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너무너무 닮았어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뒤에야 계연이 입을 열었다.
“소인,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으나, 성황신께서 우습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게. 내 알고 있는 것은 뭐든지 알려주지!”
앞서 수많은 질문을 들어서인지, 성황신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금 제가 있는 이곳은 어느 나라이고, 어느 시대이며, 다른 나라의 상황은 어떠한지 여쭈고 싶습니다. 또한, 역사상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어찌 이런 질문을……?’
당황을 금치 못하던 성황신의 표정이 엄숙하게 가라앉았다.
요괴라던지, 선문, 수행 같은 것에 대해 모르는 것쯤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어느 시대이고, 이곳이 어느 나라인지 같은 속세의 질문을 하는 건 비정상적이지 않나?’
전자는 평범한 사람들이 흔히 접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후자는 학식, 아니 조금의 상식만 있어도 누구나 아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계 선생이 학식도 상식도 없는 사람인 걸까? 성황신이 지금까지 봐온 바로는 절대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말도 또박또박 조리 있게 하고, 언행이 똑바르며, 예의범절을 아는 사람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한담을 나눌 때도 굉장히 독창적이고 예리한 견해를 보이곤 했다.
이런 사람이 글을 읽은 적 없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간혹 유별난 말투를 구사하곤 했다.
그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성황신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송세창은 생전에, 그러니까 그가 조정의 관직에 있을 때, 괴이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집을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속세의 평범한 사람이 상상력을 발휘해 적은 글이었지만, 내용이 그럴싸해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그중에는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재미난 놀이에 웃으며 깨어나니 꿈인 줄 알았거늘, 어느덧 천 년이 흘렀도다!
“성황신, 성황신?”
계연이 성황신을 불렀다. 멍청한 질문이라 넋이 나간 건가?
“어!? 아아, 계 선생, 내 말 똑똑히 들으시오!”
성황신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말투가 변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 * *
계연은 자신도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다고 생각했지만, 언젠가는 확실히 해야 할 일이었고, 누구에게든 물어야 할 질문이었다.
‘그런데 성황신이 왜 갑자기 예의를 차리는 걸까?’
미세한 변화였지만, 아무래도 성황신이 말투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성황신은 조리 있게 자신이 아는 역사를 세세히 읊어주었다. 중간에는 이 나라 역대 왕조의 야사와 주변 풍토, 그리고 지명의 변화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계연은 요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땐 감이 잡히지 않아 막막했는데, 이번에는 이 세계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의 수준으로 알 만한 것들은 전부 알 수 있었다.
현재 이곳은 13개의 주로 이루어진 아득히 넓은 나라였다. 지금의 왕조는 200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켰고, 벌써 8대째 제위를 계승 받아, 현재는 원덕제(元德帝)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무(武), 동(同), 초(楚), 광(匡) 등 아홉 연대를 거쳤고, 더 이전에는 거대한 왕조의 영토 중 일부였다고 한다.
이야기하던 성황신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 거대한 왕조의 이름은 대주(大週)라고 하오.”
“대주요?”
계연은 정신이 번뜩였지만,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겼다. 성황신이 말하는 대주는 그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지리적인 위치부터 역사의 변천까지, 같은 게 없었다.
성황신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연대는 심히 오래 되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나 같은 터주신도 설명하기가 어렵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는 수많은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소. 하물며 이 세상에는 최고의 경지가 없어, 만물을 알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으오!”
계연 또한 동감을 표했다.
“성황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좀 전의 대화를 통해, 계연은 성황신이라는 직책은 인간 세상과 가장 갈등이 깊은 신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가장 빈번한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영안현을 예로 들자면, 윗대 성황신까지는 모두 이(李) 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왕조에 들어서며 낡은 관습을 뒤엎고, 영안현 출신의 송세창이 관직에 머물며 가문을 빛내게 되었다. 이후 송세창이 사망하자, 황제는 그를 추봉하여 영안현 성황신으로 임명하였고, 현지 관리들에게 성황당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원래 마을을 지키던 성황신은 수행을 많이 하면 또 다른 길을 맞이하지만, 수행하지 않으면 서서히 향불의 힘을 소모하다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현세의 황제가 마음대로 성황신으로 책봉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최종적인 결정권은 모두 향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는 백성들의 원력에 달려 있었다.
물론 수많은 왕조를 거치며 자리를 지킨 성황신들도 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는데, 하나는 인간 세상의 황제가 공신을 추봉할 여유가 없을 때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황제가 이렇게 신령스러운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경우였다.
그래도 성황신과 왕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음과 양으로 나뉘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성황신은 전력을 다해 악령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했다.
황제가 책봉한 것이든 민간에서 성황당을 지은 것이든, 대부분 명망과 덕행을 지닌 자들이 성황신이 되었다. 물론 자신의 수련 정도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속세의 관리들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못하듯, 성황신도 숨어있는 요괴나 흉물을 빠짐없이 찾아내진 못했다. 심지어 힘으로 대적하지 못할 때도 종종 있었다.
재미난 점은, 성황신과 왕조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지만 어디까지나 군신의 관계가 아니고,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져 있기에 서로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막말로 왕조의 권세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그들은 속세의 인간에 불과했다. 귀신의 힘은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었고, 음과 양의 장벽을 마음대로 부술 수도 없었다. 괴이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집이 아니면, 성황신과 요괴 등에 대해 아는 사람도 턱없이 적었다. 그들에겐 이 모든 것이 성황당 안의 신상이자, 책 속의 전기에 불과했다.
