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따라가면 안 돼!
빗속에서 만물의 소리를 듣는 기묘한 경험 끝에, 계연은 자신의 청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방금 잡념에 사로잡혀있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발소리를 놓칠 리 없었다.
조금 전 금순복의 말을 곱씹던 계연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깊은 산 속 음산한 밤에 갑자기 정체불명의 서생이 나타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러나 이 서생의 표정과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거기에 서생이라는 신분과 연약한 생김새까지 더해져, 그는 성공적으로 장수들의 신뢰를 얻은 듯 보였다.
어차피 이 산신당은 장사꾼들의 소유가 아니라서, 누구나 이곳에 들러 휴식할 권리가 있었다. 어쨌든 이들은 극악무도하거나 막무가내인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장사림의 일행들이 서생을 경계할 순 있어도, 그를 내쫓을 순 없었다.
장사꾼들 역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비록 다정하게 서생을 불러 불가에 앉히긴 했지만, 서생의 상황을 자세히 묻고 확인해야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선생께서는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집은 어느 방향이고, 어디에서 공부하셨는지요?”
이래 봬도 장사림은 한때 글 좀 배운 사람이었다. 그는 꽤 우아한 말투로 서생에게 질문을 건네었고, 일행 중 막내인 왕동은 힐끔힐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가벼이 봐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서생은, 장사림을 향해 읍(*揖: 맞잡은 두 손을 얼굴 앞으로 들어 공손히 예를 표하는 인사법)했다.
“소생(小生), 성은 육(陸), 이름은 외자인 흥(興)이요. 수선진 패문방(牌門坊)에 살고, 덕승부(德勝府) 청송 서원(靑松書院)의 학생이죠. 이번에 서원 학우와 함께 귀향하기 위해 산에 올랐소…….”
장사림의 질문이 예사롭지 않자, 서생은 그를 학자 비스름한 사람으로 여겼는지 자신을 ‘나’가 아닌, ‘소생’으로 일컬었다.
서생은 기억을 떠올리기가 무서웠지만, 누구와 함께 산에 오른 것인지, 왜 갑자기 벗과 흩어졌는지, 집은 어디인지, 어느 서원에서 공부하였는지까지 요목조목 설명했다. 도중에 고상한 시구를 섞어 말하기도 했다. 상당히 논리정연한 말들은 즉흥적으로 지어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태도는 조금도 가식적이지 않았고, 말투는 적당히 예의 발랐다.
서생이 유서 깊은 서원의 학생이라는 말에, 장수들의 머리가 절로 수그러졌다. 홀로 집에서 고학하는 학자에 비해, 서원 소속의 학생은 지위도, 가문도, 재능과 학문까지도 훨씬 뛰어났다. 소위 능력이 뛰어난 이들뿐이었다.
학자는 언제나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청송 서원의 문하생이라면 말이다.
서서히 장사림까지도 경계를 내려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일행은 육흥을 한껏 공경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서생은 오만하게 굴지 않았다. 물이나 음식을 받을 때도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비록 배가 고프지 않다며 음식을 거절하였지만 말이다.
계연의 마음은 골짜기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자신을 서생이라고 칭하는 저자의 연기력은 실로 뛰어났다. 만약 일찌감치 저자는 사람일 리 없다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계연 또한 저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다.
‘정말 끔찍하다, 끔찍해!’
지금 누군가가 계연에게 ‘타임슬립을 유지할래,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래?’라고 묻는다면,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할 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실 속 계연에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계연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이 서생이 저리 연기하는 걸 보니, 계연의 능력은 사방을 압도하는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상대는 아직 산신상 뒤편에 누워있는 거지꼴의 계연을 발견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육흥과 장사꾼들은 이미 웃으며 담소를 주고받았다. 유명한 서원의 학생이 그들 같은 행상인에게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이들은 서로 사이좋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서생이 머리를 ‘탁’ 치며 종잡을 수 없는 말투로 장사림 일행에게 말했다.
