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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11화 (11/892)

11화. 말릴 수 없는

가장 먼저 계연을 발견한 사람은 역시 연비였다. 무리의 선두에 있다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모닥불이 피워졌던 곳을 대충 살피던 그는 고개를 들어 산신당 뒤편에 앉아있는 계연을 발견했다.

“거지잖아?”

다른 사람들 또한 가까이 다가와 계연을 살펴보았다.

“이봐, 비렁뱅이, 여기 당신 혼자요?”

긴 막대를 들고 있던 사내가 계연을 향해 외쳤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계연은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계연은 무의식적으로 새끼손가락으로 왼쪽 귀를 후볐다.

일행의 호흡은 보편적으로 뜨내기 장사꾼들보다 더 힘차고 길게 이어졌다. 계연은 그들이 평범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일행 앞에서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 얌전히 묻는 말에 대답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네, 당신들이 오기 전까지는 저 혼자였습니다.”

계연은 사실 ‘당신들까지 합치면 혼자가 아닌데?’라며 농담하려고 했지만, 여긴 키보드만 두드리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에게 매우 낯선 세계였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두들겨 맞을 수도 있었다.

일행 중 낙 사매라고 불리던 여인이 처참한 몰골의 계연을 보며 의아한 듯 목소리를 냈다.

“이 산에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 요괴가 있다던데, 어찌 혼자 산에 있는 거죠?”

호기심에서 우러난 질문이겠지만, 계연은 그들을 따라 산에 내려가고 싶었다. 적어도 시도는 해 봐야 했다. 그가 울상을 지으며 정말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어쩌겠습니까. 저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데, 저를 이곳에 데려온 사람이 혼자 가버린걸요. 산에 범이 살고 있다 한들, 누가 저를 부축해주지 않으면 저 혼자 산에서 내려가기엔 역부족이에요.”

동정심, 동정심을 유발해야 해!

그때, 이글거리는 눈빛의 청년이 일행을 향해 손짓하더니 계연과 자신의 눈을 번갈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거지의 두 눈으로 향했다. 살며시 뜬 거지의 눈은 투명하고 반짝였지만, 이상하게도 회백색을 띠었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눈이 멀었네…….”

이 작은 목소리는 계연의 귀를 피하지 못했다. 그 소리에 계연의 머릿속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작게 말했다는 것은 계연의 상황을 염려하는 것이었으니, 최소한 저 사람의 마음은 그리 악독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계연은 자신이 이곳을 떠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긴 막대기를 든 사내가 낙 사매와 다른 사람들을 슬쩍 보더니, 계연에게 말했다.

“우리를 마주친 게 운 좋은 줄 아쇼. 우리가 사람을 잡아먹는 그 범 새끼를 처리하고 나면, 당신을 산 아래까지 데려다주겠소!”

기쁨에 젖어있던 계연은 사내의 말에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범 새끼를 처치한다니, 무슨 범? 설마 육 산군은 아니겠지?’

“그…… 산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망설이던 계연이 그들에게 물었다.

이번 역시 막대기를 든 사내가 유난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하……. 이 산에 식인 호랑이 요괴가 산다는 소문이 돈 지 꽤 됐지만, 관아에선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소. 무인의 길을 걷는 우리는 영안현(寧安縣) 관아에서 써 붙인 방문(榜文)을 보고, 수선진 백성들을 위해 놈을 제거하러 온 자들이오!”

“그럼, 그럼!”

“옳소!”

사내와 여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고, 자신만만하게 의협심을 드러냈다.

계연이 넋을 잃었다. 그의 머릿속엔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이 사람들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 * *

눈먼 거지 신세인 계연은 본디 일행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산을 찾은 까닭을 설명한 일행은 각자 산신당 안에서 할 일을 했다.

쿵, 쿵.

커다란 자루 두 개가 산신당 구석에 놓였다. 계연은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자루 안에서 간혹 돼지와 양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니 말이다.

“비렁뱅이, 여기 있는 장작 당신 거면 우리가 좀 써도 되겠소? 우리가 시장가에 사는 것으로 하죠.”

