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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14화 (14/892)

14화. 희망

순간 육 산군은 ‘수행이란 사람의 됨됨이와 같아서, 몸과 마음, 정신을 올바르게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헤아렸다. 심지어는 ‘하늘은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자를 돕는데, 인간은 부족한 자를 착취해 풍요로운 자의 배를 불린다’는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이해력이 놀랍도록 뛰어났다.

선생은 이 아홉 사람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이들을 빌려 자신에게 절호의 기회를 선사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완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다!

“또 한 번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다니, 정말 고맙네!”

호랑이 요괴는 감격스러우면서도 공손한 어투로 산신당 안을 향해 대답했다. 뒤이어 그가 고개를 돌려 육승풍 일행을 바라보자, 넋이 나가 있던 그들은 순식간에 정신을 번뜩 차렸다.

“선생의 분부라면 응당 따를 것이네. 내 이들을 산 아래까지 데려다주어도 되겠는가?”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저희끼리, 저희끼리 산에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육승풍을 비롯한 사람들이 다급히 거절했다. 인제 호랑이 요괴가 저들을 잡아먹을 리 없다는 걸 명백히 알았지만, 진짜 요괴와 함께 있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계연 또한 황급히 호랑이 요괴의 말을 받아넘겼다.

“저들이 알아서 돌아갈 걸세. 인간 세상엔 요괴에 관한 선입견이 파다하니, 육 산군은 이만 산으로 돌아가 수행하는 것이 좋겠군!”

이제야 계연과 육 산군의 생각이 서로 통했다. 육 산군은 사실 일찍이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계연의 체면을 생각해 예의상 이런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런데 계연이 그에게 얼른 돌아가 수행하라고 하니, 그는 선생은 실로 유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인사를 건네고 사라지려던 육 산군은 순간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금 산신당 안을 향해 말했다.

“오늘 또다시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나, 내 보답할 만한 물건이 없네. 다만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들의…… 젊은 협객들의 사정을 봐주기로 하지.”

이내 호랑이 요괴가 뒤로 돌아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그는 겁에 질려 미동도 하지 못하는 일행을 바라보며 꽤 인간다운 미소를 드러냈다.

“오늘 너희는 산을 내려가서 마을에 이리 전해라. 산중의 식인 호랑이 요괴는 죽었으니, 모두가 걱정 없이 우규산을 올라도 된다고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육 산군은 으르렁 소리와 함께 입속에서 새하얀 호랑이 가죽을 토해냈다. 가죽은 마치 방금 벗겨낸 것처럼 피로 물들어 있었다.

뒤이어 육산군이 매서운 눈빛을 반짝이더니, 뒤로 돌아 산신당을 향해 공수하며 인사를 올렸다.

“계 선생, 제자는 이만 가보겠네!”

계연이 곧바로 대꾸하지 않자, 호랑이 요괴는 남몰래 기뻐하며 도망치듯 멀리 달려갔다. 그는 마치 바람을 따라 남겨진 잔영처럼 빠른 속도로 산신당을 벗어났다.

계연은 속으로 외쳤다.

‘인제 뭐라고 하는지 안 들려, 안 들린다고!’

육 산군이 멀리 사라지고 난 뒤, 산신당 안팎의 사람들은 뜨거운 물에 목욕이라도 한 듯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한 사람은 이번에도 잘 넘겼다며 한숨을 쉬었고, 한 무리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것에 기뻐했다.

겨우 시름을 놓은 계연은 갑자기 전기가 통하듯 온몸이 저릿해졌다. 손을 들자, 아주 가느다란 전기 불꽃이 보였다. 그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바둑돌 모양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머지않아 그 형상은 손가락 사이로 감쪽같이 사라졌고, 계연의 몸도 동시에 파르르 떨렸다.

계연이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땐, 이전의 모든 것이 환각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어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 * *

잠시 쉬고 난 뒤, 정신을 차린 산신당 밖의 사람들은 허겁지겁 산신당 안으로 들어와 거지처럼 생긴 고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그들 덕분에 의심의 굴레에 갇혀있던 계연도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산신당 안의 모닥불은 곧 꺼질 듯, 붉은 장작 한 더미만 태우고 있었다. 멀쩡히 설 수 있는 다섯 사람은 모두 읍을 하며 허리를 굽혔고, 연비를 포함한 부상자 넷은 있는 힘껏 감사 인사를 올렸다.

다만 이들은 한시라도 빨리 산을 내려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육승풍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계 선생, 저희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서 선생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이 실로 후회스럽습니다. 오늘의 은혜는 저희가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희 동료가 중상을 입어 더는 저희가 산에 머물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선생께서 저희와 함께 하산하시겠습니까?”

다행히도 그들은 이전에 약조한 일을 잊지 않았다. 계연이 이 제안을 거절할 리 없었다.

“몸이 편치 않으니, 당신들만 괜찮다면 함께 내려가야죠.”

그들은 계연이 동행하기를 고대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싫을 리가 없었다.

겨우 죽음을 면한 젊은 협객들도, 또한 고수 계연도, 더는 산에 머무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산신당의 밝은 불이 꺼지자, 그들은 곧바로 움직였다.

계연을 제외한 일행은 모두 어려서부터 무술을 연마한 덕분인지, 이 정도로 길이 미끄럽고 날이 어두운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 밤 일어난 일은 육승풍과 연비를 비롯한 사람들의 뇌리에 매우 깊이 새겨졌다. 이들은 세상에 정말 요괴가 존재한다는 것과 재야의 고수가 실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외심이 드는 한편, 자연스레 이 약조에 대한 압박감도 한층 짙어졌다.

지금까지는 만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협객이 되는 게 꿈이었다면, 앞으로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넷은 부상자를 업고, 육승풍은 계연을 업었다. 일행은 마치 바람을 탄 듯 빠른 속도록 산 아래 수선진을 향해 걸어갔다.

