 돌아가면 아○ 알파로 고양이귀를 붙여 버릴 거야!!'

반 정도 울먹이는 표정으로 시즈쿠를 향한 분노를 표출하며, 옷을 제대로 입었나 세면대에 달린 거울로 확인하고 있을 때..

갑자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등 뒤 사선 방향 윗 쪽 공간에, 갓난아기가 소리도 없이 출현한 것이다.

'.....윽!?'

너무 놀란 탓에 숨이 멎었다. 하지만, 굳어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그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나타난 아기가 그 공간에서 천천히, 중력의 힘에 의해 낙하했기 때문에.

'위험해애애앳!!'

"....이런 일이 있었어."

"위험할 뻔한 일을 잘 넘겨 줬네."

그 뒤, 백화점에 있는 미아 센터에 아기를 데려간 셋은, 그대로 센터 사무소 안에 있는 소파에 앉은 채 아기와 함께 보호자를 찾아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기... 아마 아직 1살도 채 되지 않았을 남자아이는, 지금 스텔라의 팔에 안긴 채 잠들어 있었다. 스텔라는 그 아기를 바라보며, 옆에 있던 잇키에게 질문했다.

"......아 이이, 블레이저지?"

잇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야. 아마 죠가사키 씨와 같은 '공간 이동' 쪽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해."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나타날 이유가 없다.

통상 블레이저의 능력 발현은 자아가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지만, 강한 능력을 가진 자 중에는 아직 자아조차 애매한 유아기 시점에서, 디바이스는 아직 무리라도 그 자가 가진 능력의 단편이 돌발적으로 발동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힘으로 서지도 못하는 갓난아기가, 초현실적인 힘을 폭발시킨느 것이다.

......그건 물론, 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경우에 따라선 생명이 관련될 정도로.

예를 들면 이번 케이스도, 스텔라가 받아들지 못했다면 아기는 그대로 딱딱한 지면에 머리를 부딪혀 엄청난 부상을... 최악의 경우 사망했을 수도 있었다.

"스텔라가 때마침 거기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러게 말야. .....이 아이 부모님, 금방 찾아낼 수 있을까?"

"어떠려나. 이 아이가 눈뜨게 된 능력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니까."

운이 좋으면 아기의 부모님이 이 백화점 안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좀 더 떨어진 곳에서 날아왔을 가능성도 있다.

'닛타 마코토'라 쓰인 이름표를 보면 일본인인 것엔 틀림없으니,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일본 국내엔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 백화점 관계자 분에게 이야기는 해 두었으니 그건 저 분들에게 맡기고, 우리들은 시간이 되는 데까지 이 아이 곁에 있어 주자."

"그렇네. .........아."

그 때였다.

스텔라의 팔 안에서 아기가 크게 뒤척인 뒤, 눈을 떴다.

"아, 우부.....?"

그리고 크고 동글동글한 눈으로 자신을 안고 있던 스텔라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히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스텔라의 팔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작은 몸을 힘껏 파닥이고 있었다. 아마도, 모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패닉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얘, 얘가! 날뛰지 마! 위험하니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앙!!!!!!!!!!!!!!"

"어, 어어어어어떡해!? 어떡해야 해, 잇키!?"

스텔라는 얼굴을 차이면서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듯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잇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잇키도 갓난아기를 달래는 법 따윈 몰랐다.

잇키에겐 시즈쿠라는 동생이 있었찌만,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일단 정석인 '혀를 내밀며 까꿍'으로 달래려고 해 봤지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어, 어쩐지 악화됐는데!?"

"이, 이거 곤란하네..."

전혀 그칠 모습이 보이지 않는 아기를 바라보며 곤혹해하는 둘.

그런 둘 사이에 끼어들듯

"이리 내 봐."

사라가 순식간에 스텔라의 팔에서 아기를 빼앗아들었다.

"사라!? 너 힘 엄청 약하잖아! 위험하다구! 떨어뜨리면 어쩌려고 그래!"

