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15화 (15/892)

15화. 안정을 되찾다

두형이 절망에 빠질까 봐 다들 걱정스러웠던 것일까? 일행 모두가 조용히 생각에 잠긴 그 순간, 계연이 심오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고난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두(杜) 협객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두형과 일행은 다시금 계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계연은 이미 두 눈을 감고, 입을 굳게 다문 상태였다.

잘난 체했으니, 자는 척할 시간이었다. 지금 계연의 심정은 짜릿함 그 자체였다.

잠시 망설이던 육승풍이 계연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계 선생님, 마을 사람들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요? 이 백호 가죽은 저희가 사냥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맹호 요괴는 일행에게 갓 벗겨낸 보기 드문 백호 가죽을 주며, 범 사냥에 성공한 척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일행의 처참한 몰골에, 육승풍은 도저히 그런 말로 마을 사람들을 속일 수가 없었다.

이에 계연이 화들짝 놀랐다.

‘당신들 미쳤어? 진실을 말했다가 간덩이가 부은 누군가가 요괴 사냥에 나서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요괴를 잡으면 몰라도, 실패하면 육 산군이 당신들을 가만히 둘 것 같아?’

바위 위에서 엄숙하게 몸을 일으켜 앉은 계연이 하얀 눈을 반쯤 뜨며 말했다.

“육 산군은 우규산에 자리 잡은 맹호 요괴요. 우규산에 은거하며 밤마다 사람을 잡아먹지요. 자칫 육 산군의 성질을 건드리면, 놈은 또다시 사악한 마음을 품을 겁니다.

육 산군이 당신들에게 말했죠. 마을 사람들에게 산에 사는 식인 호랑이는 죽었다고 전하라고 말이에요.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고, 당신들이랑도 관계가 있는 일이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신들이 식인 맹호를 처리했다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모두 계 선생님 덕분에…….”

육승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연이 손을 뻗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의 이야기도 다른 사람에겐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에 당신들처럼 용감히 싸우기 위해 산에 들어갈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계연의 진심 어린 말은 좌절감에 빠져있던 협객들의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던졌다.

육승풍이 또 입을 열려고 하자, 계연은 재빨리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제발 좀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다들 그냥 쉬어!’

계연은 하마터면 그들에게 소리칠 뻔했다.

‘그냥 이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고, 호랑이를 때려잡은 영웅이 되면 되잖아!’

어찌 되었든 그 후로 아무도 이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협객들 모두는 사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이토록 커다란 대가를 치렀는데 사람들에게 손찌검과 조롱까지 받으면, 그땐 정말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계연은 겨우 숨을 돌렸다.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건 참으로 고된 일이었다. 그의 언변이 뛰어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일찍이 분위기가 냉랭하게 가라앉았을 것이다.

무사히 산에서 내려가게 된다면, 계연은 제일 먼저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다음으로 눈을 치료할 수 있는지 알아보거나, 도를 닦으러 어딘가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물론 육 산군이 떠날 때 왜 자신의 신체에 변화가 발생한 것인지, 그리고 반짝이다가 사라진 바둑알의 정체는 무엇인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은 십중팔구 난가기국과 관련이 있을 거야. 어쩌면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열쇠일지도 몰라.’

일렁이는 산바람을 맞으며 잠시 마음을 내려놓으니, 계연은 어느덧 나른해져 잠이 들었다.

자신이 예전에도 이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 온 뒤로 자신의 스트레스 대처 능력이 나름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행은 냇가에서 15분 정도 휴식했다. 충분히 체력을 회복한 그들은 부상자들의 상태를 살핀 뒤, 다시금 산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모두가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여 마을에 도착했다.

일행이 수선진에 도착하자, 고요한 거리에 야경꾼 하나와 의용병(義勇兵) 차림의 사내 둘이 서 있는 모습이 일행의 시야에 보였다. 한 사람은 경탁(警柝)을, 다른 한 사람은 징을, 나머지 한 사람은 등롱(燈籠)을 들고 있었다.

* * *

탁……. 탁탁탁!

대나무 경탁이 느리게 한 번, 빠르게 세 번 소리를 내었다.

“사경(*四更: 새벽 1시에서 3시)이오!”

댕……. 댕댕댕!

“사경이오!”

한 바퀴를 빙 돌고 한산한 거리를 둘러보던 세 사람은 옷깃을 여미며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어 그들은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제 낮에 유랑객 몇이 산에 들어갔대.”

“거긴 왜?”

“현 관아에서 써 붙인 방문을 보고, 우규산에 범을 잡으러 갔다던데!”

“뭐라고?”

경탁을 들고 있던 야경꾼이 사뭇 긴장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시기에 산에 들어간다고? 물건 파는 사냥꾼이 그러는데, 저 산에 있는 범은 그냥 범이 아니라, 요괴나 다름없대. 그렇게 노련한 사냥꾼도 해가 지면 산에 있기가 겁난다잖아.”

“에이, 그건 좀 아니다.”

“요괴가 없으리란 법 있나!”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는데 날씨까지 쌀쌀해지니, 그들은 저도 모르게 발길을 재촉했다.

골목 끝에 다다라 모퉁이를 돌려던 그때, 그들 중 한 사람이 멀리서 다가오는 일행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육승풍 일행이었다.

“저거 사람이잖아!”

거리가 조금 더 좁혀지자, 거대한 백호 가죽을 발견한 세 사람은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 * *

아홉 명의 협객들이 마을에 돌아온 다음 날, 백호 가죽은 영안현 관아에 올려졌다.

