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24화 (24/892)

24화. 성황신의 부름

“하하하하하……. 물 긷는 게 쉽지 않네!”

그 말을 마친 계연은 바닥에 엎드린 채 땅바닥을 더듬거리며, 한쪽으로 날아간 물통과 멜대를 찾았다. 평범한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몸짓이었다. 드디어 사람들이 계연의 눈동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머, 저 사람 눈이 안 보이나 봐!”

“그러네, 어쩐지 아까부터 눈을 뜨질 못하더라고…….”

“그런데도…… 직접 물을 길으러 온 거야?”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계연이 짐작하기로는 영안현 사람들은 매우 순박한 듯했다. 이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을 조롱하지 않았다. 아, 그 망할 놈의 중개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저기요, 제가 물 긷는 거 도와드릴게요!”

옆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계연은 진작에 발소리를 듣고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멜대를 손에 쥐자마자, 계연은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이는 까만 피부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12살 남짓한 사내아이였다.

‘어라? 잘생겼다고? 뭐야, 얼굴이 보이잖아!’

이에 계연은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내아이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요 며칠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눈에는 평범하지 않은 것들만 보였다.

“꼬마야, 이름이 뭐냐? 몇 살이야?”

계연의 희끄무레한 눈동자를 보고 잠시 당황한 아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이름은 윤청(尹靑)이고, 나이는 12살이에요. 집까지 자주 물을 길으러 와서, 힘도 세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계연이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위엔 이 아이의 가족은 없는 듯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마 윤청도 아이들과 뛰놀던 중이었던 것 같았다.

“그럼 나야 고맙지.”

아이에게 물을 길으라 시키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계연은 이참에 윤청을 관찰하기로 했다.

“아니에요!”

계연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윤청은 물통 두 개와 멜대를 들고 우물 앞까지 걸어갔다. 겉보기엔 의심할 여지 없이 생기발랄하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 * *

“선생님, 대체 어디에 사세요? 아직도 더 가야 해요?”

계연을 따라 천우방 동쪽 깊숙이 들어가니, 서서히 인적이 드물어졌다.

“거의 다 왔어, 저기야!”

이따금 아이를 바라보던 계연은 윤청이 굉장히 영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후, 윤청은 거안소각 밖에 멈춰 섰다. 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제 옆에 멈춰 서 있는 계연을 올려 보았다.

“선생님께서는 여기 사시는군요…….”

계연은 그런 아이의 표정이 참 귀엽고도 재미있었다.

“맞아, 여기가 내 집이야. 어제 이사 왔어. 뭐 해? 저 안까지 물통을 옮겨야지?”

제자리에 멈춰선 윤청은 머뭇거리며 대문을 넘지 못했다.

“선생님, 여긴……. 저희 부모님께서 이곳에는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윤청은 계연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숨김없이 말했다가 점잖은 선생께서 오해하시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처해하는 윤청의 모습에, 계연은 아이를 곤란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집의 흉물은 어젯밤 성황당 관리들의 손에 처리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몰랐으니 말이다.

“그래, 그럼 물통이랑 멜대를 문 앞에 두고 가. 안으로 들여놓는 건 내가 할게.”

계연은 웃으며 윤청의 어깨에서 멜대를 내려주었다. 계연을 도와서 물을 멀리까지 길러 주었는데도, 윤청의 조그만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생님! 이 집에서 나오세요! 여기는…….”

윤청이 침을 꼴딱 삼키며 뜨거운 태양을 올려 보았다. 아무래도 대문 앞에서 이 집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가 겁이 났다.

윤청의 집안 어른들은 거안소각에 관해 함부로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특히 그 집에 사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이것은 금기와도 같은 것이라, 만약 이 금기를 깨면 운 나쁘게도 악귀의 원한을 살지도 몰랐다.

윤청은 미처 말을 잇지 못했지만, 계연은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는, 그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 선생님이라고 불러줘. 아직 어린데 마음씨가 참 곱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난 여기서 멀쩡히 잘 지내고 있거든! 어서 가봐. 가족들 걱정하시겠다.”

“그럼, 계 선생님…… 전 가볼게요.”

사실 윤청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이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참은 것만으로도 대견한 일이었다. 이만 가보라는 계연의 말에, 아이는 인사를 건넨 뒤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종종걸음으로 떠나는 윤청을 눈으로 배웅하던 계연은, 순간 께름칙한 느낌에 오솔길의 다른 한쪽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하급 관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새하얀 장포를 입고 높은 관을 쓴 관리의 움직임이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중요한 건, 그에게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귀신인가? 대낮에도 귀신이 돌아다니나?’

그 하급 관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계연의 코앞으로 다가오더니,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인사를 올렸다.

“영안현 성황당 소속의 주간 순시관(巡視官)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계 선생님!”

계연은 이 남자가 무섭지 않았다. 관아의 하급 관리다운 사내의 행색을 보자마자, 이 남자가 영안현 성황당의 저승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젯밤 사건으로 영안현 성황당은 계연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자신의 성이 계씨라는 걸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방금 엿들었거나, 무슨 방법을 통해 알아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상대가 먼저 말을 걸었으니, 계연도 인사를 해줘야 했다.

한편, 멀리 가지 못한 윤청은 뒤편에서 들려오는 계연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은 누구랑 이야기하시는 거지?’

