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붉은 여우
우르르 쾅…….
천둥소리가 울리고, 하늘에 또다시 뱀 모양의 번개가 그려졌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은 계연이 산속의 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까지 내리니, 눈이 반쯤 멀어버린 그가 하산하기엔 최악의 환경이었다.
등산은 쉬워도 하산은 어렵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지금 그의 상황이 딱 그러했다!
‘아니면…… 조금만 더 쉴까?’
솨아아…….
머지않아, 빗줄기가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 산의 날씨는 실로 변덕스러웠다. 지금 내려가면 죽을 게 뻔하다고 생각한 계연은 이만 고민을 접었다.
계연은 그대로 산신상 앞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추슬렀다.
마음이 차차 안정을 되찾자, 무채색의 아름다운 광경이 빗소리를 따라 천천히 계연의 뇌리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빗물에 목욕하는 산의 생동감 넘치는 풍경이 서서히 계연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거친 빗줄기 사이로 계연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장면은 보는 이에게 활력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계연은 심지어 고기를 구워 먹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바로 그때, 빗속에서 길을 잃은 듯 갈팡질팡하는 작은 동물의 발소리가 들렸다. 산신당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던 녀석은 산신당 지붕 아래에 몸을 숨겼다.
작은 동물의 몸에서는 뚝뚝 빗물이 떨어졌다. 조심스레 산신당 안으로 들어선 녀석은 문을 넘자마자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향탁 앞에 앉아있는 계연을 발견한 듯했다.
계연이 눈을 떴지만, 시야는 여전히 희뿌옜다. 어렴풋이 보이는 윤곽으로 미루어 보아, 평범한 시골 개보다도 몸집이 작은 동물이었다.
조금 전 소리를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녀석은 조그만 여우였다.
여우는 상당히 겁이 많아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없었다. 계연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산신당 곳곳에 쌓인 동물의 분변에서 알 수 있듯이, 엄밀히 말하자면 이 황폐한 산신당은 평소 산짐승의 차지였다. 계연과 뜨내기 장사꾼들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했다.
모두가 비를 피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혼자 있느라 무료했던 계연은 이 여우를 내쫓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여우는 굉장히 선명한 색을 지닌 붉은 여우였다. 산신당 입구에 앉아 줄곧 계연을 응시하던 녀석은 계연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녀석은 산신당 입구와 가까운 벽에 찰싹 달라붙은 채, 몸을 털어댔다.
투둑, 투둑, 투둑, 투둑…….
붉은 여우 털에 묻어있던 빗방울이 빠르게 사방으로 튀었다. 몇 미터 떨어진 계연에게도 물방울이 튀니, 계연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우가 물을 털어내는 동안, 계연은 여우의 사소한 부분까지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복슬복슬한 털의 가닥가닥까지 선명히 그려지는 걸 보니, 매우 아름다운 여우가 틀림없었다.
이 여우는 꽤 얌전했다. 몸을 털던 녀석은 산신당 입구 쪽에 엎드린 채 휴식을 취하였고, 이따금 경계 어린 눈빛으로 계연의 반응을 살폈다.
사람과 여우, 하나는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고, 다른 하나는 산신당 안에서 비를 피했다. 둘은 아무런 말 없이 평화를 지켰다.
그 무렵, 계연은 드디어 허기를 느꼈다. 무언가를 먹고 싶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마대에 요깃거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바닥을 더듬으며 마대를 펼친 그는 자루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과자는 돌처럼 딱딱했고, 만두도 푹신한 건 아니었지만 과자보다는 상태가 양호했다. 그는 만두 하나를 쥐어 들었다.
계연은 만두를 반으로 찢어 냄새를 맡았다. 쉰내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만두를 입에 물었다. 희한하게도 먹을수록 허기가 졌다. 계연은 만두 하나를 20초도 되지 않아 해치웠다.
그는 만두를 하나 더 집어 들어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자루 안의 음식을 모두 먹어 버리고 싶었지만, 계연은 애써 식욕을 억누르며 식사를 마쳤다.
자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만두 두 개를 먹었는데, 만두 하나는 뭉개져 먹을 수가 없었다. 자루 안에 손을 넣고 수를 헤아려 보니, 고작 만두 두 개와 과자 세 개가 남아 있었다.
21세기를 살아온 청년으로서, 계연은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생활했다. 언제나 먹고사는 게 걱정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굶어 죽을까 봐 마음 졸인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여태 이런 방면으로는 파악하는 게 매우 느렸다. 계연은 이제야 깨달았다. 남은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게다가 무사히 산에서 내려간다고 해도 아는 이 하나 없는데, 앞으로 무얼 하며 생계를 잇겠는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구걸이라도 해야 하나?’
“짜증 나아아!”
계연이 결국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여우가 경계하며 몸을 일으켰다.
녀석의 움직임에 그가 말했다.
“하하, 여우야, 너한테 줄 거 없어. 만두랑 과자가 조금 있긴 한데, 너는 이런 걸 먹지 않고, 나도 이걸 나눠줄 생각 없어. 오히려 네가 나를 잡아먹는다면, 내가 걱정을 좀 덜 수는 있겠네.”
스으…….
여우가 털을 쭈뼛쭈뼛 세우며 계연을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농담이야, 농담! 너는 그냥 가서 들쥐나 토끼 같은 거 잡아먹어…….”
계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자신의 목소리와 행동이 여우를 자극한 것이 틀림없었다. 토끼도 놀라면 사람을 무는데, 나름 들짐승인 여우는 어떻겠는가!
그 후로 한참 동안 둘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여우는 다시금 모퉁이에 자리를 잡아 엎드렸고, 계연 또한 한숨을 쉬며 멍하니 향탁에 기대었다.