계연과 성황신은 묘외루 3층에서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이따금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러 정오에 다다랐다.
계연은 여러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었고, 성황신은 계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오늘의 대화는 이걸로 충분했다.
성황신은 계연에게 묘외루에서 점심을 먹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과를 집어 먹으며 담소를 나누다 보니, 계연은 식사 생각이 없어졌다.
이렇게 둘은 묘외루를 빠져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성황신, 오늘 이렇게 대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이신가? 선생이 이곳에서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영안현에는 행운일 따름이오. 선생에게 필요한 서적은 내 곧 거안소각으로 보낼 테니, 염려하지 말게나!”
“고맙습니다, 성황신!”
“그래, 그럼 후에 또 만나세. 오늘은 이만 가보겠소!”
성황신은 계연을 향해 살며시 공수하였고, 계연 또한 공수하며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성황신은 성황당을 향해 유유히 걸어갔고, 계연은 한참 동안 성황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성황당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절 안의 시장도 저녁이나 되어야 열리고, 계연은 향불을 피울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이만 집으로 돌아가 발 닦고 책을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성황신이 보내는 책이 특별할지 궁금하네. 눈이 안 보이는 거나 다름없어서 글을 읽지 못하는데, 정 안 되면 책 읽어줄 사람을 따로 구해야 하나? 아니면 성황신한테 도와줄 저승사자를 한 명만 붙여달라고 해야 하나.’
* * *
묘외루에서 멀지 않은 조그만 길목에선 윤재성이 윤청의 손을 잡은 채 걷고 있었다. 잠시 후, 갑작스레 멈춰선 윤청이 아버지의 손을 재빨리 잡아당겼다.
아들이 제자리에서 고집을 부리자, 윤재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윤청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아버지……. 저기, 그 선생님이 저기 있어요!”
‘선생님?’
윤재성은 아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는 아들이 말하는 ‘선생님’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제일 먼저 계연과 성황신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풍채와 기품이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다.
“청아, 네가 말한 선생님이 대체 누구냐? 괜히 생사람 잡지 말고, 똑바로 보고 말해.”
“청색 장포를 입고 저 할아버지랑 인사하시는 분이요! 저분 맞아요, 제가 똑똑히 봤어요!”
아버지의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민 윤청이 계연과 그 앞의 노인을 보며 말했다.
윤재성이 다시금 묘외루 밖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각자 성황당과 길목으로 걸어갔다. 겉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었지만, 아들이 이토록 무서워하니, 아버지로서 아들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됐다. 인제 간 것 같으니, 이만 성황당으로 가자!”
“네!”
윤재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들이 헛것을 봤으리라고 생각했다. 저 둘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굉장히 기품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음산한 기운이 득실거릴 것 같진 않았다.
‘저 노인은 누구지? 영안현에 웬만큼 이름 있는 사람들은 내가 다 아는데, 혹시 타지 사람인가?’
윤청의 손을 잡고 골목을 벗어난 그는 성황당으로 향했다. 계연과 인사를 나누었던 먹색 장포의 노인은 여전히 윤씨 부자의 시야에 머물렀다.
미묘한 심리가 발동한 윤씨 부자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치 그 노인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는 것처럼 말이다.
* * *
“향 사세요, 최고급 단향입니다! 신당에 들어가 성황신을 모시려면, 향을 세 개 피우셔야 합니다. 최고급 단향 사가세요!”
성황당 입구에는 단향을 사라며 소리치는 행상인이 서 있었다.
“향 세 개 주세요.”
“예, 여기 있습니다.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윤재성은 행상인에게 1문을 건네었다. 계산하고 향을 받을 때까지, 그의 시선은 줄곧 노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향을 받은 그는 재빨리 윤청을 데리고 성황당 안으로 걸었다.
“어라? 어디 간 거지? 청아, 그 사람 어디로 갔는지 봤느냐?”
“아니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라졌어요. 아버지, 설마 귀신은 아니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여긴 성황당이다!”
윤재성이 아들을 모질게 꾸짖었다. 이내 그는 윤청을 데리고 본전(本殿)에 들어섰다. 이 성황당은 크지 않았다. 전전(前殿)에는 성황당의 각 기관을 모셨고, 본전에는 성황신을 모셨다. 어쩌면 그 노인은 곧장 본전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전전을 지나 본전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그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향불을 들고 오가며 성황신을 모시는 백성들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사람 하나 찾는 것쯤이야 거뜬했다. 사당 구석의 뒷문은 사람이 오가지 못하도록 굳게 닫혀 있었다. 게다가 그곳은 묘지기의 처소라, 아무나 함부로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희한하네…….”
성황당 안에 있는데도 윤재성은 소름이 끼쳤다.
“청아, 우리 성황신께 절 올리러 가자!”
윤재성은 혼란스러운 생각을 잊고자 윤청을 데리고 본전에 들어가, 묘지기가 건네는 촛불을 빌려 단향에 불을 붙였다.
우선 향로에 단향을 꽂은 다음, 윤씨 부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윤재성은 제자리에 앉아 넋이 나간 눈으로 성황신상을 바라보는 윤청을 발견했다.
“청아, 뭐 하는 게냐?”
“아버지……. 너무 닮았어요…….”
윤청이 작디작은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