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우연이 빚은 차질
계연은 계약서를 대강 쓱 훑어볼 뿐이었다. 그의 시력으로는 종이에 적힌 글을 읽을 수 없을뿐더러, 아직은 육승풍을 신임하였으니 말이다.
순간 저릿한 감각이 그의 온몸에 번지기 시작했다. 계연은 황급히 몸속에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희한하게도 집중할수록 감각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외려 마음을 내려놓고 잡념을 버리면, 신기한 감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일순 몸이 무한대로 커지고 부풀며, 곳곳의 경락이 강줄기처럼 확장하고, 뼈와 피가 높은 산과 시원한 냇물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계연이 잡념을 잊고 무념무상에 들자, 온 천하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 속으로 차츰 계연의 의식이 스며들더니, 이내 그의 의식은 한 줄기 바람을 탄 듯, 무중력 상태가 되어 세상 방방곡곡을 누볐다.
산과 강은 일렁였고, 좁은 시냇물이 흘러내렸다. 하늘에는 가물가물 비가 내리기도 하고, 맑은 하늘에 안개가 끼기도 했다. 이 순간, 갖가지 기묘한 현상들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교차하였다.
화려한 풍경이 찬란하게 반짝이던 찰나, 비록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계연은 환영으로만 보았던 바둑돌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감각들은 마치 이 세상의 것과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계 선생님? 음, 그게……. 관아 기록에 따르면, 이 집이 흉가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선 이미 알고 계셨죠?”
육승풍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계연에게 물었다.
무아지경에 이른 계연은 모처럼 오롯이 내면세계에 빠져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육승풍의 목소리는 마치 ‘우르르, 쾅쾅’ 내리치는 천둥 같았고, 음절에 따라 우렁찬 천둥소리가 불안정하게 울려 퍼졌다.
신비로움 그 자체였던 감각은 계연을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 순간, 계연은 처음으로 이번 생엔 후회 없이 다채롭게 살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들었다. 계연의 얼굴에는 어슴푸레 미소가 깃들었다.
‘그 푸른 기운은 어쩌면 전설에나 나오는 신령한 기운이 아닐까?’
육승풍 또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단하신 계 선생님께서 가옥의 정체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집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인제 마을은 계 선생님의 덕을 볼 터였다.
“하면, 그 안의 더러운 것은 언제 치우실 계획입니까?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육승풍은 기대에 부푼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정한 고수의 솜씨를 지켜보는 것은 소문난 무술인의 대결을 구경하는 것보다 보기 드문 기회였으니 말이다.
다만 계연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육승풍이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계연은 그저 두 눈을 살포시 감은 채,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계연이 침묵으로 거절을 대신했다고 생각한 육승풍은 조금 겸연쩍어졌다. 이내 조금 전 자신이 계연의 수행을 방해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선생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분부만 하십시오. 저희는 부상자들이 상태를 회복할 때까지 당분간 영안현에 머물 겁니다.”
계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육승풍은 지레 겁을 먹었다. 자신의 행동이 선생님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한 그는 반감을 사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울였다.
“선생님, 그럼 편히 쉬세요.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탁자 위에 살며시 붓꽂이를 내려놓은 육승풍은 살금살금 방을 걸어 나와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 * *
한 시진(*一時辰: 약 2시간)이 훌쩍 넘은 뒤에야 계연은 황홀한 감각 속에서 깨어났다. 스스로 벗어나려고 한 게 아니라, 그 감각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한 줌 모래처럼 휙 사라져 버렸다.
계연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방을 둘러보니, 탁자에는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고, 육승풍은 언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이리 순식간에 무아지경에 빠지다니.’
좀 전의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물론 계연은 탁자에 놓인 붓꽂이도 발견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육승풍이 참 세심하구나’라며 깊은 감탄을 내뱉었다.
이제 집문서와 땅문서를 자세히 확인할 시간이었다. 계연은 내 집을 마련했다는 흥분감에 흠뻑 취해 버렸다.
