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천지 화생(化生)
시간은 어느덧 깊은 밤이 되었지만, 계연은 잘 생각이 없었다.
낮에든 밤에든 앞이 보이지 않는 계연은 촛불을 켤 필요가 없었다. 오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내내 정원에 앉아 책을 ‘읽었다’.
때로는 죽간을 들고, 때로는 죽간을 탁자에 펼친 채로 검지를 이용해 위에 적힌 문자를 하나하나 훑었다.
죽간에 새겨진 문자는 굉장히 가늘고 작아서, 죽간 한 면에 담긴 내용이 상당했다. 물론 계연의 글 읽는 속도가 느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안에 적힌 글은 계연이 태어나 처음 접하는 영역이었고, 과학 기술 시대의 청년이라면 누구나 선망할 만한 내용이었다.
현재 계연은 흥분이 고조된 나머지,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와씨, 나 완전 천재였네! 이해력 장난 아니다!’
계연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언어를 모두 이해했다.
몇 차례에 걸쳐 흡수한 푸른 기운이 몸에서 움직일 때마다, 계연은 소위 말하는 경맥의 혈자리가 어디 있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혈자리의 명칭과 역할에 대해 아는 게 없었는데, 인제 책을 통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었던 계연은 아주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갔다. 뒷부분을 읽을 때도, 끊임없이 앞을 들춰보며, 앞 내용과 연관 지어 이해했다.
[음양오행(陰陽五行), 육합팔황(*六合八荒: 우주), 산수와 만물의 움직임을 느끼고, 천지의 정기를 받아, 깨끗한 몸가짐으로 수행하라!]
계연이 들고 있는 책은 기를 모으는 비결을 담은 <도기결(導氣決)>이었다. 이름도 매우 단순한 지극히 평범한 책이었다. 수행하는 사람들에겐 기초 서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책이 꽤 많았는데, 나아가 음양과 오행을 세부적으로 다룬 고급 서적도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나 속세의 권력가들에겐, 여전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신선의 책이었다.
계연에게는 이 또한 귀한 보물과도 같았다. 이것은 계연이 수행의 길에 첫발을 딛게 해준 계몽서이니 말이다!
새로운 세계까지 왔다. 남다른 존재가, 불로장생의 존재가 되길 바라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맨 처음 객잔에서 기이한 환영을 본 건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정기를 받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겪는 증상이었구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환영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경맥을 강으로 보지만, 어떤 이는 타오르는 불길로 본다. 이것은 자신의 자질은 물론, 심경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체내의 환영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일부는 환영을 보았다는 연유로 스승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비록 절대적인 건 아니었지만, 이런 이들의 성취가 더 기대되는 건 당연했다.
‘내가 천재였다니!’
글을 읽던 계연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미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책에서는 환영이 단순할수록 좋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새하얀 눈이나 뜨거운 불같은 것을 보는 게 좋지, 복잡한 풍경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계연이 생각에 잠겼다. 그가 보았던 건 굉장히 수려한 풍경이었다.
‘더는 복잡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화려한 풍경이었는데……. 아, 몰라! 다른 거 생각하자!’
오밤중까지 도기결을 붙들고 있던 계연은 <도기결>에 몇 개의 온점이 찍혀있는지까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술법 몇 종을 기록한 <술법정수(術法精髓)>를 제외하면, 수행에 관해 기록한 책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머지 죽간들은 그저 무공을 익히는 비결이 적힌 무공서적과 기보집이었다.
“한번 해 보지, 뭐!”
낮게 읊조리던 계연은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외부에는 커다란 천지가 있고, 몸 안에는 작은 천지가 있었다. 인체의 모든 경맥에서부터 장기까지, 오묘하게도 천지의 음양오행과 모두 대응했다. 소위 수행이라는 것 또한, 천지의 아득함을 느끼고, 올바른 건곤(乾坤)의 힘을 쥐는 것이었다.