* * *

바위를 넘고, 시냇물을 건너, 산행객이 조약돌 사이로 남긴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일행들은 속도가 붙었다.

때때로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가 일행들의 머리를 스치고, 간혹 차가운 산바람이 몰아치기도 했다. 나무 그늘 밑으로 걸어서인지, 주변이 유난히 어둡게만 느껴졌다.

밤새 잠을 뒤척인 데다가, 적잖이 겁을 먹기까지 한 다섯 사람은 슬슬 체력이 바닥났다. 더구나 각자 사람까지 업고 있으니, 얼마나 힘에 부치겠는가. 하지만 채 가시지 않은 긴장감과 두려움이 그들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육승풍의 등에 업혀있는 계연은 마치 가냘픈 여인처럼 가벼웠지만, 계연이 이들에게 선사하는 심리적 압박감은 산더미만큼 무거웠다.

이들이 가장 외곽의 산봉우리를 넘자, 주변에 커다란 돌덩이가 가득한 냇가가 나타났다. 그제야 사람들은 시름을 내려놓았다. 이곳에서 산비탈을 따라 멀리 내다보니, 어렴풋이 수선진의 윤곽이 보였다.

“계 선생님,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도 되겠습니까? 동료들의 부상이 심해서, 쉬지 않고 길을 가기가 힘듭니다.”

육승풍이 자신에게 업혀있는 계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사람을 업고 가파른 산길을 걸은 사람도 힘들었겠지만, 등에 업혀있던 계연 또한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뻐근하고 시큰해서, 잠시 쉬었다 가기를 바라던 참이었다.

“좋지요. 여기서 잠시 쉬다 갑시다.”

계연의 대답에 일행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계연이 괜찮다고 하니, 그들도 안심할 수 있었다.

“잠깐 쉬었다 가자, 다들 조심해서 내려놓고!”

“그러지!”

일행은 사뿐히 동료를 내려놓았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체력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일행이 산길을 걸으며 펄쩍펄쩍 뛸 때마다 다친 부위에 통증이 배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애써 이를 악물며 참은 것이었다.

계연은 비스듬한 바위에 누워 살포시 눈을 감고 쉬는 척했지만, 사실은 조용히 주변의 부상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방이 환한 대낮인데도 그의 처참한 시력에는 변화가 없었다. 낮이면 낮대로 시야가 흐릿했고, 저녁이라고 시야가 더 또렷해지지도 않았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커컥! 욱…….”

떨리는 몸으로 냇가의 바위를 붙잡고 선 조룡이 새빨간 피를 토해냈다.

“조룡, 무슨 일이야? 물 좀 줄게, 기다려봐!”

“괜찮아…….”

낙응상은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떨리는 손가락으로 제 왼쪽 어깨를 어루만졌다. 호랑이 발톱에 긁힌 상처가 마치 칼자국처럼 선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연비의 몸에는 낙응상보다 더 깊고 큰 상처가 나 있었다. 혈을 꽉 눌러 지혈한 덕분에 피가 멎었지만, 어째서인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새하얀 도화지처럼 창백해져만 갔다.

상태가 가장 심각한 건 두형이라는 이름의 칼잡이였다. 아무래도 두형의 부러진 오른팔은 불구가 될 듯했다. 애써 고통을 참던 그의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계연은 차마 눈 뜨고 이 상황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저 정도 부상이라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불구가 되는 것은 무술인으로서 죽음보다 더 가혹한 결과였다. 두형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번 생에 다시는 손에 칼을 쥐지 못할 것이다.

계연의 흐릿한 시야 속에서 두형은 조용히 팔을 감싸 안았다. 아마도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물 좀 마셔, 두형.”

육승풍이 그에게 물주머니를 건네었다. 힘겹게 웃음 짓던 두형은 마치 술을 마시듯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하…….”

계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협객 일행의 마음씨는 어디 하나 모진 구석이 없었다.

“계 선생님, 저희는 어찌 되든 상관없습니다. 그렇지만 두형은……. 선생님께서 두형을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바위 위에 누워있던 연비가 주먹을 꽉 쥔 채 조용히 계연에게 물었다. 몸에 힘을 주어서인지, 그의 상처에서 주륵 피가 흘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순식간에 계연에게로 향했다. 더욱이 두형의 눈에는 희망의 빛이 솟아났다. 그들은 문득 눈앞의 거지가 맹호 요괴마저 공경하는 고수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제길, 나한테 방법이 있기는 개뿔, 내가 의사냐!’

계연은 머리를 쥐어짰다. 열 번 잘해줘도 한 번 잘못하면 미움을 사는 게 인간관계였다.

‘내가 이 사람들을 구해주었지만, 영검한 묘약을 찾아주지 않았다고 외려 원한을 사면 어떡하지?’

“하하! 제가 산에 요괴가 된 범이 있다고 미리 말했잖아요. 근데 당신들은 들은 체도 안 하셨죠!”

입을 연 계연이 잠시 뜸을 들였다. 일행이 낯간지러운 듯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계연은 말을 이어갔다.

“아휴, 안타깝지만 제가 의술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서 말입니다. 지금 제 눈도 치료받지 못해서 이 모양인데, 어찌 다른 사람을 신경 쓰겠어요. 다만, 세상에는 의술에 능한 사람들이 많으니, 어쩌면 아직 가망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두형이 왼손으로 오른팔을 감싼 채로 이를 악물더니 땀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계 선생님, 저는 시비를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앞서 저희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또 저희를 살려주셨으니, 저희는 이 은혜를 평생 갚아야지요. 그리고 이토록 괴로운 결과 또한…… 저희가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의 말에 일행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계연은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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