“맞다! 소생이 수중에 돈이 부족하여, 도와준 은혜에 보답하기가 어려울 듯싶소. 다만 소생 산신당에 오기 전 좋은 물건을 하나 발견하였는데, 여러분에게 충분한 수익을 안겨줄 것 같군요!”
역시나 사람들은 관심을 보였다.
“무슨 물건인데 그러세요?”
육흥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산왕삼(山王參)이요!”
인삼은 귀하기로 유명한 약재였다. ‘삼’ 자 앞에 ‘산왕’ 두 글자가 붙으면, 인삼 중에서도 최상품을 뜻한다.
1년 365일 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뜨내기 장수들은 적당한 약재만 보아도 캐가곤 했다. 어쨌든 약재라면 썩 괜찮은 수익을 안겨주기 마련이었다.
산왕삼이라는 말에 일행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었다.
장사림은 살며시 미간을 좁히며 육흥을 바라보았다.
“육 도령, 도령께선 학자이신데 산왕삼의 생김새까지 아시나 보군요?”
“하하하,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소. 잡서(*雜書: 옛날에 소설, 수필 등을 일컫던 말)인 <초목정요(草木精要)>에서 인삼의 특징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한눈에 산왕삼을 구별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하지만 다른 사람은 할 수 있잖소!”
육흥은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소생은 수선진의 사람이오. 마을 저잣거리에는 간혹 산에서 캐온 약재를 내다 파는 약초꾼들이 있소. 그들과 몇 번 대화를 나누면서 몇 가지 내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지요. 산왕삼은 잎이 아홉 개고, 붉은 씨처럼 생긴 꽃이 피어 있다 하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이내 장사림을 포함한 모든 장사꾼들은 저도 모르게 육흥에게로 귀를 가까이 대었다.
“……소생이 발견한 인삼의 줄기에 붉은 끈이 세 가닥 묶여 있었다는 거요. 이는 유명한 채삼꾼 우두머리가 고안한 방법인데, 산왕삼이 도망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이리한다지요!”
신선한 이야기에 뜨내기 장사꾼들은 큰 흥미를 보였다.
“옳거니! 마을 어르신들께 오래된 인삼은 흙을 파고 도망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가장 훌륭한 심마니만이 이를 잡을 수 있다고 하셨죠!”
금순복 또한 옛날에 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맞소, 맞소! 금 씨의 말이 맞소!”
육흥은 가볍게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마니가 끈만 묶어놓고 캐가지 않은 것을 보니, 최적의 시기를 기다리는 것 같소. 하나, 여러분은 그럴 필요 없잖소. 이 산왕삼은 절대 적지 않은 수입을 안겨줄 것이오. 인삼을 발견했을 때, 난 너무 무섭기도 했고, 행여나 약재를 잘못 캘까 봐 걱정되어서 그냥 지나쳤지만, 그런 문제가 없었다면 진작 캤을 거요.”
“암요, 암요!”
“사림 형님, 인삼 캐러 갑시다!”
“서생, 그 산왕삼이 어디에 있죠?”
장사꾼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산왕삼을 캐고 싶었다.
재화는 모름지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다. 이익에 휩쓸린 그들은 육흥의 말을 더 깊게 신뢰했다.
싸한 기분이 점차 계연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오로지 이 생각만이 계연의 머릿속에 떠오를 뿐이었다.
‘큰일이다!’
장사꾼들의 간절함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서생이 대답했다.
“소생이 전에 비를 피하던 곳과 멀지 않소. 왕복 이주향(*二柱香: 약 80분~2시간)도 안 걸릴 거요. 여러분께서 산왕삼을 캐러 가시겠다면, 날이 밝기 전에 소생과 함께 가시죠.”
“왜죠? 지금은 날도 어둡고 길도 미끄러운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장사림이 궁금한 듯 물었다.