계연은 가볍게 호흡했다. 숨이 심장과 복부를 따라 차례대로 내려와, 온몸 구석구석 깊이 퍼져 나아갔다. 어렴풋한 의식은 마치 호흡을 따라 몸속을 떠다니다, 또다시 호흡을 따라 몸 밖으로 흩어져 나와, 주위의 광활한 천지로 널리 퍼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그는 천지의 움직임을 느꼈다.
<도기결>의 비법은 천지 화생(化生)!
어떤 방법으로 수행하든, 수많은 사람…… 이를테면 선문에 있는 자도, 평범한 산속에 사는 자도, 혹은 이번 생에 불로장생을 갈망하는 자도 바로 이 첫 번째 관문에서 난항을 겪었다.
한편, 계연은 아무런 고비도 느끼지 못한 채, 점점 가경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이 순간의 느낌이 맨 처음 정기를 받아들일 때의 신기한 감각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당시에 무한대로 확장되던 몸과 천지는 체내의 환영이었고, 지금은 의식이 멀리 흘러가며 실제 풍경으로 화생되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하면서도,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았다.
소위 정기라는 것이 천지에서 멀어지자, 계연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정기가 마치 자석이라도 달린 듯 차차 모여들더니, 마침내 계연의 주변을 잔뜩 둘러싸며, 서서히 계연의 피부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왔다.
저릿하거나 시큰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는 빗물을 맞듯, 계연은 오롯이 편안함과 개운함에 젖어 들었다.
좀 전의 바둑알이 끌어들인 것보다 적은 양의 정기가 스며들어왔지만,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리고 이 정기는 이상하도록 친밀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이 정기에서는 전보다 훨씬 순수하고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비로소 계연은 정기를 제대로 흡수했다.
그는 이것을 집자식(*執子式: 기를 모으기 위해 바둑돌을 쥐는 것)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 수행 효력을 높이기 위한 저력을 다질 수 있었다.
* * *
꼬끼오~!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닭이 우렁차게 울어 젖혔다.
거안소각 정원에서 책을 읽던 계연은 그제야 밤을 홀딱 지새웠다는 걸 알아차렸다.
삼경에서 사경(*三更~四更: 밤 11시부터 새벽 3시)까지 계연은 도기결의 천지화생을 연구했다. 그와 동시에 몸 구석구석에 정기를 충분히 보충했다.
이 과정에서 계연은 바둑알을 쥐고 기를 모으려고 시도했다. 단, 이번에는 모든 정기를 흐트러뜨린 다음, 도기결을 이용해 다시 흡수해 보기로 했다.
이러한 방식은 정원 안에 정기가 밀집하게 했다. 도기결의 효력이 대폭 상승하는 동시에, 계연은 아무런 고통도 부담도 없이 정기를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쩌면 현재 계연의 몸 상태로는 무슨 방식을 사용하든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사경(*四更: 새벽 1시에서 3시)이 되자, 정기가 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에 도달했다. 계연의 몸속 곳곳에 축적된 정기는 아주 낮은 효율로 천천히 신체를 단련시키고 있었다.
계연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겐 도기결 한 권이 전부라, 기를 단련시킬 수 있는 비결을 알 방도가 없었다. 계연이 할 수 있는 건 이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홀로 바둑알을 들고 기를 모으던 때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것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죽간을 들고, 수행과 관련된 또 다른 책을 읽어야 했다.
죽간은 술법을 다루고 있었다. 책은 전체적으로 오행이나 음양, 뇌법(雷法), 괴이한 주술이나 여타 비현실적이고 흔한 술법의 흔한 유형들을 소개했다. 책에는 꿈속에 들어가는 방법, 혼령을 부르는 방법, 혼령을 속박하는 방법처럼 특수한 술법도 담겨 있었으며, 향불신령과 산수신령을 비롯한 귀신에 관한 이야기도 언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고작 죽간 두 권 분량밖에 안 됐다. 글이 아무리 작아도 내용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책 끝에는 작은 술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총 두 개의 간단한 술법이었는데, 불을 통제하는 화행(火行)의 공화술(控火術)과 물을 피하는 수행(水行)의 피수술(避水術)이었다.
