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외출
해가 뜨고 지며, 어느덧 보름이란 시간이 훌쩍 흘렀다. 계연은 무아지경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처음으로 컴퓨터 게임이란 것을 접했을 때와 똑같은 기분에 푹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다.
몸이 정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는 집자식으로 정기를 모으고, 천기 화생을 이용해 기를 흡수했다. 이후 두 무공서적을 통해 무술을 연마하고, 남은 시간에는 기경과 기보를 읽었다.
결론적으로, 매일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계연은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가까운 이웃을 제외한 사람들은 계연의 존재조차 몰랐고, 계연이 자주 찾는 국숫집 주변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이날 계연은 호흡을 가다듬고 몸에 긴장을 풀며, 두 발로 살며시 까치발을 들고 있었다.
부웅-.
갑자기 뛰어오른 계연은 타다닥 소리를 내며 가볍게 대추나무 위에 올라섰다. 단 몇 보 만에 나무 꼭대기까지 오른 그는 멋스럽게 뒤로 재주넘기를 하더니, 30척(*약 10미터)높이까지 번쩍 뛰어올랐다.
동작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이윽고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그는 바닥으로 떨어지긴커녕, 숨을 흡, 들이쉬며 한 마리의 새처럼 가뿐히 대추나무 가지 위에 올라섰다. 그는 우직, 소리를 내는 나뭇가지 위에서 중심을 잡았다.
나뭇가지 위에 우두커니 선 그는 숨을 참은 채, 마치 나뭇가지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체중에 눌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일이 없도록, 최소한 일정 시간 동안은 숨을 꾹 참아야 했다.
‘멋있어!’
계연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랜 시간 경공(輕功)을 연마한 끝에, 드디어 지금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계연은 비교할 상대가 없었지만, 자신 만큼 무예를 익히는 속도가 빠른 자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책에는 걸핏하면 몇 해간 고행을 겪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계연이 이토록 빠르게 무술을 연마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정기 덕분이었다.
평범한 무술인이 후천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기 위해선, 매우 높은 분수령을 넘어서야만 했다. 무공 비결이 적힌 책에서는 천지의 아득함을 느낄 수 있다는 둥, 천지의 힘을 모아 심신을 깨끗이 한다는 둥의 환상적인 말들로 선천적인 것을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연이 아는 바에 따르면, 소위 선천적인 것은 천지의 정기를 빌려 자신을 씻어내는 것이고, 선천의 경계가 지닌 내적 변화는 정기가 섞인 특별한 기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계연에게 중요한 건 무술의 초식이 아니라, 쉽게 배울 수 있고 경공의 성과를 극대화해줄 내공이었다.
아무래도 숱한 단련이 필요한 무예라서 그런지, 계연은 무술의 기본 초식이 복잡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공과 기본 초식은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내공이 갖춰지면 연마 속도가 빨라지고, 나아가 기본 초식의 수련도 또한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이다.
책에는 선천에 도달하면, 모든 것을 통달한다고 적혀 있었다. 다소 과장된 이야기였지만, 얼마나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이러한 수련은 그야말로 속세의 우스운 술법에 불과했지만, 계연은 피곤함도 잊고 그 속에 푹 빠져 버렸다!
생각을 정리한 계연은 가볍게 뛰어내려, 돌탁자 옆에 편안히 착지했다. 그가 다리를 내밀고 발끝을 오므리자, 대추나무 가지 하나가 쭉 뻗은 오른 다리를 따라 머리 위를 지나, 계연의 반대쪽 발에 정확히 쥐어졌다.
‘완전 멋있어!’
이 동작을 지난 생에 했더라면, 계연은 아마 더는 남자 구실 못 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계연은 나뭇가지를 칼 삼아서 휙휙, 소리가 나도록 휘둘렀다.
계연이 동작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지만, 낙엽과 흙먼지는 여전히 정원을 빙빙 선회했다.
시계도,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었지만, 현재 계연의 생체시계는 놀라울 만큼 정확해졌다. 계연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곳의 백성들은 대부분 이러했다.
해가 뜨고 짐에 따라 규칙적으로 생활하다 보니, 정확한 시간 감각이 생겼다. 아마 21세기 지구에서도 규칙적으로 생활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계연은 식사를 위해 외출하기로 했다.
* * *
지난 생에 그가 할 줄 아는 요리라곤 볶음밥이 전부였다. 볶음밥 외에 해 본 요리라곤 없었고,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귀찮음까지 더해지니, 그는 차라리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어차피 비싸 봤자 10문, 20문이었고, 저렴한 곳에선 몇 문이면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를 정돈한 계연은 대문을 나섰다. 어차피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으니, 문을 잠글 필요도 없었다.
그는 천우방을 돌아다닐 땐, 익숙한 지름길을 택했다. 간혹 천우방 주민 한둘을 마주치긴 했지만, 대부분 계연을 피해 다녔다. 계연과 정면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름 사이에, 계연이 거안소각에 산다는 사실을 거의 모든 이가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 재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과는 최대한 거리를 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계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소탈함을 드러내며 유유히 골목을 거닐었다.
천우방을 벗어나면, 순식간에 주변이 번화해졌다. 거리 곳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술을 배운 이후, 계연의 보폭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단 7분 만에 그는 손기(孫記)라는 이름의 노인이 운영하는 노점에 도착했다. 계연이 자주 가는 국숫집 중 하나였다.
커다란 흰 천으로 만든 지붕 아래에는 작은 탁자 네 개와 수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곳이 바로 손기(孫記) 영감이 돈을 버는 가게였다.
저 멀리서 계연을 발견한 손기가 말했다.
“아이고, 계 선생님 오셨네요. 요 며칠 안 보이던데, 어서 앉으세요!”
아직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노점 음식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익숙한 안부 인사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내장 있어요?”