"조용히 해. 당신은 목소리가 너무 커."

"윽.."

서둘러 아기를 다시 빼앗아 오려 한 스텔라, 하지만 사라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강한 시선으로 스텔라를 제지했다. 소파에 앉은 채 아기의 후두부를 쓰다듬으며

"안심하렴. 네 어머니는 금방 돌아올 테니까."

차분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그러자

"아우.. 아우?"

"그쳤어.."

놀랍게도, 방금까지 그렇게 날뛰고 있던 아기가 얌전해졌다.

"사라 씨, 굉장한데? 이런 거 익숙해?"

"아니. ......그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를 관찰해 왔으니, 말은 몰라도 무얼 원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그런 걸 은연중에 알 수 있게 된 것 뿐. ......이 아이는 자신의 부모님이 없어져 불안해하고 있었어. 그런 때에 우리들까지 허둥지둥대면 더욱 불안해할 거야. 그러니 침착해야 해. 안 그래도 이런 아기들은 어른의 안색에 민감하니까."

" "죄, 죄송합니다.." "

비난하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그런 말을 듣고, 잇키와 스텔라는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어른이 기분나빠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불안해하거나 겁을 먹는다. 확실히, 그녀가 말한 대로 허둥지둥대는 모습은 좋지 않았다. 같은 여자로서의 분함과 완력에 대한 불안함이 남았지만, 아기에 대한 건 사라에게 맡겨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스텔라는 그리 판단하고, 아기를 빼앗으려 뻗은 팔을 거두고 사라가 언제 아기를 떨어뜨려도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기로 했다.

그리고 잠시간 있자, 완전히 진정된 아기가 사라의 가슴을 손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우.. 맘마! 맘마~!"

그 귀여운 모습에 스텔라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아하하. 이건 나라도 알고 있어."

모유를 달라고 하는 동작이었다.

"그래도 미안. 우리들은 아직 모유가 안 나와."

"관계자 분에게 분유를 만들어달라고 할까?"

그리 생각해 낸 잇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 그 순간.

사라가 놀라운 행동을 취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리스인이 골라 준 노출된 브래지어에 손을 댄 뒤, 브래지어를 옆으로 밀어 내 그 커다랗고 하얀 가슴 한 쪽을 노출시킨 것이다.

"푸웁!?"

"뭣.. 사라!? 너 지금 뭘..."

"시끄러워."

너무도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커진 스텔라를, 곧바로 사라가 노려보며 제지했다.

"아, 미.. 미안... 하지만...!"

".....우유는 안 나오지만,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거야."

사라의 말대로, 사라의 젖꼭지를 달라붙듯 물고 있던 아기의 표정은, 모유가 나오지 않음에도 너무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배가 고픈 게 아니었다.

아기가 바라고 있던 건, 식사가 아닌 따스한 온기.

그걸, 사라는 세계 제일의 화가의 관찰력으로서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아기에게 수유와 비슷한 행동을 하며, 사라는

"ninna nanna ninna oh    questo bimbo a chi lo do~♪"(자장~ 자장~ 오, 우리 아가. 이 아가를 누굴 줄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황녀로서 어학에 정통해 있는 스텔라는, 그게 이탈리아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자장가라는 것을.

"se lo do al lupo bianco     me lo tiene tanto tanto"(만약 하얀 이리에게 준다면, 널 멀리 데려갈 거란다)

애정을 담아 짜여지는 선율.

이 아기는 거기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전해진다.

국경을, 말을, 의미를, 모든 것을 넘어서 스며들어 오는 애정.

틀림없이, 그건 모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ninna nanna nanna fate      il mio bimbo addormentate~♪"(자장~ 자장~ 얼른 자거라. 우리 아가 잘도 자네)

이윽고 사라의 품속에서, 다시금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들기 시작한 갓난아기. 그 조그마한 고동을 끌어안은 채 노래를 부르는 사라의 모습은.... 스텔라의 눈에도, 잇키의 눈에도, 지금까지 그녀의 어떠한 모습, 어떠한 표정보다도 아름답게 보였다.

