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흑돌
“닮았다니, 뭐가?”
윤재성이 윤청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자, 성황신의 평온하고도 위엄 넘치는 신상이 그의 시야에 꽉 들어찼다. 쉬이 형언할 수 없는 익숙함이 느껴졌다.
“아버지…….”
“가자, 이만 돌아가자!”
윤청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고, 윤재성은 황급히 아이의 입을 막았다. 아들을 일으켜 세운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성황당을 빠져나왔다.
성황당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 곁을 지나, 성황당 밖에서 각종 물건을 파는 행상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윤씨 부자는 걸음을 재촉했다.
묘사방을 벗어난 뒤에야, 윤재성이 뻐근한 다리로 속도를 늦추었다.
“청아, 방금 누가 뭐를 닮았다고 한 거지?”
아버지의 시선 속에서 불안해하던 윤청이 대답했다.
“방금 그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생김새랑 사당 안 성황신상이랑 너무너무 닮았어요! 아버지, 정말이에요!”
“그래!”
윤재성의 가벼운 대답에 혼날 준비를 하던 윤청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 아비가 보기에도 낯이 익더구나. 하지만 확신할 순 없어.”
사당을 찾아가 절을 올리더라도, 보통 성황신 신상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그 노인도 얼핏 보았던 터라, 정확한 생김새를 기억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윤재성은 확신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윤청은 제 눈을 의심하지 않았다.
“청아,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네 어머니께도 말하면 안 돼, 알았느냐?”
“아…….”
“응?”
“알겠어요, 아버지…….”
윤청은 왜 어머니께도 말해선 안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버지께 말대꾸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 청아, 잊지 말아라. 여인들은 머리만 길고, 견문이 좁아. 네 어미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그래 봤자 똑같은 여인일 뿐이다. 온종일 이웃들이랑 한담이나 나누는데, 무슨 이야기를 못 하겠어!”
윤청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참, 후에 네가 말했던 그 선생이라는 작자를 다시 마주친다면, 무조건 예의 바르게 인사하거라. 알았지?”
“네, 그럴게요!”
윤재성은 윤청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만약 거안소각의 새 주인이 보름간 무사히 지낸다면, 윤청을 데리고 찾아가야지!‘
영적인 존재를 믿는 사람도 있었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치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직접 보기보단 구전된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영적인 존재를 믿었고, 적어도 이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윤재성은 이번 경험이 참으로 신비롭고 기이할 따름이었다.
* * *
그 무렵, 계연은 집에 도착했다. 집에 훔칠 만한 물건도 없을뿐더러, 감히 거안소각까지 찾아와 도둑질할 사람도 없었으니, 그는 외출할 때 문을 하나도 잠그지 않았다.
대문을 열어젖힌 그는, 길에서 꺾어온 버들가지를 꺼내고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선 늦은 양치질을 했다.
이 세계에 온 이후로 계연이 가장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양치질이었다. 버들가지는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를 닦기 전, 먼저 버들가지를 마디마디 자르고, 그중 양 끝이 섬유 모양으로 되어있는 마디를 골라 작은 칫솔처럼 사용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비교적 얇은 버들가지로 치아 틈새를 닦아야 했다.
반나절 동안 만지작거리던 계연은 마침내 나무 바가지로 물을 퍼서 입을 헹궜다.
“그아아아아…… 퉤…….”
입을 헹궈낸 물은 녹색빛을 띄었다. 깨끗한 기분을 내려면 여러 차례 입을 헹궈야 했다.
사실 소금이 있으면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겠지만, 소금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고관이나 귀인이 아닌 이상, 소금으로 양치를 하는 건 터무니없는 낭비였다. 계연은 자신이 그런 사치를 부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양치질을 마친 그는 남은 긴 하루가 지루하리라고 생각했다. 인터넷도 없고, 핸드폰도 없었으며,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저녁에 성황당 안 시장을 구경하는 것 말고는 밖에 나가도 할 일이 없었다.
‘아휴, 이러고 있으니까 무슨 독거노인 같네……. 우리 할아버지랑 고모부께선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을까?’