“그럼요, 그럼요! 오늘 왠지 계 선생님이 오실 것 같아서, 일부러 좋은 걸로 남겨뒀어요! 어떤 집에서 소를 한 마리 잡았는데, 제가 내장을 넉넉히 받아 왔어요. 양 내장보다 훨씬 구하기 어려운 거예요!”
손기는 말주변이 좋았다. 게다가 조그맣게 장사하는 사람들에겐 단골손님이 최고이지 않던가.
손기가 보기에 계연은 학문이 깊어 보였다. 주변 손님들은 종종 계연의 눈을 보고 맹인이라며 수군대곤 했다. 그러나 계연이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길을 걷는 모습은 그들이 보기에 참으로 희한했다. 계연을 기인이라 부르는 손님도 있었다.
“아, 그럼 국수 한 그릇이랑, 소 내장 한 접시 주세요!”
계연이 웃으며 자리에 앉아, 저녁 식사를 주문했다. 손기의 내장 요리에 복잡한 양념은 들어가지 않지만, 좋은 식재료로 골고루 내장을 무쳐서인지 비린내도 없고 맛도 좋았다.
“알겠습니다!”
손기가 재빨리 요리를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윤씨 부자가 때마침 서당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서당이 열리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요 며칠 윤재성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서당에서 일을 했다. 윤청도 종종 함께 서당을 찾아 아버지를 돕곤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 길목을 지나던 그때, 윤청의 눈이 번뜩였다. 노점 앞에 앉아있는 계연을 발견한 아이는 허겁지겁 아버지의 소매를 잡아끌며 계연을 가리켰다.
윤재성은 오래전부터 계연을 만나 보고 싶었다. 그날 그가 계연을 멀리서 본 이후로 어느덧 보름이나 지났지만, 계연의 얼굴에는 여전히 혈색이 돌고 윤기가 흘렀다.
계 선생이란 자가 거안소각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추측에도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계 선생이란 자는 자신과 윤청이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잠시 생각하던 윤재성은 윤청을 데리고 일부러 멀리 걸어갔다. 그는 이제야 골목을 지나는 척하며, 손기의 노점으로 향했다.
“손 영감, 여기 국수 두 그릇만 주시오!”
윤재성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노점에 다가와 인사를 건네었다. 한창 계연의 음식을 준비하던 손 씨가 윤재성을 다정하게 반겨 주었다.
“이게 누구야, 윤 훈장님 아니요? 어서 오세요, 어서 와!”
현에 서당이 생기는 것은 영안현 백성들에게 큰 경사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마을에서 예비 훈장님 윤재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지요.”
윤재성이 담담하게 대답하며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윤청을 데리고 빈자리에 앉은 그가 이제야 계연을 발견한 척하며 물었다.
“아, 당신이 바로 계 선생님이시군요? 마을에 고상하신 분이 이사 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서당을 새로 여느라 경황이 없어서, 미리 찾아뵙지 못했소이다!”
윤청의 조그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윤청은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사실 계연은 이미 한참 전부터 이들 부자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들이 노점에 들어온 뒤에야, ‘우연한 만남’을 빙자해 자신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계연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저야말로 천우방의 윤 훈장님께서 해박하신 분이라고 익히 들어왔습니다.”
계연이 고개를 돌려 윤씨 부자를 바라보았다. 윤재성은 처음으로 그 희뿌연 두 눈과 마주했다.
“윤청이 아드님인가 보군요? 역시 학자 집안이라 그런지, 자제분도 참 훌륭합니다!”
“계 선생님,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윤청은 말하면서 신기하면서도 민망한 듯 계연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물을 길어다 준 은혜는 내 평생 잊지 못하지! 두 분께서 괜찮으시다면, 저와 합석하시겠어요? 물론 윤청이가 무서워한다면, 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셔도 됩니다!”
윤청이 조금 난처해하며 뒷머리를 긁었다. 계 선생님은 자신이 겁에 질려 거안소각에 들어가지 못했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희가 어찌 사양하겠소이까? 청아, 얼른 가서 앉자!”
이는 윤재성이 바라던 바였다. 그는 곧장 아들을 데리고 가, 계연과 같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국수 나왔어요! 계 선생님, 훈장님, 윤 도령, 각자 시키신 국수요! 소 내장은 조금만 기다려요!”
손 씨가 탁자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네, 고마워요!”
계연이 웃으며 손 씨에게 고갯짓을 했다. 가만히 앉아있던 윤재성은 그에 흠칫 당황하더니, 재빨리 계연을 따라 손 씨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자고로 백성은 학자와 농부, 인부, 상인, 네 등급으로 나뉘는 법이다. 영안현 최고의 학자로서, 윤재성은 길가에서 장사하는 손 씨를 대놓고 무시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손 씨보다 급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음식을 파는 건 손 씨의 본분일 뿐인데, 뭣 하러 감사 인사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계연이 인사를 했으니, 옆에서 가만히 있으면 계연을 낮춰보는 꼴이었다.
“아이고, 황송합니다, 황송해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손 씨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돌아가 나머지 음식을 빠르게 준비했다. 계 선생님은 매번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였으니 그렇다 치지만, 윤 훈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받다니, 손 씨는 체면이 배로 서는 기분이었다.
계연은 아무 말 없이 생긋 웃음을 지었고,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친절한 종업원이나 택배 기사, 배달원에게 인사를 하는 건 계연이 지난 생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이었다. 사실 오래전에 마음 아픈 뉴스 기사를 보고 이러한 습관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현대에서는 계연처럼 이런 예의를 갖춘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지내며 겪은 경험들로 미루어 보면, 이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계급에 대한 사고가 단단히 틀어박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상대를 가려가며 예의를 차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계연은 이곳의 성황신이 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