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작별
사람들의 흥이 무르익고 환호성까지 더해지자, 짧게 재정비를 마친 육승풍과 왕극은 다음 대결을 준비했다.
다친 사람들은 당연히 대결을 치를 수 없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해소할 수 있었다. 아홉 협객 중, 오른손을 못 쓰게 된 두형만 풀이 죽은 채 아무 말 없이 동료들의 대련을 바라보았다.
현재 계연은 단순히 청력이 뛰어난 걸 넘어, 소리에 대한 판별력 또한 상당히 높아졌다. 협객들의 목소리가 모두 들렸지만, 두형만 유일하게 한마디도 하질 않았다. 생각건대, 충격이 심한 모양이었다.
‘참 괜찮은 사람인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네.’
한편, 일부 투숙객과 사동들 마저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바깥의 사람들도 한창 흥이 오른 듯했다. 시선을 끌기 싫었던 계연은 관중처럼 사람들 틈에 섞였다. 어차피 저들의 대련도 곧 끝날 테니 말이다.
다치지 않은 다섯 사람만 대련을 이어갔고, 다친 사람들은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손짓했다. 몇 차례 대련이 끝나자, 그들은 버드나무 그늘에 모여 조금 전 동작을 어떻게 바꾸는 게 더 적합했을지, 언제 반응이 느렸는지 등을 놓고 대화했다.
뒷문 쪽에 잠시 서 있던 계연은 더는 흥미로운 소리가 들리지 않자 슬슬 성질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름 고수로 알려진 자신이 고작 식사를 위해 협객 일행을 억지로 끌고 가기도 민망했다.
‘에잇! 만날 밥 먹으러 가자고 먼저 찾아왔으니까, 방에 가서 기다리지 뭐!’
이렇게 생각하니, 더는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계연은 이만 방으로 돌아가, 이름 모를 바둑알 수련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렇다. 비록 그 환영이 무엇인지 알아낸 건 없었지만, 또한 그것이 무슨 효력을 지니었는지 몰랐지만, 계연은 그 상태를 일종의 수련이라 정의하기로 했다.
* * *
계연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좀 전의 감각을 회상했다. 그리고 바둑알 환영을 소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너무 의도해서인지, 아니면 중요한 요소가 빠진 것인지, 아주 엷고 희미한 푸른 기운만 모일 듯 말 듯할 뿐, 도무지 내면세계를 들여보는 상태에 진입할 수 없었다.
방 안을 맴돌던 맑은 바람은 점차 잠잠해졌고, 게연의 머리카락 또한 더는 흩날리지 않았다.
‘분명히 바둑알 환영이 손가락 사이에서 사라지는 순간, 푸른 기운이 냉기로 변하며 손끝에서 몸속으로 흔적도 없이 흘러 들어갔는데…….’
계연이 턱을 끌어당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설마 시간대도 중요한가? 그럼 아까 환영을 본 시간이 몇 시였지? 시계도 없고 핸드폰도 없으니까 더럽게 불편하네! 아니면 나중에 진짜 도 닦는 사람을 찾아가서 검증해 달라고 해볼까? 소설에서처럼 선문에 들어가서, 날 지켜주는 대단한 사부나 만나면 얼마나 좋아!’
한창 생각에 잠겨있던 계연의 마음이 순간 움찔했다. 아홉 사람의 발소리와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승풍, 지금쯤 선생님께서 수행을 마치셨겠지?”
“한참 지났으니까 끝나셨을 거야…….”
“어쨌든 말씀은 드려야지!”
“맞아!”
작은 소리에 계연은 의아해졌다.
‘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머지않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계 선생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계연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린 뒤, 찬찬히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객잔의 나무문이 특유의 끼익 소리를 내었고, 육승풍과 연비를 비롯한 아홉 사람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계 선생님,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연비는 입을 열자마자 작별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네? 다들 가신다고요?”
살짝 눈치채고 있었지만, 계연은 쉽사리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젊은 협객들은 계연이 이 세계에서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난다니 막을 수 없는 적적함이 밀려왔다.
“네. 아무래도 영안현은 작은 마을이고, 저희도 각자의 스승님들께 돌아가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며칠 더 머무르려 하였으나, 방금 덕승부 수도 낙하산장(落霞山莊)의 셋째 장주(莊主)께서 낙 사매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계연의 물음에 육승풍은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특히나 계연이 어떻게 그 흉가를 처리할지가 너무도 궁금했다. 하지만 육승풍은 두 눈을 꾹 감고 이렇게 대답했다. 여하튼 셋째 장주가 1층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낙응상은 날카로운 눈으로 육승풍을 흘겨보더니, 웬일로 여인네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계연에게 유감을 표했다.
“계 선생님, 별일은 아닙니다. 그저 저희 셋째 백부(伯父)께서 저희가 다친 걸 아시고, 당장 돌아오라며 으름장을 놓으셔서요…….”
그녀가 갑작스레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아니면 선생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셔도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 또한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계연을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계연에게 심오한 기술 따위를 전수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 뒤뜰에서 육승풍이 해준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더욱이 마음을 접기가 어려웠다. 계 선생님이 방에서 찬 바람으로 회오리를 일으켰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그러나 계연은 이들과의 동행을 한 번도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이들과 함께 다닌다면, 언젠가 비밀을 들키고 말 터였다. 계연이 남부끄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때로는 창피한 것만큼 간단치 않은 일도 있었다.
