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놀라 죽지는 않았네
산신당 안에서 들려오는 질문에 호랑이 요괴가 흠칫 놀랐다. 초조해진 호랑이 요괴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발톱으로 땅을 긁었고, 이내 무언가가 떠오른 듯 콧김을 뿜었다.
후!
그러자 신비한 안개가 일렁이더니, 갑자기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육흥이었다.
불빛이 반짝이는 산신당을 살피던 호랑이 요괴가 작은 목소리로 서생 창귀에게 말했다.
“방금 그 이야기 다 들었지?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이 절호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을까? 네가 이번에 나를 도와준다면, 내 너의 혼을 고향 땅으로 돌려 보내주마!”
산군은 계연이 그 자그마한 목소리까지 듣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계연은 이 호랑이 요괴가 수행의 비법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산군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육흥이 산신당을 바라보았다.
“아까 제가 사람을 데리러 갔을 땐 일어나질 못했는데, 지금은 장사림을 막고 있군요. 보아하니 저자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저런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허언입니다. 하물며 고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육 산군께서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하셔야 합니다. 고작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유로 저자를 속여선 안 됩니다.”
그 말에 방대한 체격에 매서운 눈초리를 한 호랑이 요괴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요괴는 머리를 저으며 산신당을 향해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 내 수행을 시작한 이래로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해, 하는 수 없이 인간을 먹어 몸보신해야 했네. 내가 먹은 사람들의 수는 쉰 하고도 셋…….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건 사람이 새를 잡아먹는 것과 같은 이치일세. 마구잡이로 죽이는 게 아니라, 배가 부를 때까지만 먹을 뿐이지. 낮 동안 나를 건드리지 않는 자는 잡아먹지 않고, 노인이나 어린아이, 병든 환자가 아닌 건장한 청장년만 먹을 뿐이라고!”
‘말도 안 돼! 사람을 53명이나 잡아먹었다니!’
계연은 조금 전 뒷말을 잇기 위해 날카로운 질문을 생각해 냈지만, 막상 대답을 들으니 다리에 맥이 풀렸다. 주변의 장사꾼들은 더욱이 처참해진 몰골로 바들바들 떨며 신음을 냈다.
* * *
질문에 대답을 건넨 후, 산신당 밖의 호랑이 요괴와 그 옆의 창귀는 초조하게 마음을 졸였다. 한편 산신당 안의 사람들은 겁에 질려 한참 동안 넋을 놓았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계연은 다시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사람을 잡아먹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호랑이 요괴와 어떻게 하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산신당 밖의 호랑이 요괴가 조바심을 내던 그때, 산신당 안에서 끝음을 길게 늘어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 산군, 기백이 넘치는군. 다른 요괴들은 몇 사람 잡아먹지 않았다며 거짓말하였을 텐데, 대단해!”
서생 창귀는 옷소매 사이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호랑이 요괴 육 산군은 더욱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지. 어떤 요괴들은 인간이 최고의 보양식이라 생각한다는데, 육 산군은 어떤가?”
계연은 호랑이 요괴가 말하기도 전에 질문을 이어갔다.
사람을 잡아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뿌리째 뽑아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을 끌어 적당히 대꾸할 말을 생각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를 끝까지 속이지 못한다면, 상대의 분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할 것이다.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호랑이 요괴와 창귀는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육 산군이 커다란 머리로 창귀를 바라보았다. 그는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맞다’라는 대답은 절대 옳은 답변이 아닌 것 같고, ‘아니다’라는 답변은 너무 단순했다. 만일 산신당 안의 저자가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라고 묻는다면 어떡한단 말인가.
서생 창귀가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맨 처음 학문길에 올라 엄격한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생각했어? 생각했냐고!”
“산군 진정, 진정하세요……. 생각났습니다!”
“빨리, 빨리!”
서생은 무심코 옷소매를 들어 땀도 나지 않은 이마를 닦아내며 조용히 말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일 수는 없겠지요. 중요한 건, 앞서 산군의 말씀과 엇갈리지 않는 선에서 반대하는 관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산군께선 사람 쉰다섯을 드셨으니…… 이리 말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뇌하던 육 산군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표정을 풀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뭐라고 대답하든 옳지 않으니, 본심을 따라 앞뒤가 맞는 이야기를 하라는 거지?”