수술이 달린 검을 짊어 멘 사내가 소리쳤다. 넋을 놓고 있던 계연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마음껏 쓰라며 손짓했다.

다만 연비는 그저 예의상 저리 말할 뿐, 계연에게 장작 비용을 내진 않았다. 계연 또한 돈을 달라며 조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산신당 안 거지에게 더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주변을 정리하고, 누군가는 불을 지핀 뒤,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쉬기 시작했다.

계연은 이미 일행이 죽을 길을 찾는다고 단정했지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지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를 보니, 결코 악인은 아니었지만, 장사림 일행처럼 다정하고 친절하진 않았다. 괜히 그들의 신경을 긁었다간, 다시 산신당에 버려질지도 몰랐다.

가만히 지켜보던가, 귀를 기울이는 게 좋았다.

‘만일 저들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라면, 육 산군을 항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계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홉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귀담아들었다.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을 때 나는 마찰음에서 계연은 그들이 가져온 무기가 한둘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길고 다부진 호흡을 보니, 그들은 진정한 무술인이 확실한 것 같았다.

‘이곳의 무림 고수는 지난 생의 고수들과 같을까, 아니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지붕 위를 날아다닐까? 요괴가 된 호랑이와 상대가 될까? 혹시 저주 부적 같은 걸 가져왔나?’

계연은 걱정스러우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일행을 지켜보았다.

불이 다시금 타올랐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불을 지폈다. 어떤 이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나무 막대에 넌 뒤에 불에 옷을 말렸다. 남녀가 함께 있는데도 그들은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지 않았다. 계연은 그들이 미끼로 호랑이 요괴를 유인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당장 행동하진 않을 듯했다.

“수선진 사람들이 그러는데, 범 때문에 피해를 본 게 꽤 오래되었대. 지금까지 놈이 잡아먹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더군.”

횃불 옆에 앉아있던 낙 씨 성의 여인이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채 나뭇가지로 숯을 뒤집으며 작게 물었다.

연비가 천으로 제 장검을 조심스레 닦으며 대답했다.

“맞아. 그래도 범에게 잡아먹힌 사람은 실종자 중 일부일 거야, 여기 산세가 꽤 험하잖아. 어처구니없게도 수선진에는 그것이 요괴의 짓이라는 소문이 돌지만 말이야.”

연비의 말에, 발치에 귀두도(*鬼頭刀: 검 손잡이에 귀신 머리 모양의 장식이 달린 흉포한 도검)를 내려놓은 사내 또한 대화에 끼어들었다.

“누가 아니래. 나랑 연비가 우규산 호랑이 요괴에 관해 수소문할 때, 수선진 사람들이 함구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더라고. 찻집의 한 노인이 꺼림칙한 얼굴로 산에 요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더라니까. 하하하, 이 세상에 진짜 요괴가 있으면, 진작 내 앞에 나타났겠지. 안 그래?”

“황당하기 짝이 없어. 멀쩡하게 산을 오가는 사람들도 많잖아!”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사내가 모닥불에 장작을 더하며 웃었다.

“됐네, 됐어. 우리가 자진해서 나선 것이니, 그들 대신 일을 해결해주면 돼. 진짜 요괴가 있는 거면 차라리 잘 됐지, 나 육승풍(陸乘風)이 그놈 얼굴 한번 보고 싶거든!”

“하하하, 그러네!”

옆에 있던 사람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젊고 무예를 지닌 그들에게 이번 여정은 웅대한 계획을 펼칠 절호의 기회였다. 강호에 명성을 떨치고 말 절호의 기회 말이다!

그들이 신나게 대화를 나눌수록, 계연의 희망은 빛을 잃어갔다. 보아하니 그들은 이 산에 진짜 요괴가 산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듯했다.

계연은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서 저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나중에 요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다.

젊은 무술인 아홉 명은 거지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듯했다. 이렇게 된 이상, 계연이 직접 그들의 주의를 끄는 수밖에 없었다.

“크흠, 큼……. 혹시 범을 잡으러 오신 용사들입니까?”

계연이 헛기침한 뒤 떠보듯 물었다.

그의 질문에 일행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맞소, 우리는 현 관아의 방문을 보고 문제를 해결하러 온 자들이오.”