갓난아기가 다시금 잠든 뒤, 사라는 잇키에게 아기를 넘겼다.

서서히 팔에 한계가 온 것이다.

"잘도 자네."

잇키는 자신의 팔 안에서 편안하게 새근거리고 있는 작은 생명에, 미소를 흘렸다.

"......스텔라도 말이지."

"쿨~ 쿨~"

이걸 보고 흘러나온 건, 쓴웃음이었다.

스텔라는 사람의 노래에 이끌려 꿈 속 세계에 빠져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공격력, 방어력, 민첩, 이 모든 게 완벽한 그녀였지만, 아무래도 상태이상에 대한 내성은 없는 듯했다.

한 편, 잇키에게 아기를 맡긴 사라는, 무릎 위에 노트를 펼쳐 잇키의 팔 안에서 잠들어있는 갓난아기의 데생을 그리고 있었다.

전투시에 보여준 신의 영역에 가까운 속도가 아닌, 천천히, 정성스럽게.

평탄한 하얀 노트 위.

연필 하나로 어디까지나 이어지는 세계가 형성되어간다. 손을 뻗으면, 노트 속으로 손가락이 푹 하고 빠져들어가, 부드러운 아이의 뺨이 느껴질 정도로.

그림에 대해서 지식이 없는 잇키로서는, 사라의 기술은 마치 마법처럼 느껴졌다.

"..........응? 뭐야?"

노트를 바라보던 잇키의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사라가 잇키를 바라보며 '왜 그래?'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 미안. 그저.. 잘 그린다고 생각해서.."

뭐, 상대는 스텔라가 말하길 그림 하나로 14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을 벌어들이는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의 화가라고 했다. 잘 그리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그림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잇키는 사람의 동작을 읽는 데에 정통한 관찰력을 갖고 있다.

그러니, 알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어 가는 그 한 획이, 팔, 손가락 끝, 그리고 연필의 움직임에서,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수련 끝에 도달한 유일무이의 한 획이라는 것이.

그건, 달인의 칼을 휘두르는 모습과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평범치 않은 사랑과 정열, 그리고 각오가 없다면 도저히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림을 좋아하는군요."

솔직히 잇키에게 있어 사라는, 그녀가 자신을 누드 모델로 삼으려는 것도 있어 엄청나게 거북한, 솔직히 별로 다가가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 강한 의지에는 솔직하게 존경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잇키의 말에 사라는

".....지금은, 좋아해."

살짝 의미심장한 말로 답했다.

"지금은?"

잇키가 그 의미에 의아함을 표하자, 사라는 잠시간 잇키의 눈을 바라보며..

그리고, 입을 열었다.

증오조차 담긴 목소리로..

"옛날엔, 그림 따위는 정말 싫었어."

사라 블러드릴리.

그런 이름을 갖고 있는 소녀는, 유소기를 이탈리아 교외... 산 속에 있는 작은 아틀리에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뼈가 약하다는 지병을 갖고 있던 그녀는, 자력으로 걷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 침대 위에 앉아 보고 있는 광경만이, 그녀의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 한가운데에서 언제나, 언제나 캔버스를 향해 그림만을 그리고 있던 뒷모습이 있었다.

그게,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름 없는 화가로, 언제나 거대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건 셀 수 없을 정도의 악마가 구세주의 성스러운 빛에 의해 퇴치되는, 지금 막 도래하려 하는 하르마게돈의 구원을 그려낸 종교화였다.

그 그림을, 몇 년이고, 몇 년이고...

사라의 기억엔 그의 뒷모습만이 남아있었다.

단 한 번도, 그가 자신을 돌아본 기억은 없었다.

불러 봐도, 답을 해 온 적은 없었다.

사라의 간병이나 식사 조달은 전부, 그가 고용한 가정부가 해 주었다.