현 관아의 정청(*正廳: 건물 정중앙의 대청)에는 여전히 고약한 악취가 검붉게 말라붙은 핏자국으로부터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핏자국이 묻은 백호 가죽은 네모반듯한 탁상에 널려 있었다.

어찌나 정교하게 가죽을 벗겨냈는지, 머리와 발톱, 꼬리까지 그 모양이 흐트러짐 없이 온전했다.

“아이고야! 이빨까지 그대로 있네!”

“와아, 이 입 좀 봐요. 제 머리보다 커요!”

“대체 사람을 몇이나 잡아먹었을까!”

“엄청나게 무시무시하네! 이놈이 글쎄 요괴가 되기 직전이었다더군!”

“그럴 만도 하지. 인제 죽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벌써 요괴가 되었을지도 몰라!”

“어휴. 협객들이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아주 독종이네!”

“제 말이요. 그 다친 사람들만 봐도 그래요.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던지, 보는 제가 다 무섭더라니까요! 현에서 제일가는 동(童) 의원이 그러는데, 실력이 좋은 무술인들이라 이 정도 부상으로 끝났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거라더군요!”

몇몇 관아에서 부리는 아역(衙役)과 문관인 주부(主簿)가 백호 가죽을 둘러싼 채 혀를 내둘렀다.

현령(*縣令: 현의 장관) 진승(陳昇)과 현위(*縣尉: 현령의 보좌관) 주언욱(朱言旭)도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이를 지켜보았다.

“하하하! 대인, 사나운 범이 사라지다니……. 드디어 우리 영안현이 마음을 놓을 수 있겠습니다.”

“물론이지! 주 현위, 뛰어난 사냥꾼을 찾느라 수고했네. 범 가죽을 잘 무두질하여, 영안현 관아 입구에 열흘간 전시하도록 하지. 민심을 달래야 하지 않겠나!”

“대인, 훌륭한 고견이십니다.”

영안현 백성들은 산을 의지해 생활했다. 기본적인 경작을 제외하면, 물자가 풍부한 우규산이야말로 영안현의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악독한 범이 사라진 것은 크나큰 경사였고, 이에 영안현에 사는 향신(*鄕紳: 퇴직한 벼슬아치)들은 절 옆에 시장을 열어 이를 축하하기도 했다.

* * *

부상을 입은 네 사람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연비와 낙응상은 상처를 봉합하고 금창약(金瘡藥)을 바른 다음, 혈기를 다스리는 약을 두 차례 복용했다. 원기를 회복하고 나니, 더는 문제 될 게 없었다.

호랑이 꼬리에 얻어맞은 조룡은 내상을 입었지만, 원체 몸이 튼실한지라 큰 이상은 없었다.

다만 두형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팔뚝 뼈를 다시 맞추긴 했으나, 그 안의 근육과 뼈가 완전히 손상되어 회복되기는 쉽지 않았다. 동 의원은 운이 좋으면 젓가락 정도는 집을 수 있겠지만, 칼을 들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계연은 뭘 했냐고?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 외에, 계연이 한 가장 큰 일은 다름 아닌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인 거지가 대체 얼마간 씻지 않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객잔(客棧) 점원들이 목욕물을 세 번이나 갈았는데도 그의 몸에서는 땟국물이 줄줄 흘렀다. 목욕을 마치고 나니 몸이 어찌나 가볍던지, 심지어는 피부까지 새하얘진 것 같았다. 대체 얼마나 더러웠던 것인지 생각하면,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 * *

마을에 내려온 지 사흘째 되던 날, 몸을 단정히 가꾸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계연은 드디어 시야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날 오전, 육승풍은 계연을 데리고 영안현을 구경하며, 계연이 지낼 만한 조용한 집을 알아보았다.

세를 얻을지 아예 사버릴지는 집을 본 다음에 결정하기로 했다.

지금 계연은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없어도 너무 없었기에, 무턱대고 덤비지 않는 편이 나았다.

돈이야 영안현 관아에서 포상으로 내린 순은 150냥(兩)이면 충분했다. 아홉 협객은 진정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며, 아무리 설득해도 포상을 거절했다. 결국, 계연이 포상금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계연 또한 두어 번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받는 척하며 포상금을 거두었다. 계연 말고 이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또 어디 있는가!

이곳에선 평범한 백성의 연간 지출이 고작 은자(*銀子: 은으로 만든 돈) 몇 푼에 불과하고, 몇십 냥이면 민가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계연은, 민심이 순박하고 관리들의 평판이 괜찮은 영안현에 거처를 구하기로 했다.

계연은 가족도 없이 혼자였으니, 요구 사항이 많지 않았다. 외출도 드물어서 그저 한적한 곳에 정원이 딸려 있고, 주방과 침실, 변소만 제대로 갖춰져 있으면 충분했다.

거지 행색을 벗고 말끔히 단장한 계연은 다소 마른 몸에 훤칠한 키를 지닌 점잖고 고상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제 외모가 평범한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육승풍 또한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 계연과 동행하였지만, 집을 찾으려면 이 지역 토박이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옆에는 중년의 중개인이 함께하게 됐다.

최근 며칠간 현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식인 맹호의 가죽을 보기 위해 영안현으로 모여들었다. 더군다나 보기 드문 백호 가죽이었으니, 사람들은 우르르 떼를 지어 구경했다. 거기에 시장까지 열려서, 인근 마을의 주민들까지 영안현을 찾아온 판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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