고개를 돌려 보니, 계연이 혼자 대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와 대화하는 듯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 윤청은 줄행랑치듯 재빨리 이곳을 벗어났다.

그사이 주간 순시관은 공손한 태도로 계연의 물음에 대답했다.

“성황신께서 계 선생님을 성황당으로 부르셨습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지금 저와 함께 가시지요.”

‘지금? 영안현 성황당에 가자고?’

계연은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이 도시의 윗선을 만나러 가는 소시민처럼 느껴졌다. 성황당에 갈지 말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겠어요? 물통만 안에 넣어 놓고 올게요.”

“천천히 하십시오!”

계연은 긴말 없이 멜대를 주워들었다. 멜대 고리에 물통을 연결한 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윤청이 하던 대로 멜대가 아닌, 고리를 손으로 꽉 붙잡았다.

어쨌든 그는 주간 순시관 앞에서 망신당하지 않고, 물을 안정적으로 주방 문 앞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순시관은 낑낑대며 물독에 물 붓는 계연을 지켜보았다. 고작 물독을 채우는데도 계연은 옷에 물을 잔뜩 튀겼다. 아무리 보아도 현묘한 고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계연이 엉성한 태도를 보일수록 순시관은 예의를 차렸다. 마침내는 서 있는 자세마저 공손해졌다.

성황신께서는 저승사자들에게, 날고 긴다고 하는 정통 선문의 제자들은 매우 거만하고 위풍당당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들은 군자라기보단 소인에 가깝고, 대부분 선인으로 불릴 만한 인재가 아니라고 하셨다. 진정한 선인은 하늘의 도와 우연히 일치하여, 태초의 순수함과 순박함을 지니고 있다지 않으셨던가!

“후…….”

계연은 물통을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조금 전 물을 쏟아 젖은 옷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또 군데군데 물이 튀었다.

물을 다 붓고 나자 계연은 이제야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본래 성황신 앞에서 법력이 높은 도인인 척할 생각도 없었으니, 뇌물 따위를 준비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소매를 걷은 계연은 옷을 툴툴 털며 대문으로 걸어갔다. 밖으로 나온 그가 대문을 걸어 잠그고 순시관을 바라보았다.

“가시죠. 번거로우시겠지만, 순시관께서 길을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초행길이라 성황당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거든요.”

계연은 성황신이 자신을 찾는 까닭이 무엇이든, 일단 가보기로 했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순시관이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는 계연이 걱정했던 것처럼 안개가 되어 휙 사라지지 않고, 두 발로 걸으며 앞장섰다.

계연이 뒤따르자, 순시관은 윗사람 모시듯 걸음을 늦추며 길을 안내했다. 뭐라 말하기가 곤란했던 계연은 차라리 자신이 앞장서서 걷기로 했다. 걷다가 길을 모르면, 그때 순시관에게 물어보는 편이 나았다.

백 보 정도 걷자, 첫 번째 갈림길이 나왔다. 순시관이 빠르게 왼쪽으로 걸어가며 손짓했다.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아, 네!”

계연이 걸어가자, 순시관은 또다시 그를 옆에서 모셨다.

‘아니, 어색한데……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는 과도하게 예의 차리는 순시관의 태도가 거북했다. 지난번 만난 육승풍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계연은 주간 순시관이 보기에는 품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계연은 천우방의 한 골목을 천천히 걸어가며,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고자 억지로 대화 주제를 찾아내었다.

“순시관께선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비록 귀신은 숨을 쉬지 않았지만, 계연은 이 순시관이 한시름 놓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존함이라 할 순 없지만, 생전에 성은 유(劉), 이름은 외자 강(江)이었습니다!”

“아, 유 순시관님이시군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계연은 질질 끄는 상대의 대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

“유 순시관님은 영안현 분이신가요?”

“맞습니다. 생전에 영안현 아래 작은 냇가 마을에서 태어나, 영안현 관아에서 하급 관리로 일했지요. 살아생전 성실히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한 덕분에, 성황신께서 죽은 저를 주간 순시관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이 일을 한 지도 어언 22년이 되었네요!”

모자 아래로 보이는 순시관의 얼굴은 겨우 중년의 나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계연은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와, 그럼 이 순시관이 우리 할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을 수도 있겠네.'

“생전에는 백성을 평안케 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마을을 지켜주시다니,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직무에 충실하시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비록 과장되게 치켜세우는 말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유강 같은 공무원은 어디에서든 존경받아 마땅했다. 더군다나 사회 분위기가 좋지 않은 먼 옛날에는 말이다.

“계 선생님, 과찬이십니다!”

말을 이렇게 했지만, 유강은 내심 기뻐했다.

칭찬과 인정 한마디는 이익을 가져오지 않지만, 좋은 사람…… 아니, 좋은 저승사자를 즐겁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좀 전의 어색함이 사라지고 나니 분위기가 차차 훈훈해졌다. 걸음을 걷다 잠깐 움찔한 계연은 골목 앞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계연은 생긋 웃음 짓고 계속해서 순시관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멀리 걸어가던 윤청은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윤청이 살면서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다. 허공에 대고 대화하며 걸어오는 계 선생님의 모습이라니. 저건 귀신과 이야기하는 게 틀림없었다!

‘거안소각에 살던 귀신이 계 선생님을 따라 밖으로 나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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