비록 계연은 바둑알로 인해 최소한의 잠재력을 얻긴 했지만, 이것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아니에요. 저는 조용한 걸 좋아해서, 이곳에 남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이 말에 일행은 적잖이 실망하였지만, 본래 계 선생님 같은 기인들은 원체 종횡무진인지라 자신들이 함부로 넘겨짚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편, 계연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아쉽다. 이 사람들한테 무예를 좀 배워 볼까 했는데!’
* * *
계연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아홉 사람은 객잔 정청으로 나왔다.
길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그곳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소매가 넓은 장포(長袍)를 입고, 관을 쓰지 않은 긴 머리를 가지런히 늘어뜨린 그는 마치 훌륭한 학자나 무술인 같았다.
일행이 내려오자, 사내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인사는 잘했느냐?”
“네, 셋째 백부. 저희…….”
“그럼 가자. 내 마차 석 대를 빌려, 객잔 바로 앞에 세워두었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찻값으로 동판(銅板) 다섯 개를 내려놓은 뒤, 먼저 객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별도리가 없었던 낙응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 뒤를 따랐다. 나머지 여덟 사람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이 셋째 장주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객잔을 걸어 나온 셋째 장주는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건물 3층에서 희끄무레한 눈동자를 지닌 비쩍 마른 젊은이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셋째 장주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한 후, 객잔을 벗어났다. 뒤따라 나온 아홉 사람도 덩달아 3층을 올려다보자, 계연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들은 계연과의 약조를 지켰다. 누구도 외부인에게 말해선 안 될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셋째 장주는 계연을 일행이 산에서 마주친 산행객이며, 며칠간 일행을 도와준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다.
객잔 밖에는 마차 세 대가 일렬로 서있었다. 셋째 장주는 맨 앞의 마차에 올라탔고, 아홉 사람은 나머지 두 대에 나누어 탔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마차는 서서히 영안현 밖을 향해 내달렸다.
‘이 철없는 녀석들아. 강호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고작 산중의 범을 잡으려고 이리 참담한 대가를 치르다니……. 하, 두 씨네 아들은 너무 안됐군…….’
셋째 장주 낙풍(洛楓)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고개를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무렵, 계연은 여전히 넋을 놓고 객잔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시야는 흐릿한데, 어째서인지 일종의 ‘기질’ 같은 것이 눈에 보였다. 계연의 머릿속에는 낙풍의 형상이 매우 또렷이 그려졌다.
무언가 특별할 때마다, 계연의 엉망인 시력은 예상치 못한 역할을 선보이곤 했다. 그러나 저 셋째 장주는 기껏 무공이 뛰어날 뿐이지, 절대 요괴처럼 이상한 존재는 아니었다.
계연은 지난번 창귀 왕동과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설마 이 눈에 귀신이나 더 대단한 무언가를 보는 신기한 능력이 있는 걸까?’
물론, 빠르게 또 다른 생각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와, 근데 저 셋째 장주라는 사람……. 하고 다니는 거 완전 독특하고 눈에 띄네. 진짜 멋있어, 나도 저렇게 하고 다녀야지!
* * *
운래객잔의 일반 객실 숙박료는 하룻밤에 50문이었고, 계연이 묵고 있는 고급 객실은 하룻밤에 100문이었다. 지금까지 모든 숙박료는 육승풍의 일행이 내줬다.
인제 그들이 떠났으니, 계연은 더는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계연은 어엿이 영안현에 집이 있는 사람인데, 생돈을 날릴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짝!
계연은 갑자기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육승풍이 자신에게 집을 사주었는데, 자신은 아직 그에게 돈을 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36냥이 더 남는 거네?’
가난한 자는 학문을 익히고, 부유한 자는 무공을 쌓는다는 옛말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육승풍이 36냥이라는 거금도 달라고 말하지 않는 걸 보면, 대체 집에 돈이 얼마나 많은 걸까!
그렇다. 계연은 마차를 뒤쫓아가 돈을 갚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수중에 여유가 있으면, 그때 갚아도 늦지 않았다. 만약 영영 마주치지 않는다면, 뭐, 육 대협이 은혜를 두둑이 갚은 거로 여겨야지 어쩌겠는가!
오늘은 벌써 오시(*午時: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가 지났다. 운래객잔은 오시를 넘기면 하루 치 숙박료를 받았기 때문에, 계연은 객잔에서 편안히 하룻밤을 더 머물기로 했다.
계연은 아무도 식사를 챙겨주지 않으니, 객잔에서 파는 국수로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계연은 객잔 계산대를 찾아가 퇴실 절차를 밟은 뒤, 한 냥을 거슬러 받았다.
그 젊은 협객들은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다만, 계연이 고수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어도 이러한 친절을 베풀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마도 이 정도로 친절하진 않았으리라.
* * *
비록 영안현의 수많은 사람이 우규산의 식인 맹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사건이 지역 현지(縣誌)에 기재되었으며, 관아에서도 방문을 내걸었지만, 아홉 협객이 운래객잔에 묵었다는 사실은 현 관아에서 공개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현령의 노련함을 엿볼 수 있었다. 만약 맹호를 때려잡은 영웅이 운래객잔에 묵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다면, 그 협객들은 동물원의 원숭이 격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안심하고 요양하겠는가?
이것이 며칠간 영안현이 왁자지껄했지만, 협객들 모두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자연스레 계연을 알아보는 사람도 몇 없었다.
사실 관아의 방문에 적힌 내용과 아홉 협객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범 가죽에 정신이 팔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