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21화 (21/892)

21화. 현실 도피

일행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진 뒤에야 계연의 귓가에 어렴풋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 진짜 괜찮네!”

“아이고, 그 계 선생님이라는 분도 참 괜찮아 보였어. 학문이 깊으신 분 같아!”

“이 집의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 말에 간부 격의 사내가 일꾼들을 재촉했다.

“그만 노닥거리고 어서 가자, 어서!”

“그 선생님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되게 잘생겼더라!”

“그만 떠들고 얼른 가라고 했지? 잘생긴 게 무슨 소용이야?”

마지막 몇 마디에 계연은 만족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근데 몇 살인지 모르겠다는 말은, 설마 내가 나이 들어 보인다는 소리일까? 잘생긴 게 무슨 소용이냐니? 못생긴 것보다야 낫지!’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어느덧 황혼이 가까워졌다.

비록 집은 누추했지만, 필요한 건 모두 갖추고 있었다. 계연은 정원에 앉아 또다시 넋을 놓았다.

인터넷과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과 이따금 ‘계 선생님, 계 선생님’ 하며 자신을 찾아오던 순진한 협객들이 없다는 사실이, 계연에게는 너무 애석했다.

“하, 좀 외롭네…….”

긴 한숨을 내쉬던 계연은 갑자기 매우 신경질적으로 우물을 바라보았다. 우물 앞으로 걸어간 그는 옆에 놓인 나무판자를 들어 ‘쾅’ 소리가 나게 우물 위를 덮었다.

“후우.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 별것도 아닌 거에 혼자 놀라고 말이야, 지난 생에 공포 영화 좀 작작 볼걸!”

* * *

그날 밤, 심야의 적막을 뚫고 야경꾼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댕- 댕댕…….

“평안 무사하십쇼-.”

댕- 댕댕…….

“평안 무사하십쇼-.”

어째서인지, 계연은 밤새워 뒤척이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양도 세어 보고, 운동도 해보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야경꾼이 경탁을 치자, 눈을 감고 있던 계연은 어느덧 삼경(*三更: 밤 11시에서 새벽 1시)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경탁을 세 번 치면 삼경이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사실상 밤 11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지만, 지금은 해가 일찍 저물고 재미난 놀 거리도 없었기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이곳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 나 잠자리를 가리는 거야? 아니면 드디어 내 집이 생겨서 너무 흥분했나?’

이러한 생각에 빠져있던 계연은 순간 주변의 온도가 차갑게 내려간 것을 알아차렸다.

끼이익.

끽……. 끼익…….

정원에서 오래된 나무의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가벼운 소리였지만, 이 역시 계연의 귀를 피해가진 못했다.

계연의 몸이 얼어붙었다.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귀를 기울인 그는, 그것이 환청이기를 간곡히 바랬다.

끼이익.

돌덩이를 올려둔 우물 위 판자가 서서히 위로 들리더니, 하중을 버티지 못한 나무가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침상에 누워있던 계연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낮 동안 머릿속을 수없이 헤집어 놓았던 공포 영화들이 다시금 떠오르자, 계연의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계연의 이마에는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듯,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끼기긱…….

쾅!

나무판자 위에 얹어 놓았던 돌멩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계연의 심장 또한 그 돌덩이처럼 아주 거세게 내려앉았다.

나무판자가 곧 한쪽으로 들리더니, 빽빽한 머리숱이 우물에서 기어 솟구쳐 올라왔다.

꼴깍.

한기가 서서히 짙어지자, 계연이 침을 삼키고 침상의 이불을 꼭 쥐었다. 이윽고 그는 아주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머리끝까지 이불 속에 감추었다.

‘하……. 나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야! 망할 중개인 자식!’

계연은 이불 사이로 눈을 빼꼼 내밀었고, 곧이어 검은 머리카락이 방문 틈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것을 목격했다. 아주 천천히 머리카락이 방 안으로 모여들었다.

계연의 심장은 쿵쿵대고, 온몸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새로 산 이불은 이미 계연의 땀에 흠뻑 젖어 버렸다.

그는 미동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엔 그저 대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계연은 간절하게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허…….”