계연은 집문서를 손에 쥐고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비록 시력은 좋지 않았지만, 종이를 눈에 가까이 가져다 대면 문서에 반듯하게 적힌 글자들과 가지런히 나열된 세칙, 크고 작은 인장과 커다란 관인을 흐릿하게나마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계연의 눈에 인장은 붉은 덩어리로 보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관아에도 등록되어있다는 육승풍의 말을 떠올리니, 계연은 이곳에서도 이러한 계약이 나름 엄격히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고작 종이 한 장일 뿐인데, 계연은 종이에 적힌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가 무척 버거웠다. 이윽고 계연은 꽤 심각한 문제가 떠올랐다.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서적을 통해 이곳의 시대적 배경이나, 각지의 풍습과 문화를 공부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계연은 자신이 옛날 시대로 넘어온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다른 시공간에 떨어진 것인지 파악할 기회도 없었다.
지금까지 계연은 호랑이 요괴와 창귀를 코앞에서 보았고, 연비를 비롯한 진정한 무술인도 만나 보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 떨어졌을 확률이 더욱더 높았다.
‘육승풍의 일행이 영안현을 떠나면, 박학다식한 학자를 찾아가 물어보는 편이 나을까?’
계연은 언제나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더구나 이번 생은 죽음의 문턱에서 시작하지 않았던가. 다른 일들도 분명 해결책이 있을 테니, 계연은 성급하게 걱정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 * *
객잔 탁자에는 문방사우가 정리되어 있었다. 기분이 썩 괜찮았던 계연은 순간 맹인도 글을 쓸 수 있는지 시도해 보고 싶었다.
곱게 먹을 갈고 붓을 들자, 역시나 어색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몸에 옛 주인의 기억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놀랍게도 붓을 쥔 손은 여러 가지 서체는 물론, 번체와 간체를 오가며 백지장 위에서 실로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게 아니겠는가!
“와씨, 미쳤는데!”
계연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작게 환호를 질렀다.
‘이 시대 기준으로 글씨체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이 이 정도라면 분명 봐줄 만하겠지!’
보아하니, 원래 몸의 주인에게 사연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글을 연습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체력 소모도 어찌나 크던지, 계연은 슬슬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빛을 보니, 식사 때가 다 된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켠 뒤, 문서를 잘 정리해 챙겨두었다. 다친 협객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김에, 그들에게 식사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주어야 했다. 밥을 얻어먹으려는 속셈이 아니라, 그저 선의로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모두는 객잔의 고급 객실에서 묵다 보니, 계연의 방에서 3층 복도를 따라 몇 걸음만 가면, 젊은 협객들이 묵는 공간에 도착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무술을 연마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기초 체력이 매우 우수했다. 거기에 제때 치료를 받은 덕분에, 그들은 며칠 사이에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부축 없이 혼자 거동하기도 했다.
계연은 이들이 머무는 방을 하나하나 둘러 보았지만, 모두 텅 비어있었다. 육승풍의 방에서도 숨소리 하나 들리질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조용히 귀를 기울이니, 번잡스러운 소음 사이로 독특한 소리가 들렸다. 객잔 뒤뜰에서 수련하는 소리 같았다.
* * *
운래객잔 뒤뜰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었다. 이곳은 두 객잔 사이에 있었고, 옆에는 마구간과 여물 창고, 나뭇간 또한 붙어 있었다.
이 공터를 사용해 추후 객잔을 확장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평소 객잔에서 사용한 이불을 널거나, 절인 음식을 쌓아두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부상자들은 한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육승풍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여러 객잔의 투숙객과 잠시 쉬고 있던 사동(使童)들도 객잔 뒷문에서 이를 지켜보았다.
외지고 작은 영안현에는 무술인이 드물었다. 하물며 무림의 고수는 더욱이 볼 수가 없었다. 서로를 때리고 눕히는 강호 협객들의 대련에 주변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주먹질 소리 사이로, 주위를 에워싼 버드나무들이 바람결에 따라 나풀거렸다.