이런 기초적인 술법은 아직 단련되지 않은 정기로도 충분히 부릴 수 있었다. 물론 지극히 기초적인 부분에서만 말이다. 계연은 아직 학습을 통해 술법을 습득해야 했기에, 지금 당장 시도하는 건 무리였다.
이 죽간은 모두 기초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계연에겐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그는 이로써 전무후무한 흥분감과 기대감을 만끽하게 되었다.
지금 계연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고모부와 할아버지께서 해주시던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계연의 마음은 온갖 신비로움을 빠짐없이 담고 있는 이 세계에 관한 동경심으로 가득 찼다.
안 졸리냐고? 미안하지만, 지금 잘 시간이 어디 있는가!
꼬끼오~ 꼬꼬~.
이번에는 거안소각 가까이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웃이 키우는 수탉이 아침을 알리는 듯했다.
“후! 밤새는 줄도 모르고 봤네!”
엷은 바람이 초봄의 쌀쌀한 기운을 전했다. 계연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한서불침(*寒暑不侵: 추위나 더위를 타지 않는 몸)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는 말이다.
정원의 대추나무 가지가 스스슥 소리를 내며, 엷은 바람을 따라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계연은 고개를 들어 연륜이 있어 보이는 대추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수확의 계절이 오면, 대추나무에도 주렁주렁 대추가 열리겠구나!’
이 세계에서 선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면, 제철이 아닌 채소와 과일을 맛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러므로 계연은 자신의 대추가 얼마나 달콤할지 기대되었다.
“밤새 네가 같이 있어 줬네. 좋아, 좋아. 그래도 외롭지는 않겠어!”
계연은 스스로 위로하며 웃음을 지었다. 죽간을 내려놓은 그는 몸을 쭉 늘이며 기지개를 켰다.
가장 중요한 책 두 권을 하룻밤 사이에 완독했다. 그러니 계연은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자, 나머지 책 중에서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찾아 읽기로 했다.
계연은 기경(棋經)과 기보를 잠시 내려두고, 무공서적을 찾기로 했다. 상자 속에는 여러 개의 죽간이 남아 있었다. 그 중 기경 한 권, 기보 두 권을 제외하고 남은 일곱 권이 무공서적이었다.
하나는 내공심법과 기본 전술을 다룬 <철형전첩(鐵刑戰帖)>으로, 죽간 여섯 권에 나뉘어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호흡법과 기본 기술만 담은 <응조수(鷹爪手)>였다.
책의 내용은 계연이 제목만 보고 추측한 바와 같았다.
이 무공서적들은 포리(捕吏) 같은 전문인력이 배우는 무술을 다루고 있었다. 계연이 보기에도 책에서 소개하는 공법은 엄청난 비법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취할 수 있는 무예는 결코 아니었다. 최소한 중상급의 무술인에게 적합한 책이었다.
두 부로 나뉜 무공서적 모두 당시 육주(六州)의 철포(鐵捕)라 불리던 관아의 고인이 일생의 심혈을 기울여 만든 책이었다. 시작하기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으며, 위력이 센 동작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었다. 일부는 관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여러 우수한 관리들이 배운 책으로도 알려졌다.
한편, 중상급 무술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형적으로 배우기는 쉽지만, 제대로 통달하기는 어려운 것이 바로 무술이었다. 그러니, 진정 고수라 칭할 만한 무술인이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계연은 책을 읽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두 무공서적에는 셀 수 없이 수많은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수행에 관련된 두 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현재 계연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내용도 들어오질 않았다.
“무공이란, 참!”
죽간이 계연의 손을 오르고 내렸다. 당장은 더 좋은 무공서적이 없으니, 일단은 호신술로 무공을 연마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