문제를 떠올리자마자, 해답이 툭 하고 튀어 나왔다.
‘바둑!’
심지어 바둑은 그가 가장 믿을 만한 것과 관련 깊었다. 계연은 조금 전 성황신에게 기보에 관해 묻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정원 돌의자에 앉은 계연은 오른팔을 뻗고 검지를 내민 채, 마음속으로 그 바둑알을 떠올렸다.
전기가 통하는 익숙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바둑알의 환영이 손가락 끝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흑돌이다!’
계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바둑알은 색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했다. 그러나 지금, 여전히 환영으로 나타난 바둑알은 놀랍게도 검은색이었다.
색이 검을 뿐만 아니라, 손끝에 촉감도 느껴졌다. 계연은 이 바둑알을 정말 바둑판 위에 ‘내려’놓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어젯밤 그 불결한 악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팔에 달라붙어 회전하며 느껴지던 음산한 기운을 떠올리니, 바둑알이 무언가를 빨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기, 땅속의 사악한 기운……. 설마 악기(惡氣)는 아니겠지? 일단 정기를 흡수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어.’
사실 계연은 전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 바둑알을 보려 정신을 집중할 때마다, 바둑알에 어떠한 흡수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둑알이 정기를 빨아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일에 관해서는 앞으로 천천히 알아가야 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계연은 잡념을 접어두고, 마음속으로 난가기국을 그렸다.
계연이 난가기국에 몰입하자, 머릿속에서 잡념이 서서히 사라지며 정원에 엷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거세지 않았지만, 쉼 없이 불어오던 바람은 계연과 1장(*약 3미터) 정도 떨어진 곳을 빙빙 맴돌았다. 이내 푸른 기운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렇다. 흑돌 주변에 서서히 푸른 기운이 짙게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됐어, 좋았어!’
방해하는 이 하나 없으니, 계연은 한계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휘오오…… 휘오오…….
바람은 여전히 거세지도, 약하지도 않았지만, 계연은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원의 대추나무 가지가 바람결에 흔들리며 내는 불규칙한 소리도 바람결을 타고 흘러왔다.
계연의 손가락 끝에는 흑돌이 쥐여 있었고, 그 주변에는 푸른 기운이 한가득 모여들었다. 그 기운은 어린아이 키만 한 크기로 회오리를 만들며 천천히 움직였다.
이쯤 되자, 계연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고, 팔은 무거운 추를 매달린 양 무거웠다.
모든 일에는 정도라는 게 있었다. 계연처럼 몸을 사리는 사람은 이렇게나 많은 정기를 흡수하는 것도 겁이 났다.
‘우선 살짝 내보내고, 힘이 약해지면 다시 빨아들이자!’
굳건한 생각으로 기운을 누르자, 주변을 에워싼 푸른 기운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푸른 기운은 엷은 바람이 되어 정원을 떠다녔다. 3분의 1 정도가 사라진 뒤에야 계연은 바둑알을 거두었다.
찌릿…….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들더니, 곧이어 손끝이 저리면서 푸른 기운이 계연의 손끝에 스며들었다. 그 저릿한 감각은 푸른 기운을 따라 팔까지 타고 올라갔다.
“쓰읍…….”
계연은 반사적으로 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텨야 해!’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은 신체가 더는 감당할 수 없다며 보내는 일종의 신호였다. 보양식도 많이 먹으면 독이 되기 마련이었다. 다행히도 산신당에서 인내심을 키운 덕분에, 이 정도 고통쯤이야 꾹 참아 넘길 수 있었다.
계연은 정기가 한데 모이지 않도록 온 힘을 다했다. 정기를 온몸 구석구석으로 밀어내며, 서서히 정기의 저항을 낮추려고 노력했다.
십여 분 정도가 흐르자, 드디어 통증이 가시기 시작했다. 그즈음, 계연의 몸은 바들바들 떨리며 약하게 경련했다.
‘푸른 기운을 먼저 걷어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이미 죽었을 거야. 멍청한 놈!’