사람의 것이 아닌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안 그래도 무서워 죽을 것 같았던 계연은 온몸이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문틈을 통해 머리카락이 서서히 위로 올라오더니, 시커먼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분명히 주변의 모든 것이 모호한데, 저것만큼은 계연이 보지 않으려고 해도 매우 선명하고 또렷하게 시야에 나타났다.

뼛속까지 한기가 스몄다.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전혀 따듯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쩌지? 이건 창귀랑 완전 다르잖아! 저건 악귀가 분명하다고!’

계연은 이불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극심한 공포에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고, 그의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은 뜨내기 장수들도, 젊은 협객들도 옆에 없었으며, 상대는 육 산군처럼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강렬한 음기와 살기가 거안소각 전체에 피어올랐다.

우두둑.

뼈마디가 어긋나는 음산한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소리는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왔고, 얇은 이불 바로 너머에서 괴이한 소리가 이어졌다.

생명을 앗아가겠다는 악의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탐욕과 갈망이, 너무도 선명하게 전해졌다. 이불 뒤에 숨어있던 계연의 희끄무레한 동공이 바늘처럼 수축했다.

‘이대론 죽고 말 거야! 도망치자!’

이건 모니터 화면 속 공포 영화나 괴담이 아니었다. 이러한 공포와 절망감은 사람을 질식시키고 무력감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곧이어 계연은 이 무기력함은 체내 과도한 호르몬 분비로 인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하얀 기운이 서서히 그의 몸을 떠나고 있었다.

‘놈은 지금 내 양기를 빨아먹고 있어!’

“허…….”

몸에서는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지고,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곧 숨 쉬는 것마저 힘겨워졌다.

만약 계연이 이불을 덮지 않았다면, 저 불결한 검은 그림자가 창백하고 비틀린 몸을 쭉 내민 채, 자신의 몸 위에 철썩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을지도 몰랐다.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는 신음을 들으며, 계연은 맨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를 떠올렸다.

바로 그때, 계연의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내가 산신당 호랑이 요괴한테서도 죽다 살아났는데, 영문도 모르고 여기에서 죽는 거야? 제기랄, 그건 안 되지! 절대 안 돼!’

계연은 죽일 듯이 이를 악물었다. 희뿌연 눈이 다소 충혈되고, 눈꺼풀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는 꽉 움켜쥐어진 오른손을 어떻게든 펼치려 안간힘을 썼다.

‘내가 이 세계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겨우 내 능력을 알아가기 시작했단 말이야. 아직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아. 이 세계의 신기한 것들을 아직 더 보고 싶다고!’

소용이 있든 없든, 계연은 계속해서 난가기연을 생각하고, 그 바둑알을 떠올렸다. 현재로선 이것이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계연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참을 수 없는 통증에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불 안을 헤집던 기운이 순간 멈칫하자, 계연은 다시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난……!’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짧게 외치던 계연은 벌떡 몸을 일으켰고, 이불을 걷어차며 검지 자세를 취했다. 계연이 매섭게 이불 뒤로 손을 휘두르자, 계연의 팔에 오묘한 기운이 흐르더니, 곧 손가락 끝에 바둑알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썩 꺼져!”

부웅-!

계연의 팔이 옅은 하얀빛으로 물들었고, 곧이어 바둑알과 손끝이 악귀의 몸에 닿았다.

“끄아악!”

검지와 바둑알이 악귀의 혼과 맞닿자, 귀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윙윙…….

이따금 음산한 바람이 선회하는 것 같더니, 불결하고 두려운 음기가 계연의 오른팔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마치 세탁기 속 옷이 빙빙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계연의 오른손은 완전히 얼어버린 것 같았다. 뼛속 깊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한기가 계연에게 전해졌다. 통증에 한기까지……. 이제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펑 하는 소리가 들리고, 새까만 그림자가 훅 튀어 나왔다. 마치 연기처럼 방문을 통과한 그림자는 빛처럼 빠른 속도로 우물 안에 몸을 숨겼다.

오른팔을 뻗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계연은, 십 초가 훨씬 지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내려온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자빠졌다.

계연은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침상에 쓰러졌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림자의 처량한 비명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음산했다. 거안소각 인근에 살던 주민들은 한밤중에 들려온 소름 끼치는 소리에 남녀 할 것 없이 기겁하며 잠에서 깨어났고, 모두 이불 속에 몸을 숨긴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밝게 불을 켜두었던 사람들은 행여나 악한 기운을 부를까 봐, 허겁지겁 촛불을 끄기도 했다.