따라서, 그녀는 부친의 얼굴조차 모른다.

본 적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쭉, 그렇게 쭉... 그야말로 무언가에 홀린 듯, 눈 앞의 그림에 빠져 있었으니까.

그러니...

".....난 미웠어. 내게서 아빠를 빼앗아 간 '그림'이라는 존재가."

돌봐 줬으면 했다.

사랑받고 싶었다.

어렸을 적의 심정을 토로하는 사라.

그런 그녀를 향해, 잇키가 질문했다.

"그렇다면, 사라 씨는 어째서.. 자신의 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건가요?"

그렇게까지 그림을 증오했으면서.

그 잇키의 질문에, 사라는 답했다.

계기는... 아버지의 죽음이었다고.

어느 날, 아버지는 캔버스에 푹 엎드린 채 죽어 있었다. 아버지를 병원으로 옮긴 가정부가 말하길, 지병의 악화 때문이라고 했다. 아틀리에에 남겨진 건, 천애고아가 된 사라와, 미완성인 채로 남은 거대한 유화.

사흘 정도를 운 탓에, 눈물도 말라버렸을 무렵, 사라는.. 증오에 불타는 눈동자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그림을 노려보았다.

일반적인 방의 벽면 정도의 면적은 될 법한 거대한 캔버스.

결국, 구세주가 새겨졌어야 할 터였던 중심이 텅 빈 채로, 미완성으로 끝나 버린 아버지의 그림을.

그리고, 그녀는 그 그림을 찢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당연하다. 그녀는 그 그림에 증오 외엔 느낀 것이 없었으니까.

이 그림에 열중한 탓에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았으니까.

사라는 침대에서 온 힘을 짜내, 하루라는 시간에 걸쳐 캔버스 앞까지 기어간 뒤, 의자를 짚고 그림 앞에 섰다.

그리고 옆에 떨어져 있던 페인팅 나이프를 쥐고, 그 나이프를 번쩍 들었다.

이 칼로, 그림을 갈갈이 찢어버리기 위해서.

하지만......

"난... 그 칼을 내리치지 못했어...."

그건 어째서일까.

멀리 떨어져 있던 곳에 있던 침대에 있으면,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되었으니까.

그건...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셀 수 없을 정도의 튜브의 잔해.

털이 엉망이 되어 버린, 수십 개나 되는 붓의 잔해.

몇 겹이나 묻은 채 굳어버린 물감과, 그리고.. 몇 번이고 칠한 뒤 떼어 내고, 칠한 뒤 떼어 내는 것을 반복해 갔음에도, 끝내 그려넣지 못한... 얼룩덜룩해진 캔버스의 공백.

......거기에 존재하던 건, 뿜어나오는 열기조차 느껴질 정도의, 아버지의 귀기서린 정열이었다. 그걸 느낀 순간, 사라의 안에 있던 증오가.. 슬픔으로 가득 차 갔다.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멈출 줄 모를 기세로 흘러나왔다. 셀 수 없는 시간을 써 가며, 자신의 딸조차 돌보지 않고, 자신의 몸을 깎아 가며, 넘쳐흐르는 피로 그려낸 듯한 이 그림은,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이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은, 아버지에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 정도의 마음을, 정념을 쏟아부어도, 아버지는 미의 여신의 총애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건, 얼마나 원통했을까.

이 아버지의 원통함을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가 이 그림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증오를 느낄 정도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사라는 눈물을 흘리며 결의했다.

아버지가 끝내 완성해내지 못한 이 그림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시키겠다고.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애도의 꽃을 바치는 것보다, 그것이.. 그것만이, 나 자신이 돌아가신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효도라고 생각했으니까."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신과 아버지를 이어주는 물건이었으니까.

....그 뒤로 사라는, 생전의 아버지에게서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있거든 딸을 부탁받은' 아버지의 친구, 카자마츠리 코우조의 인맥의 도움을 받아 '해방군'의 뛰어난 의사이기도 하며 '12사도'라 불리는 간부급 중 한 명 '대교수'에게, 막대한 자금을 들여 지병을 치료받았다.