또 십여 분이 지나자, 신체가 평정을 되찾았다.
“후…… 후…… 후…….”
계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뛰는 심장과 피로에 찌든 몸을 진정시켰다. 나른히 의자에 앉아 돌탁자에 엎드린 그는 미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
주변의 바람이 서서히 사라지자, 정원의 대추나무 가지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피로했던 탓인지, 계연은 저도 모르게 탁자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계연이 자는 동안, 마치 봄날의 나무처럼 계연의 뼈와 경맥, 오장육부가 활짝 펴지더니, 한계치를 넘기고 흡수되었던 정기들이 한 줄기 연기처럼 그의 몸을 빠져나왔다. 비로소 계연은 다시 편안해질 수 있었다.
* * *
“계 선생님, 책 도착했습니다!”
정원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깬 계연은 비몽사몽한 눈으로 대문을 바라보았다.
“유 순시관이군요. 들어오세요. 제가 몸이 고단해서, 문을 열러 가기가 힘드네요.”
어차피 귀신이니, 어떻게든 대문을 통과할 것이다. 더구나 계연은 자신이 유 순시관과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정원 밖의 두 순시관과 검은색 양산을 든 저승사자 넷이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거안소각의 대문을 넘어섰다. 성황신께서 친히 명령하신 일이니, 저승사자들은 거안소각의 정적을 깰 수도, 거안소각의 주인에게 무례를 범할 수도 없었다.
계연은 돌의자에 앉아, 정원 안으로 우르르 들어서는 저승사자를 바라보았다.
‘뭐 이리 많이 왔대?
하늘 높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두 명의 주간 순시관은 맡은 직무로 인해 햇빛에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듯했지만, 다른 이들은 양산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것 같았다.
양산 아래에 선 네 명의 저승사자는 모두 대나무 상자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정원에 한껏 서늘한 기운이 더해졌다.
“계 선생님, 이건 성황신께서 보내라고 하신 서적입니다. 어디에 놓아 드릴까요?”
당장이라도 책을 들춰보고 싶었던 계연은 돌탁자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두시면 돼요.”
’근데 이 책들 저승사자들이 대문까지 통과해서 가지고 온 거잖아, 설마 실체가 없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계연은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이었다. 네 저승사자가 짊어지고 있던 대나무 상자를 내려놓자, 두 명의 주간 순시관이 우산 아래로 상자를 들어, 조심스레 탁자 옆으로 옮겼다.
대나무 상자가 바닥에 닿으며 마찰음을 내었다. 분명 실물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마도 지난 생에 들었던 것처럼, 귀신에겐 물건을 옮기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계 선생님, 책을 모두 가져다드렸으니,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 네. 다들 수고하셨어요!”
계연은 이만 책에서 시선을 떼고, 예의 바르게 공수하며 인사를 건네었다. 상대 또한 공손히 예의를 갖춘 뒤, 대문을 지나 거안소각을 벗어났다.
저들이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계연은 쉬었다 가라는 둥 쓸데없는 빈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저승사자들이 사라지자, 계연은 마음 놓고 네 개의 상자를 살펴보았다. 그는 빠르게 상자 하나를 골라 탁자 위에 올렸다.
꽤 묵직하긴 했지만, 책이 몇 권 들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렇게 커다란 상자를 책으로 가득 채운다면, 혼자서는 들지 못할 정도로 무거웠을 테니 말이다.
상자를 열자, 흐릿한 시야에는 그가 상상했던 책이 아닌, 원통형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을 뻗어 한참 만지작거리던 그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죽간(竹簡)이구나!’
계연은 그중 하나를 들어 손대중한 다음, 천천히 펼쳐 보았다.
‘성황신께서는 참으로 세심하시네!’
이 죽간은 흔히 붓으로 글을 적은 책과 달리, 문자를 하나하나 새긴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살며시 죽간을 훑자, 계연은 그 위에 적힌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성황신이 일부러 배려한 것이든 아니든, 계연은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책 읽어줄 사람을 따로 안 구해도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