* * *

같은 시각, 영안현 서북 쪽 묘사방(廟司坊), 영안현 성황당의 소재지.

사당 안의 금불상이 흔들렸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영안현의 성황신은 신당 높이 우뚝 서 있었다.

“야경대 어디에 있나? 속히 성 남쪽 천우방으로 가, 악귀를 가둬둔 우물을 확인하라!”

“명 받잡겠습니다.”

새까만 옷차림의 저승사자 두 명이 하나는 기다란 갈고리를, 다른 하나는 허리에 칼을 차고선, 이 세상과 동떨어진 검은 그림자로 변해 성황당을 벗어났다. 그들의 목적지는 천우방이었다.

* * *

거안소각에서 계연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조금 전 기절하면서 침상 가장자리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머리가 돌머리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뇌진탕이 왔을지도 몰랐다.

계연에게는 기절하기 직전의 기억이 남아있었다. 자신은 손가락 하나로 악귀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무찔렀고, 놈은 줄행랑을 쳤다. 악귀의 반응으로 봐선, 놈이 무사할 리 없었다. 적어도 놀라기는 엄청나게 놀랐을 것이다.

아까 전의 일을 겪고 나서인지, 한층 대담해진 계연은 겉옷을 걸치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오른팔은 여전히 시리고 얼얼했다. 온몸이 마치 폭삭 죽은 솜털처럼 기운이 없었지만, 크게 다친 건 아니었다.

계연이 나무 빗장을 열자,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머리 위로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찬란하게 빛을 내었고, 정원의 커다란 대추나무는 밤바람에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나무 그늘 아래 놓인 우물은 완전한 어둠에 뒤덮인 상태였다.

휘잉-.

간혹 찬바람인지 음산한 바람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불어와 계연을 떨게 했다.

본채 문 앞에 선 계연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고, 안색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계연은 이 틈을 타 도망을 쳐야 할지 몇 번이고 고민했다. 아무래도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같았으니 말이다.

“거안소각에 인간이 사는데?”

이때, 정원 밖에서 갑자기 의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옷을 입고 손에 무기를 든 두 그림자가 괴기하게도 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이 철렁해진 계연의 동공이 수축했다. 놀랍게도 저들의 형체가 매우 선명하게 보였다.

‘또 귀신이잖아!’

검은 옷차림의 두 그림자는 오로지 정원 안 우물에만 집중한 듯, 본채 입구에 서 있던 계연을 슬쩍 바라보기만 할 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상하네, 우물 속 악기가 절반으로 줄었잖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성황신께서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차리셨나 봐!”

“거안소각의 풍수는 그대로이니, 이 악귀가 도망가진 못할 거야. 우물 안에 있는 건 확실해!”

“응, 기운도 없는 것 같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이 흉악한 악귀를 죽일 절호의 기회겠군. 속히 돌아가 성황신께 보고하자고!”

두 저승사자는 짧은 대화 끝에, 손에 기다란 갈고리를 든 자가 우물을 지키고, 허리에 칼을 찬 자는 희미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문 앞에 서 있던 계연은 조금 전 도망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자기들을 못 보는 줄 아는 건가? 흉악한 악귀? 풍수? 성황신?’

21세기 인터넷을 통해 폭발적인 정보를 수용하였던 청년으로서, 계연은 그들의 짧은 대화에서 수많은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거안소각의 우물은 저토록 무시무시한 귀신을 가둘 수 있는 곳이었고, 영안현 성황신은 단순한 신당의 조각상이 아니었으며, 이곳을 찾은 두 사람은 어쩌면 성황신 휘하의 저승사자일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앞서 요괴와 귀신을 본 계연은 이제 이 지역 성황신이 다스리는 저승사자까지 보았다.

계연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럼 이 세계에 신령이나 신선, 석가모니도 있을까? 지금 도망쳐도 될까? 36냥이나 줬는데……. 저 우물 안에 있는 건 나 때문에 다친 건가?’

이렇게 생각하니, 계연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더욱더 지켜보고 싶었다.

계연은 뼛속 깊이 중2병스러운 꿈을 지닌 사내였고, 성황신 같은 건 아무나 볼 수 있는 존재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