“맞습니다. 산군, 저만 믿으세요!”
호랑이 요괴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산신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선생의 질문에 한참을 고심했네. 나 육 산군은 영묘한 지혜를 갖고 태어나 줄곧 우규산을 떠난 적이 없네. 다른 요괴는 보질 못하여 그들의 생각은 알 수 없다만, 나는 인간이 단연코 좋은 보양식이라고 여겨왔지. 허나 선생의 질문을 듣고 나니, 그간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군. 부디 선생이 나를 가르쳐주시게!”
놀랍게도 질문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만 이 상황은 계연의 의도를 벗어나진 않았다. 인터넷 대유행 시대를 겪은 청년으로서, 계연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혼비백산이 되어 정신줄을 놓지만 않는다면, 사실 심오한 이치를 지어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다른 건 몰라도, 번지르르해 보이는 격려 문구 따위를 생각해 내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바로 대답이 이어졌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갖가지 요괴들이 인간에게 홀린다지. 하지만 인간은 그와 동시에 세상에서 감정이 가장 복잡한 생명체일세. 인간에게는 원망과 분노가 복잡하게 뒤엉켜있기 때문에, 요괴가 오랜 시간 인간을 먹으면 이것에 중독되기 마련이네. 인간을 먹는 게 보양과 수행을 위한 행위인 줄 알았겠지만, 실상은 아닐세. 인육을 먹으면 악한 기운이 몸에 달라붙게 되어 아무리 노력해도 이를 떼어내기가 쉽지 않게 돼. 악기가 쌓이다 보면 결국엔 미치광이가 될 정도로 성격이 포악해지고…… 끝내는 자멸에 이를 거야.”
그 말에 거대한 호랑이 요괴 육 산군은 말문이 턱 막히고, 온몸에 털이 쭈뼛쭈뼛 섰다.
누군가 육 산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건 처음이었다. 서생 창귀가 그에게 알려준 책들에 선량하게 살라는 내용이 담겨있긴 했지만, 그저 육 산군에게 이는 우습고 진부한 말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재 산신당 안에서 들려오는 말에 육 산군의 등허리에는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그 이유는 육 산군의 식인 행위가 갈수록 충동적으로 변하였고, 수행에 곤욕을 겪은 지도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저 산신당 안에 있는 자는 이 사실을 알 리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말이 자신의 상황에 딱 들어맞았다. 그러니 육 산군은 저자가 말하는 이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육 산군은 자신이 맨 처음 물은 질문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다급히 다른 질문을 건넸다.
“선생. 혹시, 혹시…… 만회할 방법이 있을까?”
그 말에 계연이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꽉 막고 있던 커다란 돌덩이가 반은 사라진 것 같았다. 아주 적절하게 얼버무리는 데 성공했다!
“육 산군의 말을 듣자니, 산군이 사람을 먹는 것은 사람이 새나 짐승을 잡아먹는 것과 비슷하더군. 무분별하게 죽이지 않고,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낮에는 사냥하지 않고, 노약자는 먹지 않는다니. 참 보기 드문 요괴야, 하하하. 육 산군이 거지 행색의 나를 내버려 둔 것도 그 까닭에서였겠어!”
“어찌 함부로 손을 대겠는가! 선생 같은 고수를 육 산군이 건드릴 리 없지!”
또다시 마음이 복잡해진 육 산군은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처음에는 단순히 병든 인간이라 건드리지 않았지만, 점차 이 거지에게서 절대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사실은 이 거지가 고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그러한 추측이 사실일 줄이야.
계연은 섣불리 제 생각을 밀어붙이지 않고, 느릿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만회할 방법이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겠지. 단순히 사람을 먹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만회할 방법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아. 수행이란 수행자의 됨됨이와 같아서, 몸과 마음, 정신을 올바르게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네.”
계연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아무래도 이걸로는 호랑이 요괴가 겁먹을 리 없었다. 곧이어 그가 말을 덧붙였다.