“아.”

계연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그는 최대한 도발적이지 않으면서도 일행의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냈다.

아니나 다를까, 거지의 반응에 연비를 비롯한 사람들이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보게, 뭐 할 말이라도 있소?”

연비가 되묻자, 계연이 착실하게 말을 이어갔다.

“별건 아니고, 범을 잡으러 오신 영웅들께 감탄한 거였어요. 다만 적을 때려잡기 전에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워야 하듯,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도 철저히 준비해야 할 텐데, 협객들께선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계연은 최대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도록 말했다. 거지처럼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행동하면 일행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과연, 거지가 조금 전과는 다른 태도를 선보이며 옹골지고 중후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을 늘어놓자, 일행은 그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집 밖에선 함부로 아무나 얕보지 말라던 웃어른의 말씀이 떠올랐다. 동료를 살피던 연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지를 향해 몇 걸음 다가갔다. 그 거지를 자세히 관찰하던 그가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범은 한밤중에만 출몰한다고 하여, 우리는 살아있는 돼지와 양을 미끼 삼아 밤 동안 호랑이 요괴를 유인한 다음, 순식간에 놈을 덮칠 계획이오.”

계연이 당황했다.

“그게 끝인가요? 다른 계획이나 방법은 없습니까?”

이들은 구덩이나 그물망 같은 함정을 설치할 생각도 하지 못한 듯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수련하여, 비범한 실력의 소유자들이오. 호랑이 요괴는 아무리 흉포할지언정, 짐승에 불과하오. 손에 검을 쥔 우리가 힘을 합쳐 공격하면, 그놈 하나 못 잡을 것 같소?”

이럴 수가. 이들은 호랑이 요괴의 적수가 되긴커녕,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계연은 기분이 울적해졌다.

‘보아하니 허세를 좀 부려야겠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그가 입을 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짝짝짝…….

그가 낮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좋아요, 아주 호기롭습니다. 다만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만약 이 산중에 평범한 호랑이 요괴가 아닌 요괴가 된 괴물이 살고 있다면, 다들 자신 있으십니까?”

“요괴?”

“진짜야, 가짜야…….”

“수선진 사람들도 저리 말했어!”

협객들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금 거지를 바라보았다.

“비렁뱅이, 괜히 허풍 치지 마쇼!”

마음을 한결 내려놓은 계연은 여전히 미소지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두 눈에 아홉 사람은 절로 입을 다물었다.

“보잘것없는 제가 경솔하게 입을 열면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 십상이죠. 하지만 당신들을 옆에서 지켜본 결과, 의협심이 강한 당신들은 하늘 아래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리란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런 당신들이 이대로 목숨을 잃게 내버려 둘 순 없어서, 참다못해 입을 연 겁니다.”

사람을 설득시킬 땐, 약간의 아부도 떨어주는 게 좋았다. 이것은 계연이 오래전부터 터득한 이치였다.

역시, 그의 말에 아홉 사람은 속으로 뿌듯해했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비렁뱅…… 크흠, 당신의 호의는 잘 알겠소만, 우리는 놈을 잡기로 한 이상 힘이 닿는 데까지 싸울 것이오. 게다가 요괴는 아무래도 와전된 소문 같군요. 우리가 정말 뜻밖의 일을 당하더라도, 다른 이를 탓할 순 없는 노릇이오!”

연비의 정의로운 말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연의 칭찬은 그들의 마음속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연비의 말은 모두의 마음을 대변했다. 자신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 이번 여정에 오른 게 아니지 않던가!

그 말을 끝으로 연비는 계연을 향해 읍을 해 보였다.

“의견을 내주어 정말 고맙소!”

뒤이어 불가로 돌아간 그는 눈을 붙였다.

‘될 대로 되라지.’

더욱더 자신만만해진 일행의 모습에 계연은 그들을 말리지 않기로 했다. 괜히 고집을 부렸다가 그들에게 미움을 사고, 육 산군에게 오해를 사 버리면, 계연의 입장만 난처해질 것이다.

그들과 함께 호랑이를 잡으러 갈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계연은 그저 전날 밤 자신이 육 산군에게 해준 말들이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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