* * *
오늘은 어제보다 적은 비가 내렸다. 머지않아 비가 그쳤지만, 한차례 산을 휩쓸고 간 비 때문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추위를 느낀 계연은 뜨내기 장사꾼들이 남겨둔 옷을 입고, 그 위에 비옷을 걸쳤다.
어제 장사꾼들의 대화를 미루어 보면, 지금은 아마 초봄일 것이다. 날이 쌀쌀한 건 정상이었지만, 계연이 두 차례에 걸쳐 본 비는 결코 평범한 봄비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안 그래도 늦잠을 잤는데, 비가 그치고 나니 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었다. 가뜩이나 산은 순식간에 어두워지는데, 길까지 미끄러웠다. 계연이 아무리 용감하다 할지라도, 지금 산에서 내려갈 순 없었다.
오늘 밤에는 뜨내기 장사꾼들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몸을 데울 불더미도 없다는 소리였다.
“휴…….”
계연이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의 앞날이 너무도 비관적이었다. 현재 남은 희망이라고는 내일 날이 맑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계연은 부디 비극적인 이 상황에 조금의 빛이라도 스미길 바랐다.
역시나 계연의 예상대로 산은 순식간에 어둠에 사로잡혔다. 곧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계연의 마음에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낮처럼 향탁 앞에 앉아있기가 겁났던 그는 다시금 산신상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산신당 안에서 비를 피하던 붉은 여우는 언제 나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계연의 마음은 어제보다 더욱더 초조해졌다. 이곳에는 오직 계연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어젯밤 호랑이 요괴를 속였는데, 설마 하루 만에 사실을 알아차리고 자신을 쫓아오진 않을 것이라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불안감 속에 꾸벅꾸벅 졸던 계연은, 처음 듣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아직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먼 산길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번뜩 차린 그는 산신당 뒤 낡은 멍석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설마, 진짜야? 이 허름한 신당이 무슨 교통의 허브도 아니고, 매일같이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설마 또 창귀는 아니겠지? 아니야, 아니야, 발소리가 들리잖아. 진정하자, 진정!’
* * *
아홉 사람이 다소 먼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의 발소리는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다.
남녀가 섞인 일행에는 젊은이가 대다수였다. 이들 대부분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칼을 든 사람이 가장 많았고, 몇 명은 끝을 쇠로 감싼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일행 중간에 있는 두 사람은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마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들의 몰골은 참으로 딱했다. 비옷을 입지 않아서인지, 조금 전 비를 피했는데도 온몸이 빗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수술이 달린 검을 들고 앞장서서 걷는 젊은 사내의 이름은 연비(燕飛)로, 그는 육 척(*약 180cm) 장신에 균형 잡힌 몸매,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을 지닌 사내였다.
앞을 사리던 그가 먼 곳을 가리키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저기 산신당이 있으니, 저기서 쉬다 가지. 가서 불 좀 쬐면서 기력을 보충하자고!”
“좋아, 다들 빨리빨리 움직이자. 비가 와서 그런지, 산길을 걷기가 힘드네!”
한 여인은 손목과 발목이 좁은 단정한 옷에 짧은 겉옷을 두르고 있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옷은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몇 걸음 내딛던 여인은 힘차게 발을 흔들어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우리 중에 우비 가져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정말 어이없어.”
여인은 걸음을 재촉하며 짜증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쇠를 덧댄 막대기를 든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낙(洛) 사매(師妹), 산속 날씨는 예측할 수 없어. 산을 오르기 전까지는 분명 해가 쨍쨍했는데, 이럴 줄 누가 알았겠어.”
“웃긴 뭘 웃어, 너도 비에 젖은 생쥐 꼴이구먼!”
“됐어, 그만해, 여기 놀러 온 거 아니잖아. 다들 신당에 들어가서 잠시 정비하자고!”
땅이 질퍼덕해서 일행의 걸음걸이가 우물쭈물하긴 했지만, 그들의 보폭은 꽤 빠른 편이었다. 곧이어 그들이 산신당 앞에 도착했다.
낡고 황폐한 산신당 주변에는 비쩍 마른 고목들이 빼곡히 자라있었다. 바위와 나무 그늘에 가려 빛이라곤 들지 않는 이곳은 저녁이 되자 음산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까악! 까악!
산신당 뒤편의 고목에서 들려오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무서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가볍게 걸음을 옮기던 아홉 사람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늦추었고, 말소리 또한 줄어들었다.
산신당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지만, 대문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바람과 비를 피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산신당 지붕 아래로 걸어온 연비는 내부를 슬쩍 살피다, 앞서 뜨내기 장사꾼들이 불을 피우고 간 흔적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선진 사람들 말이 맞아. 여기는 사람들이 자주 쉬다 가는 곳이 분명해. 그래도 다들 조심하는 게 좋겠어.”
산신당 안의 계연은 이 일행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 전 길에서는 썩 큰 소리로 서로를 원망하더니, 지금은 외려 조심스레 행동했다.
하지만 그는 마음 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없을 땐 누구라도 나타나길 바랐거늘, 정말로 누군가 나타나자 상대가 극악무도한 악인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무래도 현재 그는 자신의 몸을 지킬 힘이 없지 않은가.
일행은 산신당 밖을 한 바퀴 빙 둘러본 뒤에야 안으로 들어왔다.
연비가 제일 먼저 산신당 내부에 발을 들였고, 나머지 사람들이 그를 뒤따랐다.
잿더미와 장작을 여러 번 살펴보던 그들은 살금살금 산신당 쪽으로 다가왔다. 산신당 천장과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산신당 뒤편을 가장 유심히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