“하늘은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자를 돕는데, 인간은 부족한 자를 착취해 풍요로운 자의 배를 불린다는 말이 있다네. 산군이 처음에는 수행을 어찌 생각하느냐 묻고, 다음에는 만회할 방법이 없느냐 물은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치지……. 육 산군, 당신과 나는 인연이 참 깊은 것 같아. 오늘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것 같군!”
말을 마친 계연은 잔뜩 긴장한 채 산신당 밖의 반응을 살폈다.
바깥의 호랑이 요괴는 눈썹을 매섭게 추켜세웠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했다. 골똘히 생각하던 육 산군은 그 말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이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어찌 되었든 산군의 마음은 한결 차분해졌다.
산신당 안팎의 침묵은 몇 분이나 이어졌다. 계연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지만, 희한하게도 허둥대지 않았다.
스스슥……. 스스슥…….
휘오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고심하던 육 산군은 네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산신당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날카로운 발톱이 계연의 심장을 콱 누르는 것 같았다. 차가운 식은땀이 또다시 등줄기를 적시자, 계연이 속으로 울부짖었다.
‘젠장, 젠장, 젠장! 이 빌어먹을 상황을 해결한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내 무덤을 파고 있었던 거야!?’
외려 장사림 일행이 침착하게 행동했다. 비록 긴장되어 미칠 것 같았지만, 첫째로 그들은 호랑이 요괴의 발소리를 듣지 못했고, 둘째로 옆의 이 거지가 고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덕분이었다.
계연과 장사림 일행이 호흡을 몇 번 고르는 사이, 육 산군은 산신당 입구에 도착했다.
계연과 뜨내기 장사꾼들이 질겁하던 그때, 커다란 머리에 날카로운 눈, 길이가 4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호랑이 요괴가 천천히 산신당에 들어섰다. 그의 옆에는 조금 전 이곳을 찾았던 육 서생도 있었다.
누런 털에 검은 줄무늬, 이마에는 ‘왕(王)’자 무늬가 나 있고, 독기 서린 눈빛은 흉악스럽기 그지없어서 보기만 해도 두려웠다.
뜨내기 장사꾼들은 무기를 쥘 힘마저 잃어, 하나둘씩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계연도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호랑이 요괴의 시선은 오직 무참히 훼손된 산신상 옆의 거지에게로 향했다. 비록 덥수룩한 머리에 얼굴에는 때가 가득 흘렀지만, 떴는지 감았는지 분간이 안 가는 창백한 두 눈은 입구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 육 산군, 선생에게 가르침 받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네!”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운 육 산군은 앞발을 모으더니 공수하는 자세로 계연을 향해 절을 올렸다.
뒤이어 네 다리로 바닥을 짚고 선 그는 매서운 호랑이 눈으로 창귀를 바라보았다. 그가 ‘흡’ 하며 숨을 들이마시자, 창귀의 몸에서 새하얀 기체가 흘러나와 호랑이 요괴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를 도와주면 풀어준다고 약조하였지. 이만 가봐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서생 창귀는 육 산군을 향해 연신 절을 올리더니, 이번에는 계연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마지막으로 그는 뜨내기 장사꾼들에게 머리를 조아린 뒤, 군말 없이 한 줄기 연기가 되어 형체를 감추었다. 그 연기는 산신당을 벗어나기도 전에 흩어져 사라졌다.
서생 창귀가 떠난 뒤, 육 산군은 한쪽에 모여 있는 뜨내기 장사꾼들을 쳐다보았다. 무서워 죽겠다는 그들의 눈앞에서 창귀 왕동을 뱉어낸 그는, 방금 했던 것처럼 창귀가 된 왕동의 혼을 풀어주었다.
이를 본 계연은 다소 경직된 웃음을 흘렸다. 다행히 자신의 목숨은 지켜낸 셈이었다.
“그럼 편히 쉬시게, 육 산군은 이만 가보겠네!”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일행을 겁에 질리게 했던 호랑이 요괴는 천천히 산신당을 빠져나갔다. 주변을 가득 메웠던 바람 소리 또한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