계연이 도착했을 때, 객잔의 뒷문은 이미 사동들에게 가로막혀 있었다. 심지어 몇몇 요리사와 객잔 안주인, 하녀 두 명도 한데 모여 대련을 구경했다.
육승풍과 왕극(王克)이라는 이름의 청년은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한 결투를 이어갔다. 무기 하나 없이, 오로지 맨주먹으로 말이다.
왕극은 검을 다룰 줄 알았지만, 장법(掌法)에 더욱 강했다. 육승풍의 주특기는 권법(拳法)과 조공(爪功)이었다.
퍼벅! 쿵-!
그 순간, 공격을 막으려던 둘의 팔이 맞부딪혔다. 그들은 동시에 상대에게 다리를 뻗었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발바닥이 서로 맞부딪쳤다. 육승풍은 반 바퀴 돌며 뒤로 미끄러졌고, 왕극은 마치 한 마리의 나비처럼 뒤편의 버드나무 아래로 날아갔다.
곧 공중으로 날아올라 나뭇가지를 밟고 선 왕극은, 몸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살며시 비틀고 발을 세차게 굴러, 육승풍에게로 돌격했다.
겨우 중심을 잡은 육승풍은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뒤로 드러누웠다. 그 틈을 타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장법을 구사하는 왕극을 향해 왼쪽 다리를 내찼다. 힘이 들어간 그의 오른쪽 다리는 더욱더 매서운 기세로 그 뒤를 따랐다.
퍽! 퍽!
왕극은 자신이 충분히 빠른 속도로 무공에 변화를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육승풍의 발차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거셌다. 왕극이 두 손으로 육승풍의 다리를 잡는 순간, 그의 손바닥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내 왕극의 몸 전체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조심해야지!”
육승풍이 크게 소리치며, 잽싸게 몸을 돌렸다. 땅을 짚고 있던 두 팔에서는 힘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불끈 솟았다.
“헛!”
육승풍이 왼쪽 다리를 살며시 구부리고 오른쪽 다리를 쭉 뻗자, 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갔다. 그는 돌풍보다 빠른 속도로 공중의 왕극을 걷어찼다.
퍽!
발길질 한 번에 왕극의 방어를 뚫은 그는 왕극의 명치를 찔렀다. 물론 힘을 적당히 준 채로 말이다.
단번에 승패가 갈렸다. 두 사람은 노련한 몸놀림으로 가볍게 땅 위로 착지했다.
계연의 앞에 서 있던 객잔의 점원들이 한껏 상기된 얼굴로 손뼉을 쳤다.
“멋있다.”
“시장에서 하는 연극보다 훨씬 낫네!”
“굉장해, 육 대협 대단합니다.”
“왕 협객도 굉장해요!”
“한 번 더, 한 번 더!”
계연 또한 덩달아 손뼉을 쳤다. 비록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어슴푸레한 윤곽과 귓바퀴를 타고 들려오는 율동적인 타격음을 통해, 두 사람의 대련이 근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그저 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훈련인지라, 사실 두 사람은 실력을 팔 할도 발휘하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실력을 십분 보여주었다면, 분명 더욱더 거칠고 무거운 타격음이 들려왔을 터였다.
계연은 주먹과 발이 맞닿으며 내는 묵직한 울림과 주변 공기의 떨림만으로도 저것이 진정한 무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객잔 투숙객들과 점원들은 흥미진진하게 대련을 지켜보았다. 만약 이 사람들 중 누군가가 협객 중 한 명에게 한 대라도 맞는다면, 적어도 보름 이상 앓아눕거나, 심각할 경우 중병을 얻고 말 터였다.
이에 계연은 지금 자신이 겉보기에 병든 닭과도 같지만, 사실 꽤 대단한 무술 실력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닌지 호기심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