그렇게 완전하다고 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몸을 손에 넣게 된 사라는, 아버지의 원통함을 갚기 위해 그림 실력을 쌓아 가면서, 미완성인 채로 남은 그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신에게 쏟아져 오는 모든 악의를 두고도 용감히 맞서 싸우는 메시아의 모델을 찾아나선 것이다.

여자 혼자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몇 번이고 목숨의 위기를 맞아 가면서도 한 점의 타협 없이.

10년이라는, 자신의 생애의 반절에 가까운 시간을 써 가면서까지.

기술도, 모델도 완벽하지 않고서야, 그 그림에 담긴 원념이라고 해도 좋을 뜨거운 열에 삼켜져 버릴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사이... 어느 틈엔가 난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아졌어. .....내겐 역시 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느끼고, 조금 기뻤어."

"....그랬군요."

그 사라의 고백에, 잇키는 한 가지 납득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녀의 이상할 정도의 자신을 향한 집착. 그에 대한 이유였다. 그랬다. 어째서 그 정도까지 자신을 모델로 삼고 싶어하는지까진 잇키의 센스론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생애의 반절을 소모해 가면서까지 찾아 나선 끝에 드디어 찾아내게 된 모델이 자신이라면, 그리 가벼이 내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죠?"

"뭐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에요? 당신은..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잖아요?"

사라의 집념의 이유에 대해 납득하는 한 편, 잇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녀가, 단 한 번도 그녀를 돌봐주지 않았던 부친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를. 그건.... 그 자신의 경우를 겹쳐 본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잇키의 질문에 사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한 듯이 답했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도요? 사랑을 받은 적도 없는데?"

"확실히 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해낼 수 없어. 돌아봐 준 기억조차 없어. 주변의 평가가 좋지 못한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난 단 한 번도, 아빠를 싫어했던 적은 없었어. 왜냐면, 그거면 됐어. 그것만 있으면 좋았던 거야.

그 감정이 이 가슴속에 있는 한, 내 사랑은... 일방통행이라도 상관없어."

사라는 말했다.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는 자신의 존재를 진심으로 귀찮아했을 수도 있다. 아니, 그걸 떠나서라도, 자신의 유작에 자신의 딸이 붓을 대는 걸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내 알바가 아니다.

왜냐면, 나와 그는 부녀지간이니까.

"내 멋대로 그를 사랑한다는 억지 같은 건, 당연히 받아줘야 할 정도인 거 아냐?"

".............."

그 순간, 잇키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었다.

그건,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에도 통하는 답...

".........그렇, 구나..."

잇키는 지금까지... 언젠가 아버지와의 연을 끊어야만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와 그의 길은 어디까지 나아가도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것이... 언젠가 끝내야만 할 결착의 형태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설령 아버지가 자신과의 연을 끊는 것을 바란다 할지라도.

자신을 거슬린다 여길지라도.

그런 건, 자신이 고려할 문제 따위가 아니다.

당연하다.

상대도 이쪽을 돌아본 적 따윈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만이 상대의 사정을 고려해야만 하는가?

;그래. ..........이건, 다름 아닌 내 심정이야!'

이츠키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다.

자기 자신이 아버지를 싫어하게 되지 않는 한.. 억지로 싫어할 필요 따위는 없다.

좋지 않은가. 등을 마주댄 채라도.

자신도, 아버지도, 심장은 하나인 사람.

자신의 인생의 길을 열심히 걸어나가고, 그 길이 결코 만날 일이 없다 할지라도....

.....나와 그가 피를 나눈 부모지간이라는 것에 변함은 없을 테니까.

'억지를 부려 주겠어. 그게 아이의 특권이니까.'