“장 씨가 잘 모르나 본데, 심마니들은 날이 밝기 전 산에 들어와요. 그 산왕삼에 붉은 꽃이 피었던데, 만일 심마니가 하루 이틀 일찍 와서 캐간다면, 저희가 순서를 놓치지 않겠어요?”
“그렇네요!”
“일리 있는 말씀이에요!”
“사림 형님, 손발이 빠른 제가 다녀올게요!”
“그래, 어서 가서 캐옵시다!”
이 시대에는 가족을 부양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산왕삼은 자연의 것이니, 심마니가 붉은 끈을 묶어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심마니들의 차지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심마니와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 갈 필요 없어. 손발이 빠른 사람 몇만 가고, 나머지는 이곳에서 짐을 지켜야지.”
장사림도 더는 망설이지 않고, 소쿠리에서 불붙일 나무 막대와 기름을 먹인 천 등을 꺼냈다.
“금 노인, 동이, 유전, 그리고 이귀, 자네들 넷은 육 도령과 함께 가도록. 산길이 미끄러우니, 도령의 안전에 특히 유의하고!”
“나만 믿으라고!”
“사림 형님, 염려 마세요. 육 도령께서 넘어지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부탁드릴게요!”
육흥은 읍하며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그의 그림자 진 얼굴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괴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늘한 한기가 계연의 머리 가죽까지 간지럽혔다. 계연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안 돼! 따라가면 안 돼!’
‘제발 어리석게 굴지 마! 가지 말라고!’
산신상 뒤의 계연은 마음이 타들어 갔다. 이 장사꾼들에게 사고가 나면, 결국 자신에게도 문제가 생기는 격이지 않은가!
소리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다가, 끝내 귓가에서 사라졌다.
강렬하게 마음속으로 안간힘을 쓴 덕분일까? 계연의 눈꺼풀이 매섭게 떨리고, 입술이 파르르 흔들렸다. 바로 그때, 계연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살며시 움직였다.
계연은 처음으로 변화를 감지했다. 이에 계연은 최악으로 치달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신중히 몸의 움직임을 느꼈다. 격렬한 의식의 몸부림 속에서 ‘가위’가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손가락 몇 개는 힘들지만 쥐었다 펴는 게 가능해졌다. 비록 많이 구부려지진 않았지만, 확실히 눈에 띄는 발전이었다.
계연은 미쳐 날뛸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서생을 따라 나간 네 사람의 결말이 여전히 우려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이 움직일 수 있다면 뜨내기 장사꾼 일행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고, 아직 저 사람들을 살릴 기회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 * *
그 무렵 산신당 입구에선, 장사림이 횃불 두 개를 피워 왕동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야밤에 불어오는 찬 바람에 불꽃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조심해, 육 도령 잘 지키고.”
“걱정하지 마세요, 사림 형님!”
“금 노인,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걱정하지 마, 사림! 내가 있잖아!”
횃불을 건네받은 금순복이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장사림에게 호언장담했다. 뜨내기 장사꾼들은 유능한 산객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 여정쯤이야 무섭지 않았다.
육흥이 길을 안내할 터이니, 장사림은 두 번째 횃불을 육흥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육흥은 횃불을 건네받지 않았다.
“안 돼요, 안 돼. 만약 피풍에 불이 옮겨붙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동이 씨가 대신 들면 좋겠군요!”
“맞아요, 저한테 주세요, 저한테. 헤헤헤…….”
왕동은 웃으며 횃불을 휙 낚아챘다.
“너 이 자식!”
웃으며 나무라던 장사림은 불을 붙이지 않은 나무 막대를 유전의 소쿠리에 넣어주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일행은 산왕삼을 캐는 여정에 올랐다.
그 와중 산신당 안에서는 계연이 잔뜩 구겨진 표정을 한 채, 손과 발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상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육체의 통제권을 쟁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