그것이, 자신과 쿠로가네 가문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한 쿠로가네 잇키의 답이었다. 그 답에 도달한 순간, 잇키는 자신의 마음에 쭉, 어렸을 때부터 쭉 매달아 놓은 듯한 납처럼 느껴지던 무거운 안개가 걷히는 감각을 느꼈다.

이제야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설령 일그러진 감정이라 할지라도 이츠키와 부자지간으로 있고 싶다는 그 마음을... 똑바로 긍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게 너무나도 기뻐서, 잇키는 무심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잇키의 표정을 바라보며, 사라는 안도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표정이 되었어. 모델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야, 곤란하지."

그 말에, 잇키는 알게 되었다.

오늘 아침, 의무실에서 자신과 이츠키의 대화 뒤에 나타난 사라가 말하려 했던 것.

그 때, 사라는 잇키와 이츠키의 관계를,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에 겹쳐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잇키가 그렇게 했듯이.

그리고, 그렇기에 '과연 그럴까'하고 질문을 던져 온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 인연의 형태를.

그리고, 그걸... 지금 말해 주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자신을 위하여.

".....사라 씨 덕에 한 고민이 해결되었어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보단 차라리 모델이 되어 줘."

사라다운 대답에 잇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배경을 알게 된 지금, 그 집착도 이해가 갔다. 말하자면 그녀의 동기에 대한 모든 것이 이 하나에 담겨 있는 셈이니까.

그리고.. 그런 이유가 있다면

"알았어요. 할게요."

"엣..."

잇키의 그 답에, 사라는 크게 눈을 부릅떴다.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상상치도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잇키도 물론 조건 없이 이 부탁을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어요. 다음 시합에서 제게 이기는 것."

"..............시합.."

"그래요. 다음 3회전, 사라 씨가 이긴다면 당신이 말한 대로 모델이 되어 줄게요. 하지만 반대로 당신이 진다면, 절 모델로 삼는다는 생각은 이후로 완전히 접는 거에요. .....그런 승부라면 어떨까요?"

잇키가 그리 고한 순간이었다.

오싹.

잇키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 앞에는.... 명백히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빛을 한 사라의 모습이 있었다.

".........알았어."

양 눈 안쪽에서 보이는, 활활 타오르는 강한 의지.

찌릿찌릿..

불어닥치는 압력이 잇키의 앞머리를 태우고 있었다.

그 감각에, 잇키는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르다, 고.

애초에 칠성검무제는 기사들의 축제.

잇키나 스텔라처럼 무(武)에 빠져 사는 자들에게 있어선 명예로운 대결이지만, 사라는 달랐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다. 그 희귀한 재능에 의해, 전투력은 높지만 이 대회에 걸고 있는 것은 없다. 더불어, '해방군'으로서의 활동도 그리 열심히 하고 있던 것도 아니다.

그녀가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남긴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

모든 건 그걸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다.

따라서, 모든 일에 동기가 없었다.

그건, 쿠라우도와의 대결에서도 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건...

'아깝잖아.'

사라가 예술에 보내고 있는 정열은, 자신들, 기사가 대결에 보내고 있는 그것과 같았다. 방향성은 다르지만, 정열의 양, 마음의 강도도 같았다. 아니, 그 이상일까?

모르겠다.

그렇기에, 확인하고 싶었다.

따라서 잇키는 다음 승부에서 한 가지 사항을 덧붙였다. 그녀의 의지의 방향성을... 그 모든 것을, 다음 한 시합에서 집약시키기 위해.

그 약속으로, 사라는 진심으로 나서게 될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잇키를 꺾으려 들 것이다.

하지만, 그거면 됐다.

자신의 정열을 맞부딪히며, 격전을 벌인다.

그게 바로, 칠성검무제니까.

이 뒤, 바로 옆에 있는 백화점에서 모친이 찾아온 덕에, 미아가 된 아기는 무사히 보호자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 남은 셋은 가볍게 식사를 한 뒤, 백화점을 나서 회장으로 돌아왔다.

시각은 16시 반.

결전의 시간까지, 앞으로 2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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